" 자~ 신입생을 위하여! 건배~! " 술 냄새 가득한 이 곳은 교내 지하실에 위치한 으슥한(?) 동아리실. 전국에서도 꽤 이름난 밴드 동아리다. 사실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우연히 깡패시키를 따라왔다가 거의 강제적으로 가입이 됐다. -_-;; 나중에 뭐라 뭐라 핀잔을 주면서 가입한 이유를 물었더니 '그. 냥. '이란다. 젠장.. ㅡㅡ++ 녀석이 맡게 된 포지션은 기타. 실력은 선배들이 감탄할 정도다. 그리고.. 내가 맡게 된 포지션은.. " 야! 이쁘니 보컬! 뭐하냐? 한 곡 뽑아라! " 황당하게도 보컬이다. -_-;;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으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보컬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1.5옥타브도 소화를 못하는 음치가 무슨 보컬이냐고-!! =0=;; 밴드 망치고 싶냐고 따졌더니 립싱크 하랜다. ㅡㅡ;; 그냥 나가서 얼굴 마담이나 하라고..;;; (여기가 무슨 호스트바냐? =ㅁ=++) 이거 정말 전국 내 유명 밴드 동아리 맞아?! 진짜 보컬 무대 뒤에서 노래시키고 날더러 립싱크를 하라니.. 이건 정말 밴드 동아리가 아니라 집단 사기단이다. 제길.. ㅡㅡ; 구석에 멀뚱히 앉아 궁시렁대고 있는데 선배의 목소리가 커진다. " 뭐해?! 보컬이 빼면 어쩌자는 거야?! " " 저.. 노래 못하는데요..;;; " 순간 동아리 실 분위기가 싸아해진다. 보컬이라는 작자가 노래를 못한다니..;;; 다들 종이컵을 든 채로 굳어있다. ㅡㅡ; 젠장.. 꼭 이런 자리에서 공개 망신을 시켜야겠냐고!! 노래 못해도 상관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시베리아 벌판 같은 분위기에 쫄아 붙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선배의 얼굴이 펴진다. " 자~ 그럼 이쁘니 보컬의 실력 좀 볼까? ^^ " 뜨벌.. 이쁘니 보컬이라고 부르지 말란 말이다!! ㅡㅡ++ " 저기.. 무슨 노래 부를까..요..? ;;; " " 아무거나. 우리 이쁘니 보컬 좋아하는 걸로. ^^ " " 네.. 그럼..;;; " 특별한 주문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려는 순간 리더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She's Gone. " " !?! " 미.. 미친놈!!!! 네가 지금 정녕 귀가 썩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0=+++ 젠장.. 저 비웃는 꼬락서니를 보고있자니 정말 속이 뒤틀리는군.. ++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 설마.. 보컬씩이나 돼서 그 정도도 못 부르는 건 아니겠지? " 울컥..! 저.. 저놈 자식 보게나. 아주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구만?? 같은 1학년 주제에 지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냐고!! =0=++ 고개를 홱 돌리니 깡패시키가 말없이 앉아 날 쳐다보고 있다. 양 옆에는 여자까지 끼고서(!) -_-++ " 누.. 누가 못 부른대-?! =0=;; " 이런 젠장..;;; 아무리 지기가 싫어도 그렇지. 이제 어쩔 거냐!! 위 열매-?!!! 내가 따지듯 묻자 리더시키가 피식 웃는다. 뺀질뺀질하게 생긴 게 꼭 제비족 같다. ㅡ_ㅡ;; 웃는 것도 어쩜 저렇게 얍실할까. 앞으로 저 놈과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한숨밖에 안나온다. 나와 리더시키가 파지직 광선을 마구 발산하는 사이 어느새 내 옆으로 바싹 다가온 깡패 시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 녀석한테 노래시키지 마라. " 오오! 깡패시키!! 그래도 애인이라고 날 감싸주.. " 귀 썩는다. " =0=;;;;;; 이.. 이 잔인한 시키-!!!! 나 이제 니들이랑은 말 안 해!! ㅠㅁㅠ (애냐-_-;) 나는 여린 가슴(?)에 남겨진 상처를 부여안고 그대로 동아리 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누구 성화 땜에 무리해가며 이 학교에 왔는데-!! 누구 따라 왔다가 이따위 사기(!) 동아리에 가입이 됐는데-?!!!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_-++ 내가 속이 좁은 거라고-?! 무슨 섭한 말씀을! ㅡㅡ 깡패시키 때문에 미팅 한 번 못하고 수절하다시피 하며 살고 있는데.. 대학에 왔으면 미팅 정도야 기본으로 하는 것 아닌가..! 뭐.. 깡패시키도 수절(?)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왠지.. 손해보는 느낌이.. ;;; 나는 학생 휴게실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공개적 망신은 피했으니.. 아무리 무대포인 나라도 대중(?)들 앞에서는 얌전해지니까.. ㅡㅡ;; " 요즘 날씨가 참 좋죠..? "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왠 남자가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 고 있다. " 혼자 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이길래요.. ^^ " " ....... " 그러더니 곧바로 옆자리에 걸터앉는다. 어이.. 이봐.. 지금 나한테 수작 부리는 거야..? 등에 닿는 이 느물느물한 감촉은 뭔데..? ㅡㅡ^ 쓸쓸해 보이면 막 더듬어도 되는 거냐고!! =0=++ 나는 잔뜩 째려보곤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변. 태. -_- " " .....! "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변태 놈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잠시 뚫어지게 날 쳐다보던 놈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 하하하.. 미안해요. 난 완전히 여잔 줄 알고.. 큭큭.. " " ....-_- " 이.. 이런 염병할..! =_=++ 아무리 그래도 네가 변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어디서 더러운 수작을..! 자세히 보니 얼굴 하나는 여자 뺨치게 이쁘다. -_-; " 저는 건축과 1학년 '류세이'라고 합니다. " " ....... " 젠장.. 말하기 싫은데..;; 내가 왜 너 같은 변태 놈과 통성명을 해야 하냐고.. ㅡㅡ;; " 그쪽은요..? " " ....;;;; " 어.. 어쩔 수 없군..;;;; " 저는 국문과 1학년.. 위.. " " 위 열매! " " ?! " 슬쩍 고개를 돌리니 깡패시키가 휴게실 앞에 기대선 채 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내 옆으로 시선을 옮기던 깡패시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다. 왜.. 그러지..? ㅡㅡ? " 이율-?! " 갑자기 변태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깡패시키에게로 달려간다. " 혹시 날 보고 일부러 와 준거야?! " 자.. 잠깐!! 뭐냐..! 이 상황은..?? -0-;; 잠시 후 깡패시키가 말없이 변태 놈과 날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둘이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냐? " 깡패시키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물었다. 이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ㅡㅡ;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결국 모르는 사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변태 놈이 깡패시키의 옆에 달라 붙으며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 몰라. 이 사람이 갑자기 막 더듬잖아! " 뭐...? 너 지금 뭐랬냐..? 내 귀가 맛이 갔나..? ㅡㅡ? 손으로 귀를 쭉 잡아당기고 있는데 깡패시키가 내 어깨 위에 손을 걸치며 말했다. " 너.. 더듬었냐? " " 미친-!! 내가 돌았냐-?! =0=++ "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닌 모양이다. 저 가증스러운 표정 좀 봐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가 변태 짓 해놓고 선량한 날 범인으로 몰아-?!? " 저 자식이 그랬어!! 내 등이랑 엉덩이를 막 더듬었다고!! " 흥.. 어디 질까 보냐!! ㅡㅡ^ (그런 걸로 이기고 싶냐-_-;) 내가 소리치듯 말하자 깡패시키가 천천히 내 등으로 시선을 옮긴다. 잠시 이리저리 살펴보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 변태 놈을 차갑게 노려본다. " 류세이. 죽는다. " " 뭐...?;;;;; " 변태 놈이 당황한 얼굴로 짧게 되물었다. 이쁘장한 얼굴이 순간 하얗게 변한다. " 내가 알기로 이 녀석은 당. 하. 는. 쪽. 인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 그럼~ 그럼~ ^^ .....이 아니지-!!! =0=++ 아니.. 이 자식이 쪽팔리게 왜 그딴 얘기를 하는 거야-!! //// " 야!! 내.. 내가 당하긴 뭘 당해-!?! " " 그럼 네가 더듬었냐? " " 아, 저 자식이 그랬다니깐-!!!! =0=++ " " 그럼 당한 거 맞잖아. " " 그.. 그..;;;" 젠장.. 변태가 되는 것도 싫지만 남자가 돼서 성추행을 당하는 것도 그다지 나을 건 없다. -_-;; 곰곰이 생각하니 창피하기도 하고.. ///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깡패시키가 변태 놈에게로 다가갔다. 변태 놈도 나와 키가 비슷해서 깡패시키와는 키 차이가 심하다. 잔뜩 굳은 변태 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히죽 웃음이 난다. 뭐.. 조금쯤은 불쌍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업자득이지. ㅡㅡ " 다시 한번 이 녀석한테 손 댔다간 죽을 줄 알아. " " ....;;;;; " 변태 놈은 대답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한테 들러붙지마. 귀. 찮. 으. 니. 까. " " ....... " 야..;; 그건 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ㅡㅡ;; 괜시리 내가 더 무안하다.;;; 깡패시키의 성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끔 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차갑다. 지금이야 정이 들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 .....어. " " ? " " ? " " 싫어!! " 커.. 커헉--!!! 운다---!!!! =0=;;;; " 쟤한테 그런 건.. 그냥 장난으로 한 거였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 가느다란 턱선 위로 촘촘히 모아진 눈물은 녀석이 말할 때마다 바닥위로 떨어졌다. " 야..;;;; " " 내버려 둬. " " 강이율! " 변태 놈은 울먹이며 몇 번씩이나 깡패시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동요하고 있는 건 오히려 내 쪽이다. 뭔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ㅡㅡ;; 혹시 지금 이 상황은 그 유명한(!) 삼각관계..?! 그건 그렇고.. 저 변태 놈은 벨도 없나..? 저렇게 싸가지 없는 놈이 뭐가 그리 좋다고 울면서까지 매달리는 거냐고! 인정하긴 싫지만 척 보기에 변태 놈도 대단한 킹카인데 말이지.. 저 정도 얼굴에 이 정도 학벌이면.. 변태 짓 하는 버릇(?)만 고치면 그럭저럭 쓸 만 할텐데.. ㅡㅡ;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변태 놈이 날 노려보며 소리쳤다. " 강이율! 너 애인 있다며?! 이 자식이랑 있는 거 보여도 될까?! " 이 자식이라니.. -_-; 이게 이젠 아주 막 나가네-!! 방금 전 킹카라고 한 말은 취소닷-!! =ㅁ=++ " 이 녀석이 바로 내 애인이야. "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가 짧게 대답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어쩐지 좀 창피하다. ///// " 그럴 리가.. " " 맞아. " " 너.. 눈 높잖아?! " 빠직!+++ 야-!!! 너 지금 그거 무슨 뜻이냐-?! =ㅁ=++ " 그 때 나한텐 분명 '보고 있으면 쓰러트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했 잖아-?! " 컥...! 깡패시키! 정녕 네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저 얼음장같은 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나는 황급히 깡패시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날 쳐다보던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 녀석이 묻고 있는 건 나다. 혹시 지금 나한테 동의를 구하는 거냐..? 내가 물끄러미 녀석을 쳐다보자 피식 웃는다. " 황당할 정도로 어벙하고 실수투성이고 고집만 센 녀석이지만, 뭐.. 부족한 건 내가 채워주면 되는 거고.. 어쨌든 같이 있으면 질리지 않는 녀석이긴 하지. " 야! 지금 그거 내 욕하는 거지-!? ㅡ0ㅡ++ "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아무리 바보라도 알아들었겠지..? " " ?? " 가까이 다가온 깡패시키가 갑자기 내 귀를 쭉 잡아당긴다. " 야! 아프..! " " 바람 피다 걸리면 죽. 는. 다. " " ;;;;;; " " 그 년부터 죽일 테니까 알아서 해. ㅡㅡ " 야..;;; 네가 무슨 살인 청부업자냐..;;; 거 참, 말 한번 살벌하게도 하네.. ㅡㅡ;; 나는 아픈 귀를 주무르며 천천히 바닥에 내려놨던 가방을 주워 들었다. 깡패시키가 커다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아 끈다. 녀석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 야! 쟤는..? " " 신경쓸 거 없어. " " 그.. 그래도 우는데..;;; " " 지금 수업 있지? 늦겠다. 뛰자. " 아주 내 시간표까지 다 꿰고 있구나.. ㅡㅡ;;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데.. 살짝 보기만 할까.. 하. 지. 만. 차라리 안 보는 편이 나았을 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변태 놈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덕분에 그 날 이후 몇 일 밤을 잠 못 이루던 나는 퀭한 모습으로 지내야만 했다. 그 원한에 사무친(!) 눈..;;;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자고 있는 깡패시키를 원망스레 쳐다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뭐.. 만일의 경우엔 이 녀석이 지켜주겠지.. 그 날 밤 나는, 달려드는 칼(류세이)과 맞서는 방패(강이율)가 나오는 기이한 꿈을 꿨다. ㅡㅡ; " 그것 밖에 못해-??!! " 뜨벌.. ㅡㅡ; 그러니까 노래 못 한다니깐!! =0=++ 저노무 싸가지 없는 리더시키!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0=++ " 자자~ 다시 한번 해보자. " 연습을 지도하던 선배가 손뼉을 치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제서야 리더시키가 내게서 시선을 거둔다. 가뜩이나 인상도 더러운 게.. ㅡㅡ 나는 깊은 한숨을 들이킨 뒤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간주가 흘러나오고.. " 널 사랑해애애애~ 죽는 날.. " (플라워의 endless..) " 그만! 그만!!! " 몇 소절 부르지도 않았는데.. ㅡㅡ; 싸가지 리더시키가 짜증난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포지션은 베이스다. 놈이 리더가 된 건 순전히 자기-_-추천에 의해서다. 나와 깡패시키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으므로.. 지가 한다고 손들어 놓고는 막상 되고 나니 어찌나 유세를 떠는지.. -_-;; " 너 지금 장난해??!! " " 뭐가..? -_- " " 노래 그 따위로 밖에 못하냐고-!! " " -_-++ " " 할 마음이 있긴 있는 거냐??!! " " 난 애초에 분명히 노래 못한다고 했어. 억지로 가입시킨 건 선배라고!! " " 노래 못하면 노력도 못해?! " 아니..! 이 노무 싸가지가 정말-!! =ㅁ=++ 참다못한 내가 욕을 퍼부으려는 찰나 등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베이스 실력도 그다지 좋진 않은 것 같은데? " " !! " " 뒤에서 어설픈 기교는 그만두지 그래? 내 연주가 묻히잖아. 거. 슬. 리. 게. " 리더시키를 능가하는 저 싸가지 없는 말투!! 깡패시키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비웃듯 말했다. 차가운 시선이 리더시키에게 고정되어 있다. " 무슨.. 소리야? " " 말 그대로. 남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네 실력이나 더 쌓지 그래? " " ....... " 머.. 멋지다. 깡패시키!! >ㅁㅁ< 워낙 간지러움을 잘 타는 체질이라 스킨쉽이 두렵기까지 한 나다. 그런 내 약점을 알고 있는 녀석은 때때로 더욱 짓궂게 더듬곤 한다. ㅡㅡ; 아무래도 괴롭히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_-;; " 어이~ 그림 좋은데..? " 으윽.. 간지러워!! >0ㅁ<;;;;;;; 나는 어느새 허리까지 내려온 녀석의 손을 밀어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간지러워서 말도 제대로 안나온다.;;;; 이노무 깡패시키.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ㅠㅠ " 야!! 그림 좋다고!!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 에..?! ㅡㅅㅡ??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뭔가 소음이 들리긴 했는데.. 나는 흘끗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적한 공원 벤치 앞에 선 몇 명의 양아치들이 이쪽을 향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소리쳤다. " 니들 그림 좋다고!! 알았어??!!++ " 하.. 나 참.. 남자 둘이 가는데 그림 좋다는 말은 또 처음 듣는다. 예전처럼 여장을 한 상태도 아니고.. 옷차림도 평범한데.. 평범한 반팔 티에 칠부 바지.. 크로스 백.. 벙거지 모자.. 헐렁한 운동화.. 이 정도면 충분히 남자답지 않은가?! (아니--;;) 여자취급 당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어쩐지 더 화가 난다. 특히나 기름이 주르륵 흐르는 저 느끼한 면상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나는 거리낌없이 놈들에게로 다가갔다. " 오올~ 가까이서 보니까 더 이쁜데..?/// " 놈들 중 하나가 바싹 다가오더니 느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철사처럼 뻣뻣하게 서있다. 나름대로 멋을 낸다고 신경 쓴 모양이지만 내 눈엔 그저 조잡해 보일 뿐이다. 가뜩이나 껌껌한데 시꺼먼 선글라스는 또 왜 쓰고 있냐.. -_-; 나는 가만히 녀석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 니들 뭐야? " " ?! " " 사람 지나가는 거 처음 봐? 촌스럽게 굴지말고 꺼져. ㅡㅡ " " !! " 갑작스런 내 말에 놀랐는지 놈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 받는다.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들었는지 놈들 중 하나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 아니.. 이 년이-!? " 뭐..?! 이 년..?! =0=++ " 야, 이 미친 새꺄-!! 누가 년이야? 난 놈이야! 알았어?! =0=++ " " 웃기네. 네가 남자라고? " " 그렇다-!!++ " 놈들은 비웃듯 날 쳐다보더니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 야. 네 눈엔 저게 남자로 보이냐? " " 계집애가 입만 더러워서는.. " " 그래도 귀엽잖냐. ㅋㅋ " 뭐.. 뭐가 어째-??!! =ㅁ=+++ 마침내 뚜껑이 열린 나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 개쉐들! 니들 오늘 다 죽었어!! =0=++ " 그렇지 않아도 요즘 류세인가 뭔가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는데 마침 잘 됐다. 그동안 연마한 실력으로 땅바닥에 눕혀주지! -ㅁ-++ 나는 가방을 옆으로 내던지고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갔다. 놈들이 황당하다는 듯 날 쳐다본다. 니들은 류세이다.. 니들은 류세이다..-_-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물론 저런 떡대들이 그 시키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만.. ㅡㅡ;; 마침내 쉼호흡을 가다듬고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꼬르륵-- 헉..!! 갑작스런 소리에 긴장이 풀린 나는 그만 헛손질을 하고야 말았으니..! 안타깝게 빗나간 주먹 옆으로 능글맞은 양아치 놈의 얼굴이 보인다. 젠장.. 눈 썩는다. -ㅁ-;; " 멍청이. " 그때까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말없이 구경하고 있던 깡패시키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머.. 멍청이라니.. ㅡㅡ; 내가 홱 돌아보자 어느새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녀석은 날 등뒤로 돌리더니 짧게 말했다. " 저기 앞에 식당 보이지? 먼저 가서 주문이나 시켜놔. " " 야! 내가 해치울.. " 꼬르륵--- -_-;; " 그.. 그럼 먼저 간다. ㅡㅡ; " 내 말에 녀석은 살짝 웃고는 양아치 놈들을 향해 걸어갔다. 음식점으로 가는 길. 슬쩍 뒤를 돌아보니 신나게 몸을 풀고 있는 깡패시키가 보인다. 고등학교 때 짱으로 통하던 녀석이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 했겠는가.. 양아치들 운도 더럽게 없지. ㅡㅡ; 그저 무사히 살아 돌아가길 빌 뿐이다. 잠시 후 식당에 자리잡고 앉은 뒤 주문을 시키려는데 녀석이 안으로 들어섰다. " 버.. 벌써 끝났냐-??!! ㅇㅁㅇ;;; " " 뭐...그렇지.. 주문했어..? " " 네..? 아.. 아직이요..;;; " 무서운 시키..;; 아직 10분도 안 지났는데..;; 함부로 개기지 말아야겠다. ㅡ_ㅡ;;; 땀방울 하나 맺히지 않은 단정한 녀석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한숨짓는 나였다.;;; " 무거워. 빨리 좀 받아! " " 응..? 으응!! ;;;; " 평온한 일요일. 갑작스런 벨소리에 놀라 황급히 문을 여니 눈앞에 사랑스러운(?) 동생 녀석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열무 녀석은 현관으로 들어서며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 앞으로는 집에도 좀 자주 들러. 형이 안 오니까 내가 여기까지 반찬 날라주러 와야 하잖아. ㅡㅡ " " 미.. 미안..;;; " 슬쩍 보니 녀석의 손바닥 위로 빨갛게 자국이 나있다. 무거운 반찬 통을 들고 여기까지 왔으니 팔이 아플 만도 하지. 나는 흘끗 현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 태진이는? 태진이한테 들어달라고 하지 그랬어? " " 그 녀석 요즘 바빠. 콩쿨 준비하느라. " " 피아노..? " " 응. " 열무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천천히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다. (이게 과연 남동생한테 할 말인 지는..--;) 나는 부엌으로 가 시원한 주스를 컵에 따른 후 얼음까지 띄워서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보통 자취생이라고 생각하면 원룸을 생각하기 쉽지만.. 현재 나와 깡패시키가 살고 있는 곳은 오피스텔이다. 그것도 상당히 큰 평수의. 나는 상관없지만 깡패시키가 좁은 곳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 곳으로 정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소유주는 깡패시키네 부모님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는.. 식객인 것이다. ㅡㅡ; " 집 진짜 좋다. 정말 자취생 맞아? " " 내 집도 아닌데. 뭐.. -_-; " " 이율형은? 어디 갔어? " " 응. 친구 만나러. " 깡패시키는 이성에게나 동성에게나 인기 폭발이어서 부르는 곳이 많다. 그야말로 인기 연예인이 따로 없을 정도다. 오늘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난 낯가림이 심해서 그런지 그런 자리는 영 불 편하다. 녀석 옆에 붙어 다니려면 따가운 시선도 감수해야 하고.. ㅡㅡ; 주스를 쭈욱 들이키고 난 뒤 열무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 이율형이 잘 해주지? " " 자.. 잘해주기는 개뿔.. ㅡㅅㅡ//// " 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녀석이 생긋 웃는다.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눈웃음 죽인다.;;;; 아무리 봐도 남자라고는 인식이 안 된다니까. (자네도 만만치 않아.--;)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소파에 기댔다. 역시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포만감이 좋다. 내일이 시험만 아니라면 훨씬 더 좋을 텐데. ㅡㅡ; " 형. " " 응..? " "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 " " 뭐가..? " 소파에 드러누운 채 고개만 슬쩍 돌려 묻자 녀석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 형이 내 형이긴 하지만.. 솔직히 좀 꿀리잖아..? ^^; " " ㅡㅡ; " 반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군.. ㅡㅡ;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멀뚱히 천장을 쳐다봤다. " 정말 사귀는 거 맞지? " " 아.. 아마 그럴.. 걸..;;; " " 이율형 바람 안 펴? 혹시 들러붙는 여자는 없어? " 여자는 없지만 남자라면 있다. ㅡ_ㅡ;;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 태진이는.. 괜찮냐? " " 흥. 그랬다간 나한테 죽어. ㅡㅡ " 무.. 무서운 시키.. ㅡㅡ; 정말 나랑 같은 핏줄이 맞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어떻게 틀려도 이렇게 틀릴 수가 있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열무는 어릴 때부터 나보다 훨씬 똑똑했다.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는 녀석과 달리 나는 늘 흐지부지했고 그래서 부모님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외모는 많이 닮았지만 녀석이 훨씬 더 화려하달까.. 굳이 동물에 비유하자면 녀석은 은 여우. 나는 비실비실한 고라니다. ㅡㅡ; 워낙에 뼈가 가늘어서 몸이 부실한 덕분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내차지였다. 물론 절대로좋았다는 건 아니다. 결국 그 약은 다 열무녀석의 입으로 들어갔지만.;;; " 그 녀석. 보기보다 성실해. " " 그래..? " " 적어도 바람 같은 건 안 피우니까. ㅡㅡ; " " 그럼 다행이고.. 형 얼굴이 안 좋길래 한 번 물어 본 거야. " " 응.. " 내 얼굴이 그렇게 안 좋나..? 잠자다가 일어나서 그런 것 같은데.. 그나저나 대화내용이 참.. ㅡㅡ; ' 형부는 잘 해줘? 바람 안 피우지? ' ' 어머. 얘는.. 그이는 나밖에 몰라. 호호 ' ' 그렇다면 다행이고. ^^ ' .....와 같은 드라마 속 자매의 대화 장면이 떠오르는 건 그저 기분 탓인가.. -_-; 열무 녀석이 돌아가고 난 뒤. 나는 녀석이 가져다 준 반찬 통을 냉장고 속에 집어넣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가정-_-주부가 된 기분이랄까..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지..;;; 기선은 초반에 제압해야 한다고 열무 녀석이 그렇게 열심히 말했었는데.. 요즘 들어 깡패시키랑은 얼굴 보기도 힘들다. 무슨 바쁜 일이 그렇게도 많은 건지.. 혹시.. 갱-_-년기인가.. ㅡㅡ? 젠장.. 열무 녀석 괜한 얘기를 꺼내 가지고.. ㅡㅡ; " 누구 왔다가 갔어? " " !! " 고개를 돌리니 문 앞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는 깡패시키가 보인다. 나갔을 때와 다름없이 단정한 모습이다. 하긴.. 녀석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 " 응.. 열무가 반찬 가져다 줬어. " " ....... " " 빨리 왔네.;; " " 재미없어서. " 깡패시키는 짧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익숙한 녀석의 향수 냄새가 잔잔하게 퍼진다.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녀석이 천천히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 야.. 뭐.. 뭐하는 거야!!//// " " 그렇게 쳐다보니까 못 참겠어. " " 무..무슨!/// " 녀석을 밀어내려고 버둥거리는 순간 강한 힘이 내 손목을 압박해왔다. 그리고 서서히 겹쳐지는 입술. 어쩔 수 없이 반항을 포기한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녀석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과는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녀석만큼 키스를 잘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도저히 거부하기 힘들만큼 달콤한 키스. 물론 나는 산소조절에 온 신경을 쏟아야 하지만.. -_-; 한참 후에야 내게서 입술을 뗀 녀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녀석이 가장 기분이 좋을 때 짓는 미소다. " 서.. 설거지해야겠다.//// " 괜시리 민망해진 내가 황급히 싱크대 앞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녀석이 내 허리 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또다시 버둥버둥..;;;; " 요즘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서운하지 않았어? " 녀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내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 서.. 서운하긴 뭐../// " " .......쿡.. " 제.. 젠장.. 빌어먹을 왜 이렇게 심장이 뛰고 난리냐..! >ㅁㅁ<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_-;) " 서.. 설거지 해야 돼!! " " 나중에 내가 할게. " " 마.. 맞다! 내일 시험이잖아!!!! " "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 야--!!!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이 나쁜 시키-!! 언젠가 반드시 덮치고야 말겠어-!!! ㅠㅁㅠ 그 날 밤. 뜨거운(!) 침대 위에서 또다시 헛된 꿈을 키우는 나였다. -_-; " 준비 다됐어? " " 응! " 화창한 토요일 오후. 오늘은 고등학교 반창회가 있는 날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볼 생각을 하니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경문이는 이류 녀석이랑 같이 온다고 했지. 제희도 온다고 했는데.. 학교를 졸업한 뒤 자주 연락을 못해 미안했었는데.. 잘됐다. " 가자. " " 잠깐! 나 지하철 패스 좀 찾고-! " " 됐어. 그냥 나와. " " 금방 찾을 수 있어.;;; " 에에.. 어디다 뒀더라.. ㅡㅡ; 방안 곳곳을 뒤지고 있는데 밖에서 모터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 또 오토바이를..?? 스피드광인 저 시키랑 타려면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와야 한다. 차라리 걸어가고 말지 죽어도 저건 못타겠다. ㅡㅡ; 나는 더더욱 열심히 지하철 패스를 찾기 시작했다. 서랍. 책상 위. 침대 밑. 소파 구석구석. 젠장.. 아무리 찾아도 없다. 600원 아끼려다가 지각 벌금 2만원 날리게 생겼군. -_-;; 결국 나는 찾기를 포기하고 집을 나섰다. 오토바이는 절대 안 타겠다고 말해야지..;;;; 나는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 빨리 타. "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주시했다. 커헉-!!!!!!!!!!!!!!! 이 삐까리 번쩍한 물체는 뭐냐!!!! 은색의 심상치 않은 광택이 본체를 감싸고 있다.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차가 아닌가-!! " 너.. 이거.. " " 선물 받았어. " " 누.. 누구한테..? " " 아는 여자한테. " 뭬.. 뭬이야-??!! =ㅁ=++ 아는 여자라니.. 대체 어떤-_-뇬이야-?!!! 나는 흘깃 녀석을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사실은 타고 싶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지. ㅡㅡ 싸나이 위 열매 아직 죽지 않았다 이거야-!! 내가 무시하며 걷자 녀석이 황급히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 뭐하는 거야? " " 나 혼자 갈 거야. ㅡㅡ " " 뭐..? " " 아는 여자가 사준 차타고 빨리 가시지. ㅡㅡ " " .......하.. " " ㅡㅡ; " " 하하하하하- " ㅡㅡ;; 이.. 이시키! 지금 날 비웃는 거지!! =0=++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 뭐.. 뭐가 웃겨-??!! =0=++ " 젠장.. 이럴 땐 말 더듬으면 안되는데.. -_-;; 내가 빼액 소리치자 녀석이 웃음을 멈추고 날 내려다본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다. ㅡㅡ; " 혹시 너.. 지금 질투하는 거냐..? " " 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릴!!;;;;;;; " " ....... " " .....;;;;;;; " 잠시 그대로 날 내려다보던 깡패시키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할머니야. " " ......?! " " 할머니가 사주신 거라고. " 에엑...?? " 오토바이는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사주셨어. " " .....;;;;; " 삐질삐질..;;; 그렇다면 난 여지껏 할머니를 상대로 질-_-투를.. ㅡㅡ? 내가 벙찐 얼굴로 굳어있는 사이 어느새 녀석은 내 목을 손으로 감싸며 끌어안고 있었다. " 젠장.. 정말 귀여워. 반창회 따윈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자. " " 아.. 안 돼애!!;;;; " " ....쿡쿡.." 녀석은 몇 번씩이나 내 뺨을 쭈욱 잡아당기고 나서야 긴 몸을 일으켜 차로 향했다. 으으.. 볼따구가 부었는지 화끈화끈거린다. ////ㅡㅅㅡ//// " 타. " " 어..엉..! " 역시나 승차감이 아주 좋다. 가히 예술이라 할 만한 세련된 내부 디자인하며.. 나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서 운전을 하던 깡패시키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 면허증은 있어..? " " 응. " 쳇.. 그건 또 언제 딴 거냐..? 난 자전거도 못 타는데.. ㅡㅡ; 잠시 후 운전에 집중을 하던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누가 온대? " " 응. 경문이. 제희. 영우. 태식이.. " " ....... " " 참, 이류도 온다고.. " 끼익---- 허억-!!!! 갑자기 깡패시키가 갓길로 차를 들이댄다.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채 녀석을 쳐다봤다. " 차 돌린다. ㅡㅡ+ " " 야-!!!;;;;; " " 여기까지 나왔으니 외식이나 하지. " " 야-!! 안 돼!! 나 경문이랑 만나기로 했단 말야!! " " ....... " " 오랫동안 연락도 못했는데.. " " ....... " " 나 경문이 녀석 보고 싶어-!! ㅠ0ㅠ " " ....... " " ......ㅠㅠ " " ........알았어. "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핸들을 잡았다. 긴 손가락이 단단히 핸들을 감싸쥐고 있다. 평소 포커페이스라 불리는 녀석이지만 유독 이류의 얘기만 나오면 민감해진다. 뭐..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친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잠시 후 약속한 장소에 다다를 즈음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륜지 삼륜지 하는 자식이랑 가까이 했다간 오늘 밤 잠은 다 잔 줄 알아. ㅡㅡ^ " " =0=;;;;;; " 저 얼굴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보라.. 필시 진심이다. -ㅁ-;;;;; 나는 뻣뻣해진 고개로 겨우겨우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 조심해야겠다.. ㅡㅡ; ....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열매야-!!!!!!!! " 호들갑스럽게 달려와 날 끌어안는 자 있었으니.. 그 이름 이류였다. =ㅁ=;;;;;;;;;;; " 저.. 저기..;;; " " 진짜 반가워~ >ㅁ<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 " 으.. 응.. 나도 반가워. 근데 이것 좀..;;; " " 너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다? " " 고.. 고마운데 이것 좀 놓고..;;; " " 그동안 잘 지냈어? " 야!!!! 정녕 네가 지금 날 죽이기로 작정을 한 것이냐-!!!! ㅠㅠ 나는 이류시키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 괴물 같은 시키는 도무지 꼼짝을 안 한다. 도대체 뭘 먹고 살 길래 이렇게 힘이 센 거냐? -_-;; " 그 손 놔. " -!!! 등뒤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 그제서야 나를 부등켜 안고 있던 이류시키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녀석의 얼굴에 웃음이 싹 걷힌다. " 강이율..? " " ....... " 깡패시키는 말없이 이류를 노려보다가 내 손목을 잡았다. 손에 실린 힘의 무게로 봐서 폭발 일보직전인 게 틀림없다.;;;;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의 통증을 참다못해 소리쳤다. " 아.. 아파아~ " " ....... " " 저.. 정말 아프다니깐-!! " " .......조용히 해. " " -_-;; " 지.. 지금 건드리면 안 된다. ㅡㅡ;; 감정 없는 목소리로 짧게 대답한 녀석은 한참 후에야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재빨리 손목으로 시선을 가져가니 빨갛다 못해 푸르딩딩하다. =ㅁ=;;; 제.. 젠장..! 이게 다 저노무 이류시키 때문이지--!!!!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이류시키를 노려봤다. 잠시 후 눈이 마주치는 순간 녀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달려왔다. " 그렇게 쳐다보지 마. 숨을 못 쉬겠잖아. //// " " -ㅁ-;;;; " 이.. 이런 수탉 같은 놈..;;; 쳐다본 게 아니라 노려본 거다!!! =0=++ 젠장.. 말을 말자. ㅡㅡ; 나는 놈을 무시하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스윽 한 번 훑어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녀석은.. " 오경문----!!!! " 애들 사이에서 떠들던 녀석은 그제서야 날 알아차렸는지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 열매야-!! " 내 등을 감싸안은 녀석은 잠시 고개를 묻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의 재회라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아냐? " " 나도.. ^^//// " " 그간 잘 지냈어? " " 응. " 경문이는 몇 번씩이나 내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본 사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예전엔 통통해서 귀여웠는데.. 우리는 손을 잡은 채로 몇 분간 계속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학교가 갈리기 전까지 둘도 없는 친구였으니까.. 슬쩍 고개를 들어 살피니 멀리로 깡패시키의 모습이 보인다. 일진 애들과 여자 애들 사이에 둘러싸인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확실히 멀리서도 눈에 띄는 녀석이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시선을 옮겼다. 눈앞에선 경문이가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다. " 이율이랑은 잘 지내고 있어? " " 뭐.. 그냥..;;; " " 잘 해주지? 그 녀석 너라면 끔찍이 위하잖냐. " " 뭐..;;; " 그.. 그랬었나..? ㅡㅅㅡ?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유리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이류는..? 잘 해줘? " " ....... " 내 말에 녀석이 당황한 기색으로 날 쳐다본다. 한참 후에야 녀석이 머뭇거리며 내게 말했다. " 우리.. 깨졌어. " " !! " 녀석은 짧게 대답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수심 가득한 얼굴이 안타깝다. 아무래도 괜한 얘기를 꺼낸 모양이다. " 그 녀석.. 지금 사귀는 여자 있어. " " 뭐..?!! " 설마.. 바람을..??!! 가장 친한 내 친구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 그런데.. 그 여자가 말이지.. " " ......? " " .....너랑 많이 닮았더라. " " ...!!! " 순간 눈앞이 새하얘진다. 왜 하필이면 나와..?! 나는 조심스레 경문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녀석은 덤덤한 표정이다.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져 있다. " 뭐.. 이젠 상관없어. 나도 지금은 따로 사귀는 사람 있고. " " ....... " " 근데 너.. 정말 이율이 좋아하냐? " " ......!! " 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면.. >ㅁㅁ< " 잠시 후 침묵을 깨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 정말이야-??!! " 그 목소리의 주인공 역시 이류였다. ㅠ0ㅠ " 으아악~ " 집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녀석은 내 손목을 끌고 침실로 향했다. 억지로 끌려 들어간 침실은 불이 켜지지 않은 상태라 무척 어두웠다. 어스름한 달빛이 창문을 뚫고 침대 한 가운데로 스며든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더 스산하다. ㅡㅡ; " 자.. 잠깐만-!! 우리, 말로 하자고!!;;;; " 나는 침대 위에 내팽개쳐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소리쳤다. 하지만 깡패시키는 전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한발짝 한발짝 다가설 때마다 목에선 꿀꺽 침이 넘어간다. " 야..;;; 난 그냥 장난으로..;;; " " ....... " " 저.. 정말이야!! 이류랑은 아무.. " "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지마. ㅡㅡ " 움찔..;;;; " 어.. 어쨌든 그 녀석이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니깐!! " " ....... " " 처음에 안았던 것도 갑작스럽게 당한 거라구.;;;; " " ....... " 야! 이 시캬!! 말 좀 해라. 무서워 죽겠다. ㅠㅠ 나는 이불을 돌돌 말아 감싸 안고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어두운 방안, 내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마치 무슨 공포 영화의 한 장편 같다.;;;; " 야..;;; " " ....... " " 여.. 여보세요..?;;;; " " ....... " 이 시키 정말 화났다. =_=;;; 잠시 후 슬금슬금 뒷걸음 질 치던 내 등뒤로 커다란 벽이 닿았다. 헉..!! =0=;;; 나는 재빨리 돌돌 말아두었던 이불뭉치를 녀석에게 던지고는 문을 향해 달렸다. 아니.. 달리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가? 그 이름도 유명한 깡패시키 아니던가..? 허리에 묵직한 힘이 가해지는 순간 내 몸은 빠르게 등뒤로 당겨졌다. 홉사 블랙홀이 별을 빨아들이듯이. 깡패시키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안은 채 말없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과의 키 차이는 16cm.. 나는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삼켰다. " 야..;;;;; " " .....네 친구의 조언대로 오늘은 정신 못차릴 정도로 괴롭혀주지. " =0=;;;;;; 오 경문 이 쉑!! 담에 만나면 죽었어-!!!!!!!! 나는 온 몸으로 저항하며 소리쳤다. " 아.. 안 돼애!! 이틀 전에도 했잖아! 나 아직 다 안 나았단 말이야!! ㅠ0ㅠ " " 낫게 해주면 될 거 아냐.. " " 어.. 어떻게..??;;; " " 열. 기. 로. " =0=;;;;;; 깡패시키는 상냥하게 웃으며 날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열심히 버둥거리곤 있지만 녀석이 위에서 누르고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마치.. 뒤집어진 거북이가 버둥거리는 꼴이라고나 할까..-_-; 젠장.. 그동안 쌓아놓았던 쿨한 내 이미지(?)가... ㅠㅠ " 그.. 그러니까 나랑 이류는..!! " " ㅡㅡ^ " " .....;;;; " " 한번만 더 그 이름 꺼내면 열 번 채운다. " " .....!! " 여.. 열 번을 채우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궁금하긴 하지만.. 왠지 알고 싶지는 않군.=_=;;;; 얼마나 버둥거렸을까.. 마침내 힘이 빠진 나는 제 풀에 지쳐 그 자리에 뻗고 말았다.;;; 잠시 날 내려다보던 깡패시키는 희미하게 웃더니 가만히 내 뺨을 쓸어 내렸다. 아찔하도록 관능적인 애무.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녀석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혀끝으로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온다. 힘을 잃은 내 몸은 녀석이 이끄는대로 끌려갈 뿐이다. 젠장..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따위 거북이-_-짓은 하지 않는 건데.. ㅠㅠ 어쩐지 속은 기분이다. " 윽..! " 녀석은 내 목선을 따라 천천히 부드럽게 키스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혀의 감촉이 조금씩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간다. 어느새 셔츠는 침대 밑으로 내던져져 있다. 정말 손이 빠른 녀석이다. -_-;; " 그.. 그만..!//// " " ....... " " 야...;;;; " " ....... " 불러도 대답 없는 야속한 깡패시키.. ㅠㅠ 이상하게도 녀석은 서두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느리다고 해야하나.. 시계소리가 머릿속에 새겨질 정도니.. 잠시 후 내 몸은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 야..;; 그만..! " 야! 이 망할 깡패시캬--!!! 그만 하던지 빨리 하던지 둘 중에 하나만 해라!! ㅠ0ㅠ 괴롭힌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ㅁ-;;; 녀석은 내 가슴을 살짝 쓰다듬더니 이를 세워 핥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 온 몸을 감싼다. 나는 억지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잠은 다 잔 것 같다. =_=;; 애태우며 이어지던 애무가 잠시 멈칫한 사이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밤의 공기가 소름이 돋힐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이제야 한 고개를 넘은 건가..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이율은 오싹할 정도로 이성적인 인간이다. 아까도 그런 소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니.. 녀석은 이류에게 웃으며 말까지 건넸다. " 다시 한 번 내 눈에 뜨이면 그 땐 죽. 는. 다. ^^ " -_-;;; 그 순간 시퍼렇게 굳은 이류의 얼굴이라니.. 훗.. 질투쟁이 깡패시키.. ㅡㅅㅡ//// 찰칵- -!!? 순간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가 정적을 깼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옮기니 버클이 풀려있다. 허억--------=0=;;;;;; 나..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 야-!!! 자.. 자.. 자.. 잠까아아안----!! " " 시끄러워.ㅡㅡ " " 난 아직 마음의 준..읍-!!!! " 입.. 막혀버렸다. =ㅁ=;;; 긴 키스 후.. 내가 숨을 몰아쉬는 사이 녀석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 천천히 네 안으로 들어가 주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괴롭힌 후에. " 순간 내 눈에 비친 녀석은.. 악마였다. =ㅁ=;;;; 사실 처음엔 끝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다. 불과 이틀 전에 일을 치른 입장에서 녀석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 니까.. 하지만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평소에는 칭얼대는 어린애 같던 녀석이 침이 넘어갈 만큼 색스러운 얼굴로 버둥거리는 모 습이란.. 결국 나는 생각을 바꿔 마지막까지 가기로 했다. 이류와의 일이 있으니 조금쯤은 괴롭혀도 괜찮겠지.. " 야.. 하지.. 윽..! " 나는 녀석의 다리를 벌린 후 천천히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한 녀석이 헉헉대며 허리를 틀었다. 평소의 녀석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처음 내 흥미를 끌었던 건 녀석의 얼굴이었다. 도무지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 선이 가는 얼굴과 귀여운 이목구비. 녀석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내 얼굴이 어떻게 변해있는 지 모를 정도다. 그리고.. 얼굴만큼이나 귀여운 행동들.. 새까만 눈을 껌뻑이며 쳐다볼 땐 그대로 묶어서 감금시켜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 어쩌면 나는 녀석의 말대로 지독한 새디스트에 질투쟁이인지도 모르겠다. " 가만히 있어. 버둥거리 좀 마. "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녀석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팔다리를 휘저어댄다. 나는 한 손으로 녀석의 가느다란 양팔을 침대에 고정시키며 잠시 말없이 녀석을 내려다 봤다. 새빨개진 얼굴 위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가슴을 쓰다듬던 손이 점차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간다. 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는 뜨겁게 열을 발산하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녀석이 반항할수록 더욱 괴롭히고 싶어지는 난.. 역시 새디스트인건가..? 움찔거리는 녀석의 반응을 즐기며 애태우듯 애무를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큰 소리로 외쳤다. " 야--!! 할 거면 빨리 해-!!! >ㅁㅁ<;;;;;;;; 순간 놈의 얼굴이 하얗게 굳는다. 이 시키.. 깡패시키가 어지간히도 무서운 모양이지..? 나는 말없이 가방을 들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실례지만.. 여기 위열매라고.. " =ㅁ=;;;; " 여.. 열무...?!! " 아니.. 이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침묵.............. 잠시 후 내 얼굴을 살피던 녀석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 어떤 개새야--?!? 우리 형 얼굴을 이 꼴로 만든 새끼가--?!? " 변명을 하기도 전.. 녀석은 이미 류세이의 멱살을 잡아채고 있었다. =ㅁ=;;;;; " 지.. 진정해. 열무야..;;;; " 이 녀석은 쎄단 말이다-!! -ㅁ-;;; 나는 열무의 팔을 잡으며 열심히 말렸지만 녀석은 쳐다도 안 본다. 한마디로.. 씹. 혔. 다. =_=+++ " 죽여버린다. " " 형제가 나란히 뻗고 싶은 모양이지? " 뭐.. 뭣이 어쩌고 어째--!?!? =ㅁ=+++ 나는 황급히 열무를 말리던 손을 거두며 소리쳤다. " 야! 이 싸가지 없는 새꺄! 디질래!!!! " " ......또 맞고 싶냐? " " 이.. 이 c8! " 더 이상 참다간 홧병으로 죽을 것 같다. =ㅁ=++ 결국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놈의 쇄골을 향해 머리를 날렸다. " 큭-!!! " 미처 예상 못했는지 놈은 간단히 내 공-_-격에 당하고 말았다. 아.. 하하.. 서.. 성공이다아--!!!! ㅠㅁㅠ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는데 갑자기 놈이 주먹을 날린다. 으헉-!! 어.. 어떡하지-!! 아까 맞아보니까 장난이 아니던데..! =ㅁ=;;;;; 턱--! " !! " 예상과 다른 소리에 꼬옥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류세이의 주먹이 간단히 잡힌 채로 허공에 멈춰있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 회전을 가동하려는 순간 퍼억---!!!! " 큭-!!! " 류세이의 얼굴이 돌아가며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이 녀석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이.. 이 정겨운 목소리는..! 황급히 고개를 든 순간 깡패시키와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던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퉁퉁 부운 내 얼굴이 그렇게 흉측한가? ㅡㅡ;; 천천히 손을 올려 뺨을 쓸어 내리는데 갑자기 깡패시키가 벽에 기대선 채 숨을 고르고 있 는 류세이에게로 다가갔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이더니 자리에 멈춘다. 순식간에 가까이 마주하는 두 시선. 류세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깡패시키를 올려다본다. " 저.. 저기.. 난.. " " ....... " 어째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하다.;;;;; 방금 전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열무 녀석조차 당황한 표정이다. 급기야 녀석이 내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 이.. 이러다 살인 나는 거 아냐?;;;; " 천하의 위열무가 말을 다 더듬다니..;;;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사실 지금 깡패시키의 표정을 봤을 때 그다지 말리고 싶지 않다.;;; 나도 내 목숨 귀한 줄은 아니까.. 아무래도 말리다가 나부터 죽게될 것 같은데.. -_-;;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깡패시키의 팔을 잡았다. 젠장.. 손 떨리는 것 좀 봐라. 수전증 환자 같다. -_-;; " 그.. 그냥 좀 다툰 거야.;;; " " ....... " 날 바라보는 류세이의 눈빛은 필사적이다. 제발 살려달라는 듯한.. " 애.. 애들끼리 치고 박고 싸울 수도 있.. " " 그게 치고 박은 얼굴이냐? 또 혼자 얻어터졌겠지. " " ㅡㅡ; " 제.. 젠장! 사실 성질 같아서는 나도 말리고 싶지 않다. 아까의 그 싸가지 없는 행동을 보면 옆에서 응원을 해줘도 시원치 않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와는 달리 깡패시키는 한 번 시작을 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성미라는 것을. 전직 '일짱'의 주먹이 어디 그리 쉽게 넘길 수 있는 주먹인가.. 이래봬도 일단은 내 애인이다.///// 못난 나 때문에 감-_-방에서 썩게해서야 되겠는가.. 지금 나는 한 인간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려는 거다. -_-;; " 손 치워. " " -_-;; " " 가서 찬물로 얼굴에 열부터 식히고 와. " 녀석은 류세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녀석의 습성(?)을. 자기는 죽도록 괴롭히다가도 정작 다른 사람이 건드리면 용서가 없는 무지막지한 인간.;; 그것도 비뚤어진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 아닐지.. 아니면 정말 새-_-디스트이거나. ㅡㅡ;;;;; " 이율형.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요. " 열무녀석이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녀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나는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녀석에게 속삭였다. " 야..! 안 말리면 어떻게 해?!;;; " " 뭐 어때. 저 새낀 좀 죽어봐야 돼. " -_-;;;; 무.. 무서운 시키.. ㅡㅡ;;;; 화장실로 날 끌고가던 녀석은 웃으며 말했다. " 걱정 안 해도 되겠네. " " 뭐.. 뭐가..;;; " " 이율형한테 죽을 만큼 사랑 받고 있구만. " " 뭐.. 뭐가-!!///// " " 아~ 부럽다. 저런 끝내주는 킹카가 애인이라니. " " /////// " " 밤도 외롭지 않겠어? " 제.. 젠장.. 동생 놈한테 놀림이나 당하고.. ㅠㅠ " 너.. 너도 태진이 있잖아!///// " " 아.. 저기 오네! 야!! " 에...? 화장실 앞에 다다른 순간 복도 끝에서 커다란 실루엣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내 어깨에 손을 걸치고 있던 열무 녀석이 크게 팔을 흔들며 소리친다. " 여기!! " 잠시 후 바로 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몰라볼 정도로 남자다워진 태진이었다. 정말 1년 전보다 키가 많이 자랐다. " 안녕하세요. " " 아.. 안녕.. " 이젠 깡패시키랑도 삐까하겠다. 시원스러운 얼굴 위에 선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 야. 우리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갈 테니까 너 저기 서클룸 안으로 들어가서 이율형 좀 말리고 있어. " " 뭐..? " " 빨리 안가면 살인 난다. ㅡㅡ " " 알았어. " 태진이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복도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경쾌한 구두 굽 소리가 복도 가득 울려 퍼진다. " 야.. 우리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 " 세수부터 해. 그리고 제발 이쁜 얼굴 함부로 굴리지 좀 마. ㅡㅡ++ " 녀석은 상냥하게 내 코까지 풀어주며 세수를 시켜줬다. ㅡㅡ;; " 내.. 내가 할 수 있.. " " 가만히 좀 있어! " " 그.. 그치만..;;; " " '흥' 해! " ㅡㅡ;; 녀석의 강압적인 태도에 일단 '흥'은 했지만..;;;; 어쩐지 뭔가 잘못된 것 같은.. -_-;;; 거울에 비춰진 퉁퉁 부운 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한숨짓는 나였다.;;;; 으헉!!!! =0=;;; " 으.. 윽.. " 바닥에 쓰러진 채 울먹이는 류세이와 두 사람의 만류 끝에 겨우 주먹을 거둔 깡패시키. 태진과 리더시키는 녀석의 팔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이율형! " 뒤에 따라온 열무 녀석이 문 앞에 서서 소리쳤다. 그제서야 깡패시키가 이쪽을 바라본다. " 그쯤 해요. 이제 정신 차렸겠죠. " " ....... " " 형 얼굴도 많이 가라앉았으니까요. " 녀석이 내 얼굴을 가리키며 싱긋 웃는다. 그래.. 얼굴 가라앉은 것까진 좋다 이거야. 근데 이 코는-!?!? 이 시키.. 코 풀어준다면서 이 꼴로 만들어놓다니!! 얼마나 세게 쥐었으면 이렇게 빨개졌냐고오--!!!!! 코 두 번 풀다간 루돌프 되겠다!! ㅠㅁㅠ 나는 벌개진 코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열무를 바라보던 깡패시키가 내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피식 웃는다. 이.. 이 시키-!!! 웃지 말란 말이다!! =ㅁ=++ " 야! 뭐.. 뭐가 웃겨-?!! ++ " " .....쿡.. " 목석 같은 놈이 웃자 모두가 놀란 얼굴로 시선을 집중한다. 바닥에 주저앉아 코피를 닦던 류세이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긴.. 이 시키는 평소에 잘 웃지를 않으니..;; " 야.. 이리 와. " 깡패시키가 웃으며 날 부른다. " 왜.. 왜..? ㅡㅡ;; " " 빨리 와 봐. "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쭈뼛쭈뼛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녀석이 살짝 몸을 움직이자 태진이와 리더시키가 손을 풀어준다. " ...큭.. " 가까이로 다가가자 녀석이 다시 웃기 시작한다. ㅡㅡ++ 이렇게까지 웃는 건 나도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열무와 태진이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깡패시키는 잠시 웃더니 손을 뻗어 내 볼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_-;; " 야! 아.. 아퍼엇!! >0< " " 가만히 좀 있어. " " 하.. 하지마아.. ㅠㅠ " " ....... " 나쁜 시키.. 내 볼이 네 장난감이냐-!! ㅠㅠ 계속해서 내 볼을 잡아당기던 녀석은 갑자기 날 와락 끌어안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 씨발.. 절라 귀엽네. " " -ㅁ-;;; " 흘끗 고개를 드니 다행히 나 외엔 아무도 못 들은 모양이다. ㅇㅁㅇ;;; 아니.. 그.. 그보다도 어서 이 손을 풀란 말이다! 다들 쳐다보고 있는데..;;; >ㅁ 1. 이름. 나이. 가족 관계. 키&몸무게 - 강이율. 만 19세. 2남 1녀중 차남. 187cm, 75kg. 2. 피아노 실력과 특별히 좋아하는 곡. (욕쟁이 꽃수 길들이기 초반에 언급된 바 있음) - 칠만큼 친다. 좋아하는 곡은 존 베리의 Somewhere in Time. 3. 열매를 보면 드는 생각? - 아방함. 다혈질. 재미있다. 귀엽다. 괴롭히고 싶다(!) 4. 이류를 보면 드는 생각? - 죽도록 패고 싶다. (-ㅁ-;;;) 5. 만약 열매 외의 다른 인물과 엮어진다면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작가를 포함(강조) - (불쾌하다는 듯 쳐다보며) 없다. " 야. 너 진짜 미팅 안 할래? " " 안 한다니까. " " 진짜 끝내주는 퀸카만 나온다는데? " " 됐어. ㅡㅡ " 끈질기게 달라붙는 이 녀석은 같은 과 친구인 연보라. 나도 남의 이름 갖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 녀석 이름도 참 어지간하다. 사내 녀석 이름이 연보라가 뭐냐.. ㅡㅡ;; 처음 이 녀석의 이름을 듣고 어찌나 웃었던지.. 그도 그럴 수밖에.. 이 녀석은 자타가 공인하는 근육맨이니까.. -_-; " 야. 너 가면 인기 많을텐데. " " 나 지금 어디 좀 가봐야 하니까 나중에 보자. " " 야! 국. 문. 과. 의. 아. 도. 니. 스!! " " 입 닥쳐!! =0=++ " 나는 크게 한 번 소리치고는 그대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놈의 헛소리 때문에 다들 한번씩 날 쳐다본다. ㅡㅡ; 으으.. 빨리 오늘 하루가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서클실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게.. 아직 아무도 안 온 모양이다. 그럼 쪽지라도 남겨놓고 가야.. 나는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대충 노트 한 장을 부욱 찢으려는 찰나.. --!! 희미하게 시작된 피아노 소리가 점점 빨라지며 환상적인 선율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잠깐 들었지만 분명 범상치 않은 실력가라는 걸 알겠다. 나는 조심스레 노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갔다. 서서히 커지는 피아노 소리가 유혹하듯 내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설마.. 그리고.. 설마가 사실로 바뀌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긴 손가락. 단단하게 바닥을 딛고 있는 긴 다리.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깡패시키다! 어.. 어째서 이 시키가 여기에? 아, 아니, 왜 피아노를..!? 고등학교 시절 소문으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목격을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전설의 주먹으로 불리웠던 저 손이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가만히 문 앞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음이 멈췄다. " 반했냐? " " !! " 녀석이 손을 멈추고 날 바라보며 말했다. 괜시리 열이 받을 정도로 여유로운 저 얼굴. -_-;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가며 짧게 대답했다. " 바.. 반하기는 개뿔..-_-;; " " ....... " " ....근데 너 꽤 치는 것 같다..?;;; " " 그래.. '꽤'.. "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 어쩐지 평소보다 눈이 부시다.;;; 나는 피아노 건반으로 시선을 옮기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 어릴 때 나도 배웠었는데.. " " .......어디까지? " 녀석이 놀랍다는 듯 날 쳐다보며 물었다. 어느새 등뒤에 선 녀석은 커다란 손을 뻗어 내 양손을 잡았다. " 바이엘 하권까지.. 였나.. " " ....... " 가까이 밀착된 녀석의 몸이 단단히 나를 지탱하고 있다. 왠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한동안 말없이 내 손을 잡고있던 녀석이 천천히 피아노 건반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 긴장풀어. " " 뭐.. 뭐가-!!//// " 내가 소리치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 너 지금 귀하고 목.. 빨개. " " /////// " 목덜미를 쓸어 내리는 생생한 손가락의 감촉. 놀라서 황급히 녀석의 손을 쳐내려는 순간 양 손목이 잡혀버렸다. 그야말로 뒤도 돌아볼 수 없는 상태. 녀석은 손에 힘을 실으며 입술로 내 목덜미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 야-!!!////// " " 할까..? 여기서. " " 미.. 미쳤..!! " " 싫으면 가만히 있어. " " 야!! 이제 다른 사람 올 시간이란 말이야!;;; " " ....... " 으악~!! 귀 물지 말란 말.. 읏..//// 내가 짧은 신음을 흘리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 너.. 여기 약하지. " " 하.. 하지마-!//// " 나는 황급히 무릎을 구부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길게 당겨진 팔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진행됐다간.. -ㅁ-;;; 나는 차가운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상태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버렸다. 으으.. 그냥 이대로 집에 가서 자고 싶.. -!!!! 황급히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4시다! 서두르지 않으면..!! =ㅁ=;;; " 야! 나 빨리 가봐야 돼! " " ......? " " 빨리 안가면 늦는단 말이야!;;; " " ......어디 가는데..? " " ....;;;;; " 선.. 보러 간다고 하면 무사할 수 있을..까..?;;;;;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손을 빼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ㅡㅡ;; 녀석은 더욱 강하게 내 손목을 압박하며 억지로 날 일으켰다. " 말 안 해? " 그.. 그냥..;;; " 젠장..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변명거리를 생각해놨어야 했는데..;;;; " 으..응.. 게임 cd 좀 보러..;; " " ㅡㅡ " " 요.. 요즘 새로 나온 게 많다고 해서.. 아.. 하하..;;;; " " ㅡㅡ^ " -_-;; 아무래도 안 통하는 것.. 같.. 지..? ㅡㅡ; " 솔직히 말 해. " " ;;;;; " " 빨리. " " ......화.. 안낼거지..?;;;; " " 봐서. ㅡㅡ " " =_=;; " 웬만하면 혼자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몇일 전, 열무 녀석이 날 찾아온 진짜 이유는 할머니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말씀이라는 게.. 빨리 결혼을 하라는 거였는데.. -ㅁ-;; 내가 전화로 정중히 거절했지만 어찌나 쇠고집이신지.. 이미 맞선 날짜까지 잡았다며 으름장을 놓으시는 거다. 상대는 할머니 친구분의 손녀딸로.. 이름은 양순자라나.. ㅡㅡ; 나는 끝까지 싫다고 버텼지만.. 선 안 보면 여기까지 찾아오시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그만 수락을 하고 만 것이다. ㅠㅠ 열무 녀석에게 입 단속을 부탁하며 여지껏 깡패시키에겐 비밀로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으로선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맞선 상대를 바람맞힐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할머니께서도 딱 한 번만 만나보라고 부탁(협박?)을 하셨으니..;;; 다시 시계를 보니 벌써 10분이 흘러가 있다. 빨리 집에 들러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가야 하는데.. ㅡㅡ;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입을 열었다. " 저기.. 있지..;;; " " ....... " " 나.. " " ....... " 제.. 젠장. 시간 없는데.. ㅠㅠ " 그.. 그러니까..;;; " " ....... " " 나.. 지금.. " " ....... " 에라~ 모르겠다--!! >ㅁ< " 나 지금 선보러 가-!! " " 뭐..? " 순간적으로 깡패시키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걷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소리쳤다. " 하.. 할머니가 딱 한 번만 만나면 된 다구! 안 그러면 집으로 찾아온다고 했단 말이 야-!! >ㅁ<;;; " " ....... " " 나.. 나도 가기 싫어. 그치만..;; " " 가지마. " " 뭐..? " " 가. 지. 말. 라. 고. " 헉..;;;; 고개를 슬쩍 든 나는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황급히 몸을 웅크렸다. 저 눈빛 좀 봐라.;;; 잘못 했다간 살인나겠다. =0=;;;; " 누가 멋대로 선 같은 거 보래!? " " ....;;;;; " " 죽을래? " " ;;;;;;;; " 야.. 지금 그 얼굴로 말하니까 장난으로 안 들리는 거 알지? ㅡㅡ;;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슬금슬금 문 쪽으로 이-_-동했다. 꼼지락.. 꼼지락..;;; 턱---!!!! " 위 열매. 어디 가려고? " " ....그.. 그치만 늦으면..;;; " " ㅡㅡ " " 우리 할머니 무섭단 말야..;;; " " ㅡㅡ " " 그.. 그럼 네가 여장이라도 해줄 거야-!!?? >ㅁ<;;; " " ....... " " ;;;;;; " 화.. 났..을..려나..? -ㅁ-;;; 흘끗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녀석이 벽을 보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 야..;;; " " .....여장.. " 낮게 중얼거리던 녀석은 갑자기 핸드폰을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이진후냐? 너한테 맞길 일이 좀 있으니까 빨리 학교로 좀 와라. 너 누나있지? 누나 옷 몇벌만 가.. " 탁--!! 나는 재빨리 녀석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뚜-_-껑을 닫아버렸다. " 뭐 하는 거야? " " 보면 몰라? 뚜껑 닫잖아! 너 왜 쓸데없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래?! =0=;; " " 그럼 나더러 하라고? " " -_-;; " " ....... " 깡패시키는 긴 다리를 바닥 위에 쭉 펴며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의 살벌하던 표정대신 이번엔 고뇌에 가득 찬 얼굴이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 그냥.. 만나기만 하고 올게.;; " " ......너. " " 나 못 믿어? " 모처럼 진지한 얼굴로 묻자 녀석이 말없이 날 바라본다. 나는 양손으로 녀석의 얼굴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 차만 마시고 올게. " " 만나기만 하고 온다며? ㅡㅡ^ " " 야.. 돈 아깝잖냐.. ㅡㅡ;; " " ㅡㅡ++ " 깡패시키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단단한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긴다. 어.. 어우야~ >ㅁㅁ< " .......쿡.. " " >ㅁ<;;;;; " 자.. 잠깐! 이 목소리는..!!;;;;;; " 뭐하고 있는 거냐? 이런데서. " 긴 다리를 굽혀 내 앞에 앉은 녀석은 휙하고 토끼머리를 들어올렸다. 순간 햇볕이 강렬하게 쏟아진다. 그리고.. 그 눈부신 햇살 사이로 토끼 머리를 손에 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깡패시키가 보였 다. -ㅁ-;; 쪼.. 쪽팔려어어어어~~ ㅠㅠ 어째서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을 때마다 녀석은 내 앞에 나타나는 걸까! 대충 시간 때우다가 끝내고 집에 가서 통닭을 시켜 먹으려했던 나의 계획은 이대로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어째서 이노무 깡패시키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냐고-!! ㅠㅁㅠ 잠시 후 내 위로 길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깡패시키가 토끼머리를 내 손에 쥐어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 뭐하는 거야? " " ...보.. 보면 몰라!! >ㅁ<;; " 아아.. 그렇지 않아도 털가죽 때문에 더워 죽겠는데 쪽팔려서 온 몸이 녹을 것만 같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재가 되어 버렸으면.. ㅠㅠ 주위에 웅성이던 관객들이 진지한 눈으로 우리들을 관-_-전하고 있다. 여자들의 시선은 전부 깡패시키에게로 고정되어 있고 징그러운 사내녀석들은 날 보며 낄 낄대고 있다. ㅡㅡ+ 깡패시키는 말없이 날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곧이어 관객들 사이에서 떡대 한 놈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짙은 숯덩이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무섭게 생겼다. ㅡㅡ; 내 옆에 있던 서있던 죠리퐁이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 너 강이율이랑 친했냐? " " 조.. 조금..;; " ....이 아니라 많이..;;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깊은-_-사이지.;;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보는 죠리퐁의 반짝이는 시선이 심히 부담스럽다. -_-; "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뻑간다. " " .....-_-; " 얼굴이야 뭐.. 조각이지. 성격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ㅡㅡ; 나는 천천히 토끼 머리를 들어 얼굴 위로 가져갔다. 뭐라도 뒤집어써야지 아무래도 이대로는 쪽팔려서 못 있겠다.;;; 턱-- 엑---?! 순식간에 토끼머리를 낚아채간 녀석이 가만히 날 내려다본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 역광 상태라 두 배로 음산하다. ㅡㅡ;; " 일어나. " " ...;;; " " 점심도 안 먹었지?" " .....;;; " 나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지만 계약-_-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신학부 선배가 당황한 얼굴로 나와 깡패시키를 번갈아보고 있다. 뭔가 말하려다가 깡패시키의 위압감에 눌려 입을 다문다. 역시 남편 하나는 잘 뒀다니깐.. >ㅅㅁ<;;;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잔뜩 쫄은 리더시키가 가만히 날 쳐다보다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뭐.. 뭐냐. 그 눈빛은! 설마 날 치겠다는 거냐! ㅡㅡ+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주먹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말없이 나와 깡패시키를 번갈아 보던 리더시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가.. 가져가라. " " ....... " 깡패시키가 상자를 받아들며 흘끗 날 쳐다본다. 방금 전의 대사와 안 어울리게 굉장히 진지한 얼굴이다. -_-;; " 이건 어디서 났냐? " " 우리 과에 누가 가지고 왔는데.. 귀엽길래 샀어. ㅡㅡ; " " ....... " " 귀.. 귀엽지 않냐? ㅇㅁㅇ;;;; " " ....... " " ....;;;;; " " .......그렇군. " 이.. 이봐..;; 전혀 안 귀엽다는 얼굴인데..? =_=;;; 나는 뻘쭘해진 채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깡패시키가 내 팔을 잡는다. " 어디 가려고? " " 다시 돈으로 바꾸게. ㅡㅡ; " " 됐어. " " 그치만 너 하나도 안 좋아하잖아. " " 좋아. 그냥 너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 " .....;;; " " 정 안되면 먹으면 되고.. " " =0=;;;;; " 나는 황급히 녀석의 손에서 거북이-_-상자를 빼앗아들며 소리쳤다. " 야! 내가 이미 이 녀석 이름까지 지어놨으니까 먹지마! >ㅁ<;;;; " " 이름..? " " 그.. 그래.;; " " .....뭔데..? " " ;;;;; " " ....... " " 유.. 율이..;;; " " 율이..? ㅡㅡ^ " " 그.. 그래!;;; " " ....... " " 그.. 그럼 난 약속이 있어서 이만.. ㅇㅁㅇ;;;; " 황급히 상자를 들고 문을 나서려는데 녀석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거 놓고 가. " " ....;;; " 먹는다는 놈한테 맡길게 따로 있지. =_=;;; 나는 상자를 세게 끌어안으며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 안 먹어. " " ...;;;; " " 농담도 못하냐? " " ...;;;;; " " 그나저나 약속이라니? " " ...;;;;;;; " " 야.. ㅡㅡ+ " 깡패시키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진다.;; " 경문이가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고 해서.. " " .....이류 자식은? " 이.. 이류자식..;;; " 안 와.;; " " ....... " " ㅡㅡ;; " 뭐냐.. 그 침묵은.. ㅡㅡ;;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깡패시키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더니 옆방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직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으로 끌려온 나는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벽과 녀석 사이에 낀 꼴이 되고 말았다. 긴 그림자가 내 위로 음산하게 드리워진다.;;; " 왜.. 왜 그래..?;;; " " ....... " " 정말 안 만난다니깐..;; " " ....... " " 이류는 나랑 별로 친하..읍! " 읍..;; 으으읍--!!! ㅇ(>ㅅ<)ㅇ 벽에 밀착된 채 열심히 버둥거려보지만 전혀 소용이 없다. 내 턱을 감싸쥔 손에 실린 힘이 장난이 아니다.;;; 또다시 산소부족 상태에 직면하는 위기가.. =ㅁ=;;;; " 으으읍~~;;;; " " ....... " " 으으으으으으읍!!;;;;;;; " 젠장.. 최장시간 기록이다.;;; 이건 정말 딥키스 정도가 아니다. 아주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 하...아.. 코.. 콜록콜록!!//// " " .....분위기 깰래? ㅡㅡ+ " 시끄러-! 이 시캬! 넌 살인미수범(?)이야!! =0=++++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고르다가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쭈욱 빠져나간다.;;; 역시 3분은 무리였어.. ㅡ.ㅜ " 방금 건 거북이에 대한 답례다. " " ;;;; " " 늦지 않게 와. " " ......;;; "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일으켰다. 잠시 날 내려다보던 녀석이 천천히 밖으로 나간다. 에에.. 이 정도면 짧게 끝난 건가..;;;; 그나저나 저 녀석이 웬일로 같이 가겠다는 말을 안 한 거지..? ㅡㅅㅡ? 평소 같으면 당장에 따라 나섰을 텐데.. ㅡㅡa 나는 녀석이 떠난 자리에 시선을 던진 뒤 천천히 서클룸 입구로 향했다. 류세이는 오늘도 지각인가.. 그 녀석 요즘 잘 보이지도 않고.. 혹시 나 때문에 피하는 건가.. 드럼을 보니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원래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가방을 걸쳐 매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 아.. 아니야! " 엥..? 이건 리더시키의 목소린데..? " 아니라고...? 그럼 내 귀가 잘못된 건가? " " 그.. 그건.. " " 아까 분명히 들었어. 네가 녀석한테 했던 말. " !? " 상관 있지. 난 너한테 관. " " !! " " 그게 무슨 뜻인지 좀 설명해 주실까..? " 깡패시키의 음산한 목소리에 굳어버린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목소리가 나는 방으로 다가갔다. 아아.. 아무래도 팀 해체 위기다. ㅡㅡ;;;; " 경문이냐? 응. 나 좀 늦을 것 같은데.. 응.. 알았어 그럼 1시간 후에 보자. " 일단 경문이와 전화통화를 끝낸 뒤 나는 슬금슬금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흘끗 고개를 내밀어 방안을 살피니 거북이-_-상자를 손에 든 채로 어둠의 오오라를 내뿜 고 있는 깡패시키가 보인다. 그 앞에는 잔뜩 굳은 얼굴의 리더시키가 고개를 숙인 채 서있다. 잠시 후 리더시키가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말했다. " 미안하다. " " ......." " 나.. 그 녀석 좋아해. " !!!!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맨날 트집 잡아서 괴롭히더니 그럼 그게 다 애정표현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깡패시키한테 내놓고 고백을 하다니! 모델 누님 사건(?)이 바로 이틀 전의 일인데 또 다시 이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댔다.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잡겠다.;;; 괜히 함부로 나섰다간 일만 커질 것 같.. " 그런 멍청한 녀석 어디가 좋은데? " 빠. 직. -_-++ " 그 멍청함이. " 빠. 지. 직. =_=++++ " 멍청함이 좋다니.. 취향 한번 특이하군 그래? " " 그러는 넌? " 잠시 뜸을 들이던 깡패시키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 뭐.. 나도 그 멍청함에 반해버렸지. " 아니..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0=++++ " 야-!!! 지금 누구보고 멍청하다는 거야!?! 내가 어디가 멍청해?! 나 고1때 아이큐 검사 해서 124 나왔어!! 숨은 그림 찾기랑 가로세로퍼즐도 잘 하고 미이라 게임도 끝판 깼고 기억력은 나쁘지만 순간적으로 암기하는 건 자신 있다! 자꾸 나보고 멍청하다고 하는데 그러는 니들은 얼마나 똑똑한데??! 니네들 나보다 똑똑해-??!! =0=++ " " ....... " " ....... " 헉.. 헉.. 헉.. " ....... " " ....... " 헉.. 헉..;;; " ....... " " ....... " 헉..;;;; 뭐.. 뭐냐..;;; 이 죽음과도 같은 침묵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드니 두 녀석의 시선이 느껴진다.;;; 깡패시키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 너 안 갔냐? " " 하.. 한 시간 뒤로 미뤘다..! -ㅁ-;; " " ......어디부터 들었어? " " .....;;;; " " ......." " 처.. 처음부터 다..;; " 나는 짧게 대답하며 쭈뼛쭈뼛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깡패시키가 거북이 상자를 내려놓으며 비스듬히 책상에 기대선다. 리더시키는 시뻘개진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젠장.. 막상 듣고 나니 시선을 못 맞추겠다.;;; " 야.. 나는..;; " " 알아. " " ! " 리더시키가 내 말을 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굳은 얼굴이 어쩐지 애처로워 보인다. 하지만 깡패시키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무섭다. ㅡㅡ; 잠시 뜸을 들이던 리더시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알고 있어. 너희 둘 관계. " 과.. 관계..-_-; " 난 그냥.. 내 감정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야. " " ....... "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모습.. 당황스럽다.;; 깡패시키는 말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대답은 안 해도 돼. 알고 있으니까. " " 허.. 허봉팔..;; " " 하지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네 애인한테 먼저 들킬줄은. " 애.. 애인이라니..///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쑥스럽..//// 흘끗 고개를 돌리니 깡패시키가 어느새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와 있다. 헉.. 인기척도 없었는데.. ㅇㅁㅇ;;;; " 고백이 목적이었다면 그걸로 끝내. " 녀석이 리더시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긴 손가락이 책상 위에 살짝 걸쳐져 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은 손이 참 예쁘다. " 대답을 알고 있다니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만약 허튼 소릴 지껄였다면 지금쯤 이 바닥 위에 누워 있겠지. " " ;;;; " 저런 말을 웃으면서 하다니..;;; 역시 뼛속까지 깡패시키다. ㅡㅡ;;; 뭐.. 힘든 얘기를 대신 해주니 나로선 고맙지만..;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깡패시키의 말을 듣던 리더시키는 몇 분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위 열매. " " .....? " " 행복해라. " 뭐냐.. 그 대사는.. -_-;; 멋있는 척 온갖 폼을 잡으며 날 바라보는 리더시키.. 급기야는 윙크까지 날린다. =0=;;; " 강이율. 이 녀석 잘 부탁한다. 너라면 믿고 맡길 수.. " " 신경 끄고 니 할 일이나 해. " 깡패시키가 차갑게 대답하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날 바라본다. 무안한 듯한 표정 위로 시뻘건 빗금 표시가..;;; 어디서 주워들은 건 또 있어 가지고.. ㅡㅡ; 잠시 얼굴을 붉히던 리더시키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머리가 거의 허리까지 내려온다.; 개인적으로 긴 머리를 좋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자에 한해서다. 머리 긴 남자는 좀.. ㅡㅡ; 뭐.. 나도 그다지 짧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거의 귀가 덮힐 정도니까.. 사실 갈색으로 염색하고 싶었는데 깡패시키가 말리는 바람에 그냥 이대로 살고 있다. 녀석의 말로는 검은머리가 잘 어울린다나.. ㅡㅡa 깡패시키가 좋아하는 색은 블랙계열.. 그래서 그런지 입고 있는 옷도 대부분 그런 색이다. " 빨리 안가도 되냐? " " 어..? " 문득 녀석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지나가 있다. 아직 늦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널널하게 출발하는 게 좋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녀석을 쳐다봤다. 녀석의 시선은 책상 위에 고정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책상 위에 올려진 거북이-_-상자에..;; 우두커니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가만히 녀석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 거북이한테 반했냐? ㅡㅅㅡ? " " .......쿡.. " " 사실 두 마리 사려고 했는데.. 한 마리가 먼저 팔려서 이 녀석밖에 못 샀다. ㅡㅡ " " ....... " " 이거 마음에 든다고 하면 한 마리 더 사다줄게. " " ....... " "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금.. " 뭐.. 뭐냐! 엉덩이에 닿는 이 감촉은-!! =0=;;; 당황한 나는 황급히 엉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역시나 긴 손가락이 잡힌다.;;; " 야..!;;; " " .....너 또 살 빠졌냐? " " 어..? 어...;; " " 얼마나? " " 2키로..; " 잠시 날 내려다보던 녀석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 너 지금 몇 키로야? " " 5.. 55키로 던.. 가..? ㅡㅡ; " " ....... " " ...;;;; " 녀석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혼신의-_-힘을 다해봐도 소용이 없다.; 완전히 촥 달라붙은 손은 꿈쩍도 안 한다. ㅡㅡ; " 야..;;; " " 오늘 나가면 오경문이랑 잔뜩 먹고 와. " " 어..?;; " " 이렇게 말라서 할 수 있겠냐? " " 하.. 하다니 뭘..?;;; " 전혀 짐작이 안가는 건 아니지만.. ;ㅁ; 녀석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기 쪽으로 날 바싹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 " 그거 말야. 섹.. " " 아아~~! 그.. 그거??!!;;;;;;;; "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그런 야시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이 시키는 도대체.. ㅡ_ㅡ;;;; " 야! 나 그.. 그만 간다! >ㅁ_ㅁ< " " 그 말. 이율이한테 전해주지. " " >ㅁ<;;;;;; " 젠장!! 더러워서 안 한다! =0=++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평소 깡패시키한테도 안 부리던 애교까지 부려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ㅁ=++ 위 열매 큐피드 변신 프로젝트고 뭐고 다 때려치울 테다! 나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녁이라 그런지 좀 쌀쌀하다. 몇 분을 그렇게 뚱하게 있는데 문득 경문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았어.. 가자.-_- " " 정말-?? +0+ " 그래.. 나 철새다. ㅡㅡ; 겨우겨우 찾은 커피숍 'rucy'는 상당히 크고 깔끔했다. 경문이에게 단골인 척 했는데 들통 안나려고 어찌나 노력을 했는지..;; 다행히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몰려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니 단아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슬쩍 주위를 살피니 우리 빼고 다 커플이다. ㅡㅡ; 경문이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 깨끗하네. " " 그.. 그러게.. " " 그러게라니.. 너 여기 단골이라며? " " 어.. 그렇지..;; " 내가 당황하며 대답하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이 녀석 대학 가더니 많이 예리해졌다. ㅡㅡ;; (니가 멍청한 거야-_-;) 그리고 잠시 후.. 말없이 창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주문하시겠.. " " !! " " 열매..?! " 오오!! 주인공 등장이다!! +ㅁ+ 이제 리얼하게 연기만 마치면 1단계 성공이다. " 아앗! 네가 왜 여기에..?! 우아! 진짜 반갑다! 이런 우연이!! 세상 참 좁다. 그치? 경 문아?! " " -_- " " =_=;; " 여.. 역시 난 연기가 안 되는 것인가..;; 솔직히 나라도 안 믿긴 하겠다만.. -_-;; 경문이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짧게 말했다. " 위 열매.. " " 아.. 아니 난..;; 잠시 후 추궁받고 있는 날 내려다보던 이류가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슬쩍 고개를 드니 눈이 마주친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게 웃고 있다. " 오랜만이야. " " 어.. 응..;; " " ......경문이도. " " .....그래.. " " .....;;;; " 그야말로 시베리아 한 복판이다.;; 큐피드 화살 쏴보기도 전에 얼어죽겠다. -_-;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너 언제 끝나? " " 10분 있으면 교대하긴 하는데.. " " 그럼 우리랑 같이 영화 보러 갈래?? " " 위 열매!! " 경문이 녀석이 황급히 내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난 간단히 녀석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냥 헤어지기는 그렇잖아? " " .....그런가.." 그렇게 말하며 흘끗 경문이를 쳐다본다. 경문이는 삐졌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다. 쫌-_-생이.. 나는 속으로 중얼대며 메뉴판을 들었다. 뭐.. 볼 것도 없지만.. ㅡㅡ; " 난 우유. -_- " " ...... " 이류 녀석이 짧게 웃더니 메뉴 판을 받아든다. " 경문아.. 넌? " " ....... " 여전히 말이 없는 경문이 녀석..;; 이류가 무안한 듯 시선을 옮긴다. 젠장.. 초반부터 이러면 심혈을 기울인 내 프로젝트가..;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 녀석도 우유. ^^ " " 누가 우유야!!? =ㅁ=++ " " ....... " " .......난.. " " ....... " " .....코.. 코아.. ㅡㅡ; " 푸훗.. 나름대로 어른인 척 하더니 역시.. ^^;; 이류녀석은 희미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한 뒤 프론트로 향했다. 경문이가 빨개진 얼굴로 날 쳐다본다. " 왜.. 왜 그래..?;; " " 너.. " " 난 그냥..;;; " " ......고마워. " " 에..?! " " 고맙다고!-ㅁ-/// " 황급히 홍당무가 된 얼굴을 돌리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녀석. 오늘따라 귀엽구만.. ^^ 뭐.. 과정이야 어쨌든 이 정도면 1단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 잠시 후 나는, 따뜻한 우유를 들이키며 제 2단계 구상에 착수했다. +_+ " 뭐 볼래? " 극장에 도착한 우리는 매표소 앞에 서서 간판을 훑어보며 고민에 빠졌다. 종류는 세 가지. 액션. 공포. 로맨틱 코미디. 턱시도 맨. 핸드폰.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_-;) 잠시 망설이던 경문이가 먼저 말했다. " 난 핸드폰. "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공포 물을 좋아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류는 말없이 팜플렛을 뒤적이고 있었다. " 너는..? " " 턱시도 맨. " " 음.. " 벌써부터 의견 차이라.. 그냥 이대로 두고 가도 되는 걸까.. ㅡㅡ; 나는 몇 차례 중재를 시도했지만 두 사람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의외로 고집이 세다. -_-; " 그냥 턱시도 맨 보자.;; " " 싫어. ㅡㅡ " 경문이놈이 차갑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유.. 이 자식 정말.. -ㅁ-+ " 그럼 핸드폰 볼까..? " " 싫어. " -ㅁ-++ 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본 뒤 빼액 소리쳤다. " 그럼 어쩌라고!! 각자 보고 모일래?! " " .....그것도 괜찮겠네. " " ㅡㅁㅡ++++++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그대로 뚜벅뚜벅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두 사람이 황급히 뒤따라 나온다. " 열매야! " " .....+++ " 쳇.. 누가 대답할까 보냐!! 이노무 쫌생이들..! ㅡ0ㅡ+ " 야! 어디가?! " " 됐어. 쫓아오지마. " " 야! 그냥 가면 어떡해?? " " 쫓아오지 말라니깐!! -ㅁ-++ " 나는 거리를 넓힌 뒤 뒤를 돌아보며 빼액 소리쳤다. (누구더러 쫌생이라고..?-_-;) !! 에...? 뭐라는 거지..?? 두 녀석이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는다. 커다래진 눈으로 뭔가를 열심히 말하는데..;;; 갑자기 경문이가 내게로 달려온다. 어쩐지 도망쳐야 할 것 같은 생각에 황급히 등을 돌린 나.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끼익----- 나는 엄청난 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 던져진 몸. 아아.. 의식이 멀어진다... " 음.. " 새하얀 천장..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 내 시선이 멈춘 곳은 흐릿한 실루엣이었다. " 괜찮아?! 정신 들어?! " " ...아.. " 경문이가 울먹이며 내 손을 잡았다. 옆에 선 이류가 그런 경문이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있다. 에헤.. 드디어 화해했나.. 나는 천천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문이가 소리친다. " 멍청아! 앞도 안보고 뛰면 어떡해?! 차에 치이면 어쩌려고!! " " ....... " " 이율이 평생 홀아비 만들래?! " " -ㅁ-;;; " 뭐.. 뭐냐.. 그 대사는.. ㅡㅡ;; " 나.. 어떻게 된 거냐..? " " 차랑 박.. " " =0=;;; " " 을 뻔했어. 어떤 아저씨가 밀지 않았으면. " 하.. 하.. 쫄았다.. =ㅁ=;;;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 그럼.. 기절만 한 거냐..;; " " 그래. " " 그 아저씨는..? " " 그냥 가셨어. " 에에.. 고맙다는 말도 못했는데.. -_-a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 그냥 있어. 이율이 올 거야. " " ! " 뭐...?! " 뭐.. 뭐라고!!??;;;; " " 너무 놀라서.. 연락해 버렸어.. " " =0=;;; " 커...헉..! 그 녀석이 이류랑 만난 걸 알면..!!;;;;; 나는 황급히 신발을 신고 가방을 집어들며 말했다. " 야! 이류! 너도 빨리 피해!!;;; " " 왜..? " "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 " 젠장.. 겨우 기절한 정도로 연락까지 하다니.. 오경문. 이 밥튀-!! ㅠㅠ " 병원비는..? " 나는 황급히 지갑을 꺼내며 물었다. " 됐어. " " 아니.. 그래도..;; " " 이율이 부른 책임도 있으니까.. " =_=;; 젠장! 넌 병원비로 끝나지만 난 이제 어쩌란 거냐!! 걸리면 절대 그냥은 안 넘어갈텐데.. 난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단 말이다!! ㅠ0ㅠ " 야! 그냥 가면 어떡해? " " 몰라! 나 먼저 갔다고 그래! 이류 너도 그 녀석 오기 전에 빨리 피하고! " 나는 이류를 향해 소리치며 황급히 문으로 향했다. 잠시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 손바닥을 살피니 반창고가 붙혀져있다. 넘어질 때 까진 모양이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손잡이를 잡는 순간 벌컥하고 문이 열리며 그대로 머리가 부딪혔다. " 아.. 야야..ㅡㅁㅜ " 젠장.. 별이 다 보이네..;;; " 너.. " " !! " 문 틈 사이로 드러난 낯익은 실루엣. 근사한 저음.. 드..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ㅇㅁㅇ;;;;; 나는 굳은 얼굴로 녀석을 올려다보며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 와.. 왔어..?;;; " " ....... " 날 바라보던 눈이 옆으로 향한다. 금새 날카롭게 바뀌는 시선. 녀석의 시선을 따라간 자리엔 이류가 있었다. " 저.. 저기..;;; " " 오경문. 연락해줘서 고맙다. "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경문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게 웃었다. 젠장.. 심장 떨려서 미치겠다.. ㅠㅠ 잠시 후 깡패시키가 바닥에 시선을 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경문. 이류.. 먼저 좀 갈래? " " 아.. 그래..;;; " 헉..!! 얘.. 얘들아--!!!! =0=;;;; 두 사람은 흘끗 날 바라보더니 손을 맞잡은 채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합쳐진 두 사람. 이것으로 위열매 큐피드 변신 작전은 성공이다!! ......가 아니라!! 난 이제 어쩌라고--!! ㅠ0ㅠ 이것들아 니들만 좋으면 다냐!!!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더듬더듬 말했다. " 저.. 기.. 그러니까.. 그게..;;;; " " ....... " 서서히 내게로 다가오는 녀석. 단정한 얼굴 위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ㅁ-;;; 화났다. 이 녀석 지금 무지하게 화났다! =ㅁ=;;; 어느 정도 뒤로 물러서니 등뒤로 딱딱한 벽이 닿았다.;; 풍. 전. 등. 화-!! 오늘도 나는 또다시 그렇게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ㅠㅠ " 어디 설명 좀 해 주실까..? " " =_=;;; " 확연히 입가에 드리워지는 냉소. 평소에도 시니컬한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극에 달해있다.;;; 긴 다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녀석과 나 사이의 공간을 좁혀나간다. 녀석과 벽 사이에 갇힌 채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상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친 곳은? " " 아.. 안 다쳤어. 멀쩡해. ^^; " " 그래..? " 야.. 안 다쳤다니까 왜 인상을 찌푸리는 건데..? ㅡㅡ; 깡패시키는 살짝 고개를 돌려 얉은 숨을 내쉰 뒤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허억..;; 저 번뜩이는 눈빛을 봐라.;; 사람 한 둘은 죽이고도 남겠다. =ㅁ=;;; " 그래.. 난 그것도 모르고 사고까지 일으킬 뻔 하면서 달려왔다는 거군. " 에...?? " 겨.. 경문이가 자세히 말 안 해줬..어..?;;;; " " ....... " 야.. 그 침묵 진짜 무서워.. ㅠㅠ 잠시 후 날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율아.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열매가 교통사고가 났어. 일단 병원으로 옮기기는 했는데 의식불명 상태야. " " =0=;;; " 오경문! 내 이 자식을 그냥--!!! =ㅁ=+++ 그딴 소리로 이 녀석을 불러놓고 지는 이류랑 손 붙잡고 나가-??!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내 두 사람 콱 찢어놓고 말껴-!! =0=+++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깡패시키를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이마에 땀이.. 정말 열심히 달려온 모양이다.;; 다쳤다는 말에 정신 없이 달려온 녀석에게 이런 꼴을 보였으니.. 젠장.. 미안해서 죽을 것 같다. ㅡㅡ;;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했다. " 미.. 미안해..;; " " ....... " " 하지만 이류랑 만난 건.. " -!!!! " 읏...///// " " ....... " " 으.. 하.. 하지 마아..//// " 이 자식아 귀 깨물지 말란 말이다---!!! >ㅁ<;;;;; 마음 같아선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몸에 전혀 힘이 안 들어간다. 이미 내 몸의 전부(!)를 꿰뚫고 있는 녀석이기 때문에. 나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간단히 잡혀서 머리 위로 결박당 하고 말았다. " 야..;;; " " 시끄러워. " 정말 화났는지 얼굴엔 더욱 짙은 어둠이 깔린다.;;;; 잠시 후 내 귀에서 입을 뗀 녀석은 거칠게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순간적으로 놀란 내 입에서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나왔지만 녀석의 손에 의해 막혀버렸다. " 버둥거리면 아플 거야. " " ! " 아.. 아플 거라니.. 그.. 그럼 역시..?!!;;;;;; 나는 황급히 몸을 돌리려했지만 강한 힘에 의해 다시 뒤집혔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 결국 뒤집혀진 거북이 꼴로 버둥거리고 있는 불쌍한 나.. ㅠㅠ 가만히 날 지켜보던 깡패시키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파도 원망하지 마. " " 야..! 시.. 싫어..!;;;;" " 문은 잠궈놨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헉..;;; 문은 언제 또 잠근 거냐.. ㅇㅁㅇ;;;;; 거칠게 벗겨지는 옷을 부여잡으며 나는 거의 징징대다시피 하고 있었다. 눈가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는 눈물을 가득 담은 채로 반짝이며 말했다. " 하.. 하지마.. 응..?? " " ....... " " (반짝반짝) " " ......유혹하는 거냐? " " =0=;;;;;; " 어.. 어째서 그런 결론이...;;;;;; " 알았어! 자.. 잘못했어! 그러니까.. " " ....... " " 그.. 그러니까.. 아프게 하지 마.. ㅠㅠ " 젠장.. 어차피 깔릴 거 그나마 이렇게라도..ㅠㅠ 순간적으로 내 팔을 잡고 있던 녀석의 손이 멈짓한다. " .......;;; " " ....... " " .......;;;; " " ......알았어. " 아아.. 다행이다. 이것으로 거친 플레이(?)는 없을 테니..ㅠㅠ 깡패시키는 방금 전과 달리 부드러운 손길로 내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느새 알몸이 된 나는 하얀 시트를 꽉 움켜쥔 채로 짧은 숨을 삼켰다. 분명 여름이라 후끈한 날씨인데도 몸에 닿는 방안의 공기는 매서울 정도로 차갑다. " 앗.. " 녀석이 단단하게 내 팔을 잡고 뜨거운 혀로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쾌감에 머리털이 다 일어설 것만 같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혀의 근육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한참을 상체에 머물던 녀석은 천천히 입을 떼며 속삭이듯 말했다. " 다리 좀 벌려봐. " 아아.. 언제 들어도 민망한 말이다. ㅡㅁㅡ//////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살짝 다리를 벌려주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는지 녀석이 양손으로 내 다리를 잡고 거칠게 사이를 넓혔다. 새빨개진 얼굴로 애써 외면해보지만 서서히 안을 파고드는 긴 손가락의 느낌이 너무 적나라하다. " 아파? " " 아.. 아니../// " 아직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다. 이물감이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최대한 소리를 낮추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이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나도 장담할 수가 없다. 아니나다를까 안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나자마자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 오기 시작했다. " 아.. 아파../// " " ....... " 나는 목을 뒤로 젖히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한여름의 열기까지 더해져 온 몸은 달아오를 만큼 뜨겁다. 내 위로 몸을 숙인 녀석의 표정이 진지하다. " 으... 읏.. "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된 행위이건만 통증은 언제나 생소하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고통에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잠시 후 어느 부분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나는 양손으로 녀석의 목을 끌어안으며 깊은숨을 삼켰다. 녀석은 그제서야 다리 사이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 하아.. "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몸이 나른해진다. 역시 여름날씨란 굉장하다. 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내 허벅지를 스윽 쓰다듬는다. " 윽..//// " " 집중해. " " ㅡ.ㅜ " 젠장.. 환자(?)를 상대로 이래도 되는 거냐?! 오경문..! 이 원수는 반드시 갚아주마-!! =ㅁ=++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오.. 오늘은 여기까지!!;;; " " -_-^ " " 다음에 또..;;; " " 하드 플레이로 갈까? ㅡㅡ^ " " =ㅁ=;;; " 나는 누운채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하드 플레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어감이 좋지 않다.;;; 이 녀석이라면 내가 모르는 이상한(?) 테크닉도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 혹시라도 무지 아프게 할 수 있고..;;; 내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자 녀석이 사람 여럿 죽이고도 남을 미소를 짓는다. " 말만 잘 들으면 세 시간 안에 끝내주지. " " !! " 뭐...!!? 세.. 세 시간-------!!! =0=;;; 네가 정녕 인간이냐!!!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녀석의 한 손에 벌러덩 눕혀지고 말았다. -_-;; 날 깔고 앉은 녀석의 표정이 여유만만이다. " 어.. 어떻게 세 시간이나!!;;; " " 그동안 쌓인 게 많아서 한 두번으로는 해결이 안 돼. " " 그.. 그럼 혼자 해결하면 되잖.. " 커.. 커헉---!!;;;; 저 살벌한 눈빛을 봐라..;; 더 이상 거부했다간 당장에 땅에 묻을 기세다. =0=;;; " 지금 이 나더러 혼자 해결을 하라고..? " 앞의 '이'는 뭐냐.. -_-;;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하얀 커튼 자락을 만지작댔다. 내 몸을 덮은 그림자가 문 앞까지 길게 드리워져있다. " 이건 장식용이냐? " 윽..!! >ㅁㅁ<;;;;; 덕분에 뒤통수에 닿는 시선이 두 배가 됐다. 이러다 뚫어지겠다. 젠장.. ㅠㅠ " 죄송하지만 전 이대로 끝낼 수 없어요. " " ....... " " 제가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오빠도 안다면 이러지 못할 거예요.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님의 등뒤에 숨어있더니 어디서 저런 용기가..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깡패시키에게 고정되어있다. 역시 보통이 아닌 여자다. 잠시 후.. 침묵을 지키던 공주님이 갑자기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 그 쪽 친구 분은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 " 친구..? " 깡패시키가 날 내려다본다. " 미안하지만 이 녀석은 친구가 아니라 내 애인이야. " 녀석의 단호한 대답에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녀석의 체온이 닿는 자리가 불에 데인 듯 뜨겁다. " 내가 별 다른 감정 없이 사내녀석이랑 같이 살 것 같아? " " ....... " 슬쩍 보니 공주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다. 충격이 심한 모양이다. 전혀 눈치를 못 챘던 건가.. 나는 말없이 깡패시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진지한 눈빛이 곧이어 내게로 향한다. 난 우물쭈물대며 말도 잘 못했는데.. 이 녀석은 단 몇 마디로 상황을 정리한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내 곁에 있는 녀석. 한결같이 단정한 얼굴.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 시원한 향수 냄새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진 시선.. 나와 다르게 하루하루 어른스러워지는 녀석이 부럽고.. 또.. 좋다../// " 전 여기에 있을 거예요. " " 정현아. " " 여기서.. " 독한 마음을 먹었는지 살기까지 띄고 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는 천천히 날 내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쓴웃음을 짓는다. 화가 났다기 보다.. 어쩐지 내게 미안해하는 듯한..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내 손목을 잡은 녀석의 손에 힘이 실린다. 그리고 잠시 후.. 녀석이 공주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좋아. 마음대로 해. " " ......! " " 정 그렇다면 내가 직접 포기하게 만들어 주지. " "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 " 그래..? 어쨌거나 침실 가까이엔 접근하지 말아 줘. 방해되니까. " 으앗..;;; 뭐.. 뭐냐 방금 그 대사는..!!///// 깡패시키와 공주.. 두 사람 사이에 낀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그대로 녀석의 등에 묻어버렸다. 정말.. 앞날이 걱정된다.. ㅠㅠ " 숙제는 끝냈어? " " 응. " 나는 필통을 정리하며 자랑스레 노트를 들어보였다. 잠옷차림의 녀석이 말없이 웃는다. " 그럼 자자. " " 응. " 나는 천천히 얇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녀석이 내 옆에 누우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일 두 시 수업이지? " " 응.. " " 그럼 안 깨우고 나 혼자 갈테니까 더 자라. " " 응. ^^ " 나는 부비적거리며 녀석의 품안으로 들어갔다. 한여름이라 덥긴 하지만.. 이젠 아주 버릇이 되놔서 떨어지면 잠이 안 온다. -_-;; 나는 녀석의 팔에 감싸인 채로 멀뚱히 천장을 보며 말했다. " 야.. " " ....? " " 저기.. " " ....... " " 저기 천장에다가 야광별 붙여도 돼? " " -_- " 예전에 우리 집에서 살 때는 내 방에 도배를 했었는데.. ㅡㅡ;; " 난 어릴 때부터 별이 좋았거든.. " " ....... " " 그래서 비스무리하게라도 꾸며보려고 했어. " " ....... " " 가짜라도 일단 분위기는 나니까.. " " ....... " 뭐냐.. 이 침묵은..;;; 자나..? ㅡㅡ;; " 야.. 너 자? " " ......아니. " " -_-; " " 듣고 있으니까 계속 해. " 뭐.. 하긴, 이 녀석은 나보다 먼저 잔 적이 없지. 먼저 잠드는 건 항상 내 쪽이었으니까.. 나는 눈을 꿈뻑이며 말을 이었다. " 뭐.. 그냥 그랬다는 얘긴데.. 야광별은 역시 좀 그렇지..? 여자도 아닌데..;; " " ......아니. " " ....... " " 너다워서 좋아. " 나다워서 좋다라.. 일단 고맙긴 한데..;; 야광별 좋아하는 게 나답다는 건.. 칭찬인가..? -_-a 나는 말없이 눈을 꿈뻑이다가 녀석의 팔에 머리를 댔다. 그러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 저기.. 현아라는 애.. " " .....? " " 원래 성격이 저래? 공주야?;;; " " .....글쎄.. " 어이.. 글쎄라니..;; 약혼한 사이라며..?! -ㅁ-;;; " 별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 " " ....... " " 그보다.. 안 졸려? " " 응..? " " 잠 안 오면 그냥 밤샐까? " 헉..! " 아.. 아니! 졸려! 어우~ 졸려 죽겠네-!! ㅇㅁㅇ;;;;; " " 그래.. 그럼 빨리 눈감고 자. " " 그.. 그래야지..;;; " 나는 천천히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그리고.. 가장 평화로운 순간.. 나는 모험의 세계(!)로 떠났다. 사락- 응...? =_= 방금 무슨 소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락- 무슨 천 스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그리고 잠시 후 부스스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대로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길게 내려오는 칠흑 같은 검은머리, 달빛에 푸르게 반사된 창백한 얼굴.. 날 노려보는 듯한 커다란 눈동자..! 으..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나는 눈을 감은 채 비명을 질렀다. 바짝 굳은 몸은 조금도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 왜 그래-?! "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깡패시키가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 었다. " 귀.. 귀.. 귀.. 귀... " 아아.. 혀까지 굳었는지 말도 안 나온다. ㅠㅠ 나는 억지로 굳은 팔을 뻗어 녀석의 옷자락을 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스스로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다. " 귀.. 귀.. " " 저예요. " -!! 이.. 이 목소리는?! 깡패시키가 한 팔로 날 감싼 채 재빨리 스탠드를 켰다. 희미한 불빛이 주위로 퍼지자 누군가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나는 억지로 눈을 뜬 뒤 고개를 들었다. " 죄송해요. 무서운 꿈을 꿔서.. " 정현아다.;;; 하.. 하.. 하..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까지도 말이 안나온다. 그러니까 지금.. 무서운 꿈을 꿔서 이 방에 들어온 거란 말이지..? 그래.. 그러니까 무서운 꿈을 꿔서.. 무서운 꿈 때문에.. 나는 깡패시키의 팔 안에 몸을 기댄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젠장.. 그새 울기까지 한 모양이다.. ㅠㅠ 말없이 날 바라보던 깡패시키는 천천히 날 끌어안았다. 내 등을 다독이는 반복되는 리듬에 조금씩 몸이 풀리는 것 같다. 난 어릴 때부터 심장이 무척 약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곧 잘 놀라기 때문에 그 유명한 전설의 고향도 한 번 못 봤다. 언젠가 열무 녀석이 장난으로 날 놀래킨 적이 있었는데.. 심각하게 놀란 내가 몸이 뻣뻣하게 굳는 바람에 결국 앰뷸런스까지 불러야만 했다. 언제나 내가 가장 싫어했던 건 벌레와 귀신이었다. " 괜찮아? " " 으.. 응.. " " ......정현아. 네 방으로 돌아가. " " 오빠.. " " 돌아가. " 차가운 목소리..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녀석의 팔에 의지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정말 심장이 약하긴 한 모양이다. 겨우 이런 일에 이렇게까지 땀을 쏟다니.. " 따뜻한 물 좀 마실래? " " 아니... " " .......이번 일은 몇 일 안으로 내가 해결 할 테니까 걱정하지마. " " ....... "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옷자락을 잡았다. 침묵 속에 서서히 심장소리가 겹친다. 따뜻한 체온.. 한여름 밤의 해프닝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늦은 아침..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잘 잤어? " " 아.. " 평소답지 않게 여전히 잠옷차림인 녀석이 턱을 괸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 너.. 오늘 아침에 수업 있잖아..? " " 제꼈어. " " 어...?!;;; " 녀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흘끗 시선을 옮기니 대야와 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그.. 그럼..?! 허억..;;; 내 평생 깡패시키의 간호를 다 받아보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는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 고.. 고마워..//// " " ....... " 대답 대신 돌아오는 건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거친 손길. 녀석다운 대답이다. " 그런데 너.. 수업 빠져도 괜찮아..?;; " " 괜찮아. " 이 녀석 여지껏 수업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째 모범생 하나 망쳐놓은 듯한 죄책감이.. -_-;;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햇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부시지만 덕분에 마음은 안정이 된다. 어제 밤의 기억도 이미 대부분 상실됐다. 이럴 땐 붕어 기억력도 도움이 된다. ㅡㅡ;; " 더 잘래? " " 아.. 아니.. " " 그래.. 그럼 나가자. " " 응..? " 잠시 후 녀석이 옷장 문을 열며 덤덤하게 말했다. " 오랜만에 데이트나 하자. " " ;ㅁ; " 커튼 사이로 스며든 환한 햇살 속의 녀석이 그보다도 더 눈부신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열매 아니냐?! " " 안녕하세요. ^^ " " 그동안 얼굴이 안보이던데.. 이사갔니? " "아뇨. 대학 때문에 자취하거든요. " " 그래.. 그랬구나. " 나는 싱긋 웃으며 낡고 조그만 천막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 손짓을 하자 깡패시키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고급 승용차와 천막이라.. 확실히 매치가 안 되는 것 같긴 하다. ㅡㅡ;; " 어떤 걸로 줄까? " " '달'이요. " " 그건 이제 없어. " " 네..?! " 아니.. '달'이 없다니..;; 난 그것 외엔 뽑을 줄 모르는데.. -ㅁ-;;; " 그게 너무 쉬워서 다 뽑아버리잖냐. 그래서 없애버렸다. " " ;;;; " " '별'로 할래? " " ....네..;; " 설탕 듬뿍, 소다 약간.. 불 위에서 지글지글 녹아간다. " 뭐야? 이게? " 깡패시키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처음 보는 모양이다. 역시 부르조아는..;;; " 뽑기. 뽑기 몰라? 찍힌 모양대로 뽑으면 공짜로 또 주는 건데. " " ....... " " 나 중학교 다닐 때까지 이거 많이 했었어. " " .....맛있냐? " " 음.. 맛 보다는 재미지. 아슬아슬한 게 스릴 있으니까. ^^ " 오오.. 말하는 새에 따끈따끈한 뽑기 하나가 완성됐다. 나는 재빨리 손바닥에 올린 후 조심스레 끝 부분을 공략해나가기 시작했다. 파삭.. 파삭.. 어찌나 정신 집중을 했는지 눈이 다 아플 지경이다.;; 나는 남은 조각을 떼어내다가 흘끗 깡패시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이 진지한 눈빛으로 뽑기를 응시하고 있다.;;; " 너도 해 볼래..?;;; " " 됐어. " " 왜..? 재밌는데.. " 나는 조각들을 입안에 던져-_-넣은 뒤 손바닥을 털고 다시 뽑기에 집중했다. 확실히 '달'과는 차원이 틀리다. 과연 이걸 뽑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ㅡㅡ;; 파삭-- " 으악!! " 젠장.. 망했다..ㅠㅠ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아저씨 가까이로 다가갔다. " 왜 사람이 이렇게 없어요? " " 지금 애들 수업시간이잖냐. ㅡㅡ; " " 아.. 맞다. ^ㅁ^;; " 그러고 보니 나 대학생이었지..;; 나도 믿기지는 않지만 현실이다. -_-;; 잠시 후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간 근사한 목소리가 천막 안을 가득 메운다. " 저도 하나 주세요. -_- " " ;ㅁ; " 내가 녀석의 말에 놀라는 동안 낡은 국자(?) 위로 또다시 설탕이 뿌려졌다. " 학생은 열매 친구? 잘 생겼네!! " " ....... " " 내 평생 학생처럼 잘 생긴 사람은 처음 봤어. " 장사용 멘트인가 싶지만.. 아저씨는 평소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래된 단골인 나한테도 잘 생겼다는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나는 흘끗 녀석을 바라보다가 남은 조각을 아삭아삭 씹어댔다. 잠시 후 녀석이 천천히 무릎을 펴고 내게로 다가왔다. " 여긴 자주 왔어? " " 응. 꼬맹이일 때부터 다녔으니까.. " " ....... " 녀석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내 손에 남은 조각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오독거리는가 싶더니 금새 미간을 찌푸린다. " 왜..?;;;; " " .....써. " " 조.. 조금 그렇지..;;; " 그.. 그래도 난 맛있는데.. ㅡㅡ;; 나는 남은 가루를 입안에 넣은 뒤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깡패시키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 날 바라보고 있다. " 잘생긴 학생! 여기 다 됐어. " " 네. " 녀석이 짧게 대답하며 뽑기를 건네 받았다. 잠시 후 길고 곧은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며 파편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 가까이로 다가가 조심스레 뽑기 형성 과정(?)을 지켜봤다. 오오.. 역시 깡패시키답다고 해야 할까.. 손놀림 하나 하나가 예술이다. 섬세한 터-_-치와 강약의 힘 조절, 무게 싣는 방향과 위치 선정까지.. 한번도 안 해봤다는 말이 거짓말 같다.;; " 야, 너 진짜 처음이야? " " 그래. " " 근데 왜 이렇게 잘 하냐? -_-; " " 너랑 틀리니까. " " ㅡㅡ+ "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그대로 녀석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ㅡㅡ; 파삭-- " 윽.. " 보기 좋게 두 동강이 난 조각이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깡패시키는 말없이 손을 귀로 가져갔다. 긴 손가락이 귀를 만지작대더니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 위. 열. 매. " " 네.. 네가 먼저 잘못 했.. " 읏-!! >__ㅁ<;;;;; " 뭐.. 물에 빠뜨린 뒤 인공호흡 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 " " =0=;;; " 진심이다! 이 녀석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나는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살아야 한다고오오오오오~~~~~~~ 까짓 거 쪽팔림은 한 순간이다!;;;; " 키.. 키.. 요. " " ....... " " 키.. 키.. 주.. ..... 요..//// " " 키키주요? ㅡㅡ^ " 젠장..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한 거냐!! 대충 알아서 들을 것이지! =0=+ " 5 " " ! " " 4 " 헉..!! 팔이 풀리고 있다!!;;;;;; " 3 " " 키.. " " 2 " " 키.. 키스해 주세요오오오-!! >ㅁ_<;; (이 녀석-_-;)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깡패시키를 이겨(?)보겠는가..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 내가 간호해 줄까? >_< " " 됐어. " " 예전에 너도 나 간호해줬잖아. 자고로 사람이면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하는 거야. " " 사양하겠어. " " -_-; " 그 자식 거 참.. 말 한 번 정떨어지게 하네. -_-; 흥..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지!! 나는 녀석의 등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 매콤한 국 끓여줄까? " " 필요 없어. " " 그리고 서비스로 따끈한 꿀물까지 만들어줄게. " " ....... " " 대신 한 마디만 해봐. '형. 아.'라고.. >ㅅㅁ< -_-; 어이.. 거기 웃지 마라! =ㅁ=+ 그리고 마침내 tv 프로그램 하나가 끝나갈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45분이 지나있다. 집과의 거리를 계산해볼 때 상당히 빠른 기록이다. 그렇게도 깡패시키의 약한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걸까.. ㅡㅡ;; 나는 먹던 과자를 내려놓고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사이로 나타난 건 뜻밖에도 새하얀 털복숭이였다.;;; " 헉..! " " 귀엽지? " 개다-! 털이 보송보송한 북극곰 같이 생긴 개! 열무는 북극-_-곰을 끌어안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조금 더 자란 머리카락 때문인지 한 층 더 여자 같아 보인다. 그러고 보니 키도 더 큰 거 같고.. " 이게 뭐냐..? " " 개잖아. " " 그게 아니라.. " " 태진이네 개야. 이뻐서 대여 좀 했지. " 대여.. ㅡㅡ; 북극-_-곰은 제법 커다란 덩치에 비해 재롱이 심했다. 바닥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휭하니 어디론가 달려간다. 금새 부엌으로 자취를 감춘 녀석은 열무가 소파에 앉을 때까지도 나타나지 앉았다. " 이름이 뭐야? " " 아루미나. " " 저 덩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지 않냐? ㅡㅡ; " 그냥 북극곰이 낫지 싶다. " 근데 난 '멍돌이'라고 불러. " " 에..? " " 태진이네 집에선 아루미나로 통하지만 태진이 녀석과 나 사이에선 멍돌이야. " 어쩐지 '녀석과 나 사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군. ㅡㅡ;; 잠시 후 날 바라보던 녀석은 고개를 돌려 안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 자고 있는 거야? 지금? " " 응. " " 정말 아파? " " 아마도..;; " 솔직히 지금이라도 문을 열면 당장 뛰쳐나올 것 같다.;;; 나는 조심스레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예상과 다르게 잠들어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잘 생긴 이마를 드러낸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생소하다. 난 침흘리는 것까지 다 보여줬는데.. -_-; 약간 몸을 굽힌 상태로 어깨까지 이불을 덮은 녀석은 내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평소엔 금방 눈치챘는데.. 많이 아픈가..;; 천천히 손을 뻗어 이마에 대니 역시나 뜨겁다. " 병원 가는 게 날까.. " 나는 가만히 중얼거리다가 녀석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나까지 노곤해지는 것 같다. 잠시 그 자세로 있는데 등뒤에서 열무녀석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형. 국 끓이자. " " 아.. 그래. " 나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흘끗 깡패시키를 내려다보니 그 자세 그대로 자고 있다. 그야말로 허점 투성이다. 괜시리 장난 끼가 발동한 나는 녀석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녀석이 평소 나한테 자주 하던 행동이다. ㅡㅡ; 으음.. 너무 약했나.. 반응이 없군..;;; 그렇다면 머리를 땋아볼까..?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엌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창창창창창----!!!! =ㅁ=;;;; 뭐.. 뭐냐.. 이 불길한 소리는..!!;;; " 형! 어떻게 해! 멍돌이가 이율형 레포트에 오줌 싸놨어!!!! " =0=;;;;;;;;;;;;; 저놈의 북극곰 시키가 정녕 날 죽이려고 작정을 하고 온 것이냐아아아---!!!! 나는 황급히 건넛방으로 달려갔다. 내 시야에 들어온 방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이리저리 찢긴 종이와 멍돌이 쉬-_-야에 촉촉이(--;) 젖은 레포트 용지. 거기엔 선명하게 깡패시키의 학번과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젠장.. 저거 쓰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새운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는데.. 이제 나와 저 개쉐이의 운명은.. ㅠㅠ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짧은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 이거.. 중요한 거지..? ^^;; " " ㅠㅠ " 열무녀석은 조심스레 쉬야-_-묻은 레포트를 들어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평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살던 녀석인데.. 확실히 깡패시키는 이 녀석에게도 공포의 대상인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레포트를 받아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결심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 거기 휴지 좀 집어 줘. " " 형.. 설마..;; " " 흐.. 흔적만 없애면 돼. ㅡㅡ;; " " 형..;; " " 거기 향수도 좀 집어 줘. " 열매 20세의 여름.. 완전 범죄를 꿈꾸다.. =_=;; 자꾸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당신들도 내 입장 돼 봐! 이렇게 안 하나! ㅠ0ㅠ 사람이란 한없이 비굴해질 수도, 추-_-접해질 수도 있는 존재다! 이깟(?) 종이 몇 십장(!) 때문에 존엄한 생명이 위협받아서야 되겠는가!! 나는 재빨리 휴지를 받아들며 곰쉐이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젠장.. 냄새 때문에 미치겠다. ㅠㅠ 도대체 어떤 사료를 먹길래..;;; 나는 잠시 일을 멈추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열무녀석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 혀.. 형!! 뒤.. 뒤에!! "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등줄기를 쓸어 내리는 싸늘한 누군가의 시선.. 죽. 었. 다. ㅠㅠ 내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방안을 싸고도는 무거운 침묵. 열무의 잔뜩 굳은 얼굴.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깨.. 깼어..?;;; " " ....... " " 그냥.. 벼.. 별 일 아닌데..;; " " ....... " 녀석은 말없이 날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며 날 재촉한다. " 아.. 이 거? 아직 다 못 닦았.. " 헉..! 내 입으로 불다니..!!;;;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녀석의 미간이 좁혀진다. 아파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다. " 형!! 죄송해요!! " 그 순간 구석에 박혀있던 열무가 재빨리 깡패시키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온몸의 무게를 실으며 매달리는 녀석의 모습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문제는 너무 열심히 매달리는 바람에 깡패시키의 소매가 찢어졌다는 거지만.. ㅠㅠ 순간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잠식했다. 열무는 당황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 역시 놀란 시선을 던졌다. 내 가슴에 안긴 개쉐이만이 멋도 모른 채 낑낑대고 있다.;;; 이노무 개쉐이.. 당장 한끼 식사로 끝장을 내주마! =ㅁ=++ 나는 쉬야에 젖은 레포트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오.. 옷 벗어. 내가 꿰매줄게.;;; " " 아.. 아니에요! 형! 제가 꿰매 드릴께요!;;; " " ....... " 열무와 투닥거리는 사이 깡패시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여진 레포트를 집어 들 었다. 잠시 훑어보던 녀석이 한쪽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아니. 정확히는 내 품에서 버둥대는 개쉐이에게로. ㅡㅡ;; " 그. 거. 이리 내놔. " " ! " 긴 팔을 뻗어 날 재촉한다. 녀석이 원하는 건 분명 북극곰이다. 서.. 설마..;;; " 죽. 여. 버. 리. 겠. 어. " =0=;;;;;;;; 그 말을 어찌나 진지하게 하는지 도무지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컨디션 제로 상태인 지금으로선 충분히 실현 가능한 얘기다.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도 녀석은 팔을 거두지 않았다. " 주.. 죽이다니.. 어떻게..;;;; " " 그거야 보면 알겠지. "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차갑게 웃었다. " 형! 이거 제 개 아니에요!;;; " " 알 바 아니야. " " 태.. 태진이 알지? 이거 그 녀석이 키우는 개야!;;; " " 상관없어. " =_=;;;; 안통한다. 아무 말도.;;;;; 몸이 아프면 히스테릭해진다는 말이 있지. 지금의 깡패시키가 딱 그런 것 같다. 차갑게 웃고 있지만 온 몸은 열로 끓고 있고.. 아마도 속은 더 끓고 있겠지.;; 내 멋대로 열무 녀석 불렀다가 접시 깼지, 데리고 온 개가 방 어질렀지, 레포트에 실례했지 게다가 사랑스런 동생 놈은 비싼 옷까지 찢어먹지 않았는가.. -_-;;;; 아아.. 정말 할 말이 없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녀석은 극도의 청결주의자란 말이다. 나는 슬금슬금 녀석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 미.. 미안..;;;; " " ....... " " 내가 잘못했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 " ....... " " 그.. 그래도 어쨌거나 내 잘못이야!!;;;; " 깡패시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한참 후에 내 앞으로 내밀던 손을 거두었다. 조금 풀린 듯 보이지만 아직은 방심할 수 없다.;; " 레.. 레포트는 내가 어떻게든..;; " " 됐어, 그건. 다시 뽑으면 되니까. " " ..;;;;; " 녀석은 북극곰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 " " 으.. 응..;;; " " 난 좀 잘테니까 방하고 부엌 치워놔. " " 응!! " " ....... " 그제서야 녀석의 얼굴에서 검은 오오라가 걷힌다. 대신 한층 더 피곤해 보인다. 처음엔 그저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좀 아픈 것 같기도..;;; 애인이 아프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일만 잔뜩 벌여놨으니..;;; 난 아직도 철이 들려면 먼 것 같다. ㅜㅜ 깡패시키가 방으로 돌아간 후 열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 몇 분 동안이지만 많이 긴장했던 모양인지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 이율현 많이 아픈가 보네.. 이 정도로 끝내다니. " " 응..;; " " 아무래도 난 이 녀석 데리고 돌아가는 게 좋겠어. 형이 간호 좀 잘 해 줘. " " 가.. 간다고!? " " 응. " " 야! 청소는 하고 가!! =ㅁ=;;; " " 그럼 난 이만. -_- " " 야-!!!!!!!!! " 이런 된장!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어유.. 저런 놈도 동생이라고.. =ㅁ=++ 나는 두-_-마리가 사라진 횅한 집을 둘러보다가 바닥에 앉았다. 자세히 보니 바닥은 온통 빠진 개 털 투성이다.;;; 청소시키려고 불렀다가 이게 무슨 꼴이냐.. -_-; 조심스레 털을 주워 모으던 나는 일단 부엌으로 향했다. 아무 것도 안 먹은 상태라 배고플텐데 뭐라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시작한 요리는 이름하야 '내 멋대로 국' ㅡㅡ; 열무녀석이 사온 재료를 최대한 이용해서 매콤하게 끓이는 거다. 고춧가루도 많이 넣고 해서. 한참 파와 당근을 썰고 있는데 문득 개털 만지던 게 생각났다.;;; 나는 황급히 손을 씻으며 이미 국으로 들어간 재료를 내려다봤다. =_=;; 아아.. 순간적으로 녀석에게 못할 짓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양심에 슝슝 구멍이.. ㅡㅡ; 일단 눈에 띄는 대로 떠있는 하얀 털을 건져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찜찜..;;; 한참 후 요리를 완성한 나는 조심스레 쟁반에 받혀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냄새는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맛은 모르겠다. 개털이 마음에 걸려서 맛을 못 봤기 때문에.. ㅡㅡ;;; 서.. 설마 병균 같은 게 있지는 않겠지..?;;; 있다해도 열이 가해지면 박멸된다고 하니까.. 생각해보니 북극곰을 안을 때 개-_-냄새가 좀 나긴 했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일단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깨워도 되는 걸까..;; 그래도 밥을 먹어야 감기가 빨리 낫는다고 했는데..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녀석의 어깨에 올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 자.. 잠깐만 일어나 볼래..;; " " ....... " " 뜨거운 거 좀 먹고 자. " " ....... " 대답이 없다. -_-;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 가.. 강이율씨이~ ㅡㅅㅡ/// " " ....... " 혼자 고개를 돌리며 쑥스러워하고 있는데 문득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잠식된.. " 생각 없어. " " 그래도 밥을 잘 먹어야 빨리 낫지.;; " " ....... " " 내.. 내가 국을 좀 만들어 봤거든..;; " " ㅡㅡ " 녀석이 살짝 얼굴을 찡그린다. 호.. 혹시 이 국의 정체(!)를 아는 걸까..!;;;; 말없이 날 바라보던 녀석은 한참 후에야 마지못해 대답했다. " 알았어. " 일단 허락이 떨어지긴 했는데 어쩐지 손이 안 움직인다. 아무래도 자꾸 개털이 떠올라서...;;; 아깝긴 하지만 역시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다. -_-;;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국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녀석이 가만히 날 쳐다본다. " 우.. 우리 오랜만에 짜장면이나 시켜 먹을까?? ㅇㅁㅇ;;; " " ......뭐..? " " 이 국 좀 상한 것 같아.;;; " " 방금 끓였다면서..? " " 그렇긴 한데 개.. " 컥..! 무슨 짓이냐! 위 열매!! 다 된 국에 털 빠트릴 작정이냐!! 이 바보야!! >ㅁ<;;; 나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 개.. 개-_-로울 만큼 맛이 이상해서..;; " " ....... " " 헤헤.. ^^;; " " ....... " " 헤..;;; " " ......이상한 거 넣었냐..? " 헉!! ㅇㅁㅇ;;;;;; " 아. 아.. 아..아니!! 무슨 그런 말을!!;;;;; " " ㅡㅡ^ " 이 시키가 혹시 나 몰래 부엌에 cctv라도 설치해놓은 거 아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무식하게도 많이 끓였는데 버리려니 정말 아깝다. 그렇다고 개-_-털국을 먹을 수도 없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국을 처리했다. 나의 소중한 작품이 버려지는 걸 바라보는 심정이란.. ㅠㅠ " 왜 버리는 거야? " " !! " 어느새 등뒤에 선 녀석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직히 물었다. 어쩐지 웃고있는 듯한..;; " 실패작이야. ㅡㅡ;; " " ....... " " ...;;;; " " 그래..? 난 상관없었는데. " 개털도 상관없냐? ㅡㅡ;; " 열무는? " " 돌아갔어. " " ....... " " 몸은.. 괜찮아? " " 응. " 녀석은 짧게 대답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 약 사올까..? " " 됐어. " " 그래도.. " trrrrrr... !? 녀석과 나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리고는 동시에 거실로 향했다. " 내가 받을게. "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 형!? ] 수화기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열무였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급박한 목소리. " 뭐..? " 나는 멍하니 수화기를 든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런 일이.. 왜 그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왜 그래?? " 깡패시키가 황급히 달려오며 물었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녀석이 걱정스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 아.. 아빠가.. " " ....... " " 아빠가 병원에.. " " ! " 나도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일단 교통사고라는 건 분명하다. 오늘 낮에 지방에 출장 가셨다가 오는 길에 일어난 사고라고.. 열무도 울지는 않았지만 잔뜩 굳은 목소리였다.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다치신 거지..? 자꾸만 눈물이 난다. " 일어나. 빨리 가보자. " 깡패시키는 내 손을 꽉 잡았다가 놓으며 긴 몸을 일으켜 안방으로 달려갔다. 분명히 지금 아플텐데도 녀석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마주 잡은 손이 심각할 만큼 뜨거웠는데도..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외출 준비를 마친 녀석이 현관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 먼저 나가서 시동 걸어놓을 테니까 세수하고 와. " 끄덕..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다시 한 번 소리친다. " 울지 말고! " 녀석의 목소리가 안타까울 만큼 잠겨있다. 이러다 이 녀석 먼저 쓰러지는 건 아닌지.. 하지만 지금은 일단 병원에. 대충 세수를 끝마친 나는 빨개진 눈으로 차에 올랐다. 녀석이 운전대를 잡은 채 걱정스런 시선을 던진다. " 어디로 가면 돼? " " xx병원.. " " ....... " 녀석은 흘끗 날 바라보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쓸어 내렸다. 그게 또 눈물샘을 자극했는지 또다시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 흐.. " "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 " " 으.. " " ....... " 어느새 어둠으로 채색된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가 웃는 얼굴.. 오직 나만이 슬픈 것 같다. 방금 전까지는 나도 웃고 있었는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어릴 적 아빠 등에 업혀서 놀던 기억.. 성적표 숨겼다가 걸려서 혼났던 기억.. 엄마가 시골에 간 날 아빠가 해준 밥이 맛없다고 투정부리던 기억까지.. 그래도 늘 곁에서 나와 열무를 지켜주셨는데..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마침내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 내려. " " ....... "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 깡패시키가 강한 힘으로 날 끌어 안았다. " 자꾸 울지 마. " " 으.. " " 아직은 확실한 게 없잖아? 그러니까.. 알았지?? " " .....응.. "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날 놓아주는 녀석. 나보다 더 지친 기색의 녀석이 애써 웃는다. 나 정말.. 이 녀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살짝 녀석을 끌어안은 뒤 차에서 내렸다. " 저어..! 오늘 입원한 환자인데.. " " 성함이..? " " 위. 도. 진. 이요. " " 네.. 203호실입니다. " " 감사합니다. " 나는 짧게 인사하고 황급히 복도를 지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203호.. 203호.. 고요한 적막이 깔린 낯선 복도. 복도 끝 유리창에서 새어 들어온 달빛이 더없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젠장.. 또 눈물이.. 나는 억지로 눈물을 닦으며 문 앞에 멈춰섰다. 203호라는 숫자 아래는 선명한 글씨로 아빠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잠시 후에야 나는 짧게 숨을 들이키며 문을 열었다. 아빠. 죽지마. 이제부터 말 잘 들을게. 앞으론 정말.. " 열매니? " " 아.. " 앞으론 정말.. " 하하. 왔구나. 너도 이거 할래..? " 앞으론.. 뭐.. 뭐냐!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tv에 ps2를 이어다가 열심히 패드를 두드리고 있는 두 사람. 아빠와 열무. 엄마는 그 옆에서 과일을 깎고 있고 옆 침대의 환자는 웃으며 구경하고 있다. " 어유~ 우리 열매 왔구나. 안와도 괜찮은데.. " " 교통.. 사고.. 났다..고.. " " 응. 살짝 부딪힌 정도야. 그래도 다리에 금이 갔지 뭐니. 그러게 평소에 멸치 좀 많이 먹으랬더니만. " " ....... " " 그나저나 우리 아들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 " 엄마가 웃으며 다가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내 눈은 열심히 버튼을 연타하고 있는 아빠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 아아앗~ 열무 너 봐주기도 없냐?! " " 이것도 봐주면서 하는 거예요. " 이.. " 그럼 다른 거 하자. 오늘 산 거 넣어봐라. " " 연애 시뮬이요? " " 그래.. 오오.. 그림도 이쁘네. " 이.. " 열매도 그렇게 서있지 말고 과일 좀 먹어라. " " 아빠, 시작해요. " 이.. 이 인간들이이이이이이----!!!!!!!!!!!! =0=++++++ 나는 말없이 저벅저벅 침대 앞으로 걸어가 배개를 들어 아빠의 등에 던졌다. 그러자 열심히 오프닝을 감상하던 아빠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 너도 할래? " 빠. 직.++ 내가 도대체 왜 여기에 온 거지?? 오는 내내 그렇게 울면서 걱정했는데. 아픈 깡패시키가 힘들게 여기까지 바래다줬는데. 정말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하다. " 야! 위 열무! 너 아까 울 것처럼 말해놓고 이게 뭐야!! " " 나도 자다 일어나서 전화 받았어. 이럴 줄 알았나..? " -ㅁ- 하.. 나 참.. 한 순간에 바보 됐다. =_= 잠시 후 간드러지는 히로인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질 무렵 녀석이 들어왔다. " 미안. 좀 늦었지? " " .......;;; " 한 눈에 봐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 녀석은 아빠와 엄마에게 정중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 오~ 이율군도 왔구만. ^^ " " 저어.. 몸은.. " " 아아.. 괜찮아. 스친 건데 뭐. 사고랄 것도 없지. " " 다행이네요. " 그렇게 말하며 깡패시키가 웃는다. 평소의 퉁명스런 모습은 온데 간데 없는 상냥한 말투.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 돌아갈래. " " ...!? " " 실컷 게임이나 하라고 그래. -ㅁ-+ " 바보 아빠 같으니. ㅡㅡ+ 나는 그렇게 말하곤 바로 복도로 나왔다. 녀석이 인사를 하고 황급히 따라나온다. " 너..! " " 미안해. " " 뭐..? " " 너 아픈데 겨우 이런 일로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 " " ....... " 녀석은 잠시 대답 없이 날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무슨 말하는 거야. 너. " " .......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울었던 주제에. " " 그.. 그건../// " " 다행이잖아? 무사하셔서. " " ....... " " 난 괜찮아. 몇 일 푹 쉬면 나을 거고. " " 학교는..? " " 민혁이한테 대출 부탁해놨어. " 어느새..;; 아파도 철두철미한 성격은 그대로구나.. ㅡㅡ;;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몸.. 괜찮아..?;; " " 그래. " " 여기까지 왔는데.. 진찰 받아볼래..? " " 됐어. " 녀석은 짧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이더니 어느새 복도 끝까지 가버렸다. " 가자. " " ! " 날 바라보며 손을 뻗는다. 이젠 더 이상 소년의 티를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서. " 그.. 그래../// "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 그도 그럴 것이.. 아까 그렇게 정신 없이 우는 꼴을 보였으니..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녀석의 눈에 난 분명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거다. 아니면 여자처럼 보였거나..;;; 나는 언제쯤에야 녀석과 같은 '남자의 얼굴'을 가질 수 있게 될까.. " 빨리 안 와? " " 아.. 알았어..!;; " 긴 복도를 한달음에 달려 녀석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언제나와 같은 시원한 향수냄새가 날 맞이한다. 그래.. 사실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 녀석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막한 복도를 흘끗 돌아본 뒤 녀석의 뒤를 따랐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엄마.. 긴 하루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열매야, 빨리 좀! ] " 아.. 알았어! " 일단 대답하고 끊긴 했는데 나중 일이 문제다. 괜히 끼어 들었다가 죽도록 터지기만 하는 게 아닌지..;;; 방금 건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용태 놈한테서 온 전화다. 나이트 클럽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쪽수가 모자란다며 내게 sos를 친 것인데.. 일단 나가긴 하겠지만 도움이 될는지 솔직히 자신은 없다. ㅡㅡ; 깡패시키는 지금 감기약 먹고 자는 중이고.. 일단 되든 안되든 나가기나 해봐야지. 나는 최대한 싸움하기 편한 옷으로 골라 입고 집을 나섰다. 나오기 전, 나름대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봤지만 집 안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그저 스스로의 힘을 믿는 수 밖에. 뭐..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만.. ㅡㅡ;; 한참을 해맨 끝에 찾은 나이트 클럽은 생각보다도 훨씬 큰 곳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전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큰 규모란다. 길치인 내가 그나마 빨리 찾을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 야! 왜 이렇게 늦었어?? " 아니.. 이 자식이.. 불쌍하다고 와줬더니.. ㅡㅡ++ " 야, 우리 쪽은 몇이고 저쪽은 몇이냐? " 짧게 묻자 용태놈이 갑자기 시선을 피한다.;; 그러더니 한참 시간을 끈 뒤에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 우리쪽은 다섯 명.. " " ....저 쪽은? " " .....;;; " " .....? " " 열 둘..;;; " =ㅁ=;;;; 니가 아주 날 죽일 작정으로 불렀구나..!;;; 어유.. 그놈의 의리가 웬수지.. -ㅁ-;;;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쉰 뒤 상대 진영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시야에 들어오는 건 다섯. 금발머리 하나, 덩치 셋, 작은 놈 하나. 음.. 이렇게 볼 땐 해 볼만 할 것 같기도 한데.. 금발머리와 작은 놈은 체구도 작아서 별로 세 보이지 않는다. 덩치 큰놈들이 문제긴 한데.. 더 큰 문제는 이놈들 외에 일곱이 더 있다는 거다. 솔직히 난 두 명 이상은 버겁다. ㅡㅡ;; " 야.. 이율이는? " " 안 왔는데..? " " -ㅁ-;; " 뭐냐.. 그 기분 나쁜 표정은..;;; " 야! 그럼 너 혼자 왔어-?! " " 응. " " 으악- 내가 미쳐!! " 왜 혼자 발광이야..? -_- 짜증 섞인 시선으로 슬쩍 한 번 째려주자 용태놈이 푹푹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어느새 사각형 얼굴 가득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내가 왜 널 불렀는데?? 그 녀석 안 오면 어떻게 하라고! " " 그럼 그 녀석 때문에 날 부른 거냐? -ㅁ-+ " " 당연하지. 안그럼 뭣하러 너같은 약골을.. " 이런 신발..! =ㅁ=++ 보던 만화책 집어 던지고 달려와줬더니 뭐가 어째--!!!! " 야! 조용태! 너 지금 나랑 뜨자는 거냐!!! " "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정해라. " " 이런 씹! 너 같음 그딴 말 듣고 진정하겠냐? 새꺄!! " " 아..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일단 이번 일만 해결되면 크게 한턱 쏜다. " -_- " 우리 쪽 애들은 어디 갔어? -_-; " " 응.. 경문이 곧 올 거고. " " !! " 자.. 잠깐.. 경문이라면.. 혹시.. 설마.. 오경문--??!! =ㅁ=;;;; " 야! 오경문 말이야--!? " " 응. 다른 녀석들 연락이 안되서 일단 급한대로.. " 컥..! 그런 약골 데려다가 어디다 쓰려고..? 혹시 이 자식이 우리를 총알-_-받이로 쓰려는 거 아냐!?? =ㅁ=;;;; 나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 또다른 두 명은..?;; " " 응.. 제희랑.. " =_=;; 제희.. 제희라면.. 언젠가 깡패시키 패거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나와 경문이가 구출(?)해준 녀석 말인가.. 덩치는 큰 주제에 겁만 많아서 주먹 한 번 뻗어본 적 없는 그 녀석..? 지금도 내가 깡패시키를 이긴다고 믿고있는 그 녀석?? 하.. 정말 최악의 멤버들만 골라서 모았구만.. -ㅁ-;;;;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용태놈을 바라보다가 대충 앞에 놓여진 의자에 걸터앉았다. 상대 패거리 놈들이 흘끗거리며 용태놈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다. 기분 나쁘게 지들끼리 히히덕거리면서.. ㅡㅡ; " 야.. " " 응? " " 튀자. -_-; "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잔뜩 굳은 표정 위로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 안돼.. 자존심이 있지. " 이 씹탱아! 니 자존심 때문에 애들 죽일래--??! =ㅁ=++ 성질 같아선 이 시키부터 밟아버리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는다.++ 가뜩이나 쪽수도 딸리는데 내분 일으켜서 좋을 거 없겠지. -_-;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서서히 녀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세 명이지만..-_-;) 반바지와 샌들 차림의 오경문, 힙합 복장의 최제희, 그리고 한 놈은.. 어라..?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내 속을 눈치챘는지 용태놈이 우리에게 뉴 페이스를 소개시켜준다. " 이 녀석은 내 동생, 조용서다. 다들 처음 보지? 이래봬도 싸움은 꽤 해. " " 안녕하세요. " " 아.. 그래.. 안녕..;; " 그다지 통성명할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용서라는 녀석은 척 보기에도 주먹 좀 쓴다싶을 정도로 위압감을 풍겼다. 용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몸도 근육으로 다져진 거 같다. 그나마 여기에서 유일하게 주먹 좀 쓸 타입이다. ㅡㅡ; 젠장.. 떨거지 집단이 따로 없다..;;; " 열매야. 이율이는? " 경문이 놈이 샌들을 질질 끌며 내게 물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머리가 부스스하다. -_-; " 그녀석 자. " " 그럼 너 혼자 왔냐? " " 응. " 녀석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제희가 어깨를 두드려준다. 이 녀석은 안본 사이 살이 더 찐 듯.. " 그럼.. 이제 다 모인 거 같으니 한판 떠볼까? " 뜨긴 개뿔.. 우리가 회 떠지게 생겼구만.. ㅡㅡ;; 용태놈은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저 녀석들 별 거 아니니까 떨지 말고. " 제일 떨고 있는 주제에 큰 소리는.. -_- 나는 대충 대답하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상대 패거리들 중 한 놈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 뭐냐..? 이 예쁜이는? " " ㅡㅡ+ " 덩치쉐리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 아가씨는 오빠들 싸우는데 끼지 말고 옆에서 구경이나 해. " " 미친 새끼! " 홱하고 손을 쳐내자 덩치쉐이가 패거리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웃기 시작한다. 솔직히 키나 덩치나 뭘로 봐도 나완 상대가 안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내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 덩치쉐이는 한바탕 웃고 난 뒤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쫙 찢어진 눈이 매섭게 날 훑는다. " 그래서.. 너도 싸우려고..? " " 그럼 놀러왔겠냐? 병신아? " " 하.. 이게 귀엽게 노네. " 이런 c8! 내가 호구로 보이나! 나도 그간 연마한 실력이 있다 이거야!! =ㅁ=++ 나는 녀석을 노려보며 주먹에 힘을 실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열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그렇다..! 이게 바로 사나이들의 세계다!! " 열매야! 조심해!! " 등뒤로 2번 타자 경문이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끗 돌아보니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고있다. 미친놈.. 지가 무슨 터미네이터라고.. ㅡㅡ;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 지금 떨고 있다.;;; 밤에 깡패시키 아래 깔리는 것 다음으로 싫은 게 바로 얻어터지는 거다. 어릴 때부터 계집애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시비의 대상이 됐던 나는 나름대로의 맺집 을 확보했지만 그래도 맞는 것만은 여전히 두렵다.;; 그래서 언제나 말했지 않은가.. 아픈 건 딱 질색이라고.. ㅡㅡ;; 아아.. 깡패시키는 지금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른한 꿈을 꾸고 있겠지. 애인 놈 맞아죽게 생긴 것 따윈 알지도 못한 채.. ㅠㅠ 젠장.. 이렇게 멤버가 딸릴 줄 알았으면 열무랑 태진이라도 부르는 건데.. ㅜㅜ 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며 덩치쉐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놈이 느끼하게 웃으며 날 내려다본다. 침묵 가운데 불꽃튀는 눈싸움. 덩치쉐이가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강이율은 잘 있어? " " !! " " 여전히 멋지겠지..? " 귀에 익은 목소리.. 기분 나쁠 정도로 익숙한.. 나는 천천히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짧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오랜만이야. 위. 열. 매. " 차갑게 웃으며 날 내려다보는 장신의 남자. 이 녀석은 분명.. " 김재명. 물러서. 이 녀석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 " ....... " " 그래.. 기필코 이. 녀. 석. 만. 은. " 증오에 불타는 눈동자. 그 날 나는 졸업식 이후 처음으로 그 녀석을 만났다. 나의 첫 번째 연적이기도 한 녀석.. 조민국을.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조민국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놈이 그런 날 보며 피식 웃는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 너 진짜 나랑 할 셈이냐? " " 잔말 말고 빨리 덤벼. " 어쨌거나 일단 멋있는 대사를 뱉긴 했는데 뒷감당이.. -_-;;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발뺌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다시 한 번 굳게 마음을 다잡고 녀석을 노려봤다. 키 차이가 심해서 목이 좀 아프긴 하지만 일단 기세싸움에서 밀리면 안되니까. 싸움 할 때의 깡패시키는 늘 시니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조금쯤은 기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녀석의 옆에서 배운 게 있다면 절대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된다는 것. 실력은 둘 째 문제다. " 열매야, 무리하지 마. 저 녀석 실력 너도 알잖아? " 등 뒤에서 경문이 놈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엔 제희놈까지 합세해서 날 말리기 시작한다. 젠장..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건가.. ㅡㅡ; 나는 등을 돌린 채로 짧게 말했다. " 너희들은 참견하지 마. 이건 우리 둘의 문제야. " 아하하.. 마치 깡패시키가 된 기분이다. +_+ 나에게도 이런 터프한 면이 있었다니.. 잠시 스스로의 말에 도취되어 히죽거리고 있는데 문득 조민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곧 죽어도 큰 소리군. " " 주.. 죽긴 누가 죽어-!!?? " 이 시키가 정말 날 죽일 셈인가.. -ㅁ-;;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주먹도 무식하게 크다.;; 키는 깡패시키와 거의 맞먹고 덩치도 딸리지 않는다. 얼굴은 깡패시키에 비하면 확실히 딸리지만.. ㅡㅡ;; " 시작할까..? " 헉.. ㅇㅁㅇ;;; " 그.. 그래! 더.. 더더더... 덤벼!! " 아아.. 한심한 내 인생.. 그래.. 네가 달리 위열매겠냐.. ㅠㅠ 나는 짧게 숨을 삼킨 뒤 주먹에 힘을 실어 녀석에게로 날렸다. 이젠 시위를 떠난 화살. 엎질러진 물이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놈은 가볍게 내 주먹을 피했다. 그것도 입가엔 미소까지 띄우면서.. =_=;; " 여전히 허접한 실력이군. " " 다.. 닥쳐!! " 놈의 말이 기폭제가 됐는지 갑작스레 폭주모드에 돌입한 나는 있는 힘껏 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역시 전부 실패. 계속 헛 주먹질만 해대자 나중엔 제풀에 지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녀석은 피하기만 할 뿐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 왜.. 헉.. 넌.. 안.. 헉..쳐..? " " 너같은 녀석 상대로 힘 뺄 필요 없겠지. " " 뭐야-!! " 젠장.. 이 자식이 아주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ㅁ=++ 일단 한 방이라도 먹여야.. 하지만 너무 숨이 찬다. 시작한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꼬리를 내릴 수는 없다! 결국 난 한 번에 모든 걸 걸기로 마음을 먹고 그대로 방심하고 있는 놈의 턱으로 연타를 날렸다. 그리고.. 내 소망이 이루어진 걸까.. 다섯 번의 헛 주먹질 후에 들어간 콤보가 그대로 녀석의 턱에 꽂혔다. " 윽..!! " 놈이 고개를 돌리며 낮은 신음을 뱉어낸다. 제대로 들어갔는지 입가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민국은 잠시 입가의 피를 닦더니 내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분명 방금까지와는 180도 다른 눈빛이다.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것 같.. ㅇㅁㅇ;; " 하.. 아주 끝장을 보시겠다..? " " ...;;;; " "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대응해주지. " 그렇게 말하며 차갑게 웃는 얼굴. 눈빛이 달라진 놈을 보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내가 잠시 움찔하는 사이 날아온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내 뺨을 스쳤다. 매섭도록 강한 힘이 느껴지는 주먹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네가 내 상대가 될 것 같아-?! " " ....윽.. " 젠장.. 손목에 살짝 스쳤는데 왜 이렇게 아픈 거냐. 아무래도 뼈에 금이 간 것 같다. 조민국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주먹을 날렸고 난 아슬아슬 피하다가 몇 대를 맞았다. 맞은 부위는 눈 옆, 코, 뺨, 머리, 복부, 어깨 등등 다양했고 결국엔 바닥에 주저앉고야 말 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버텨봤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 여.. 열매야!! " 바닥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경문이 놈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녀석은 놀란 눈을 한 채 날 일으키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지금으로선 손이 닿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찬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욱신거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에.. " 일어서. 위열매. 이게 끝이야? " " 무슨 소리야!! 쓰러진 거 안 보여!? " 조민국의 빈정거림에 나대신 경문이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녀석은 분하다는 듯 조민국을 노려보고 있었다. " 열매야, 괜찮아? 얼굴에 피가 흥건해. " " 괜찮아.. " 억지로 태연한 척 연기를 해보지만 아무래도 움직이기가 힘들다. 아까부터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바람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경문이놈은 안절부절 못한 채 휴지로 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 야, 고개 좀 들어봐. 이마에서도 피나는데..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냐? " " 됐어. " " 머리카락에도 피 묻었어. 어떡하지? " " 뭐가.. " " 너 이 꼴로 집에 들어갈래?? 이율이한테는 뭐라고 말하려고!? " 빌어먹을..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거 생각하는 중이다. -_-; 이대로 들어갔다간 밤새도록 추궁 당하기 십상이다. 일단 세수라도 해야.. 나는 경문이 놈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했다. 주위에 몰려있던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며 길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조민국의 앞을 지나려는 순간, 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강이율한테.. " " 말 안 해. " 내 말에 놀란 듯 커다래진 눈으로 날 바라본다. " 이젠 지겨워. 너랑 엮이는 건. " " ....... " " 싸움은 여기서 접는 게 어때? 어차피 결과야 안봐도 뻔한 거 아냐? " " .......그렇군. " 놈은 짧게 대답하며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젠장.. 피가 빠져나간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나는 경문이놈을 재촉했다. " 빨리 가자. 세수하고 붓기 가라앉혀야 집에 갈 거 아냐.. " " 그래.. " " 너도 비밀 지켜. " " ! " 녀석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잠시 후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젠장.. 절라 아프네.. ㅡㅡ " " ...... " 결국 경문이의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소리를 죽여 집 안으로 들어서다가 깡패시키와 눈이 마주친 건 그보다 한참 지나서였지만. 내 몰골을 잠시 훑어보던 녀석이 미간을 찡그린 채로 물었다. " 너.. " " 아.. 이거?? 넘어졌어. 버스에서 내리다가 발이 걸려서.. 바.. 바보 같지? 헤헤.. ^ㅁ^;; " " ....... " 그림 같은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간다. 제길.. 아파 죽겠는데 이럴 땐 제발 좀 그냥 넘어가 주라. 나는 벽에 손을 짚은 채 비틀비틀 녀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최대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래도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다. 특히나 타고난 파이터(!)인 이 녀석이 피냄새를 놓칠 리가 없다. " 너.. 넘어졌는데 버스에서 내리던 몇 명한테 밟혀서..;;; " " .....그래..? " " ....어...;;; " " ....... " 잠시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는 갑자기 내 턱을 들어올리더니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걷어냈 다. "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 " ....... " 턱은 특히나 심하게 다쳤는데 이 자식이 무식하게 잡는 바람에 아파 죽을 것 같다. ㅠㅠ 녀석은 내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매서운 눈으로 내 얼굴을 훑어보고 있다. 젠장.. 정말 아파 죽을 것 같다. ㅠㅠ " 이마가 깨지고, 눈 옆은 시퍼렇게 멍들고, 코는 퉁퉁 붓고, 입술은 터졌는데 이게 넘어 진 거란 말이지? " " 아.. 아파아아..!!! ㅠ0ㅠ " 녀석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 영역 싸움이라도 하고 온 거냐? " " 그.. 그게 아니라..;;; " "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누. 구. 야? " 으으.. 이럴 줄 알았다..;;; " 어떤 새끼냐고 물었어. " " 아.. 아니.. 정말..;;; " 번뜩이는 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무섭게 화낼 줄은 몰랐는데..;; 이 녀석은 예전부터 내가 싸움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싸움을 하면 이긴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부모들이 자기 자식 맞고 들어오면 속상해하는 심리 같은 게 아닐까..;;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빌어먹게도 등까지 멍이 들어 욱신거린다. " 그냥.. 좀 다쳤어.. " " 위열매. " " 그냥.. 그렇게 생각해줘. 응..? " " 너.. " " 부탁이야.. " " ....... "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그래.. 이 꼴이 되었지만 일단 살아남긴 했구나..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난다. " 이 일은 여기서 끝이야. 알았지..? " " ....... " " 내 부탁 들어줄 거지? " " ....... " 젠장.. 평소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려니 닭털이 돋아나는 기분이다. -_-;; 그래도 의외로 먹혀들어가는 듯.. 녀석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킨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다음은 없어. " " 그.. 그래.. ^^;;; " 마주하는 시선.. 쑥스럽지만 일단 닭살작전이 먹혀들어서 다행이다. 가끔은 써 먹어도 좋을 듯.. +_+ 나는 속으로 수첩을 꺼내 체크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녀석이 손을 뻗어 내 턱을 들어올린다. 그래..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내 턱을.. 턱.. "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어무이~!! 아들 죽어유~~!! ㅠ0ㅠ 결국 그 날 난.. 녀석의 정성어린 간호 속에 밤을 지새야 했다. ㅠㅠ " 이.. 이게 뭐야..?;; " " 보이는 대로. " 녀석은 탁자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우유가 담긴 곰돌이 머그컵은 내 거. 심플한 무늬의 커피 잔은 녀석 거다. 나는 잠시 뚫어져라 녀석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 이거 비싼 거 아냐..?;; " " 조금. " 조.. 조금이라..;; 90만원 넘는 옷도 안 비싸다고 했던 놈의 입에서 나온 '조금'이란 말은 어쩐지 의미심장하 다. -_-; 빛깔이나 심플한 모양새가 확실히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근데 이거 정말 받아도 되는 걸까..;;; 나는 조심스레 만지다가 녀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녀석이 희미하게 웃는다. " 뭘 그렇게 흘끔거려? 맘에 안 들어? " " 아.. 아니..;; " " 일종의 의식이지. 소유인이라고 할 수도 있고. "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가 열심히 만지작대던 반지를 빼앗아 조심스레 약지에 끼워주었다. 오오.. 딱 맞는다. +ㅁ+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럴 때 보면 녀석의 눈썰미는 가히 두려울 정도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왼쪽 손에도 뭔가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내 것과 똑같은 모양이지만 좀 더 큰.. 여.. 역시 커플링인가..////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녀석이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 우냐? " " 아.. 아니!;; " " 그럼 왜 그래? " " ....... " 가슴이 찡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라고는 죽어도 말 못하지. =_=; 나는 더욱 더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 어.. 어쩐지 좀 창피해서../// " " .......쿡.. " " 너.. 넌 안 그래??/// " 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다만.. ㅡㅡ;; 깡패시키는 잠시동안 날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나도 그래. " " ! " " 이거 고를 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 녀석은 내 손을 잡은 채로 가만히 웃었다. 너무나 상냥해 보이는 미소가 당황스럽다. 이것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살인미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방금 먹은 따뜻한 우유 때문에 나른해진 탓도 있겠지만.. 어쩐지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뒤 천천히 테이블 유리에 머리를 댔다. 차가운 유리가 뺨에 닿자 그제서야 화끈거림이 좀 사라지는 것 같다. " 이제부터 꼭 끼고 다녀. " " 어..?;; " " 절대 빼지마. 알았어? " " 아.. 알았.. " 녀석은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락하고 날 껴안았다. 어찌나 세게 안았는지 숨이 막힐 정도다.;; 게다가 머리까지 쓰다듬는데.. 이건 마치 애완견이 된 듯한 기분이다. -ㅁ-;;; 나는 녀석의 팔에 갇힌 채 겨우겨우 숨을 내쉬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녀석이 고개를 숙인 탓에 가지런한 머리카락이 내 목 위로 내려온다. " 이건 언제 준비한 거야? " " 글쎄.. " 녀석은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혹시.. 이 녀석도 쑥스러워 하는 건가..//// " 이제 슬슬 낄 때도 됐잖아? " " 그.. 그런가..?;; " " 모르겠어? 이제부턴 철저히 구속하겠다는 뜻이야. " 구.. 구속이라니..; 그건 싫어어어어어어~~~~~~~~ " 지금까지는 대충 넘겼지만 이젠 안돼. " 야! 네가 언제 대충 넘겼다고 그래-!?! =ㅁ=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녀석은 말대신 허리를 숙여 입술을 겹쳐왔다. 부드러운 입술.. 숨결..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이미 수도 없이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느낌이랄까.. 나날이 늘어가는 테크닉을 감상(?)하는 것도 묘미중의 하나다. 안타깝게도 내 테크닉은 늘 제자리걸음이지만.. ㅡㅡ;; 스치듯 이어지는 풋풋한 키스가 끝날 즈음 나는 천천히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고 해도 키스한 뒤 시선을 마주하는 건 역시 쑥스럽다. 녀석은 내 얼굴을 보려하지만 나는 늘 이렇게 시선을 내린다. 커다란 창문에 비친 달빛이 내 바로 앞까지 드리워져 있다. 짙은 밤의 향기 사이로 길게 늘어선 건물과 반짝이는 불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익숙한 골목의 풍경이다. 그래.. 전봇대 앞에 서성이고 있는 어느 누군가만 빼면..!! " 헉.. " " ......왜그래? " 무의식중에 새어나간 소리에 깡패시키가 나직히 묻는다. 젠장.. 녀석이 이대로 고개를 돌리면 끝장이다!;; 나는 꽈악하고 한 번 녀석을 끌어안은 뒤 황급히 품에서 빠져나왔다. " !? " " 나 깜빡 잊은 게 있어서..;;; " " 뭘..? " " 마.. 만화책 갖다줘야 돼!! 오늘까진데 깜빡 잊고 있었네..!;; " " ㅡㅡ^ " " 빠.. 빨리 갖다주고 올게!!;;;; "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 몸을 숙여 소파에 걸터앉은 녀석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야말로 의심으로 가득찬 눈이다. ㅡㅡ;;; 하긴.. 한창 분위기 무르익어 가는데 만화책 핑계로 달아나다시피 했으니..;; 하지만 밖의 누군가를 발견한 이상 이대로 베드인(!)하는 건 무리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책상에는 날짜 넘긴 만화책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내가 학교간 사이에 녀석이 정리한 모양이다. 아니,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황급히 종이가방에 만화책을 담은 뒤 코트를 챙겨 입었다. 밖이 쌀쌀할 텐데 아무래도 걱정이다. 아까 집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언제부터 밖에 서있었던 거지..?;; 일단은 만나서 해결을 해야.. " 가.. 갔다올게. " 외출준비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니 커피를 마시던 녀석이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긴 다리를 꼰 채로 무심하게 날 바라보던 녀석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늦지마. " " 으.. 응..;; " 휴우..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녀석이라면 알면서 모른척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까 눈에 새겨뒀던 그 장소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직 그대로 있다. 빨간 목도리를 돌돌 만 채로 입김을 불면서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은 분명.. 그녀다! 청순한 미소가 아름다운 순박한 시골 처녀. 이름도 정겨운 양순자씨! -ㅁ-;;; 잠시 후 나는 짧게 쉼 호흡을 하고 순자씨의 앞으로 다가갔다. " 저.. " " ! " " 순자씨 맞죠..? " " 여.. 열매씨!!? "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다. 화장도 많이 수수해진 거 같고.. " 날씨도 추운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 " 그.. 그냥 좀.. " " 일단 다른 데 가서 얘기해요. " 더 이상 있다간 깡패시키한테 들킬 위험이 높다. 그 때 확실히 끝내라고 그랬는데.. 빨리 자리를 떠야.. -_-;; 손을 잡기 위해 팔을 뻗는데 갑자기 순자씨가 몸을 뒤로 뺐다. " 아.. 아니에유. 오늘은 이율씨를 만나러 온 거예유. " " 네..? " " 전에 지가 여기 왔을 때.. 이율씨가 지를 구해준 적이 있어유. " " ....! " " 깡패놈들이 수작을 부리는디 그때 이율씨가 나타나서../// " 자.. 잠깐.. 다 좋은데 그 빗금의 정체는..!?? -ㅁ-;; 순자씨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 혼자서 장정 넷을 잡더라니께유! " 그야 당연..! 그 녀석은 전교짱 출신이니까..;;; 그런데 그 보다도 그 붉은 빗금의 정체가 뭐냐고오~!! =ㅁ= 어쩐지 불길하다. -_- 서.. 설마 그 녀석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던 순자씨가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 이.. 이율씨 집에 있어유..?/// " " 그.. 그렇긴 한데.. ;ㅁ; " " 그럼 좀 뵐 수 있겠지유?//// " " ;;;; "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순자씨는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날 만나러 온 게 아니라니 막을 수도 없고..;; 흥..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나 좋다고 할 땐 언제고.. ㅡ3ㅡ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 빨리 갔다왔네.. " " 어..? 어.. 근데.. " " .....? " " 누가 너 좀 만나고 싶다고..;; " 내 말에 깡패시키는 읽던 책을 덮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위로 언뜻 불쾌의 감정이 스친다. 뭐.. 이 시간에 약속도 없이 찾아왔으니 불청객일 만도 하지.. " 누군데..? " " 야.. 양순자씨..;; " " 뭐? " " 안녕하세유!!//// " 어느새 현관 안으로 들어선 순자씨가 허리를 숙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깡패시키가 천천히 우리를 번갈아 본다. 그 상황에서도 내 시선을 끄는 건 녀석의 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느닷없는 불청객의 방문에 황당해하는 녀석과 뻘쭘한 나. 나는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대다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젠장.. " 일단 들어와서 앉죠. " 녀석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그럭저럭 온화하다. " 지가 너무 늦게 찾아왔지유? 죄송해유. " " ....... " 그 침묵은 뭐냐..;; =ㅁ=;; 괜히 중간에서 무안해진 나는 양손을 내저으며 열심히 대답했다. "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 " ^^ " 100% 순박한 미소로 활짝 웃는 그녀. 방금 전까지 투덜댔던 게 미안해진다. 설령 깡패시키한테 반했다고 해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한 것도 죄인가요..? ....라는 말도 있고.. ㅡㅡ;;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물러터진 인간인지는.. =_=; 순자씨는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요란스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 와~ 집 진짜 좋네유~ 이렇게 넓은데 둘이 살아유? " " ....... " " 네..! 그.. 그래요!! ㅇㅁㅇ;;; " 깡패시키는 대답없이 순자씨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소파에 걸터 앉았다. 언제나처럼 긴 다리가 테이블에 바싹 닿는다. " 여긴 무슨 일로 왔죠? " 곧바로 용건인가.. 한 마디로 '용건만 말하고 나가'의 의미가 아닌가..; 언뜻 보면 괜찮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니다. 저 미간 사이의 분명한 주름 하나의 의미. 확실한 불쾌감의 표시다. ㅡㅡ;; " 그냥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유. ^^ " " ....? " " 저번에 집 앞에서 절 구해주셨잖아유./// "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린다. 이미 귀까지 빨개진 상태. 슬쩍 깡패시키에게로 시선을 옮기니 여전히 무표정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ㅁ-;;; 하긴.. 인사를 받는다고 좋아할 녀석이 아니지. 그저 빨리 용건을 끝내고 돌아가길 바라고 있을 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녀석이 흘끗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주름 세 개. ㅡ_ㅡ;;; 왜 데려왔냐고 책망하는 듯한 표정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입모양을 냈다. 미 안 해 그제서야 녀석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 그 일이라면 됐어요. 특별히 그 쪽을 위해서 한 일도 아니니까. " 찬바람이 쌩하고 날리는 대답이건만 그래도 순자씨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건가.. 오히려 옆에서 관전하는 나만 무안해 죽을 지경이다.;;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깡패시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녀석은 잔인할 정도로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곤 하니까.. ㅡㅡ;; 천성적으로 여자에게 약한 나와는 차원이 틀리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여지껏 여자친구 한 번 사귀어 본 경험이 없다. (알고 있나?;;) 초등학교 시절엔 이성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고 중학교 때는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막 이성에 관심을 가질 무렵 이 녀석을 만난 거다. 그 순간부터 완전히 코가 꿰인 거랄까.. ㅡㅡ;;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여자란 가족들 뿐이다. 할머니, 고모, 엄마.. 보통의 이성과는 만난 적도 거의 없고 혹여나 그랬다간 깡패시키한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아까도 말했듯 이 녀석은 여자라고 절대 봐주지 않으니까.. -_-;; " 이율씨 인기 많지유? " " ....... " " 척 보기에도 그래 보여유. 열매씨랑은 달리 남자답잖아유.//// " 아니! 이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ㅁ=+ 그 여자-_-같은 남자 좋다고 쫓아다니던 게 누군데!!!! " 지가 기억력이 나뻐서 그러는디.. 이율씨 전에 애인 있다고 했었나유..? " 그 애인 여기 있수다. -ㅁ- 이 아줌마도 나 못지 않게 머리가 나쁜 모양이다. 붕어 기억력 동-_-지랄까.. 잠시 후 깡패시키가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그래요. " " 아.. " 억지로 웃고 있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역시 깡패시키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건가.. 깡패시키는 잠시 침묵을 지킨 채로 순자씨를 바라보다가 흘끗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녀석은 천천히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반지를 가리켰다. 그러자 순자씨가 숨을 죽이고 시선을 고정한다. " 보시다시피 약. 혼.까지 한 상대가 있습니다만. " !! 뭐..!!? 야.. 약혼..??? =ㅁ=;;;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녀석이 말없이 웃는다. 그러나 시선은 다시 순자씨에게로 향했다. " 결혼은 대학 마치자마자 할 생각입니다. 그 외에 더 묻고 싶은 건..? " " 아.. " " ....... " " 아.. 니유.. " 조금 굳은 표정의 순자씨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 그럼 용건은 끝난 거군요. " " ....... " "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게 인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구한 건 당신을 위해서 가 아니라 내 애.인.을 위해서였으니까요. " " !? "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서였다고 할 수 있겠죠. " 깡패시키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미소랄까.. 아마도 접대용 미소일 확률이 높은.. ㅡㅡ;; 잠시 침묵을 지키던 순자씨는 고개를 떨군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 쳐진 어깨가 안쓰럽다.;; 고백하기도 전에 실연이라니.. 단 한번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온 나로선 실연의 아픔을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이지만 어쨌 든 분명히 마음이 많이 아플 거다. 나도 이미 순자씨에게 같은 의미로 상처를 준 적이 있지 않은가.. 어째 둘이 팀을 이뤄서 상처를 주는 것 같은.. ㅡㅡ;;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비틀거리는 순자씨의 손을 잡아주었다. " 괘.. 괜찮아요..?;; " " ....... " " 따뜻한 물 좀 마실래요?;; " " ........여.. " " !? " " 열매씨! " 순자씨의 가느다란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자란 원래 다 이렇게 가녀린 걸까.. 어쩐지 그냥 재버려 둘 수가 없.. " 역시 지는 열매씨 뿐이예유!! ㅠㅠ " =ㅁ=;; 갑작스레 내게 달려든(!) 순자씨는 강한 힘으로 내 목을 끌어안은 채 훌쩍이기 시작했다. 뿌리쳐내기도 그렇고 그대로 있기도 그런.. 참으로 난감한 상황의 연출이다.;;; 그것도 옆에는 버젓이 약-_-혼자까지 있는데 말이다.;; 굳이 죄를 찾자면 여자한테 약한 점이 죄랄까..;;; 하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건 그야말로 꿩 대신 닭이 아닌가!! 내가 그렇게 만만하다는 건가!! =ㅁ=+ " 떨어져. " " ! " 잠시 후 쫙 가라앉은 목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깨뜨렸다. 그제서야 날 끌어안은 채로 훌쩍이던 순자씨가 고개를 든다. 눈물 때문에 마스카라가 다 번져서 얼굴이 엉망이다. 솔직히 보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ㅁ=;; " 쇼하지 말고 나가. " 헉..; 직빵이다.. ㅇㅁㅇ;;;; " 이 녀석이 네 장난감이야? " " 야..;;; " " 넌 가만히 있어. " 움찔..;; 아아.. 그랬지.. 이 녀석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지..;;; 녀석은 지금 분명히 화가 나있다. 신체적 접촉을 했다는 사실보다 아마도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에. 퉁명스러운 듯 해도 가장 날 아껴주고 챙겨주는 건 녀석이다. 여지껏 단 한 번도 내게 폭력을 쓴 적이 없었다. (볼은 자주 늘리지만..-_-;) 내가 어떤 잘못을 하고 어떤 실수를 해도. 분명히 화가 나서 날 때릴 거라고 질끈 눈을 감았을 때도 녀석은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천하의 강이율이 그렇게 끔찍하게 아껴온 녀석이 정작 자기가 찬 여자에게서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게.. 충분히 기분 나쁠 만도 하다. 게다가 우리는 약-_-혼반지까지 교환한 사이가 아니던가.. -_-/// 나는 말없이 깡패시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순자씨. 돌아가요. " " ....... " " 솔직히 방금은 기분 나빴어요. " " 여.. 열매씨..;; " "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요. " " ....... " " 돌아가서.. 좋은 사람 만나세요. 이 녀석이나.. 저보다 훨씬 멋진 사람요. " 그렇게 말하며 나는 웃었다. 깡패시키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내가 손을 뻗자 커다란 손으로 감싸주었다. 결국 그렇게 순자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마스카라가 번진 얼굴을 그대로 손으로 감싼 채.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날 내려다본다. " 만날 수 있을까..? " " ......? " " 우리보다 멋진 사람. " 내 말에 녀석이 피식 웃는다. " 아, 맞다!! " " ? " " 내일부터 밴드부 연습 있잖아! " " ....... " " 류세이도 내일은 나와야 하는데.. " 요 몇 달 동안은 휴식기간이라 동아리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덕분에 류세이의 부재도 묵인됐지만.. 이젠 대회 일정이 공개됐으니 또다시 연습에 돌입해야 한다. 이왕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 데리고 올게. " " 응? " " 내가 책임지고 끌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 깡패시키는 그렇게 말하며 긴 손가락으로 살며시 내 턱을 들어올렸다. 아아.. 이대로라면 아마도 다음 코스는 '베드 인'일 듯 싶다. ^^;; 이젠 방해꾼도 없으니..;; 그나저나 들고 나갔던 만화책은 어디다 뒀더라.. ㅇㅁㅇ;;;; 지금 이 순간 그야말로 동상이몽이다. ^^;; 오랜만에 만난 류세이는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여전히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조금 창백해 보였고 손목도 예전보다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도대체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길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 오.. 오랜만이야. " " ....... " 역시나 예상대로 무반응이다. 녀석은 시큰둥하게 날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책을 안 가지고 다니는지 짙은 감색 가방이 텅 비어있는 듯 하다. " 그동안 왜 안 나왔어? " "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 일이나 똑바로 해. " 뭐..? 이런 개쉐! 나 때문에 얻어터진 게 불쌍해서 말을 걸어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ㅁ=+ 류세이는 차갑게 날 노려보더니 흘끗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깡패시키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하다. 녀석에겐 다행이랄까.. 깡패시키는 선배 따라서 밖으로 나간 상태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류세이는 안심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앞으로 연습은 빠지지 않을 테니 걱정 마. " " ....... " " 그나저나 노래 연습은 좀 했냐? " 움찔..;;; " 너 노래 잘 못하잖아? " 이 싸가지가.. ㅡㅡ+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렇게 내놓고 말해야겠냐!! " 우리들 반주는 최상급이야. 문제는 너지. " " ....... " " 솔직히 네가 가진 거라곤 얼굴 뿐이잖아? " 빠. 직. ++ 마침내 인내심이 끊어진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 그래! 내 얼굴 잘난 거에 네가 뭐 보태준 거 있어!! 못하면 연습해서 잘하게 만들면 되는 거지! 너는 처음부터 북 치면서 태어났냐=?!! =ㅁ=+ " " 북이 아니라 드럼이야. " " 북이나 드럼이나-!! =ㅁ= " 내 말에 놈이 피식 웃는다. 마치 우습다는 듯.. 저거 분명히 지금 날 비웃는 거 맞지-?! =ㅁ=++ 잠시 후 류세이는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야말로 코앞까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 그래.. 이런 거였군. " " ..? " " 이런 거였어. " 이 자식이 미쳤나.. 뭘 혼자 중얼대는 거야.. -ㅁ-;; 어두운 구석에 마주선 지금 상황은 상당히 위험하다. 이 녀석은 내게 원한을 품고 있고.. 무엇보다도 나보다 훨씬 세다. 만에 하나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걸로 내 자존심은 끝장이 나는 거고.. ㅡㅡ;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 뭐.. 뭐가 그렇다는 거야?;; " " ......입술. " " ! " " 녀석이 좋아하는 입술 말이야. " " 무슨 헛소릴 하는.. 읍!! " 읍.. 으으으으으으읍---!!!!!!! >_<;;;;;;; 이 자식 미쳤다!! ㅇㅁㅇ;;; 미친 게 분명하다-!!!! 야리야리한 외모와 달리 엄청난 괴력을 지닌 녀석은 끈질기게 날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키스랄 수도 없는 행위. 결국 난 질끈 녀석의 혀를 깨물어 버렸다. 순간 코끝으로 피 냄새가 번진다. " 젠장.. " 내게서 떨어져나간 녀석은 낮게 중얼거리며 날 노려봤다. 하.. 정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싸이코 미저리 같은 놈이..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 나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녀석의 뺨을 내리쳤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 ....... " " 미친 새끼!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 류세이는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가방을 집어들었다. 살짝 찡그린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다. 입술도 빨갛고.. 순간 방금 전의 일이 떠올라 속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 오버하지마. 그냥 궁금했을 뿐이니까. " " 뭐..? 오버..!? " " 생각보다 별로였어. 그 정도 테크닉으로 잘도 녹여놨군. " " 미.. 미친 새끼!!//// " 젠장! 빌어먹을 자식!! 어디서 그따위 호색한 같은 말을 지껄이는 거야! 그리고 내 테크닉이 어때서!! =ㅁ=+ 나도 당황하지만 않았으면 충분히 현란한 테크닉을..! ....이 아니란 말이다! 위 열매 이 멍청아!! ㅠ0ㅠ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시선을 피했다. 지금 상태로는 깡패시키도 덮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빨리 진정을 해야.. " 앞으로 잘 부탁해. " 진정을 해야.. "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 진정을.. " 조심해. 다음 번엔 널 깔아버릴 지도 몰라. " 진.. ㅇㅁㅇ;;;;; 나..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녀석이 방금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나는 멍해진 채로 멀어져 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류세이.. 이 싸이코에 미저리에 변태에 호색한 같은 자식! 어디 한 번 해봐라! 니놈이 깔리는 지 내가 깔리는 지!! (어.. 어이..!=ㅁ=;;) 나 위열매의 이름을 걸고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 왜 그러고 서있어? " " ! " 깡패시키가 방안으로 들어서며 짧게 물었다. 나는 그제서야 제정신을 찾고 고개를 들었다. " 역시 어제는 좀 무리였나..? " " ////// " " 몸은 어때? " " 괘.. 괜찮아..;;; "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괜찮지 않지만 교내에서 부축 받으며 돌아다니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녀려 보인다느니 툭치면 쓰러질 것 같다느니 말이 많은데.. -_-;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녀석이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 있지.. 나.. " " ...? " " 내가.. 만만해 보이냐..? " " 응. " 젠장.. 생각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ㅁ=+ 나는 탁자에 몸을 기댄채 말을 이었다. " 그럼 나.. " " ....... " " 나.. " 나.. 쉽게 깔릴 것 같이 보여? ...라고는 죽어도 못 물어보겠다. =_=; 나도 명세기 남잔데.. 그런 자존심 상하는 질문을 어떻게 하냐..!;;; 나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 나.. 전에 조민국 만났었어. " " ! " " 그 녀석.. 아직도 너 좋아하는 거 같더라. 그리고.. 류세이도. " " ....... " " 따지고 보면 다들 대단한 녀석들인데.. "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녀석이 내 머리에서 손을 거두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솔직히 넌 나한테 너무 과분한 녀석이니까.. " "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 " 하지만 난 점점 자신이 없어져.. " " ....... " 젠장.. 이런 얘기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기분 탓에 말이 헛나와 버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 나.. 혼자 두지마. " " ! " " 혼자두면.. " 그 짐승 같은 놈에게 덮쳐질지도 몰라. ㅠㅠ 그 자식은 힘이 변강쇠라구. 분명히 아까 했던 말도 농담이 아닐 거야. 깡패시키에 대한 집착과 나에 대한 증오가 합쳐지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지. 아까는 억지로 괜찮은 듯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은.. 조금 무서웠다. 그 야수 같은 눈빛이 날 꿰뚫는 것 같았기 때문에..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다니.. 그것도 성-_-폭행 예고를. .=_=;; 마음 같아선 깡패시키한테 확 찌르고 싶지만 그랬다간 거기서 내 자존심은 끝장이다. 남자한테 깔릴까봐 무서워서 고자질을 하다니..;;; 암.. 안되고 말고.. =_=;; 잠시 후 침묵을 깨며 깡패시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기다리고 있던 말이야. " " 어..? " " 죽을 때까지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 자.. 잠깐..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ㅇㅁㅇ;;; " 만약 내가 먼저 죽게되면 널 같이 묻어달라고 하지. " " 시.. 싫어어어어어--!! =ㅁ=;;; " " 왜그래? 혼자 두지 말라면서? " " 그.. 그건 그런 의미가..;;; " 내가 우물쭈물 거리자 녀석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드리워진다. 그래. 역시 내 몸은 내가 지켜야..! =_=;; 이 녀석도 류세이 못지 않은 호색한이니..;;; 나는 결국 그렇게 두 호색한 사이에 끼어 대회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위태위태한 상황.. 균형이 깨어지면 내 엉덩이도 위험해진다. =_=;; 나는 오늘도 한 마리 양이 되어 구석에서 떨고 있다. ㅠㅠ " 으음.. 와써..? " " ....... " 테이블에 턱을 기댄 채 헤실헤실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 잠시 후 이율의 무표정한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친구 놈들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 저.. 그.. 그게.. 오늘 경훈이 녀석 생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축하주를..;; " " 죄.. 죄송합니다. 제가 부추기는 바람에..;; " 세 남자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이율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눈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어디 보통인물인가. 교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톱 클래스 그 자체인 것이다. " 됐습니다. 제가 집으로 데려가죠. " 이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하고는 반쯤 감긴 눈으로 베시시 웃고 있는 바-_-보의 손목을 잡았다. 강한 힘에 덥썩 안긴 꼴이 된 열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어..? 가게..? " " ....... " " 나 아직 더 마실 수 있는데.. 경훈아.. 너 나랑 빼빼로 게임 하자며..? " 순간 이율의 미간이 좁혀지며 등뒤로 검은 오오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경훈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빨리 손을 내젓는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 그.. 그건 그냥 장난으로..;; " " .......그렇군요. " 촥 가라앉은 목소리. 대답은 '그렇군요' 지만, 얼굴 표정은 '죽여버리겠어.' 다. =_=;; 이율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열매를 안아들었다. 워낙에 마른 몸이라 종이인형처럼 가볍게 들린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가고.. 뒤에 남은 세 사람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 야.. 장난 아니다. 소문 이상인데..? " " 위열매 재주 좋구만. " " 그나저나 경훈이 너 이제 조심해야겠다.; " " ㅡㅡ;; " 경훈이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술잔을 들었다. 그야말로 뒤끝이 안 좋다. 소문에 의하면 신경에 거슬리게 했다가 멀쩡한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소문이란 거야 부풀려지게 마련이지만.. 오늘 만난 강이율이란 남자는 소문 이상이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 만큼 강인한 느낌이랄까.. 평소에 입담 좋기로 소문난 한경훈도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할 정도였으니.. 경훈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위로 퍼져 가는 담배 연기 속에 나머지 두 사람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 조심해라. 한경훈. " " .....젠장.. " 경훈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찜찜한 끝이다. ㅡㅡ;; 어두운 방안. 이율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열매를 침대에 눕혀놓았다. 얼마나 마셨는지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평소 열매의 주량을 알고있는 이율로선 인상을 쓰게되는 게 당연하다. " 여기 어디야..? " " 집. " " 어..? 3차로 노래방 간다고 했는데..? " " ........ "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로 이율을 올려다보던 열매가 갑자기 헤실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녀석의 술버릇은 '웃기'인 모양이다. " 야.. 나 오늘 소주 한 병이나 마셨다~~ >ㅁ< " " ......알았으니까 누워. " " 경훈이가 폭탄주도 만들어 줬어. " " ㅡㅡ+ " 순간 이율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잔뜩 취한 탓에 그걸 눈치 챌 리 없는 바-_-보는 정신 없이 떠들어대느라 바쁘다. " 너도 같이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헤~ " " ......알았으니까 빨리 누워서 자. " 이율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달래듯 열매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가슴까지 올라오도록 이불을 덮어준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이율 사전에 남 뒤치닥거리를 하게 될 줄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위열매를 만난 뒤론 고생이 끊이지 않는다. 시끄러운 말썽쟁이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는 기분이랄까.. 뭐.. 결국은 본인의 뜻으로 떠맡은 짐이지만. 잠시 후 배개에 머리를 누인 열매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음정, 박자, 가사까지 엉망인 탓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노래를. 이율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열매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며 피식 웃었다. " 왜 웃어..? 내 노래 이상해..? " " 술 주정 그만하고 빨리 자. " " 으으.. " " ...? " " 더워.. -ㅁ- " 뇌쇄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인다. 그야말로 붉은 열매 빛의. 지독한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주제에 얼굴은 지나치리 만큼 달콤하다. 이율은 잠시 열매를 내려다보다가 커다란 손을 뻗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금새 가느다란 목이 드러난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붉은 흔적은 분명 자신이 남긴 것. 가끔은 일부러 눈에 띄도록 위쪽을 노리기도 한다. 짓궂은 장난이라고 할까.. 당황한 채로 징징대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우니까. " 손 좀 조바.. " " ? " " 빨리 조.. ㅡㅅㅡ* " 술기운이 짙어지는지 혀가 꼬이기 시작한다. 소주 한 병에 이렇게 되다니.. 이율은 피식 웃으며 긴 손가락을 열매의 뺨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녀석이 억지로 감기는 눈을 뜨려 애를 쓴다. " 아.. 있네.. " " ....? " " 난 혹시.. 나만 끼고 다니는 건가 했지.. " 반지 얘기다. 감기는 눈을 꿈뻑거리며 이율의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율 의 실루엣을 찾기 시작했다. 불을 켜지 않은 상태라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 여기.. 아직도 아파? " " 아.. 다 나았어.. "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활짝 웃는 녀석. 하지만 새하얀 이마엔 상처가 옅게 남아있다. 처음보단 확실히 많이 나았지만.. 이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댔다. " 조민국이지..? " " ! " " 속일 생각하지마. 네 친구한테 이미 다 들었으니까. "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사람에겐 느낌이란 게 있다. 특히나 이 남자의 직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열매는 배개에 얼굴을 묻은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이율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 다 끝난 일인데.. 뭐.. " " ......안 졸려? " " 응..? " " 자. 너 내일 오후에 수업 있잖아. " " 응.. " 열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율을 올려다봤다. 달빛에 드러난 곧은 콧날과 턱 선은 언제 봐도 감탄을 자아낸다. 천천히 손을 뻗어 얼굴 선을 쓰다듬자 이율이 열매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몸을 숙여 가슴을 밀착시켰다. 잔잔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녀석에게서 술 냄새가 난다는 것. " 으음.. " 농후한 키스가 길게 이어지며 방안의 공기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이율의 긴 손가락은 어느새 셔츠 속을 파고들어 마른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술기운에 힘이 쫙 빠진 상태의 열매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짧은 신음만 뱉어냈다. " 아.. " " 갈까..? " " ////// " 빨개진 얼굴로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인다. 이율은 희미하게 웃으며 좀 더 대담하게 탐닉해나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달콤한 속삭임은 잊지 않는다. " 고개 들어. " " 으.../// " 이율은 짧게 숨을 삼키며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느다란 목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어느 곳을 느끼는지.. 어디에 손이 닿으면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 그런 건 이미 뇌 속에 깊이 입력되어 있다. 시간이 갈수록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워나간다. 열매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다. 척 봤을 때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랄까.. 굳이 비교하자면 류세이 쪽이 훨씬 가늘고 높다. " 앗..! " " 참을 필요 없어. " " 하아.. " 술기운 덕분인지 평소보다 훨씬 감도가 좋다. 그만큼 협조적이기도 하고. 이율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열매의 허벅지를 살짝 쓰다듬었다. 순간 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 으읏..!//// "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몸을 내맡긴 열매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거친 숨을 뱉어내고 있었 다. 달빛에 드러난 가느다란 곡선이 아찔할 만큼 관능적이다. 이율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깊숙이 손가락을 가져갔다. 크게 휘청이는 다리를 단단히 잡고 몇 번을 반복한 뒤에야 몸을 밀착시킨다. 열매는 억지로 신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많이 고통스러운 듯 끝없이 숨을 헐떡이며. 이대로라면 술이 깨는 건 시간문제다. " 아... 윽..! " " 허리 좀 들어봐... " " 흐윽..... " 이미 흠뻑 젖어버린 몸이 달빛에 반짝거린다. 열매는 한쪽 팔로 얼굴을 감싼 채 깊게 숨을 삼켰다. 다른 한 쪽 손은 시트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 마침내 격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열매는 눈물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이율이 잠시 속도를 늦춘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방안의 공기도 함께 물들어간다. 방금 전까지 농후한 색기를 흘리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다. 알콜의 힘으로도 고통은 이길 수 없는 건가.. 이율은 몸을 밀착시킨 채로 열매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녀석이 감았던 눈을 떠 이율을 바라본다. " 그때 했던 말 기억 나? " " ...? " " 수영장에서 했던 말. " 순간 작은 얼굴이 화악하고 붉어진다. 아아.. 다행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율은 웃으며 말했다. " 지금 해 봐. " " ////// " " 안 하면 끝까지 갈지도 몰라. " " ㅜㅜ " 끝까지라면.. 분명 8번 이상이다. 아무리 술기운을 빌린다고는 해도 그건 절대 무리다.;;; 방금까지 상냥하다가도 금새 악마로 돌변하는 녀석.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이율을 바라보던 열매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 다.. 다른 말하면 안 돼? " " 무슨 말..? " " ////// " " ....... " " .....조..//// " 이미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듯 이율은 웃고 있다. " 좋아해..//// " 역시나 예상하고 있던 대답일까.. 이율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어깨를 끌어안으며 큭큭대며 웃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 상냥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 강도가 약했으니 벌점 2점. " " 야!!! 그런 게 어디있.. 윽...!!!! " 집안을 가득 메우는 달콤한 비명 소리. 오늘도 역시 즐거운 밤이다. ^^;;; 아까부터 옆에서 기분 나쁘게 흘끔흘끔 날 쳐다보고 있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수업에 집중하려 했지만 날 향한 시선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 오우~ 피부 죽이는데~ " " -_-+ " 내 옆의 이 변태쉐이는 6수 끝에 입학한 그야말로 늙은 동급생이다. 얼굴도 삭아서 절대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게.. 딱 노가다꾼으로 생겼다. ㅡㅡ; 무슨 멋인지 길게 기른 구렛나루와 곱슬거리는 철사 머리. 시커먼 피부 위에 깊게 패인 수염자국. 얼굴엔 개기름이 흐르고 목소리는 느끼의 극을 달린다. 사람을 외모로만 평가한다면 낙제점을 받기에 충분하다. 나는 애써 무시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또다시 끈적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든다. ㅡㅡ;; " 얼굴도 죽여주게 이쁘고.. " " ㅡㅡ+ " " 야.. 고개 좀 돌려봐. 이쁜 얼굴 구경 좀 하게. " 변태 새끼. -ㅁ-+ 성질 같아선 의자를 면상에 집어던지고 싶지만 수업중이라 참는다. 가뜩이나 싫어하는 수업이라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별 거지 같은 놈이 다 엉겨붙고 난리다 나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천천히 턱을 괴었다. " 야.. 너 내 이름 알아? " " 관심 없어. ㅡㅡ+ " " 오~ 쌀쌀맞은 게 귀여운데~ " =_=;; 아침에 먹은 게 올라올 것 같다. 이 변태놈은 우리 과에서 꽤나 유명하다. 전설의 껄-_-떡쇠라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껄떡대는 게 취미란다. 젠장.. 재수 없게도 이번에 걸린 게 나인 모양이다. ㅡㅡ;; " 내 이름은 장덕팔이야. 잘 기억해 둬. " " ....... " 씹자. ㅡㅡ " 너 애인 있냐..? " " ....... " " 있냐고..? " " 그래. 있다! " " 어떤 년인데? 아니면 놈이냐? " " ....... " 젠장.. 속삭인다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 지 시선집중이다. 교수까지 말을 멈추고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_-;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늙다리 변태를 노려봤다. 하지만 느끼한 면상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안타깝게도 난 비위가 약하다. ㅡㅡ;; " 끝내주게 멋진 애인 있으니까 나한테 신경 꺼. -ㅁ-+ " "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나? " 미친놈. 골키퍼한테 맞아죽고 싶으면 계속 하던가. ㅡㅡ 마침내 수업이 끝나고.. 나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장덕팔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 수업도 끝났는데 나랑 같이 밥 먹자. " " 싫으니까 이거 놔. " " 아아.. 자꾸 그렇게 튕기지 말고. " " 미친 새꺄!! 싫다고-!! " 결국 참다 못한 내가 소리치자 놈이 벙찐 얼굴로 날 바라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을 빼냈다. 산적 같은 외모답게 힘도 쎄서 손목에 시뻘겋게 손자국이 났다. ㅡㅡ;; 뭘 먹고살면 저렇게 변강쇠가 되는 걸까.. 잠시 날 바라보던 장덕팔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 좋아.. " " !? " " 성격도 맘에 드는데..?/// " =ㅁ=;;;;; 미. 치. 겠. 다. 그러니까 지금.. 저 놈이 나한테 윙크한 거 맞지...?;;;;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황급히 가방을 매고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자리 뛰기다. 이미 변태쉐이에게 가방을 잡혀버렸기 때문에.. -ㅁ-;;;;; " 이.. 이거 놔!! " " 네 이름.. 위 열매지? " " ....=_=;; " " 한영고 출신. 2남 중 장남. 혈액형은 A형. " 뭐.. 뭐냐!! 이 미저리 같은 대사는-!!!! =0=;; 장덕팔은 웃으며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이미 모두 빠져 나가버린 텅 빈 강의실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보라랑 경훈이는 아예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머지 놈들은 의리없이 죄다 식장으로 직 행해버린 거다. 젠장. 그런 놈들을 친구라고 믿었던 내가 병신이지. =ㅁ=+ 나는 애써 장덕팔의 시선을 외면하며 차갑게 말했다. " 이거 놔. " " 같이 밥 먹겠다고 하면. " 하.. 정말 미저리가 따로 없다. 이 배불뚝이 구렛나루 느끼 변태 미저리가 지금 뭐라는 거냐. 나랑 같이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_- 나는 빨리 집에 가서 율이 밥 줘야 한단 말이다!! =ㅁ= 탁-- 큰 소리가 나도록 세게 손을 쳐내자 장덕팔이 당황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 혹시.. " " ...? " " 지금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거야..? " " =ㅁ= " 어.. 언제 사랑으로 발전했냐..??;;; 저 진지한 눈빛..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 나 장덕팔 25년의 인생을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 " 야..;; " " 너라면 내 전부를 걸어도 좋아. " " 끄.. 끔찍한 소리하지마!!!! =ㅁ=;;; " 나는 빼액하고 소리친 뒤 재빨리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물론.. 결국엔 변강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 그 잘난 골키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덕팔한테는 안 될거다. " " 웃기네!! " " 그 자식.. 나보다 잘 생겼냐? " 너보다 못생겼으면 죽어도 한 집에서 같이 못산다. ㅡㅡ;; 못생긴 건 둘째치고 그 개기름만이라도 좀 어떻게 해봐라.. 얼굴을 마주하려니 아주 찜찜해 죽을 것 같다.;;; 나는 차갑게 놈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집어들었다. 가볍게 툭툭 먼지를 털고 있는데 갑자기 허리에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 허리도 절라 가느네. 24쯤 되냐? " " 미.. 미친 새꺄!! 당장 손 안 치워??!!!! " " 큭큭.. 이 녀석 화내는 것 좀 봐./// " 놈은 내 말은 듣는 척도 안하고 한 팔로 내 허리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뺨을 쓰 다듬기 시작했다. " 야! 이 변태 새꺄--!!!! " " 아직도 솜털이 나냐..? " " 손 치우라고 했지-!!! =ㅁ=++ " 놈이 바싹 몸을 밀착시키는 바람에 까슬한 철사 머리가 목에 닿았다. 완전히 수세미 그 자체다.;; 그렇게 한참 녀서과 실갱이를 벌이고 있는데.. 잠시 후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보아 운동화인 것 같은.. 그리고 잠시 뒤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놀랍게도 류세이였다. " 오늘 소집 있으니까 참석하랜다. " 여전히 뚱한 얼굴. 그러나 잠시 나와 변태놈을 번갈아 보더니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운다. -_-; " 아.. 알았으니까 나 좀 도와줘!!!;;;; " " ....... " 류세이는 대답 대신 사악하게 웃었다. ㅡㅡ;; 그리고는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먼저 갔다고 전해 주지. " " 뭐..!?;;;; " " 계속 해. 방해꾼은 사라져줄 테니. ^^ " " 야!! 기다려!!! 류세이이이이~~!!!!!! "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놈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장덕팔의 품-_-안에서 버둥거렸다. 그러나 몸에다 끈끈이를 붙여놨는지 쉽사리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류세이! 이 띠벌 쉐이! 넌 이제 죽었어!!!! =ㅁ=++ 한참의 실갱이에 지쳐버린 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 알았어. 밥 같이 먹을 테니까 이 손 치워. " " ....... " " 빨리 치우라고!! " 역시 전설의 껄떡쇠 답다. 소문을 들었을 땐 웃고 넘겼는데 이제 보니 아주 악질이다. ㅡㅡ;; 몇 달 전 장덕팔이 2학년 선배를 쫓아다녔는데 스토킹을 견디다 못한 선배가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젠 내 차례인가.. -_-;;; 잠시 침묵을 지키던 껄떡쇠가 천천히 손을 풀었다. 그제서야 숨이 탁 트이는 것 같다. 나는 잠시 놈을 노려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키는 180 정도.. 깡패시키 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나에 비하면 크다. " 갈까? " 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젠장.. 눈이 썩는 것 같다. =_=; 나는 억지로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 글쎄.. ^^ " 그리고는 재빨리 퍼억--하고 놈의 급소를 걷어차 버렸다. 순간 놈의 입에서 끊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 내가 너랑 밥을 왜 먹어!? 이 변태 새꺄!!! =0=+ " " 너..! 윽... " " 다시 한 번 내 몸에 손댔다간 죽을 줄 알아!!! "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놈에게로 빼들었다가 재빨리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등뒤로 놈의 포효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해 버렸다.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류세이라는 이름뿐. 놈의 외면으로 잠시 위험의 나락에 빠졌던 나다! 내가 쉽게 용서할 것 같은가!! 쾅--!! 동아리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간 나는 열심히 놈을 찾기 시작했다. " 너 집에 간 거 아니었어? " 나직한 목소리. 깡패시키가 책을 든 채로 가까이 다가왔다. 역시나 류세이가 거짓 보고를 한 모양이다. =_=+ " 류세이는!!? " " 뭐..? " " 그 자식 어디 갔어-?!! =ㅁ=+ " 폭주한 용-_-가리처럼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데 잠시 후 내 앞으로 류세이가 모습을 드러 냈다. 활짝 피었던 얼굴은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확 굳어버렸다. 그래.. 애초에 널 살려두는 게 아니었다. 류세이. 잠시 놈을 노려보던 나는 재빨리 가방을 집어 던지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2라운드 시작이다. 갑작스런 나의 공격에 당황한 류세이는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신음을 뱉어냈다. 바닥에 쓰러진 놈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날 올려다본다. 매서운 눈.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커다란 눈으로 죽일 듯이 날 노려본다. " 왜 이래? " 뭐..? 왜 이래..?? =ㅁ=++ " 지금 몰라서 묻냐-?!! " " 그래. 몰라. " 하..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위험에 빠진 사람 그냥 지나치는 건 엄연한 방관 죄라는 걸 모르나! 저 도도한 면상 좀 봐라. 보고 있으려니 아주 억장이 무너진다. =ㅁ= 잠시 벙찐 채로 놈을 내려다보던 나는 재빨리 놈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그러자 놈이 얉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별로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해대며.. ㅡㅡ;; 온갖 가녀린 척은 혼자 다한다. 그나마 얼굴과 매치가 되니 나조차도 잠시 움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잠시' 다. 잠. 시. =_=+ 난 지금 위열매가 아니다. 폭주한 용-_-가리인 것이다!! 자..!! 다시 돌격이다! 위열..아니, 용-_-가리!!!! 나는 우악스럽게 놈의 멱살을 잡고 일으킨 뒤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평소 쌓인 게 많았던 덕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 퍽--- " 큭...! " 놈은 짧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역시 피를 토할 듯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쇠파이프로 내리친 줄 알겠다. =_=;; 저번에 싸울 땐 비웃으며 피하더니 오늘은 대체 왜 이러냐..? 갑자기 왜 어울리지도 않게 엄살이냐고!! 속으로 놈의 속셈을 파헤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잠시 후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 려왔다.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인 양.. 최대한 가늘게 낸 목소리는 소름이 다 돋을 정도다. 이게 정녕 사내자식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란 말인가..;;; 놈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생쇼를 이어나갔다. " 왜.. 왜 이러는 거야..? " 이젠 울먹이기까지 한다.;;;; 얼굴 되겠다, 연기력 되겠다, 빨리 연예계로 진출해라. ㅡㅡ+ " 내가 거슬리는 거야..? " " =_=;; " " 왜 나한테.. " " 야! 헛소리 집어쳐!! 내가 아까 도와달라고 할 때 네가 한 짓을 생각해!! " "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 아까 만난 적이 있었어..?? " =ㅁ=;;; 이 개쉐가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다. 가증스럽다 못해 치가 떨린다. 잠시 놈을 노려보던 나는 그대로 놈에게 머리를 날렸다. 내가 노린 곳은 놈의 가슴. 뼈가 가늘어서 펀치가 약하니 머리로라도 해결을 할 수밖에. 그러나 천부적인 싸움꾼인 놈이 쉽게 당할리 없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놈은 일부러 약한 주먹만 골라가며 맞았다. 이제까지 비실거리는 주먹을 맞고는 바닥에 쓰러지며 온갖 생-_-쇼를 다 한 거다. 이유는 아마도.. 뒤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는 깡패시키겠지. 녀석은 아까부터 말없이 팔짱을 낀 채 구경중이다. ㅡㅡ; " 너 지금 피했냐!!? " " 네가 날 모함하니까! " " 뭐..!? 모하아암~~??!!!! =ㅁ=++ " 이 자식 이제 보니 악질 중의 악질이구만..!! 온갖 청순한 척 쇼를 하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덮어씌우기냐!! 네 놈이 그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냐!! =0=++ 놈의 말에 마침내 뚜껑이 열린 나는 그래도 달려들어 놈의 팔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_-; 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주먹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니..;;; 그러자 놈이 비명을 질러댄다. " 으아아아아아아아악---!!!!! " 그래.. 사실은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명색이 한 소설의 주인공인데 이미지를 이렇게 망쳐서야 되겠는가.;; 그것도 마이 허-_-니 앞에서..;;;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이성은 그만두라고 외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말했지 않은가.. 난 이 순간 위열매가 아니라 폭주한 용-_-가리라고.. -_-;; " 너 때문에 그 자식한테 덮쳐질 뻔했는데 몰라?? 모른다고!!?? " " 무.. 무슨 소릴.. -ㅁ-;; " " 내가 도와달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 " 이것 놓고.. " " 넌 오늘 죽었어!! " 그렇지 않아도 장덕팔의 손길이 몸에 남아 찜찜해 죽을 것 같은데 신경을 긁어?? 나도 처음엔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이거야! (거짓말-_-)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니까 내가 우습게 보이더냐! 류세이!! 오늘 아주 그 때의 그 입맞-_-춤 값까지 쳐서 물어주마!! =0=+ 나는 열심히 주먹과 머리, 발과 이-_-빨을 사용해 놈을 공격했다. 그래.. 나도 참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잠시 후 누군가가 뒤에서 강한 힘으로 날 잡아당겼다. " 그만 해. " 귀에 익은 근사한 저음. 깡패시키다. " 이... 이거 놔!! 오늘 아주 끝장을 낼 거야!! =ㅁ=++ " " ....... "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빼액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속삭이듯이 상냥한 목소리로. " 그렇게 때려서 죽겠냐.. " ...!? " 어떻게 그대로냐 넌. 그 때랑 달라진 게 없어. 뭐..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었 지만. " 그렇게 말하며 날 등뒤로 돌리는 깡패시키. 녀석은 등을 돌린 채로 나직히 말을 이어나갔다. " 죽이면 되는 거냐? " " =ㅁ=;;; " 자.. 잠깐...;; " 코뼈부터 부러뜨릴까..? 아니면 턱..? 말 해. 원하는 대로 해주지. " " 야..;; " " 아니면 내 맘대로 할까..? " 여.. 여보세요..? ㅇㅁㅇ;;;; 당신이 그런 말하면 농담처럼 안 들린다는 거 아시는지..? =ㅁ=;;; 나는 황급히 앞으로 걸어나가려는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그야말로 필사적이다. 왜냐하면.. 난 과-_-부가되기는 싫으니깐..!! >ㅁ<;;;;; " 놔. " " 아.. 아니야! 됐어! 이제 됐어!! 이미 내가 많이 패놨고..!!;;; " " 솜방망이 같은 주먹 몇 대 맞아봤자 아프지도 않아. " " 그.. 그치만 아까 팔도 두 번이나 물었는데..! ㅇㅁㅇ;;; " " ....... " " ^ㅁ^;;; " " ........멍청이. " " =ㅁ=;;; " 놈은 짧게 말하며 냉정하게 내 손을 뿌리쳤다. 오늘따라 녀석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진다.;; " 그 새끼 이름이 뭐야? " " !? " 그.. 그 새끼..??;; " 널 덮.치.려.고.했.던. 새.끼. 말이야. " 아..;; 그제서야 생각이 난다. 홧김에 엄청난 사실을 불어버리고 만 거다. ㅇㅁㅇ;;; 웬만하면 나 혼자서 조용히 처리하려했던 일을.. 이게 다 저 류세이자식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척 연기를 하고있는 놈을 노려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그.. 그냥 장난친 거 같.. " " 이. 름. " " 그..;;; " " 그럼 내가 덮쳐주지. " " 자.. 장덕팔이야-!! =ㅁ=;;; " 시끄러워질 것 같아 입다물고 있으려 했지만 일단은 나부터 살고 봐야지.;;; 어차피 그 놈도 제거되어야할 대상 아니던가.. ㅡㅡ; 다만 문제는.. 깡패시키가 얼마만큼 절제를 하는가다. 장덕팔도 어느 정도 싸움을 하는 모양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이 녀석한테는 안 될 테고.. " 장덕팔.. " " ㅡㅡ;; " 깡패시키는 가만히 중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 ......지금 어디 있어? " " 내.. 내가 벌써 해결했어!! 이젠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말해놨어!! ㅇㅁㅇ;;; " 아직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_-;;; " 이젠..? 그럼 이미 손댔단 말이군. " " =ㅁ=;;; " " 아.. 하.. " 놈의 주위로 서서히 펴져 가는 검은 기운..;;; 손이 닿은 곳이라고 해봤자 겨우(?) 뺨과 턱, 허리뿐이지만.. 그걸 이 녀석이 용서할 리 없다. 이미 모두들 알고있지 않은가.. 이 녀석이 얼마나 독점욕이 강한 지..;;; 방금 전 책을 손에 들었던 지적인 이미지의 녀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나의 한 마디 말실수에 처참한 살인극(!)의 서막이 오른 거란 말이다. ;ㅁ; 실제로 고등학교 재학 시절 깡패시키는 심심할 때마다 애들을 모아서 패싸움을 했고 그 중 몇 번은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때마다 녀석의 배경이 깨끗이 일을 해결해주었지만.. 그러니까 녀석이 죽인다고 하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사람 하나 죽인다고 눈 하나 깜짝할 녀석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배경으로 인해 아예 사건 자체가 묻혀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나 같은 서민이 이해할 수 없는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랄까.. ㅡㅡ;; " 장덕팔.. 물론 같은 과겠지? " " 자.. 잠깐만..;;; " " 이 녀석은 네가 해결해. " " !?" 깡패시키는 내게 속삭인 뒤 고개를 돌려 류세이에게 말했다. " 움직이지 마. " " 이.. 율아..;;; " " 그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마. 피하는 것도 용서 안 해. 무슨 뜻인지 알겠어? " 내 애인 놈이지만 진짜 무섭다.. =ㅁ=;;;; 나 이대로 계속 이 녀석이랑 살아도 되는 걸까..;;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거 아냐..??;;;;; 그리고 잠시 후.. 녀석은 덩그라니 우리 둘을 남겨둔 채 밖으로 사라졌다. 강이율 골-_-키퍼의 껄떡쇠 사냥이 시작된 거다.;;; 그리고 여기는.. 3라운드.. 깡패시키의 협박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류세이. 그야말로 인간 샌-_-드백이 되어버린 불쌍한 놈.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뒤 깊게 숨을 들이켰다. 파이널 라운드다. 류세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얼굴이 잔뜩 굳어있다. 얄밉도록 예쁜 얼굴은 내 솜-_-방망이에 맞은 탓에 살짝 부어 올라 있다. 입술도 터져 있고.. 군데군데엔 멍이.. 나는 잠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녀석이 인상을 찡그린다. " 빨리 패고 끝내버려! " 곧 죽어도 큰 소리는.. -_- 나는 대답 대신 녀석 앞에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우두커니 선 채로 날 내려다보는 류세이. " 때리는 건 됐고.. " " !? " 나는 키득거리며 손을 뻗어 녀석의 뺨을 쓸어 내렸다. 그러자 놈이 흠칫 놀란다. 뺨을 몇 차례 쓰다듬고 난 뒤 천천히 양 손가락으로 볼을 쥐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굴에 살이 없어서 잘 잡히지 않는다. ㅡㅡ;; " 뭐.. 뭐 하는 거야!;;;; " " 그냥.. " " 뭐가 그냥이야-!? 빨리 손 치워!!;;; " 헤~ ㅡㅅㅡ* " 맞을 때는 별 반응도 없더니 아무래도 뺨이 약점인 모양이다. 늘 깡패시키한테 당하기만 하다가 직접 해보니 재미가 쏠쏠하다. 평소답지 않은 녀석의 반응도 재미있고. " 아.. 아파!! 그만 해!! " 나는 마지막으로 길게 주욱 늘인 뒤 손을 뗐다. 녀석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찔끔거린다. 오오.. 자존심 강한 녀석이 웬일로 눈물을..?! 아무래도 심적인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이러고 보면 나도 꽤 잔인한가..? ㅡㅡa " 이게 뭔지 알아? " " ! " 나는 천천히 녀석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가운데 커플링이 예쁘게 자리잡고 있다. 류세이는 진지하게 반지를 바라보더니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 뭐.. 야.. 이게..? " " 반지. " " 그걸 누가 몰라!!? " " 약. 혼. 반. 지. *ㅡㅅㅡ* " " !! " 순간 놈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완전히 석고상이 되 버렸다. 나는 천천히 손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 너.. 아직 그 녀석 좋아하지..? " " ....... " 류세이는 대답 대신 죽일 듯이 날 노려봤다.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야말로 분하다는 표정. 나한테 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녀석의 시선이 따라 내려온다. 덕분에 온 몸이 따끔따끔.. ㅡㅡ;; 만일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난 이미 전기구이가 되어 바닥에 누워있을 거다.;; " 우리는 앞으로 계속 같이 있을 거야. " " ....... " " 네가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그 녀석을 믿고.. " " ....... " " 그 녀석도 날 믿으니까. " 나는 덤덤하게 말하며 류세이를 바라봤다.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과 손. 아마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겠지. 나도 대놓고 이런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장덕팔 문제도 머리가 아픈데 빨리빨리 해결을 봐야지.. 물론 이 녀석이 쉽게 떨어져나갈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 네 기분 이해 해. " " ....... " " 내가 밉겠지. 그래서 내 말 무시하고 가버린 거겠지. " " ....... " " 그래.. 어쩌면 나라도 그랬을.. "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물렁한 인간이라.. ㅡㅡ;; 그.. 그래도 어쨌건--!!!;;;;; "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 젠장.. 너무 깊이 생각했더니 말이 꼬여버렸다.;; 하여튼 이놈의 허접한 뇌는 용량이 너무 딸린다니깐! -_-;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녀석의 앞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 이제 유치한 싸움은 그만 하자. " " ....... " " 이래봤자 서로에게 좋을 거 없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 " ....... " 나는 손을 내민 채로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류세이가 말없이 내 손으로 시선을 옮긴다. 여전히 굳어 있는 얼굴. 아니.. 좀 더 어두워진 것 같기도 하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는데.. 잠시 후 녀석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친하게 지내자고..? " " 아... "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 동정하는 거야? " " ...뭐..? " " 네가 날??! " " ! " 한 순간이었다. 강하게 몸이 앞으로 당겨지는가 싶더니 거칠게 밖으로 밀쳐졌다. 어정쩡하게 무릎을 굽힌 채로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순간 류세이가 강한 힘으로 날 밀어뜨렸다. " 윽..! " 결국 바닥에 大자로 뻗어버린 나는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녀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위를 덮쳐왔다. 내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 너..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 " 웃기지마. " " 뭐..? " 류세이는 웃고 있었다. 얼굴 가득 악의로 가득찬 미소를 띄운 채로.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 네가 감히 날 동정해? " " 저.. 저리 비켜!!;;; " " 위열매 따위가!? "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가 날카롭게 주위를 물들이는 순간, 어깨에 한기가 느껴졌다. 차가워.. 아니.. 추..워..? 놈의 무게에 눌린 팔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훤히 드러난 목과 어깨에 오한이 느껴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바닥 위로 떨어진 단추가 보였다. " 너..! " " 그래서 내가 조심하랬잖아. " " 야!!!! " " 경고했지? 다음 번엔 널 깔아버릴지도 모른다고. " " 이 c8 변태 새꺄---!!!! " 나는 최대한 힘을 짜내 놈을 밀어뜨리려 노력했지만 결국 뺨만 한 대 맞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귀까지 얼얼하다. 여우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힘은 변강쇠를 능가한다. 양 손목을 잡힌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현재 자유로운 건 목소리 뿐. 나는 놈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 이 개변태 새꺄!! 너 진짜 디지고 싶냐--!?!! " " 지금 그런 말 할 입장이 아닐텐데? " " 빨리 치워!! 호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 " 난 그 녀석처럼 부드럽게 하지 않을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 " 뭐......?? " 아.. 지금 뭐하는..!? 최대한 고개를 빼고 보니 녀석이 거칠게 내 상의를 벗기고 있다! 그야말로 굶주린 수컷(!)의 얼굴을 하고서! 아.. 아무래도 실제상황인 모양이다!! =ㅁ=;;;; 나는 죽을힘을 짜내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매서운 손바닥 뿐. 양 볼이 얼얼해졌지만 끝까지 비명을 질러댔다. 아무나!! 제발 지나가는 누구라도!!! " 시끄러워! " 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치며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양팔은 이미 셔츠에 묶여버린 상태. 그것도 하필이면 깡패시키가 사준 셔츠다. " 장덕팔인가 하는 놈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 " 으읍--읍읍---!!! " " 얌전히 있으면 조금쯤은 즐기게 해 줄 수도 있어. " 류세이는 소름끼치도록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웃기까지!! 아무래도 진짜 미친 모양이다!!!! ㅠㅠ 차가운 공기에 드러난 몸은 금새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라리 추운 게 낫다. 이 변태새끼의 손에 닿는 것보다는! " 그래.. 뒷감당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싶지? " " 읍--- " " 그만 둘 거야.. 학교.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주지.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봉사한다고 생각해. " 저.. 정말 할 셈인가--!! =ㅁ=;;;; 나는 마지막 힘까지 짜냈지만 결국 놈의 힘에 눌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곳은 학교와 꽤 거리를 두고 있는 별관. 이 시간이면 대부분 수업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겠지.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 건물엔 거의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난.. 난 이제.. 이제.. 찰칵-- " !! " 이 금속성.. 벨트 풀리는 소리다!! " 읍!! 으으읍--!! 읍읍읍읍------!!!!!! " " 걱정마. 뭐.. 위는 나도 처음이지만. " 이 변태새끼!! 개자식!! 썩은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같은 새꺄---!!!!!!!!! 나는 눈물까지 흘리며 소리쳤지만 옷 뭉치에 막혀 밖으로는 전달되지 못했다. 정말 스스로의 무력함에 눈물이 난다. 아..! 차가운 공기가 하체에 닿는다. 훤히 드러난 가느다란 다리.. 억지로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기분 나쁜 감촉이 닿아왔다. " 원망하려거든 날 거절한 네 애인을 원망해. " 어스름한 어둠 속에 드러난 류세이는 잔혹하게 웃고있었다. 끈적한 손길이 쉴새없이 몸 위로 쏟아졌다. 거칠게 가슴을 쓸어 내리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온다. 나는 온 몸을 결박당한 채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결국 밖으로는 전달되지 못했지만. " 피부 좋은데..? " 놈이 야비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손가락으로는 여전히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지금, 나는 내 자신이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 병신같이 같은 나이, 비슷한 체격의 놈한테까지 당하다니. 자존심 상한다. 그리고.. ....두렵다. 여지껏 깡패시키 외엔 누구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는데.. 나 정말 이대로 당하는 걸까...? 잠시 후 허벅지를 쓰다듬던 손가락 하나가 거칠게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나는 짧게 숨을 삼키며 또다시 필사적으로 버둥대기 시작했다. " 읍- 읍읍읍- 읍읍---!!! " " 이제 시작이니까 미리 떠들 거 없어. " " 읍읍- 읍읍읍읍읍--!!!!! " 풀어! 이 개자식아-!!!! 소리치고 싶다! 그리고 죽이고 싶다! 웃으며 날 유린하고 있는 놈을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리고 싶다! 죽여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파묻어 버리고.. " 엉덩이가 예쁜데 그래..? " 아니..! 불태워버리고 말겠어!! 절대로 용서 안 할 거야!! 시간은 잔인할 만큼 느리게 진행됐다.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 스물스물한 그 느낌에 온 몸이 깊숙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다. 서클 실에 감도는 탁한 공기. 어느새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커져 가는 고통을 억누르느라 이마에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 아파..? " " ........ " " 역시 처음이라 좀 서툰가? " 놈은 큭큭대며 웃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정말.. 하려나 보다.. 나는 결국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이런 자식 앞에선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저 누군가가 와주길 바라는 것 외에는. 아니.. 그렇게 되도 문제다. 벗겨진 채로 류세이의 장난감이 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잠시 후 하반신을 드러낸 놈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 느낌이다. " 한 번에 들어갈 거니까 힘 빼. " " ....... " " 이젠 포기냐..? 왜 가만히 있어? 이러면 재미 없잖아. " 나는 말없이 놈을 노려봤다. 그러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내 뺨을 쓸어내렸다. " 뭐야, 그 눈은? 건방지게. " " ....... "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이 개변태새끼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더 이상 치졸하게 애원하지 않을 테니까!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널 죽여버릴 거야! 이 이상 날 건드리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는 굳은 얼굴로 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 아까 네가 그랬지? 날 이해할 수 있다고. " " ....... " " 그럼 계속 이해해 줘. 난 이미 미친 걸지도 모르니까. " " 확실히 그런 것 같군. " " !! " " !! " 아... 이 목소리.. 내가 그토록이나 기다렸던 목소리..다..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결국 포기하지 못했던.. 어떻게 이 녀석은 절제절명의 순간마다 내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걸까.. 나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 류세이.. " " 아.. " 류세이는 새하얗게 변한 얼굴을 들어 깡패시키를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황급히 내 위에서 비켜섰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들어온 깡패시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방금 사람을 죽이고 왔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살벌한 표정. 나는 훤히 드러난 그 곳을 가리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결박당한 손목의 통증도, 온 몸을 덮는 한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나타나준 녀석이 너무나 고맙고.. 또 원망스럽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녀석에게 소리라도 칠 수 있으면 좋겠다. " 흐으.. " 아주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깡패시키는 한달음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 ....... " 녀석은 무릎을 꿇고 눈물로 흥건히 젖어버린 얼굴을 꽈악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조금만 기다려. " " .......흐.. " " .......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재빨리 움직이며 내 손목을 묶고있는 셔츠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묶여있던 상태라 손목에는 보기 흉하게 자국이 남았다. 입에 물려있던 옷 뭉치가 사라지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녀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건 류세이의 굳은 얼굴. " 금방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 ....... " 녀석은 조심스레 내 팔을 떼어내고는 코트를 벗어 내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검정 색의 긴 코트. 짙은 향기가 배어있는. 나는 몸을 웅크린 채로 단단하게 코트를 여몄다. 차가운 바닥에 닿았던 맨몸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다. 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놀라서 그런 건지.. 솔직히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냥..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을 뿐. 결국 끝까지 당하지는 않았지만 쉴새없이 저항했던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 탈진해버린 모 양이다. 나는 흐릿한 시선으로 깡패시키의 뒷모습을 쫓았다. 길게 뻗은 다리가 우아하게 움직이며 류세이 앞으로 다가섰다. 짧은 정적. 푸석한 공기를 타고 전해오는 소리는 없었다. 이미 내 흐느낌 마저 사라져버린 서클룸은 숨막힐 듯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잠시 눈을 뗀 사이, 두 사람은 이미 옆방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침묵을 깨고 들려왔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내가 방금까지 무슨 일을 당했었는지.. 내게 닿았던 체온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지. 나는 천천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살에 닿는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 녀석의 코트는 내게 지나칠 만큼 길어서 땅에 끌리다시피 했다. 맨몸에 코트라.. 내 꼴도 우습군.. 이건 마치..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젠장.. 꼴사납게 사내자식이.. 천천히 발을 뗀 뒤 흩어진 옷가지를 집어들었다. 완전히 구겨져 버린 셔츠. 나는 그것을 든 채 한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어릴 때부터 여자 같이 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런 일까지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도 평생 치욕으로 남겠지.. 내게도.. 그리고 녀석에게도. " 아악------!!!!!! " " ! " 한 순간 문틈 사이로 엄청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다가가 문에 귀를 댔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만.. " 일어나. "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늘한 고통이 담겨있는 목소리가. 나는 차갑게 굳은 손을 꼬옥 말아 쥐었다. 단단한 반지의 존재가 느껴진다. " 이런.. 벌써 우는 거야? " " 우으.. " " 왜? .....내가 무서워? " " ....... " " 널 죽일까봐? " " 흑.. "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침착을 가장한 절규처럼.. 적어도 내겐 그렇게 들렸다. 간간이 이어지는 흐느낌은 류세이의 것. 나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 걱정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 " 이...율.. " " 입 닥쳐. " 한순간 절제를 잃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문틈 사이를 뚫고 들려왔다. 이제껏 들은 목소리 중에 가장.. 어쩐지 마음이 아프다. 늘 화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지금껏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결국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또다시 문제는 내가 일으키고 뒤처리는 이 녀석이 하는 거다. 나는 지금 그 사실이 너무나 서럽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녀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역시 패는 걸로는 분이 안 풀려.. " " ....... " " 왜.. 그런 말이 있지. " " ......? "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 !!!! " 똑같이 당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 " ! " 무.. 무슨 소리를..?!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순식간에 새하얘진 머릿 속. 반대로 눈앞은 깜깜하다. " 그게 싫으면 이 자리에서 반병신을 만들어줄까? 선택은 네가 해. " " ....... " " 어느 쪽이든 평생 후회하게 해주지. " 자.. 잠깐만.. " 결정해. " 선고처럼 무겁게 내려진 녀석의 말에 나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최악의 순간이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코트를 움켜쥔 채 멍한 눈으로 문을 바라봤다. 뭔가 말을 해야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잠시 후 단단한 문 너머로 류세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아. " !! " 똑같이 해 줘. " 침착한 목소리였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오히려 기다렸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깡패시키는 대답이 없었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문으로 날렸다. 쾅---!!!!! 어찌나 세게 쳤는지 손이 얼얼하다. 그것도 단단한 철문이니까. 나는 두어 번 더 쾅쾅 쳐댄 뒤에 입을 열었다. " 야! 강이율!! 잘 들어!! " 쾅쾅-- " 너 그 자식 안으면 나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 쾅쾅--- " 절대로 안 봐!! 알았어--?!! " 쾅-- 어찌나 세게 쳤는지 벌써 시퍼렇게 변해버렸다. 욱신거려서 죽을 것 같지만.. 이미 내 의지를 벗어난 주먹은 멈추지 않고 철문을 향해 날아갔다. 격렬한 움직임에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든 막아야한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나는 얼굴이 흠뻑 젖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 이 정도로 녀석을 좋아하는 거야..?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온통 멍 투성이로 변해버린 주먹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해서 소리쳤다. " 강이율! 듣고 있지!!?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 " ....... " " 제발 그러지 마.. 너.. 내 부탁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 준다고 했잖아.. "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흐느끼듯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나는 그저 녀석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단단한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재빨리 다가와 무릎을 꿇고 날 끌어안았다. "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미련하게! " " 네..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 나는 몸을 웅크린 채로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억세게 내 손목을 잡는다. 잔뜩 일그러진 시선이 내 손으로 향한다. " 이게 뭐야?! 시퍼렇잖아. 이 바보야!! " " 별로 아프지도 않.. 윽..! " 이제야 통증이 느껴진다. 녀석의 온기가 닿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들만큼 욱신거린다. 내가 생각해도 미련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 주었으니까.. 나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웃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녀석이 화를 낼 것 같아서.. 나는 어설픈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류세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허술하겠지만.. 녀석은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긴 손가락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툭툭 털어 다시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 " 실망이다. 위 열매. " " ! " 녀석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아직도 날 못 믿어? 나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인 거냐? " " ........ " " 내가.. " " ....... " 녀석은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날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닿자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멍 투성이로 변한 손을 뻗어 녀석의 등을 끌어안았다. " 내가 너 외에 다른 놈을 안을 것 같아? " " ...! " 녀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후 촥 가라앉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 내가 안는 건 위열매 뿐이야. 그러니까 너도 절대 다른 놈한테 안기지 마. " " 그.. 그치만 네가 아까..! " " 아. 그래.. 잠깐 잊고 있었지.. 기다려. " 녀석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긴 몸을 일으킨 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다. " 유명석? 지금 학교로 좀 나와라.. 그래.. 시간 없으니까 애들 셋 정도 모아서 와. " !! 잠자코 녀석의 말을 듣던 나는 흠칫 놀랐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 별관 알지? 거기로 와.. 그래... 끊는다. " 녀석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게로 다가왔다. 서늘한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짧은 한숨이 이어졌다. " 무슨.. 전화야..? " " ......슬슬 돌아가자. " " 잠깐만.. " 나는 녀석의 팔을 붙잡으며 짧게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는다. 뭔가.. 고통스러운 듯한 표정.. 지쳐 보이는 얼굴 위로 깊은 슬픔이 드리워져있다. 욱신거리는 건 이제 손이 아니라 가슴이다. " 넌 신경 쓰지마. " " 어떻게 그래..?! " 나는 황급히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 류세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설마.. 그 사이 죽인 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다. 그럼.. 친구들을 부른 건.. 시체 처리를 위해서..!? 하지만 그런 거라면 혼자 하는 쪽이 나을텐데.. 왜.. 나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깡패시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녀석의 옷자락을 잡은 채로 울먹였다. " 야..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너 대체 어쩌려고..!! " " ....... " 녀석이 말없이 날 내려다본다. " 이젠 정말 다 끝이야.. " 정말 최악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결국 내 잘못이다. 나 때문에 이 녀석은 평생을.. " 무슨 소리야?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 " ...!? " 녀석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찡그린 채로. " 잠시 기절한 거 뿐이야. 선택한대로 해줘야지. " 뭐.. " " 잘 들어. 이제 넌 참견하지 마. 지금부턴 내가 알아서 해. " " 그..! " " 네가 용서해도 내가 안 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날 용서 못해. " " 왜 네가..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은 그대로 울음소리에 묻혀버렸다. 결국 너무도 허무하게 흩어져버린.. 나는 녀석의 강경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 몸은 괜찮아..? " 녀석은 방금 전과 달리 너무나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나는 대답 대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째깍이는 초침 소리 하나 하나가 가슴에 닿는다. 그리고.. 녀석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해. " " ! " " 무서웠지...? " " ......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가슴 한 켠이 욱신거린다. 아무래도.. 지독한 심장병에 걸린 모양이다. 그래.. 사실은 정말 무서웠다. 지금도 아까의 일만 생각하면 숨이 멎을 것 같다. 일부러 지우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없던 일로 넘기는 건 무리다. 지금 녀석은 나 이상으로 화가 나있고.. 그런 녀석을 진정시키기엔 나 역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미수로 그쳤다고 해도 그때 겪었던 아득한 공포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결국 류세이가 맞게될 상황은 간단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나는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묻었다. 정말 모르겠다.. " 옷 입자. 이제 곧 올 거야. " " ....... " 나는 말없이 녀석에게서 옷가지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이 조심스레 코트를 걷어준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걸쳐지지 않은 맨몸이 녀석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리며 차례차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흘끗 바라본 녀석은 말이 없었지만 얼굴 위로 조금 더 깊은 그늘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소매 안으로 팔을 넣는 순간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시퍼렇게 멍든 손이 옷깃에 스치는 순간 내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녀석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병원에 가보자. " " 아.. 아니.. 괜찮아.. " " ........빌어먹을. "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 친구들 오면.. 어떻게 하려고...? " " ........ " " 설마.. 정말 그러려는 건.. " " 맞아. " 녀석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직접 안을 생각은 없었던 거다. 적당히 겁을 준 뒤에.. 결국은 이렇게.. 나는 찡그린 채로 눈을 감았다. 말려야 할 것 같지만.. 내겐 그럴 이유도.. 힘도 없다.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던 나다. 내가 말린다는 건.. 역시 우스운 얘기다. 마침내 옷매무새를 갖춘 나는 순순히 녀석이 뻗은 팔에 몸을 맡겼다. 이제 벌어질 일들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녀석의 팔에 안긴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몇 명의 남자들이 동아리 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처참한 복수극의 시작이다 비슷한 체격의 네 남자. 그들은 나를 흘끗 쳐다본 뒤 깡패시키에게로 다가갔다. 척 보기에도 싸움 좀 하겠다 싶을 정도로 험악한 인상들이다. " 좀 늦었지? " " 됐어. " 깡패시키는 짧게 대답하며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떡대들 중 한 명을 향해 말했다. " 유명석. 이 녀석 내 차에 좀 데려다 줘. " " ! "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봤다. 그러나 녀석의 시선은 이미 내게서 떠난 뒤다. 녀석은 나머지 셋과 류세이가 쓰러져있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대로라면 분명.. " 차로 가죠. " 명석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덤덤하게 말하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목소리는 녹을 듯이 달콤하다. " 자.. 잠깐만요..! " " ......? " 젠장.. " 난.. 지금 못 가요! " 억지로 당하는 기분.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농락 당하며 몸부림치는 기분. 소리조차 지를 수 없어 속으로 울분을 삼켜야하는 기분.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게 어떤 고통인지 내가 잘 아는데.. 그걸 그대로 묵인한다는 건 그 이상으로 고통스럽다. 그것도 상대는 셋.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킨 뒤 유명석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 말려주세요. " " ! " " 저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죠? " " ....... " 명석은 침묵으로 답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씁쓸해 보인다. 강인해 보이는 턱, 매부리 코, 가느다란 눈매. 좋은 인상은 아니지만 어쩐지 신임이 가는 얼굴이다. 그래.. 그런 느낌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명석을 향해 말했다. " 저 녀석 지금 이성을 잃어서.. " " 미안합니다. " " ! " " 그렇다고 해도 전 이율이가 시키는 대로하겠습니다. " 뭔가.. 이상하다. 이 이상한 분위기.. 정말 친구사이가 맞는 건가? 나는 당황한 얼굴로 명석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 무슨 소리예요? 친구잖아요?! " " ....... " " 이봐요! " " 상대는 류세이..? " " ! " 명석은 팔짱을 낀 채로 덤덤하게 물었다. 아직 방에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는 거지..? 아까 깡패시키가 전화통화를 할 때도 그 얘긴 하지 않았는데.. 이런 내 속을 눈치챘는지 그가 짧게 말을 이었다. " 평소 이율이가 벼르고 있었죠. 늘 귀찮게 쫓아다녔으니까요. " " ....... " " 가끔은 도시락도 싸오고.. 하여튼 지극 정성이었죠. " 명석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서 일까.. 어쩐지 편안한 친구 같은 느낌이다. 나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명석은 흘끗 세 사람이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던진 뒤 말을 이었다. " 그러다가 언젠가 심하게 맞은 적이 있었어요. " " ..! " " 그날따라 이율인 저기압이었고 세이가 눈치 없이 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래도 좀 심하다 싶었죠. " 내가 모르는 세계..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심정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세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진 건드리지 않을 테지.. " 그리고.. 그 날 자살 소동이 일어났죠. " " !! " " 우리 과에선 꽤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멀리까지 퍼지진 않은 모양이군요. " 명석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자살 소동이라니..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을 정도라면 날 범하려 했던 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 다. 그래.. 녀석은 이미 내게 경고했었지. 무심코 농담처럼 넘겼던 내 잘못이었던 건가.. 어쨌든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강한 힘이 내 손목을 덮쳤다. " 차로 가죠. " " 무슨 소리예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래요-?!! " " 쓸데없는 짓입니다. " " 그건 내가 결정해요! " 젠장.. 무슨 인간이 이렇게 차가운 거냐! 동정 가득한 눈으로 말할 땐 언제고 정작 필요할 땐 모른 척 하겠다는 거냐!? 난 멍청하고 물렁해서 이렇게 밖엔 못한다. 방금 전 겪었던 일이 생생히 머릿속을 메우고 있어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못 보겠다는 말이다!! 명석은 내 손목을 잡은 채로 날 노려봤다. 그래.. 확실히 이 쪽이 잘 어울린다. 사람 좋은 척 해봤자 결국은 이런 부류였던 게지. " 아아아악---------- " 가느다란 비명이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나는 황급히 명석의 손에 이를 박아 넣은 뒤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등뒤로 명석의 나직한 욕설이 들려왔다. 젠장..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그래서 다들 놀랐던 건가? 나와 있을 때의 녀석을 보고 신기해서?? 방안으로 뛰쳐 들어온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역시나 류세이가 목을 뒤로 젖힌 채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반쯤 드러난 새하얀 어깨. 녀석의 작은 몸 위로 두 남자가 올라타 있었다. 잠시 후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깡패시키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시선은 곧 내게와 닿았지만. " 그.. 그만해! " " ....... " 깡패시키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뒤따라 들어온 명석에게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평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알고있는 '강이율'인가.. 오싹하다. 녀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근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유명석. " " 미안하다.. " 명석은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깡패시키가 긴 몸을 일으켜 내게로 다가왔다. 젠장.. 확실히 평소의 녀석이 아니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라니..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다.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일순간 시선이 고정된다. 비명을 내지르던 류세이조차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깡패시키는 말없이 날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상관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 안 돼. " " ....... " " 이건 싫어. 이런 건 절대 싫어. " " 위 열매. " "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돌아가라고? 그렇게 하면 뭐가 나아지는데? 넌 그래서 기분이 풀릴지 몰라도 난 안 그래.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게되겠지. 넌 그래도 좋아? 내가 그렇게 불행해져도 좋아?? " " ....... " 사실은 나도 놀랐다. 내가 깡패시키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큰 소리를 치게될 줄은 몰랐으니까.. 녀석도 나만큼이나 놀란 눈치다. " 미수로 끝났잖아. 굳이 너까지 똑같은 놈이 될 필요있어?! " " .......그럼 어쩌자는 건데? " " ........패! " " 뭐..? " " 때리라고! 정신 들 정도로! 적당히! " 녀석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서 날 바라보았다. 뭔가 허탈해 보이는 얼굴이다. " 나도 같이 팰까?! " " ......너 정말.. " " 그래. 같이 패자! 나도 저 자식한테 쌓인 게 많으니까!! " 나는 팔을 걷어붙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깡패시키의 꼬붕들인 모양이니. 만일 실패한다면 결국엔 또다시 자살 소동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강간당하고 죽는 것보다야 깨끗이 맞는 쪽이 낫겠지. 어차피 그냥은 안 끝날 테니까. 물론 나도 그건 용납 못하고. " 지금 나랑 협상하자는 거냐..? " 깡패시키는 도도한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내게 물었다. 여전히 차갑긴 하지만 확실히 방금 전보다는 많이 풀린 듯 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대답했다. " 그.. 그래..;;; " " ....... " " ....;;;; " " 그럼 내가 조건을 걸지. " " 에..?;;;;; " 자.. 잠깐!!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는 거냐-??;;;;; 그렇다고 이제와서 말을 돌릴 수도 없고..;;;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녀석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생각하던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하루동안 내 명령에 따를 것. " " !! " 자.. 잠깐..!! 어쩐지 상당히 위험한 냄새가 난다.;;;;; " 대답은? " " 으..;;; " " 응? " " 아.. 알았어! 대신 이 자식은 내가 팰 거야!! " " 계약성립. " 녀석은 짧게 말하며 류세이의 몸에 올라타 있는 두 놈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제서야 육중한 두 놈이 몸을 일으킨다. 안타깝게도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다. 젠장.. 이제 생각하니 좀 억울하다. 아무리 인간의 도리라고 하지만 어째서 저따위 놈을 위해 내가 또 희생을 해야하는 거냐? 일단 일만 끝내고 나면 당장 태권도부터 배우러 갈 테다! 그래.. 그래서 결국엔 그렇게 일단락이 지어졌다. 나는 화가 풀릴 때까지 놈을 팼고 힘이 빠질 땐 깡패시키가 대타로 나섰다. 물론 그 잠깐의 순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깡패시키도 나 이상으로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다. 정말.. 딱 죽지 않을 만큼 팼다. ㅡㅡ;;; 집에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녀석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 멍청하긴.. 기껏 애들 불러놓으니까. " " 나 멍청한 거 이제 알았냐..? ㅡㅡ;; " 투덜거리며 말하자 녀석이 웃는다. " 이걸로 만족하는 거냐? " " ........ " " ....... " " .......뭐.. 이제 학교도 그만둔다고 했으니까.. " 나는 운전대를 잡고있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제서야 녀석의 존재가 실감난다. 역시 내 곁에는 늘 이 녀석이 있는 거다.. 마치 실과 바늘처럼.. " 졸려? " " 아.. 조금.. " " 그럼 자. 내일은 하루종일 바쁠 테니. " " 응?? 왜...?? 나 내일 수업 없는데..? ㅡㅅㅡ? " 나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무.. 무섭게 왜 웃는 거냐..!;;;;;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끝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미소의 의미를 알게된 건.. 그 다음날에서였다. -_-;; 커.. 커헉..! 대..대체 이게 다 뭐냐!! =ㅁ=;;;;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녀석에게서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물건들이다.;; 이른 아침 어디론가 다녀온 녀석은 이것을 손에 든 채로 자고있던 날 깨웠다. 삐까번쩍한 유명 상표가 새겨진 종이 가방 네 개..; 나는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뜯다가 짧게 숨을 삼켰다. 이.. 이것들은..;;;;;;; 짧은 회색 플레어 스커트.. 발목까지 올라오는 소가죽 부츠. 분홍색 스웨터에 조그만 핸드백.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회색 코트. 하얀색 털모자.(그것도 양쪽에 방울이 달린..-_-;)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유-_-빛 스타킹까지..;; 이.. 이걸 나에게 건네는 저의가 뭐냐!!!! =ㅁ=;;;; 나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분명히 보통의 여자가 입으면 끝내주게 예쁠 옷들이지만.. 그것도 하나같이 수 십 만원짜리 가격표를 붙이고있는 명품들이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난 남자란 말이다아아아아~~~~!!!!!! =ㅁ=;;;;;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휙휙 젓고 있는데 녀석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급하게 골라서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 야!! 너 같으면 마음에 들겠냐!! =0=++ 정상적인 대한민국 청년이 하얀 스타킹과 핑크 색 스웨터를 반기겠냔 말이다!!!! 나는 더욱 열심히 고개를 저은 뒤에 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녀석이 이미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 이젠 순간이동까지 하는 거냐.. ;ㅁ; " 싫어어어어어어~~~~!!! ㅠ0ㅠ " " 싫으면 하루 내내 침대에서 봉사하던가.. " " >ㅁ<;;;;;; " 이.. 이 짐승 같은 시키. ㅠㅠ 나는 버둥거리던 팔을 멈추고 더욱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내 등을 감싸안는다. " 갈아입어. " " 하.. 하필이면 왜 여자 옷이냐-?;;; " " 그냥. " 그래.. 내 반응이 궁금했던 거겠지. 내가 당황하는 게 즐거운 거지.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냐.. -_-;;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분명 하루동안 명령(!)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설마 이런 걸 입힐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분명 밤새도록 어떻게 날 괴롭힐까를 연구했던 게 틀림없다. 나쁜 시키. -_-; " 이.. 이거 다 해서 얼마 들었어..?;;; " " 기억 안 나. " ㅡㅡ;; 하루 괴롭히려고 이 비싼 것들을 무더기로 사다니.. 정말 돈이 많긴 많은 모양이다. 이런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 같으니! -ㅁ-+ 녀석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날 바라봤다. 도도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 그.. 그냥 입던 거 입으면 안.. " " 안 돼. ㅡㅡ " 젠장.. -_-; 나는 어쩔 수없이 종이 가방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그래.. 좋다. 남아일언 중천금. 이왕 이렇게 된 거 화끈하게 해주지. -_- 뭐.. 여장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2년 전 축제의 그 날을 떠올리며 또 한 번 미친 척 하는 거다. 그러다가 남잔 거 들통나면 개-_-망신당하긴 하겠지만.. -_-; 빌어먹을.. 인간 변태 되는 건 한 순간이다. ㅠㅠ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일단 문을 잠그고 종이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단 마음의 준비는 대충 끝냈는데.. 뭐부터 입어야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생소한 것들이라.. 특히 우유-_-빛 스타킹은 정말 적응이 안 된다.;; 깡패시키의 취향이 이런 거였나.. -_-a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레 스타킹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젠장.. 이런 것까지 일일이 묘사해야 하는 거냐..;;;; 진짜 변태가 된 것 같아 심히 불쾌하다. --+ 내 신체부위 중 가장 여자 같은 것이 바로 다리다. 종아리 살이 거의 없는 일자 다리. 일명 새 다리라고도 하지.. 게다가 털도 없어서 남자로선 치명적이다. 학창시절 한여름 체육시간에도 긴 바지를 고집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노출이 되면 친구라는 놈들이 징그럽게 한 번씩 쓰다듬고 지나가기 때문에.. -_-; 그럴 땐 정말 살의의 충동이 느껴지더군.;;; 일단 스타킹을 입고 나니 자-_-신감이 생긴다. 어쩐지 감촉도 좋.. .......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ㅁ=;;;; 난 절대 변태가 아니라고오오오오~~~~~~~ >ㅁ<;;;;; 똑똑-- 헉헉.. =ㅁ=;;;;; 한바탕 혼자서 난리를 쳤더니 땀이 난다.; 똑똑-- " 다 입었어? " " 아.. 아직!!;;;; " 문 너머로 녀석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_-신한 내 모습이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나머지 옷들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짧은 회색 플레어 스커트.. 허리사이즈 26. 조금 헐렁하다. ㅡㅡ;; 그 다음은 핑크 색 스웨터. 따뜻하긴 한데 색깔이 영 걸린다. ㅡㅡ;; 나는 일부러 거울을 외면하며 주섬주섬 회색 코트를 몸 위로 걸쳤다. 물론 가격표는 다 떼어낸 상태다. 두 개까지 계산하다가 그만 뒀다. 아무래도 명이 줄어들 것 같기에.. ㅡㅡ;; 에에.. 이제 어느 정도 된 건가.. 신발은 나갈 때 신으면 되는 거고.. 핸드백엔 뭘 넣어야 하지? 일단 핸드폰이랑.. 지갑.. 미니 게임기.. 필기구.. 수첩.. 지하철 노선표.. 타로 카드.. 나는 책상을 뒤적이다가 손에 닿는 대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율이도 넣어갈까..? -_-a 넣다보니 어느새 빵빵해졌다. 가방이 너무 작아서 얼마 들어가지도 않는다. 이런 쓸모도 없는 게 어떻게 130만원씩이나 하는 거냐..! =ㅁ=; 나는 어쩔 수없이 큼직한 물건들을 다시 꺼냈다. 혹시나 심심할까봐 넣었던 만화책 세 권과 게임기. 출출할 걸 대비해서 넣었던 비스킷과 소세지도. 그리고 마침내.. 한참을 준비한 끝에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짧은 치마가 마음에 걸려 일단 반바지를 입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 쪽으로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ㅡㅡ;; 나는 천천히 녀석의 등뒤로 다가갔다. 녀석도 어느새 외출준비를 마친 상태다. 내 옷을 감안했는지 비슷한 색깔의 정장을 갖춰 입었다. 오올~ 진짜 뽀대 죽인다.. +ㅁ+/// 빌어먹을! 나도 이딴 천 쪼가리 말고 저런 멋지구리한 옷이 입고 싶단 말이다!! ㅠㅠ 입을 삐죽 내밀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녀석이 날 돌아본다. 순간 주위를 감싸는 정적. 녀석은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다신 이딴 계약 하나 봐라!!ㅠ0ㅠ 잠시 후 침묵을 지키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 잘 어울리는데..? " 하얀색 스타킹 신고 그런 소리 들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_-; 이런 방울 달린 털모자 따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실용성 제로의 스커트 따위!! 나는 잔뜩 입을 내민 채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순간 녀석이 재빨리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는다. " 가슴은 안 만들어도 되냐? " " 피.. 필요 없어! 그딴 거!!///// " 젠장.. 젠장젠장젠자앙---!!!!!!! >ㅁ<;;;;; 누가 그딴 흉물스런(?) 걸 만들까 보냐-!! 하루만 버티면 되는 거야! 그딴 거 없어도 충분히 예쁠 수 있..! =ㅁ=;;;; 아..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 보다..;;;;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냐! 위 열매!! 제발 정신을 차리란 말이다!! >ㅁ<;;;;; 나는 벽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스스로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녀석이 재빨리 내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 시간 없으니까 빨리 나가자. " " ㅜ_ㅜ "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왔다. 젠장.. 평소보다 배는 춥다. 특히 다리가..;;; 바람이 부는 바람에 치마는 펄럭펄럭.. ㅡㅡ; 덕분에 지나는 사람이 한 번씩 다 쳐다보고 간다.;;;; 추위를 견디다 못한 나는 손으로 슥슥 허벅지를 문질러댔다. 그러자 깡패시키가 황급히 내 손목을 붙잡는다. " 뭐 하는 거야? " " 추워서.. ㅡㅡ; " " 구경꾼 더 모아줄까? "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젠장..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부터 교복차림의 여학생까지 뚫어지게 날 쳐다보고 있다. 그 중 어떤 놈은 추잡하게 침까지 흘리고 있다. ㅡㅡ;; " 난 상관없지만 넌 들켜서 좋을 거 없겠지? " " -_-; " " 일단 겉모습은 완벽해. 100점 만점에 100점 주지. " " 저.. 정말..?? " 평소 칭찬에 인색한 녀석이 웬일이냐..? 어지간히 내 변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 나는 베시시 웃으며 녀석을 바라봤다. 주 논점은 망각한지 오래다. ㅡㅡ;; 그래.. 내 이름은 열매다. 내가 달리 열매겠는가.. ㅡㅡ; 그... 그래도 깡패시키에게 칭찬을 듣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라구- !! >ㅁㅁ<;;;;;; " " 멍청아! " 녀석은 주욱 내 볼을 잡아당긴 후 팔을 걷어붙이고 허리를 숙였다. 물이 튀는 바람에 회색 정장에 짙은 반점이 생긴다.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덕분에 주위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구경중이다.;;;; 나는 상관없지만 깡패시키는 이 쪽 세계에서 유명인일텐데 큰일이다. ㅡㅡ;;; 그리고.. 한참의 노력 끝에 율이를 건져 올린 깡패시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가 물에 흥건히 젖어있다. " 미.. 미안해!!! >ㅁ<;;;; " " 괜찮은지 확인해 봐. " 녀석에게서 '율'이를 받아든 나는 배와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수박이냐-_-;)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다. " 괘.. 괜찮은 것 같은데..?;;; " " 신경 써서 관수해. " " 아.. 알았어..;; " 어째 애를 사이에 둔 부부간의 대화 같군. ㅡㅡa 녀석은 그제서야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떠드느라 난리다. 나는 조심스레 율이의 몸을 타월로 닦아준 뒤 다시 핸드백 안에 넣었다. 솔직히 나도 타월까지 넣어 왔을 줄은 몰랐다. -_-;;;; 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왔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하나 둘씩 발길을 옮기기 시작한다. 연회 시작인가..? " 들어가자. " 깡패시키는 짧게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반지가 화려한 불빛에 반짝거린다. 순간 어쩐지 달아오르는 얼굴.. 언제 봐도 싫지 않은.. 아니, 좋은 물건(?)이다. 나는 천천히 녀석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저.. 저기.. 나 정말 가도 되는 거냐..?;;; " " 그래. " " 누가 말시키면..?;; " " 씹어. " " =_=;; " 내가 넌 줄 아냐..;; 난 너처럼 살벌한 인상이 아니라 말 걸어오는 인간이 많단 말이다. 그렇다고 말을 하자니.. 남자라는 사실을 들킬 것 같고.. ㅡㅡ;; 그보다도 문제는 강이립과 강이현. 그리고.. 정현아다.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적이 한 자리에 다 모이다니..;;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이올린 독주는 어느새 오케스트라 합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 감기 걸렸으니 접근금지라고 등에 써 붙여 놓을까..?;;; " " 그러던 지. " " 그럼 잠깐만, 나 종이랑 사인펜 가지고 왔으니까.. " 나는 황급히 핸드백으로 손을 넣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녀석이 내 손목을 붙잡는다. " 농담이야. 바보야. " " 그.. 그래도 여장한 거 들키면..;; " " 솔직히 말하면 네가 또 발끈해서 싸울까봐 일부러 여장시킨 거다. " 뭬야----??? =ㅁ=+ " 만일 그럴 일이 생기면 네가 직접 나서서 싸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 ....... " " 사람들한테는 애인의 사촌 동생이라고 해둘 테니까 그렇게 행동해. " " 애.. 애인의 사촌동생이랑 이런 자리에 오는 사람도 있냐?;; " " 여기 있잖아. "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정말이지 이 녀석의 미소는.. 차마 눈뜨고 못 보겠다. 벌써 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젠장.. 날이 갈수록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심해지니 문제다. 그나마 나한테만 이러는 게 다행이랄까.. ㅡㅡ;; 가만히 얼굴을 붉힌 채로 녀석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깡패시키가 구석으로 날 끌고 갔다. 그러더니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기 시작한다. 코트 깃부터 스웨터 밑단 주름, 스커트 자락, 스타킹 상태 체크까지. 이리저리 훑어보던 녀석은 다시 허리를 펴고 날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웃으며 말한다. " 예뻐. " " 저.. 정말..? >ㅁ_ㅁ<;;;;;;;; 나는 억지로 신음을 참으며 뜨거워진 몸으로 열심히 저항했다. 그러나 인정사정 없이 내 몸을 유-_-린하는 테크닉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대로 또다시 녀석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건가..! ㅜㅜ 아아.. 뜨거운 열기의 현장. 이곳은 서우그룹 사장 취임식 연회가 열리는 xx호텔 47층에 위치한 화장실이다.;;; " 자.. 자.. 잠까아아안--!!!! >ㅁ<;;;;; " " ....... " " 우.. 우리 이러지 말고 말로 하자고..!응!?;;;;; " 나는 녀석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시 무리다. 멀쩡한 정신으로라도 힘든데 취하기까지 했으니..;; 녀석은 간단히 내 양팔을 제압한 채 목선을 따라 키스를 퍼붓고 있다. 무릎을 굽힌 상태라 눈높이에 시선이 닿는다. " 여.. 여기선 싫어-!! ㅠ0ㅠ " " ....... " " 저.. 정말.. 싫..윽..//// " " ........그럼 침대로 갈까? " 끄덕끄덕~;;;;;; 일단 이 상황은 모면하고 보자. 그리고 집으로 가는 동안 설득을 하면.. 그.. 그런데 왜 아직도 허벅지에서 손을 안 떼는 거냐!!;;; 그러다가 스타킹에 구멍나면 책임질껴!!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녀석에게서 떨어져나왔다. 내 코트는 녀석의 팔에 걸쳐져 있고 스웨터 밑단은 위로 한참 올라가있다. 덕분에 온 몸에는 오한이.. =_=;; 그걸 바라보는 녀석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린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날 덮치는 건 문제도 아닐 거다. 그나마 숨쉴 틈이라도 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젠장.. 이게 다 얄-_-궂은 이름 때문이다! '열매'라는 야리꾸리한 이름이 재앙(!)을 부른 거란 말이다! 차라리 '월매'가 낫지. =_= 우리 아빠도 참 센스하고는.. -_-; (작가를 탓하시게. --;) 나는 재빨리 화장실 문 앞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문 밖으로 나가야 안정이 될 것 같다. 그 사이 내 앞으로 와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는 깡패시키. 내가 취한 탓인가.. 아니면 또 순간이동을..?;;; " 자. " 녀석이 자세를 낮추며 친절히 코트를 입혀준다. 단추까지 하나하나 채워주며.. 뒤에 달린 모자가 접히지 않았는지 확인까지 해준다. 그야말로 애 취급이다. 이 녀석은 아이를 싫어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_-; " 손. " 야! 내가 개냐-!! =ㅁ=+ 헉.. 그런데 어느새 녀석 앞으로 내밀고 있다.;; 역시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는 거다. -ㅁ-;;;; 녀석은 말없이 없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녀석의 코트 주머니로 가져갔다. 이것은 평소 길거리에서 자주 보던.. 엄마가 자식들에게 하던.. 또는 남자가 여자에게 하던 그 행위(?)가 아닌가..! 나는 아이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20세의 건장한(?) 남잔데..;;; 뭐..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ㅡㅡ/// 다시 복도로 나온 우리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향했.. 에..?? 녀석이 누른 번호는 56. 오.. 올라가는 거냐--?!!;;;;; 나는 황급히 녀석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묵묵부답.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는 깡패시키다. 나는 녀석의 옷자락을 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 야..;;;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 " ....... " " 네가 아까 침대로 가자고../// " " 꼭 집에만 침대가 있는 건 아니겠지.. " ㅇㅁㅇ?? " 스위트 룸으로 예약해놨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 자.. 잠까아아안--!!!!!!!;;;;; =ㅁ=;;;; " 특별한 하룬데 그냥 넘기기엔 아깝잖아? ^^ " 이.. 이율씨! 아니, 이율 형님!! 그렇게 웃지 말라구-!!;;;; 스위트 룸이라니!! 그럼 연회 참석하러 온 게 아니었어?? 대체 원래 목적이 뭐냐? 연회냐, 스위트 룸이냐-!!?? =ㅁ=;;;;;; 아무래도 오늘 하루 작정을 한 모양인데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하루동안 시키는 대로 다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이제 와서 물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따르기엔 내 허리가 너무 가엾고.. ㅠㅠ 나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기대선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흘끗 시계를 보니 5시.. 자정까지는 아직까지도 7시간이나 남아있다. 7시간을 채우려면 대체 몇 번을 해야하는 걸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_=;; 녀석의 입장과 깔리는 내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나도 공격하는 입장이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어도 이미 난 '수'로 결정이 난 상태다. ㅜㅜ 이제와서 바꾸자고 하면 녀석이 뭐라고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최후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야말로 최종비기! 뭐.. 말은 거창하지만 별 게 아니라.. 쉽게 말해서 '36계 줄행랑'이다. =_=;;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미친 듯이 달려서 도망치는..;;; 현재 몸 안에 축적된 알코올 농도와 평소 100m 기록을 감안했을 때.. 성공률은 0.00002%지만.. ㅡㅡ;;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신이 날 버리지 않는다면 분명 기회를 열어주실 것이다. 나는 슬금슬금 문앞으로 다가서며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하다. 그래.. 일단 문만 열리면.. 문만 열리면.. 꿀꺽..;;;;; 입안이 타는 것 같다. =_=; 이노무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나. 왜 이렇게 늦냐.. ㅡㅡ;; 너무 긴장한 탓에 목이 다 뻣뻣하다. 다리에도 쥐가 나기 일보 직전이다. 아주아주 긴장되는 순간... 그나저나 깡패시키에게서 달아날 생각을 다 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다. 흘끗 옆으로 시선을 주니 양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있는 녀석이 보인다. 구김 하나 없는 심플한 회색 정장에 찰랑이는 새까만 머리카락. 무표정한 얼굴은 말없이 문 쪽을 향하고 있다. 54층.. 55층.. 나는 눈을 감고 침을 꿀꺽 삼킨 뒤 마음 속으로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어차피 성공 아니면 실패다. 물론 성공한다고 해도 뒷 일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컨디션이 영.. ==;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왔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린 것이다. 그.. 그럼 출바알~~!!!!!!! >ㅁ<;;;;; 턱-!!! " 윽..!! " 미처 몇 걸음 데기도 전에 장애물(!)과 충돌해버린 나.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다.;;; 나는 겨우겨우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코가 조금 찡하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젠장! 대체 어떤 놈이냐! 내 계획을 망쳐놓은 놈이-!! =ㅁ=++ 나는 살기를 담아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짧게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 .........위 열매..? " " =ㅁ=;;;;; " 그 상대가 바로 조민국이었으니까.;;;;;;; 나는 당황한 눈으로 놈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깡패시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예상대로 녀석의 시선이 조민국에게 꽂혀있다. 날 내려다보던 조민국도 어느새 깡패시키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 최악의 순간이다. " 민국씨, 아는 사람이야? " 침묵을 깬 건 조민국의 팔짱을 끼고있던 키가 큰 여자였다. 아마도 나와 엇비슷한 키에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제서야 조민국이 깡패시키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잔뜩 굳은 얼굴이 창백하다. 역시 아직까지도 미련을 못 버린 건가.. 아니면 내 여장 모습이 쇼킹해서..? ==;;;; 뭐.. 어느 쪽이든 달갑지는 않지만.. 조민국은 잠시 날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가있다. " 좋은 취미네. " " ////// " 젠장! 빌어먹을 자식!! 나는 놈을 노려보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한 판 붙고 싶지만 상황이 안 좋다. 여장을 한 상태에 술까지 취해있다. 옆에 깡패시키가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낯선 여자가 끼어있다는 게 문제다. 역시 여장변태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는 없으니까. 이래봬도 체면을 생명으로 하는 남자다. ㅡㅡ;; 나는 억지로 침묵을 지키며 깡패시키의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내게 시선을 주는 녀석.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공기가 우리 넷을 감싸고 있다. " 민국씨, 왜 그래? 빨리 가지 않으면 연회 끝난다구. " " ....... " 다소 상기된 얼굴. 조금 흐트러진 옷차림.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위트 룸이 즐비한 층에서 나온 두 명의 남녀. 역시.. 그거(?)라고 봐야겠지..?;;;; 나는 괜시리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조민국의 곁을 스쳐 지났다. 그런데 그 순간, 녀석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 흥, 좋겠어. " " ! " " 즐거운 러브 타임인가..? " 자기야말로 짙은 여자 향수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그딴 말이 나오냐-!! 그냥 지나칠래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게 하는구만! 정말 지독한 놈이다. " 아직도 주제파악이 안되시나? " " ..! " " 어차피 너 따윈 장난감에 불..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가 난 내가 뭔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엄청난 소리가 주위로 흩어졌다. 신음조차 흘리지 못할 정도로 강한.. 나는 놀란 눈으로 장신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깡패시키가 바닥에 쓰러진 조민국의 손을 밟고 서있다. " 꺄아아-! 미.. 민국씨!!!!!;;;;; " 여자가 황급히 놈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나 조민국은 차갑게 소리쳤다. " 시끄러워! " " 민국씨..;;; " " 젠장.. 아프잖아.. " 잔뜩 찡그린 얼굴로 깡패시키를 올려다본다. 깡패시키는 말없이 놈을 내려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굳은 얼굴.. 설마.. 예전에 내가 조민국한테 맞았다는 걸 알고있는 건 아니겠지..?;; 난 말한 기억이 없는데.. ==;; 하지만 저 눈빛은 분명 원한에 사무친 그것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 마침 잘 만났어. 그렇지 않아도 한 번은 만나고 싶었는데 말이야. " " ! " 입가에 살짝 드리워지는 싸늘한 미소. 결국... 그렇게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정말 재수 없는 날이다. =_=;;;;; 긴 침묵이 이어졌다. 조민국은 여전히 깡패시키의 발아래 누워있었고 여자는 안절부절하며 그 곁을 지키고 있 었다. 나는 그저 그 사이에 뻘쭘하게 껴있을 뿐. 싸움을 말렸다간 곧바로 스위트룸 행일 텐데.. 역시 조금쯤은 시간을 끄는 게 좋겠지. 나는 일단 침묵에 동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몇 분 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조민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안 하는 거야? " " 인사는 몸으로 해줬잖아? " 깡패시키가 짧게 대답하며 발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쿨럭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조민국. 옆의 여자가 호들갑스럽게 칭얼거리며 놈의 옷을 털어 주기 시작했다. 순간 조민국이 거칠게 손을 쳐낸다. 곧 죽어도 자존심은 있어 가지구.. 하여튼 재수 꽝인 놈이다. -_- 나는 살짝 달아 오른 얼굴을 벽에 가져다댔다. 차가운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 저 녀석이랑 아직까지도 사귀는 거야? " " 그렇다면..? " " .....오래 가네. " 내가 무슨 에너x이저냐! =ㅁ=+ 나는 구석에서 툴툴거리며 두 사람을 지켜봤다. 깡패시키는 모델처럼 꼿꼿이 서서 조민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스타일이 좋아서 정장이 잘 어울린다. 나도 어깨가 좀 더 넓으면 좋을 텐데.. 역시 헬스를 해야 하나.. -_-a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여자가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보아 화가 많이 나있는 듯 하다. 그런 거라면 깡패시키에게 직접 말하는 게 낫겠지만 역시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겁이 날만 도 하다. 역시 만만한 게 나인가.. 나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여자의 시선을 맞받았다. 순간 파지직 광선이.. ㅡㅡ; " 당신이 애인이죠? " " ....... " " 그럼 빨리 좀 말려봐요! 저러다 민국씨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거예요!? "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려 퍼졌다. 순간 깡패시키와 조민국이 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당신 애인 깡패예요!? 왜 갑자기 선량한 사람을 치고 난리예요!? " 젠장.. 쨍알거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울린다. 그런 그렇고.. 선량한 사람이라니..! =_=; 누가!? 내 얼굴을 떡으로 만들었던 저 변태 시키가!??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서 여자를 바라봤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여자는 다시 몸을 돌려 깡패시키에게로 다가갔다. 말없이 우릴 지켜보던 녀석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드리워진다. 아무래도 저 여자가 화를 돋군 모양이다. 그러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조민국도 피곤하겠구만. ㅡㅡ;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깡패시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의 앞으로 바짝 다가선 여자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녀석과 얼굴을 마주하자 차마 눈을 못 맞추고 고개를 돌린다. 어느새 뺨에는 붉은 빗금이.. -_-; 하.. 말 한 마디 안 했는데 벌써 또 한 명 넘어온 거냐..;;; " 미.. 민국씨한테 무슨 원한 있어요?///// " " ....... " " 왜 만나자마자 사람을 치고 그.. 그래요..?//// " " 내 맘이야. " 머.. 멋진 대사다! 저 간략한 말 한마디면 모든 상황 종료다. 그야말로 무대포성 발언이라고 할까.. 초등학교 시절 내가 자주 이용하던 말이기도 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다음에 올 말은 아마도 ' 네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 '...였던 것 같은데.. -_-; 나는 속으로 키득대며 벽에 기대섰다. 이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서있기 조차 힘들다. 잠시 조민국을 내려다보던 깡패시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놈의 멱살을 잡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 때의 일을 아는 것 같다.;; 도대체 누가 발설한 거지!?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러면 나만 비겁한 놈이 되는 거잖아..;;;;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비틀비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한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좀 이상하다. 왠지 내 시선을 피하는 듯한.. 기분 탓인가..? -_-; 정확히 3초 뒤 조민국의 멱살을 잡고있던 깡패시키가 손을 놓고 내게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켓을 벗어 내 허리에 둘러주었다. 왜 그런가 싶어 슬쩍 고개를 숙인 나는 잠시 움찔 할 수밖에 없었다.;ㅁ; 제.. 젠장..! 민망하게도 양 쪽 스타킹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덕분에 하얀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ㅁ<;;;; 그.. 그렇다고는 해도 난 남잔데..;; 이게 그렇게 창피할 일은 아니.. 엥..; 근데 저 커플들 왜 둘 다 얼굴이 빨개져있는 거냐?! 그러니깐 난 남자래도-!! =ㅁ=;;; 잠시 흥분해서 앞으로 걸어나가려는데 깡패시키가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순간 단단한 팔의 근육이 느껴진다. " 야.. 쟤들이 날 보고 빨개져써.. " " ....... " " 내가 웃기다는 거지..? 엉?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 어째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아이스크림이 좋다 이거야. 에..?; 미.. 미안하다-!!;ㅁ; 내가 지금 취기가 돌아서 정신이 좀 없다! 아무쪼록 양해를.. (__);;;;; 그렇게 한참을 휘청거리고 있는데 조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홍당무 얼굴을 한 주제에 죽일 듯이 날 노려 보고있다. 옆에서도 덩달아 날 노려본다. 아주 죽이 잘 맞는 커플이다. 그냥 이대로 예식장으로 직행해라. ㅡㅡ;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같이 노려봐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리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뭔가가 정리되는 느낌이..! 흘끗 시선을 내리니.. 헉..!! 깡패시키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내 스타킹을 허벅지까지 바싹 올려주고 있다. =ㅁ= 당연히 커플 쪽엔 다리가 안 보이도록 몸으로 가리면서. 고.. 고맙긴 한데 간지럽..! >_<;;;;;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조민국과 애인이 당황한 눈으로 깡패시키를 바라보더니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뭔가 울분에 가득 찬 무서운 얼굴이다.;;;; " 가.. 간지러워어어어어어~ >ㅁ<;;;;; " " 가만히 좀 있어. " " 그.. 그치만..!//// " 한참을 키득거리던 나는 결국 중심을 잃고 녀석의 어깨 위로 넘어졌다. 그런데도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허파에 바람이 좀 심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그 상황에서도 흘끗 주위를 둘러보니 조민국이 고개를 돌린 채 숨을 고르고 있다. 금방이라도 폭주할 분위기다.;;; 잠시 후 옷 정리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깡패시키는 긴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내가 웃으며 버둥거린 탓에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다. 그래도 여전히 단정한 외모지만. 그런데 표정은 조금 굳어있는 듯..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녀석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등을 돌려 조민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또다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된다. " 그럼 계속해 볼까? " " ....... " " 여기선 그렇고.. 화장실로 가지? " 화.. 화장실로 끌고 가려고 하다니.. 그럼 역시..?;;;;; 조민국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멍멍이가 개장수한테 팔려 가는 듯한 상황이다. 이걸 말려야 하나..;;; 혼자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깡패시키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손목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키를 올려준다. " 1064호야. 들어가서 누워있어. " 그리고는 복도를 따라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날 노려보던 조민국이 나직히 욕설을 내뱉은 뒤 녀석을 뒤따랐다. 아무래도 나한테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_-; 이제 곧있음 흠씬 얻어터질 놈이 끝까지 자존심은 있어가지구.. 구경이나 하러 갈까.. 나는 흘끗 열쇠를 보다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가기로 마음먹었다. 역시 싸움 구경은 놓치기가 아까우니까. 그런데 갑자기 팔에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니 아까 그 여자가 여전히 붉어진 얼굴을 하고 내 팔을 잡고 있다. " 무슨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가려고 그래요?? " " 나 여자 아.. " 헉..! 나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여장변태로 오인(?) 받을 뻔했다. ==;; 뭐..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지만.. ㅡㅡ; 혼자서 가만히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데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애인이 잘 생겼네요..//// " 잘생긴 건 알겠는데 그 얼굴의 빗금은 뭐냐.. ㅡㅡ;; 제발 좀 참아 주라. 난 지금 상태로도 피곤하다구.. ㅜㅜ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1064호를 찾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속이 많이 진정된 것 같은데.. 다행이라고 하기엔 앞으로 남은 시간이 너무 길다. 평소 차가운 이미지의 깡패시키지만 일단 침대 위에선 짐-_-승으로 돌변하니까. 그걸 다 받아들이려면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것도 수양이라고 하면 수양이겠지.. ㅡㅡ;; 에에.. 속은 나아졌지만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린다. 다행히 빠른 시간 내에 방을 찾은 나는 잠시 문 앞에 팔을 딛고 서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보통 와인 한 잔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이상하다. 의사형님의 ' 못된 장난은 여전하구나 '...라는 발언도 마음에 걸리고.. 그 자식 혹시 이상한 약 탄 거 아냐..!?;;;;; " 왜 그래요? 속이 많이 안 좋아요? " 어느새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조민국의 그녀. 갑자기 왜 친한 척이냐.. ==;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열쇠를 넣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어머! 여긴 로얄 룸이잖아? " 나보다 더 빨리 안으로 들어서는 조민국의 그녀. ㅡㅡ; 어느새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있다. 그저 황당할 뿐이다. 나는 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애인이 능력 좋네~ " " 이봐요..; " " 어머~ 벽지부터가 틀리네~ " " 잠깐만요..;;; " 그제서야 말을 멈춘다. 잠시 날 바라보더니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온다. 웨이브 진 머리가 탄력 있게 흔들리며 내 시선을 빼앗는 사이 강한 힘이 날 끌어당겼다. 너무 갑작스런 행동이라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쳐다보자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띄우는 조민국의 그녀. 확실히 있다. 뭔가 음모가.. ==; " 그렇게 서있지 말고 누워 있어요. 안색도 안 좋은데. " " 아.. 알았으니까 그만.. " " 어머..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냥 가요? 내가 수건 적셔올 테니까 누워 있어요. " 자.. 잠깐..!;;;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대로 있다간 또 깡패시키가 화낼 텐데. 그 녀석이 화나면 밤새도록 고생하는 건 나란 말이다. ㅠㅠ 나는 비틀비틀 침대로 걸어가 풀썩 엎어졌다. 확실히 비싼 방이라서 그런지 침대도 예사롭지가 않다. 스페셜 킹 사이즈에 침대 커버도 끝내주게 화려하다. 이 위에서 그.. 그걸 하기엔 좀..///// " 애인은 키가 몇이에요? " " ....... " 갑작스런 목소리에 나는 빨개진 얼굴을 황급히 배개에 묻어버렸다. 이상한 생각(;;)하다가 걸린 것 같아 창피하다. 무슨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정말 한심하긴 하지만..;;; 수건을 꾸욱 한 번 짜고는 내게로 가져오며 다시 한 번 묻는다. 쫙 붙는 가죽 스커트가 조금 불편해 보인다. " 민국씨보다 큰 사람은 찾기가 힘든데.. " " ....... " 나는 대답 대신 말없이 여자를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그냥 뒀다간 정말로 깡패시키한테 혼날 것 같다. 그것도 보통의 방법으로 혼나는 게 아니라.. =_=;;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최대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 저기.. 우리-_-애인이 좀 무섭거든요..? " " 간호만 좀 해주다가 갈께요. " " 그게 아니라...;; " 내 허리 끊어지면 댁이 책임질껴--!!! =ㅁ=+ 나는 바짝 타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폭신한 이불이 몸을 따뜻하게 덮어준 덕분에 기분은 한 결 나아졌지만 그래도 앞의 이 여 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에 평화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이마 위로 차가운 수건이 올라왔다. " 우리 민국씨가 이길 텐데.. " " ....... " " 민국씨는 학창시절 때, 한 사람 빼곤 다 잡고 다녔대요. " 안타깝게도 그 한 사람이 바로 지금 붙고 있을 그 녀석이올시다. ㅡㅡ;; "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 여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매니큐어다. 잠시 날 바라본 뒤 다시 말을 잇는 조민국의 그녀. " 애인과는 사이 좋아요? " " ....... " " 그런 타입은 여자가 많이 꼬일 텐데.. "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ㅡㅡ 나는 찡그린 얼굴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 나 쉬고 싶으니 그만 나가줄래요? " " ....... " 순간 여자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한다. 아무래도 한 마디 더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다.;;; 나는 돌아누우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용히 문이 열리며 깡패시키가 나타났다. 방안으로 들어선 깡패시키는 말없이 침대 맡으로 와서 앉았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던 나는 빼꼼히 고개를 빼고 녀석을 쳐다봤다. 순간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그러나 곧다시 굳어버리는 얼굴. 그야말로 자유자재의 카멜레온이다. 얼굴인지 가면인지.. ㅡㅡ;; 내 앞에서 꾸부정하게 서있던 여자가 갑자기 하이 톤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내숭으로 따지자면 류세이가 세 수는 위다. " 아... 여기 아가씨가 좀 아프다고 옆에 있어달라고 해서요.. ^^ " 내가 언제--!!? =ㅁ=+ 성질 같아서는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머리가 아픈 관계로 패스하겠다. 하여튼 조민국도 여자 취향 한 번 별나구만.. ㅡㅡ; 나는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 이불로 온 몸을 돌돌 말았다. 양털 이불이라 캡 따뜻하다. >_< 옆에는 벽난로까지 구비되어 있는데 완전히 별장 분위기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고 할까.. 단-_-세포는 이래서 살기가 편한 것인가.. " 그럼 이제 그만 나가. " " ....... " " 화장실에 가봐. 그쪽이나 신경 써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깡패시키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그럼에도 손으로는 내 머리카락을 휘젓고 있다. 마치 강아지 털을 쓰다듬듯이. ㅡㅡ; 이 녀석이 평소 즐겨하는 행동 중에 하나다. " 민국씨 많이 다쳤어요? " " 직접 가서 봐. " 서..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이 녀석도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 한 번 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뭐.. 여지껏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지만. 워낙에 이성이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는 녀석이니까. 가끔은 그 점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조심스레 녀석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 심하게 싸운 건 아니지..?;; " " 안 싸웠어. " " 거짓말. " " 내가 일방적으로 팼어. " =_=;;;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 덤덤해서 농담처럼 들리지만 아마도 분명 사실이겠지.;; 아주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이 녀석은 일단 내가 개입된 문제엔 끝을 보고야 마니까. 든든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괜히 나 때문에 큰 일 내는 건 아닌지.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 점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심각한 분위기까지 가도 일단 내가 부탁을 하면 그 선에서 끝내준 것. 녀석을 이루는 성분의 절반 이상은 아마도 '이성'일 거다. " 간호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그만 화장실로 가보세요. " 나는 몸을 일으키며 정중하게 말했다. 간호라고 해봤자 물수건 하나 이마 위에 올려준 게 다지만 어쨌거나 조금은 도움이 됐으니 까. 무엇보다도 더 이상은 낯선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 않다. 난 원래 낯가림이 심한데다 지금은 몸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다. 그저 깡패시키가 걱정하지 않도록 조용히 넘어가고 싶을 뿐이다. 잠시 나와 깡패시키를 번갈아 보던 조민국의 그녀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 민국씨 병원에 바래다주고 또 와도 될까요..? " 아니, 남의 로얄 룸엔 뭣하러 또 침입하겠다는 거냐! 거 참 성격 이상한 여자네. ㅡㅡ 나는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조민국의 그녀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각도나 위치로 보아 분명히 깡패시키의 옆모습이다. 정작 녀석은 지금 내 머리로 장난을 치고있는 중이다. ㅡㅡ; 아무래도 무시할 생각인 모양인데.. 무시는 이 녀석의 취미 생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도 가끔 당하는데 그다지 기분은 좋지 않다. -_-; " 저기.. " 그녀는 문 앞에 선 채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우리 사이에 끼고 싶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좀 불쌍해 보인다. 생긴 건 멀쩡한데 뭐가 아쉬워서 저러는지.. 깡패시키는 절대 여자라고 해서 신사적으로 대하는 성격이 아니다. 예전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는 늘 그랬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성혐오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물론 내 입장에서 안심이 되지만. 나는 폭신한 배개에 머리를 묻은 채로 가만히 녀석을 쳐다봤다. 침대 맡에 다리를 꼬고 앉은 녀석이 천천히 문 앞으로 시선을 옮긴다. 조금 언짢아 보이는 얼굴. 한참을 침묵하던 녀석은 마침내 짜증을 냈다. " 분명히 나가라고 했을 텐데? " " 아.. " " 뭐가 보고 싶어? 남의 사생활에 관심 있나? " 정말 찬바람이 쌩 부는 목소리다.; 평소 둘이서 대화할 때는 못 느끼지만 녀석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걸 보면 가끔 오싹하다. 류세이 사건 때도 그렇고.. 정현아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도.. 확실히 질질 끄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 듯. 결단력이 녀석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여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뭔가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듯 하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면 깡패시키가..? 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깡패시키가 내 머리로 장난을 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쭈욱 녀석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니 까.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손을 뻗어 녀석의 옷자락을 잡았다. 한 판 붙고 왔다는 녀석이 흐트러짐 없이 그 모양새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정말 일방적으로 팬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전교 이짱이었던 녀석인데.. ㅡㅡ; " 몇 대나 때린 거야..? " 내가 걱정스레 묻자 녀석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잠시동안의 유흥거리도 안됐던 모양이다. " 일곱 대 정도. " " 이.. 일곱 대나..?;;; " 이 녀석.. 자기 주먹의 파워를 알고나 있는 건가..;; 설마 있는 힘껏 때린 건 아니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졸리진 않지만 조금 피곤하다. 다행히 술기운은 다 떨어진 것 같다. " 반쯤 죽여놓으려다가 너 생각해서 참았다. " " 어..;; 자.. 잘했어!;;;; " 그래도 그 때 나와 했던 약속은 기억하고 있나 보군. 하긴.. 이 녀석은 나와 달리 기억력이 좋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누가 발설한 거지..?? 아무래도 평소 입이 싼 오경문이 유력한데.. =_= 하여튼 밝혀지기만 해봐라 내 명예(?)를 더럽힌 죄 값은 반드시 치르게 하고야 말 테니! 나는 다리를 쭈욱 펴고는 한바퀴 뒹굴 굴렀다. 확실히 스페셜 킹 사이즈의 침대라 구르기에 안성맞춤이다. 집에 가면 깡패시키한테 이런 걸로 하나 사자고 말.. 아.. 아니다!!;;; 그랬다간 또 무슨 오해를 받을지..!;;; 흘끗 고개를 드니 녀석이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웃고 있다. 주위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녀석은 절대 잘 웃는 타입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난 이 얼굴을 자주 접한다. 그래서일까.. 이 녀석이 원래는 밝은 성격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나는 말없이 녀석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따뜻한 입술이 뺨에 닿았다. 그리고는 아래로.. 조금 더 아래로 이어졌다. 깊은 키스 후엔 목 언저리로.. 생생한 입술의 감촉에 몸이 움찔대며 반응을 한다. 녀석은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좀 더 대담하게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느새 허벅지 위로 녀석의 손이 올라와 있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애무가 이어진다. 이미 어깨가 훤히 드러난 상태다. 아무리 봐도 남자치고 너무 좁다. 역시 헬스를 해야.. ㅡㅡ; 녀석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반라 상태가 되어버렸다. 스타킹은 무릎 선에 머물러 있고 치마는 흐트러져있다. 이제 닿는 건 푹신한 양털 이불 아니면 녀석의 손길이다. 한 두 번 겪는 상황이 아니라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래도 창피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또다시 고개를 돌린 채 팔로 얼굴을 가렸다. " 아직도 창피해? " " ///// " 나는 대답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초야를 치르는 새색시 꼴이다. 순결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이 녀석한테 빼앗겼는데도.. //// 하여튼 쓸데없는 데서 섬세하다니깐. 나는. 녀석은 천천히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여 입술로 가슴돌기를 핥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허리가 크게 휘며 신음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너무 정직한 몸 탓에 내숭도 안 통한다. 언제나 그랬듯 최대한 참다가 본능에 따르는 순서를 밟는 거다. 그게 가장 편하고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길이다. 어찌됐든 난 절대로 연기가 안 되니까. ㅡㅡ;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더울 정도로 따뜻했는데 지금은 몸에 닿는 공기가 서늘하게만 느껴 진다. 그래서 녀석의 손길이 훨씬 더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쇄골 가에 키스를 퍼붓던 녀석은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 하나의 섬세한 움직임에 바짝 긴장해버린 나는 눈을 꼬옥 감은 채로 녀석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녀석은 아직 정장 차림 그대로다. 혼자만 벗고 있으려니 민망해 죽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벗으라고 말하기도 참.. ///ㅅ/// 평소엔 성깔 있다는 말도 종종 듣는 나지만 침대 위에서만큼은 순한 양이 되버린다. 뭐.. 도중에 특별히 할 말도 없지만.. 녀석이 알아서 잘 해주기 때문에 특별히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고 할까.. 이미 내 몸 전체를 훤히 꿰뚫고있는 녀석이다. 그래서 더더욱 내숭이 안 통하는 거다.;; " 아..!/// " " ....... " " 자.. 잠..까..ㄴ...// " 허리를 천천히 쓸어 내리다가 엉덩이 사이로 슬며시 손가락을 가져온다. 이제부터 긴장을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 수비태세 점검 이상 무-!!;;;; 그래봤자 다리 사이를 좁히는 게 다지만. 결국 시간만 늦춰질 뿐이다. " 자.. 잠깐..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 " 너 자꾸 다리 모을래!? " 그러면서 찰싹하고 내 엉덩이를 때리는 깡패시키. 따.. 따갑다. ㅠㅠ 못난 주인 때문에 엉덩이 너만 수난을 당하는구나. 내 다시 태어나면 그땐 반드시 우람한 덩치로 태어나고야 말리! 가슴과 팔 다리에도 털이 북실하고 어깨도 아주아주 넓은 황소 같은 남자로!! " 다리 조금만 벌려 봐. " " ///// " 현실은 이렇지만.. ㅠㅠ 나는 잔뜩 오므렸던 다리를 살짝 벌리며 양털 이불로 어깨를 감쌌다.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건 추워서 일까.. 아니면.. 그리고.. 그렇게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녀석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콰당하는 문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덮친 건. 순간적으로 깡패시키가 손을 멈추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털 이불로 몸의 3분의 2를 가린 상태이긴 하지만 정말 심장이 얼어붙는 순간이다. 나는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가를 적시는 붉은 피. 잔뜩 부어터진 얼굴. 비틀거리며 선 채로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 정체는 바로 오기의 사나이 조민국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깡패시키가 셔츠의 목 깃을 풀며 긴 몸을 일으켰다. 문 앞으로 다가간 깡패시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틀거리는 조민국을 향해 주먹을 날 렸다. 순간 둔탁한 마찰음이 방안 가득 울려 퍼진다. 뒤따라 들려온 낮은 신음소리에 옆에 서있던 조민국의 그녀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스위트 룸. 나는 양털 이불로 가슴을 가린 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깡패시키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주 끝까지 가볼래? " " ......크으.. " " 너 때문에 한 시간을 낭비했어. 댓가를 치러줘야겠는데..? " " ....... " 조민국은 배를 움켜쥔 채로 비틀거리다가 천천히 벽에 기대섰다. 시퍼렇게 부은 입술 끝으로는 아직까지도 붉은 핏방울이 샘솟고 있다. 보통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 깡패시키는 평소에도 무슨 일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 방해를 받게 되면 굉장히 화를 냈 었다. 언젠가 녀석이 한참 레포트를 작성하고 있을 때 옆에서 장난을 쳤다가 그대로 침대로 끌려 가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다. ㅡㅡ;; 늘 여유 있어 보이는 얼굴 뒤로는 착실하게 해야할 일을 해나가는 또 다른 모습의 녀석이 있는 것이다. 나는 녀석과 동거를 시작한 후에야 녀석이 인간임을 깨달았다. 물론 언제나 노력한 이상의 결과를 얻는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잠시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깡패시키는 팔짱을 낀 채 조민국을 노려보고 있었고 조민국은 고개를 숙인 채 잔기침을 해 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선 여자가 안타까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있다.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깡패시키를 진정시키고 싶지만 지금의 난 반라상태다.;; 일단 옷부터 챙겨 입어야 하는데..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분홍색 스웨터는 저 멀리 구석으로 던져져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이 싸우는 사이 접근을 해야겠다. 옷을 입어야 말리든 응원을 하든 껴서 4p로 싸우든 할 게 아닌가. 하여튼 오늘 하루 일진은 최악이라니깐. ㅡㅡ 나는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조심스레 양털 이불로 몸을 감싼 뒤 한순간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기서 낮은 포복 자세로 15초간 대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조민국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지겹지? " " ....... " " 나도 이러는 내가 지겨워. " 푹 가라앉은 목소리는 흐느끼듯 가늘게 이어졌다. 너무 진지하게 들려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목소리. 한 순간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잔뜩 긴장한 채 상황을 살피던 나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강이율. 너 태어나서 지금까지 짝사랑은 한번도 해본 적 없지? " " ....... " 깡패시키는 한 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세웠다. 시선은 잠시 조민국에게 머물렀다가 내게 향했다. 순간 움찔한 나..; 몰래 몰래 침대 밑으로 내려왔는데 너무 쉽게 발각되어 버렸다. ㅡㅡ;; 녀석은 날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조민국의 진지한 고백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일부러 웃기려고 한 건 아닌데.. 어째 좀 미안해진다. -_-; 깡패시키와 나의 교감(?)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조민국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2년을 고민하다가 겨우 고백했는데 단 2초만에 차여버렸지. 넌 그 기분 알아?? "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 너 진짜 잔인한 놈이야. 관심 가지 않으면 시선도 안 주지? 필요 없어지면 뒤도 안 돌 아보고 버리지? " " 조민국. " " 그럼.. 위열매는? " -!! 갑작스런 호명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멈췄다. 나는 양털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을 싣고 천천히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기댔다. 도대체 어쩌다가 내 이름이 그 사이에 끼게 된 거냐..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좋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깡패시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렸으니까. 녀석은 살벌한 눈빛을 조민국에게 고정시킨 채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좋은 반응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시당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다. 나는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다시 한 번 상황을 살폈다. 역시 두 사람이 시선교환을 하는 동안 가운데 선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쩔 줄 몰 라하고 있다. 상황으로 따지자면 내가 바로 저 자리에 있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가장 긴장을 하고 있는 건 바로 나일 거다. 조민국은 피가 흐르는 입가를 손등으로 스윽 문지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위열매도 마찬가지지? 그 녀석도 질리면 뒤도 안 돌아보고 버릴 거지? 지금까지처럼? " " ....... " " 그래.. 역시 그런 거야. 넌 어쩔 수 없이 강이율이니까. " " ....... " " 네가 누군가와 영원한 사랑을 한다고..? 그거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지. " " .......조민국. " 이성을 잃은 듯 조민국이 한참을 떠들어대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너무나 침착한 목소리는 글을 읽듯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나는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 지금 네가 얼마나 추한지 모르지? " " ! " " 이젠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네 몸에 주먹이 닿는 것 조차 싫어. " 순간 조민국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쾅하고 벽을 내리쳤다. 깡패시키를 살짝 빗나간 주먹은 어느새 시뻘겋게 부어있었다. 중간에 서있던 여자가 다짜고짜 깡패시키의 이마에 손을 대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 괘.. 괜찮아요?!;;;; " 탁. 짧은 마찰음과 함께 그대로 손이 튕겨져 나온다. 깡패시키는 조민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래.. 기적 같은 일이지. " " ....... " " 그런데 말이야.. 정말 기적이 일어나 버렸거든. " 녀석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긴장이 풀려버린 나는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양털 이불에 돌돌 말린 탓에 손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코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중요한 순간에 아주 혼자서 깽판을 치고 있다. ㅠㅠ 그것도 하필이면 깡패시키의 러브러브 고백을 앞둔 황금과도.. 아니, 대한민국, 아시아, 세 계,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에! 덕분에 분위기가 흐지부지 되 버렸다. 흑..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우주제일 바보다. ㅠㅠ 의기소침해진 채 구석에서 땅을 파고 있는데 조민국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정말.. 후회하지 않냐? " " ....... " " 저 녀석을 만난 거. " " ......내가 후회하는 건 그 전의 삶이야. " " ....... " " 할 수만 있다면 되돌아가서 더 빨리 녀석을 찾을 거다. " 순간 코끝이 찌르르해졌다. 감동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던 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깡패시키에게로 달려가며 팔을 활짝 폈다. 마치 한 마리의 박쥐처럼. >ㅁ< " 꺄아아아아아--- "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양털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팔을 펴다가 이불이 꼬이는 바람에 철푸덕 엎어지고 만 것이다. 겨우겨우 꿈틀거리며 고개를 드니 조민국의 그녀가 비명을 지른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지..?;;;;; 흘끗 주위를 훑어보니 양털 이불이 저 멀리 도망가있고 훤히 가슴을 드러낸 나는 깡패시키 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손등 위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 약 1분 정도 얼어있었던 것 같다. 잠시 뒤 날 해동시킨 건 깡패시키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웃음기가 조금 섞인 목소리. " 알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 에..?;;; 당황한 눈을 꿈뻑이며 쳐다보자 녀석이 무릎을 굽히고 날 일으켜 세워주었다. 훤히 드러난 상체에 녀석의 체온이 닿자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순간적으로 아까 전의 뜨거운 베드신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황급히 손으로 코를 틀어막은 뒤 '휴지'를 외쳤다. " 급한 대로 닦아. " 깡패시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확실히 스위트 로얄룸-_-제 수건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촉감이 좋다. 냄새도 좋고.. 코피를 묻히기 아까울 정도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조민국의 그녀에게 정체를 들키고 말았으니.. =_=;; 상체는 완전히 벗겨진 상태고 밑은 치마차림이다. 그것도 하얀색 스타킹은 무릎 밑까지 줄줄 흘러 내려간 상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야말로 변-_-태 그 자체다.;;;; 정말 오늘 일진은 최악이다. 아.. 아니, 강패시키의 찐한 고백을 들었으니 최상인가..?;;; " 나.. 남자였어요..?;; " " 아.. 네..? 네!! 제가 코... 코스프레를 좀 좋아해서요!! >ㅁ<;;; " " 코.. 스프레요..?;; " " 네!! 이.. 이건 그러니까.. 차.. 창작 코스프레라고 할 수 있죠!! =ㅁ=;;; " " .....;;;; " 여자가 벙찐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조민국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고개를 숙이고 있고 깡패시키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 다. 무표정한 눈, 코와 달리 입이 웃고 있다. =_=; 젠장.. 나름대로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ㅠㅠ 나는 주섬주섬 스웨터를 챙겨 입은 뒤 다시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지금의 내 얼굴은 시뻘건 토마토가 되어있을 거다. 아아.. 정말 쥐구멍이라도 파고 싶다. 이것으로 여장-_-변태로 잡 체인지(job change)인가.. " 특이한 취향이시네요..;; " " 아.. 하하..;;; " " 그래도 정말 완벽해요. 정말 여잔 줄 알았어요. " " 고.. 고맙..;; " 흑.. 나의 성 정체성이.. ㅠ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가 잠시 날 바라보다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감쌌다. 진지한 얼굴이 정면으로 날 향하고 있다. " 먼저 차로 좀 가 있을래? " " 으.. 응..; " 뭔가 남아서 할 일이 있나보다. 그럼 난 먼저 내려가서 일단 열무 방으로 피신을..;; " 도망치면 죽어. " " =ㅁ=;; " 어.. 어떻게 알았지? 순간이동에 이어 이젠 독심술까지 하나..?;;;;;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1064호 로얄 스위트룸을 나왔다. 아직까지도 심장이 쿵닥쿵닥 뛰고 있다. 안면홍조, 호흡곤란.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녀석의 고백은 확실히 다이너마이트급 러브어택이었다. ///ㅅ/// 평소 입으로는 늘 무뚝뚝한 말만 뱉었었는데..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이런 폭탄 한 마디가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일 거다. 에에.. 그래도 역시 조민국의 앞에서 고백을 받은 건.. 그 녀석..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는데.. 호텔을 빠져나온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조수석에 올랐다. 나도 몇 일 전에 간신히 운전 면허증을 땄지만 깡패시키는 그저 웃고 넘길 뿐이다. 절대로 운전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면서. ㅡㅡ;; 나처럼 주위가 산만한 녀석이 운전을 했다간 저승길로 직행이라나..;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일단 그런 말을 들으니 움찔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나도 남자인 이상 면허증은 기본적으로 따놓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자가 운전을 못한다고 하면 괜찮다고 하면서 남자가 못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니..; 이것도 따지고 보면 엄연한 남녀차별이다. ㅡ,.ㅡ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등받이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길게 몸을 뻗으니 그제서야 좀 살 것 같다. 음악이라도 좀 틀까..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킨 나는 가지런히 놓여진 cd케이스로 손을 뻗었다. -짜악 !? 순간, 1/4쯤 열어놓은 차 창문 사이로 날카로운 마찰음이 흘러들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숙이며 빼꼼히 눈만 내밀었다. " 여보.. " " 아무리 당신이라도 내 동생을 헐뜯는 건 용서 못 해. " 너무나도 우아한 옆모습의 여자가 뺨을 쓸어 내리며 흐느끼듯 말했다. 그러나 그 앞의 남자는 무정하게 그녀의 곁을 스쳐 다가왔다. 차가운 눈동자를 번뜩이며 내게로! =ㅁ=;;;; 순간 놀란 나는 재빨리 몸을 웅크렸다.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만든 뒤 문 쪽에 바싹 붙였다. 다행히 겉에선 밖이 보이지 않는 창문이라 잘만 하면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숨소리를 죽였다. 마치 범죄인이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어쨌거나 이 남자랑 마주쳐서 좋을 게 없으니까.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ㅡㅡ;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온 변태 형님은 말없이 날 바라봤다. 아.. 아니, 겉에선 안 보이니까 날 보고 있는 건 아닐 거다. 그런데도 심장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솔직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러고 있는 게 한심하긴 하다. 그런데.. 잠깐.. 변태 형님의 얼굴에 왠 상처가..?;;; 잠시 멍하니 입가에 시선을 집중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짧게 숨을 삼켰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저건 분명 깡패시키한테 맞아서 생긴 상처임에 틀림없다! 아까 홀에서 상황을 봤다고 했으니까. 열심히 회상 모드로 진입하고 있는데 갑자기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변태 형님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숨바꼭질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심장 떨려 죽겠다.;;;; " 여보.. " 뒤따라온 여자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불렀지만 변태 형님은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때리고 무시까지 하다니.. 역시 싸-_-가지가 없긴 없다. -_- 괜히 변태 형님이 아니지. 나는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상황이 수습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 남자.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인다. 깡패시키 차에 뭐 숨겨놓은 거라도 있나?;;; " 아무리 그래도 형에게 주먹을 쓰다니.. 제가 도련님께 몇 마디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 "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 " 하지만.. " " 율이한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어. " 이야~ 아주 중증이구만? =ㅁ=;;; 그야말로 브라더 콤플렉스의 극치를 달린다. 열무 녀석이 나한테 저러면 얼마나 닭살 돋을까..;;;; 그나저나 정말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역시 깡패시키한테 맞았었군. 그거 참 쌤통이다. -ㅁ- 나는 창문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상황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눈치를 채이는 날엔 일이 좀 복잡해질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지금 표정을 보아하니 걸렸다간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 =_=; 조민국에 이어 변태 형님까지.. 아주 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멋진 남-_-편을 둔덕에 사방에 깔린 게 적이다. 이러다가 제 명이나 채울 수 있을 런 지..;;;; 그나저나 갑자기 왜 코가 간질간질하지..? 이런 중요한 순간에 소리를 냈다간..;;; 에.. 에.. 에.. 안 된닷!! 지금은 깡패시키도 없는데 이런 꼴을 하고 적 앞에 노출되면 안.. " 에.. 에취--!! " 허억.. =ㅁ=;; 해.. 해버렸다!;;;;; 조민국의 그녀에 이어 이번엔 형-_-수님한테까지 정체가 발각되는 건가! 아아.. 정말 싫다!! ㅠ0ㅠ 최대한 소리를 작게 냈지만 천하의 변태 형님의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저것 봐라. 벌써 의심 가득한 눈으로 이 쪽을 훑어보고 있지 않은가.;;;; 급기야는 손까지 들어 이리로 가져온다.;;;;; 나는 더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창문을 완전히 닫아 놓을 걸. 정말 후회 막심이다.;;; " 지금 남의 차 앞에서 뭐 하는 거야? " " ! " 순간적으로 귓가를 파고드는 근사한 저음. 결코 흔하지 않은 이 멋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 도련님..? " " ........오랜만에 뵙네요. " " 아.. 네에.. " 변태 형님의 뒤로 다가온 깡패시키는 무표정하게 내 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스윽하고 쓸어 넘긴다. 녀석이 피곤할 때 자주 하는 행동이다. 나도 요즘 거울보고 연습 중이다. ㅡㅡ/// " 내 차에 볼 일 있어? " 저 삐딱한 말투. 보통 사람이라면 정이 뚝 떨어지겠지만 나에겐 이제 다정하게 들린다. 오히려 너무너무 친근해서 사랑스러울 정도랄까.. 쿨럭.. =_=;; 변태 형님은 창문 사이로 밀어 넣으려던 손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비슷한 키에 비슷한 체격. 게다가 얼굴까지 비슷해서 얼핏 보면 쉽게 구별이 안 간다. 물론 깡패시키 쪽이 조금 더 잘 생기긴 했지만..//// 아아.. 나도 이젠 팔불출 다 됐다. =_=;;; " 창문이 열려 있길래. " " 환기시키려고 일부러 좀 열어놨어. " " ......그 녀석은? " 그 녀석이라.. 그 녀석이라면 아마도 날 가리키는 말이겠지? 변태 형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와 달리 너무나 온화한 인상이다. 정말 이 집 사람들은 타고난 배우들인 모양이다.; 아주 신들린 연기가 일품이다. 잘생긴 가면을 하나씩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내 바로 앞 창문에 기대선 깡패시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무슨 상관이야. " " 도련님. 형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 " 당신은 가만히 있어! " " ....! "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주위를 감싸며 흩어졌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관계다. 보통은 이럴 경우 동생을 나무라지 않나..? 차라리 브라컴이 안전하다. 어느 이상 선을 넘으면 상당히 위험한데.. =_=;;;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 사람이 미묘한 위치에서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 " 아아.. 죄송합니다. 형수님. 제가 지금 기분이 좀 안 좋아서 실수를 했네요. " " ....... " " 그럼 다시 말씀드리죠. 형. 님. 이제 그만 그 녀석에겐 신경 꺼 주시죠? " 깡패시키는 천천히 변태 형님의 앞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 덕분에 오늘 계획이 완전히 망쳐져서 제가 지금 기분이 좀 안 좋거든요? " " ....... " "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 얼굴 붉혀서 좋을 거 없겠죠? 안 그래요? 형. 님. " 녀석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조금 화난 얼굴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진행 중인 상황에서 방해를 받았으니.. 지금 시각은 밤 아홉 시 이십 분. 이제 조금만 버티면 하루 봉사도 끝이다. 깡패시키로선 아쉬운 게 당연하겠지. " 그럼 안녕히들 계십시오. " 잠시 형수님을 바라보던 깡패시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깍듯이 존댓말을 쓰는 녀석이 어쩐지 생소하게 느껴진다. 너무 깍듯해서 무서울 정도랄까.. 형님도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 않고.. 미인 형수님은 양손으로 핸드백을 쥔 채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서 있다. 아무래도 깡패시키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듯. 뭐.. 내가 저 입장이라도 그렇긴 하겠지만.. 짧게 인사를 끝낸 깡패시키가 돌아서려는 순간 형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언제까지 그 애랑 같이 살 거냐? " " ....... " " 아버님께서 눈치 채신 것 같다. " " ....! " 깡패시키는 굳은 얼굴로 형님을 바라봤다. 녀석이 저런 표정을 다 짓다니.. 보이지 않는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진다.;;; 깡패시키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변태 형님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와라. " " ...... " " 이율아. " " 싫습니다. " 단호한 목소리가 짧게 퍼졌다. 나는 창문에 손을 붙인 채 빼꼼히 눈을 내밀었다. 좀 더 자세히 상황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얼굴을 바싹 내밀던 나는 아차하는 생각에 재 빨리 자세를 낮췄다. 아무래도 엿듣고 있다는 걸 들켜서 좋을 게 없지.; 그런데.. 갑자기 왜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거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두 사람이 저 멀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인다. 그렇게 멀리 간 건 아니지만 거리가 거리이니 만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는 것 같기도 하고. 형제들끼리의 비밀 대화인가..;;; 잠시 덤덤한 표정으로 깡패시키의 말을 듣던 변태 형님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러다가 또 싸움 나는 게 아닌 지 걱정이다. 오늘 하루는 정말 불운의 연속이다. 나만큼이나 깡패시키도 피곤할 텐데.. 그나저나 정말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깡패시키의 아버님까지 연관이 된다면..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스테이지 보스를 하나씩 클리어 해 나가는 기분이랄까.. 정말 변태 형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엔 좀 힘들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난 어른 앞에선 말도 잘 못하기 때문에..;;; 그것도 천하의 깡패시키의 아버님이라니.. 만나지 않아도 느껴진다. 위엄을 갖춘 중년의 막강 카리스마가.. ==;;; 열심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갑자기 운전선 쪽 문이 열리더니 깡패시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몇 분 사이에 많이 초췌해 진 것 같다.;;; " 돌아가자. " " 으.. 응..;; "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잠시 날 바라보던 녀석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당기며 깊숙이 혀를 감아 왔다. 순식간에 녀석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버린 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고 있어서 빠져나가는 건 무리다. 뭐..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지만.. 완벽한 딥 키스. 뜨거운 숨결이 순식간에 주위를 잠식해버렸다. 조금 차가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사이를 훑고 들어온다. 그저 가만히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 지금 이 순간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하아.. "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날 바싹 끌어당겨 안았다. 사실은 방금 전의 일에 대해 묻고 싶지만 그냥 모른 척 해야겠다. 녀석이 먼저 말하기 전까지. 지금의 표정을 보아하니 녀석도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으로 전해진다. " 우리 그만 둘까.. " " ! " " 응..? " 너무나 갑작스런 말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녀석의 옷자락을 잡고 열심히 고개를 저었 다. 차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즈음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 했다. " 그래.. " " ...... " " 그럼 이제 죽을 때까지 안 놔준다. " 희미한 미소. 잠시 후.. 다시 한 번 뜨거운 숨결이 하나로 겹쳐졌다. " 아.. 안 돼애-! 진짜 안 돼-!!!;;;; " " 아.. 협조 좀 해라. 잠깐 머릿수만 채우면 된다니까. " " 잠깐이고 뭐고 간에 안 된다고-!! >ㅁ<;;;; " 나는 영필이 놈의 손에 질질 끌려가며 소리쳤다. 그런데도 녀석은 막무가내다. 미팅하는데 인원이 한 명 모자란다나? 나더라 잠깐 머릿수 맞춰준 뒤 폭탄 제거 좀 해달란다. 아무래도 손 좀 봐줘야 할 것 같다. 이런 싸가지 없는 시키 같으니라구. ==+ " 야! 나 미팅하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 지 몰라서 그래?! " " 그러니까 비밀로 하면 되잖아. " " 웃기네. 누구 좋으라고?! " 나는 퉁명스레 쏘아붙인 뒤 녀석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영필이 놈이 다짜고짜 날 끌어안는다. 으헉.. 지.. 징그러워어어어어어어어-!! >ㅁ<;;;;; 덩치는 곰 같은 놈이 길 한복판에서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냐!!;;; 깡패시키 외의 다른 놈이 이러는 건 정말 질색이다. 그것도 손가락을 꼬물꼬물 거리며 허리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ㅁ=;; 순식간에 폭발한 나는 높이 발을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내리 찍었다. 순간 엄청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필이 놈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비명을 삼키며 발을 움켜잡았다. 자세히 보니 눈가에 이슬이 맺혀있다. 조금 심했나.. -_-a 나는 머쩍은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 많이 아프냐..? " " 아.. 하... 아.. 아.. " " ....... " " 후.. 후.. 하아.. 아흐.. " " ㅡㅡ;; "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거친 숨결. 이상한 신음소리. 덕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다 쳐다본다. 덤으로 옆에 서있는 나까지. -_-;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건물을 향해 돌아섰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좋은 친구 노릇이나 한 번 해주고 갈까.. 평소 대리출석도 착실히 해주던 녀석의 부탁이니까.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딱 10분만 있는다. " " 어..! " " 폭탄 처리는 안 해. -_- " " 야..;;; " 뭔가 말하려던 영필이 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 기 시작했다. 역시나 약속 장소는 건물 3층 커피숍인 모양이다. 아무리 머릿수 맞추기 용이라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에 하나 이런 곳에서 깡패시키의 친구라도 만나는 날엔.. 아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_=;; 영필이 자식 하필이면 학교 근처 커피숍으로 장소를 정해 가지고. ㅡㅡ; 나는 뒤따라 계단을 오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 몇 명인데? " " 5:5 " 일단 미팅하기에 적당한 숫자이긴 한데 멤버들이 문제다. 혹시라도 날 아는 사람이 나오지는 않겠지..? 어차피 나야 아는 여자도 없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커피숍 앞에 도착했다. 영필이 놈은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날 끌어안고 변태 짓(?)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너무 진지해서 얼어 보인다고 할까.. 이러면 도로 나무아미타불인데.. 나는 안으로 들어서려는 녀석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준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숍 내부는 굉장히 단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굉장히 넓고 사람도 많다. 덕분에 멤버들을 찾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영필이 놈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로봇 걸음으로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길 정도가 되었다. 옆에서 보기가 애처로울 정도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도착한 테이블. 낯익은 얼굴 둘이 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아리따운 여학생들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스윽 한 번 훑어보니 하나같이 빼어난 미인들. 헉..; 끝으로 시선을 옮기던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눈이 맞다면 저 여자는 분명 호텔에서 봤던 조민국의 그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쌍둥인가?;;;; 나는 최대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의자에 앉았다. 서로 바람(?) 피우는 건 마찬가지인 셈이지만 어쨌든 들켜서 좋을 게 없지 않겠는가.. 여장했던 나의 암울한 과거도 알고 있고.. -_-;; 그나저나 정말 어떻게 된 일이지? 조민국이랑 헤어졌나? 아니면 진짜 쌍둥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영필이 놈이 팔꿈치로 날 툭 쳤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어 있다. 조민국의 그녀 역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너 소개할 차례야. " 잠시 멍하니 있자 영필이 놈이 귓가에 대고 속삭여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조민국의 그녀한테도 들킨 것 같으니 이판사판이다. 만약 깡패시키의 귀에 들어간다고 해도 잘 설명하면 되는 거고. " 저는 xx대학교 국문과에 재학중인 위열매라고 합니다. " 잠시 후 소개를 끝내기가 무섭게 여자들의 호들갑스런 질문이 쏟아졌다. " 1학년이세요? " " 애인 있으세요? 가끔 애인 있는 분도 나오시잖아요. " " 이름이 정말 열매예요? " " 와.. 진짜 귀엽게 생겼다. " 다행이랄까.. 조민국의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다니 그 쪽도 껄끄러운 건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이는 것도 같다. 나는 쏟아지는 질문에 웃음으로 답했다. 양옆에 앉아있는 녀석들의 싸늘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_-;;; 순정만화의 영향인가.. 예전엔 나같이 비실비실한 타입보다는 영필이 같은 녀석이 인기 폭발이었는데. 녀석이 좀 변태스럽긴 해도 얼굴 하나는 진짜 잘생겼다. 그야말로 남자다운 매력이 물씬 풍기는 얼굴이랄까. 적당히 난 구렛나루와 적당히 부리부리한 눈. 강인해 보이는 입매. 남자다운 사각 턱. 보고만 있어도 힘이 나는 그런 마력을 지닌 얼굴이다. 그런 외모와 달리 성격은 굉장히 여성적이랄까.. 애교 있는 말투가 압권. 개인적으로 난 이 녀석이 좋다. 옆에 있으면 늘 즐겁기 때문에. 확실히 깡패시키와는 다른 맛이 있다. 나는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나야 금방 빠질 텐데 오래 시선을 끌어서 좋을 게 없지. 나중에 이 녀석들의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일어서야 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깡패시키와 있으면 편하다. 시선이 다 그 쪽으로 가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좀 슬프기도 하지만 어쨌든 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나 같은 얼굴보다는 남자다운 얼굴이 인기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ㅡㅡa 옆으로 쭈욱 돌아가며 소개를 끝낼 때까지도 난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다. 율이는 잘 놀고 있을까...에서부터 저녁 반찬은 뭘 할까, 깡패시키 옷도 다려놔야 하는데.. 까지. 녀석이 집에 있을 땐 장난치기에 바빠서 일을 뒤로 미루기 일쑤다. 집안 일을 서로 떠밀거나 하지는 않지만 가급적이면 옷 다리는 일은 내가 하려고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몇 번 해보니까 재미있어서. 제일 싫어하는 가사 일은 역시 청소. 특히 걸레로 방 닦는 건 정말 싫다. 무릎 꿇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싫기 때문에. 물론 귀찮기도 하려니와.. 그래서 청소는 깡패시키가 할 때가 많다. 녀석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나한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그냥 알아서 하는 것 같 다. 열무에게 말했는데 전혀 안 믿는 눈치다. 뭐.. 천하의 강이율이 걸레 들고 방을 닦는다는 게 얼핏 상상이 안 갈 만도 하지만. 그래도 난 녀석의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좋다. 분명히 본가에 있을 때는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살았겠지. 모델 누님의 말에 따르면 깡패시키는.. " 열매야. " " ! " 옆에서 영필이 놈이 내 어깨를 툭하고 쳤다. 어느새 자기 소개가 다 끝난 모양이다. 그럼 난 이제 슬슬..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특히 여자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날 향하고 있다. 도저히 빠져나갈 분위기가..;;;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것 같다. 그랬다간 변명거리 자체를 잃게되는 거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결심을 굳히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저..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 " 네..? " " 집에 누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 우리 거북이가. *-_-* " 죄송합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 " 아.. " 나는 꾸벅하고 인사를 한 뒤 벙쪄있는 무리들을 뒤로한 채 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웅성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확실히 얼어버린 듯 하다. 그래도 어차피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온 거니깐.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계단으로 내려서려는 순간. " 잠깐만요!!! " " ! " 멀리서 달려오는 어느 누군가의 실루엣. 그건 바로 조민국의 그녀였다. 분명히 자기 소개 때 이름을 밝혔을 텐데 다른 생각하느라 미처 듣지 못했다. 괜시리 미안해진다. ㅡㅡ;; 열심히 날 향해 달려오는 그녀는 사뭇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나는 말없이 난간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꺄아아아아아아아악-----!!!!!! " 내 앞까지 달려온 그녀가 방금 물 청소를 끝낸 바닥에 미끄러지며 날 밀어트린 것이다. 그 여파로 나는 그대로 계단 위를 구를 수밖에 없었다. 길지 않은 계단을 정신 없이 구르면서 몸 곳곳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아득한 정신 너머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찢어질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 그 소리는 결국 눈을 감는 순간에야 저 멀리로 사라졌다. 아.. 누군가가 내 이마를 쓸어 넘기고 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강렬한 빛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 괜찮아요..? " " ....... " " 죄송해요. 저 때문에.. "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왜 날 보고 우는 거야..? -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남자. 굉장한 미남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심각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거지..? " 너.. 괜찮아..? " " ....... " " 멍청아. 제발 걱정 좀 시키지 마라. "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런데.. 누구지..? " 누구세요..? " " .....! " " 절.. 아세요...? " 순간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아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 뭐.. 라고..? " 눈앞의 남자는 잔뜩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나 진지한 그 모습에 괜시리 미안해지는 나. 아무래도 이 미남씨와 잘 알고 지낸 사이였던 듯 한데.. 그렇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이름조차도..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어떻게 된 거죠? " " 아.. " 미남씨가 옆에 서있던 낯선 여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자는 빨개진 얼굴로 우물쭈물거리다가 조심스러운 톤으로 짧게 대답했다. "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비명소리가 나서 달려가보니까 바닥에 쓰러져 있더라구요. " " ....... " " 그래서 일단 병원으로 옮기고.. " " .......고마워요. " 무뚝뚝한 목소리. 미남씨는 짧게 인사를 건넨 뒤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몇 번을 봐도 감탄사가 흘러나올 만큼 잘생긴 얼굴이다. 내가 정말 이런 미남씨와 아는 사이였다는 건가..?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정말 누구지..? " ....정말 날 모르겠어? " " 아.. " " ....... "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물으면 미안하잖..;;;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치.. 친구 사이죠? 우리? +ㅁ+ " " ....... " 순간 미남씨의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다. 아무래도 헛짚은 것 같은데..;;; 그럼 무슨 사이지? 형과 동생? 학교 선배와 후배? 빚쟁이와 채무자? 부디 세 번 째 예는 아니기를 바란다. ;; 미남씨의 어두운 표정에 미안해진 나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 저.. 저기요..;;; " " 존댓말 쓰지 마. " " 그.. 그치만 초면인데..;; " " 초면? " 싸늘한 미소. 윽.. 화났다! =ㅁ=;;;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아무래도 친구라기엔 뭔가가 이상하다. 일단 나보다 훨씬 체격도 좋고.. 목소리도.. 역시 형인 걸까? 나는 잔뜩 움츠린 채로 미남씨의 말을 기다렸다. 옆에 선 여자는 미남씨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혹시 두 사람이 애인사인가..? 미남씨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여자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잠시 자리 좀 비켜줘요. " " 아.. 네.. "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 여자는 흘끔 날 돌아다본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보니 이 쪽도 연인 사이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도대체 이 낯선 사람들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거지? 한꺼번에 많은 생각을 하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둘만 남은 텅 빈 공간. 이상한 약품 냄새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미남씨는 말없이 가만히 날 바라보고만 있다. 이렇게까지 위축되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된다는 건 혹시 괴롭힘을 많이 당했던 게 아닐까..?;;; " 너. " " 에.. 네..?! " " 존댓말 쓰지 말라고 했지? " " 네.. 아..아니. 응.;;; " 무서워.. ㅠㅠ 이 남자 엄청난 기를 내뿜고 있다. 절대로 조심해야 한다고 내 세포들이 외치고 있다. 도대체 누구지..? " 네 이름은 열매야. " " 엑..?? =ㅁ=;; " 그런 이상한 게 내 이름이라고??;;;; 설마.. 농담이겠지..?;;;;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미남씨가 짧게 한숨을 내쉰다. 그는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혹시 연예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 가까이 마주하고 나니 심장이 두 배로 뛰는 것 같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꽈악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내 이름은 '강이율'이고 너와는 친구 사이가 아니야. " " ....... " " 너와는.. " " ? " " ....... " " ?? " " .......어쨌든 친구 사이는 아니야. " 미남씨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았다. 어쩐지 지쳐 보이는 얼굴.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날 향하고 있다.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진 나는 고개를 숙이며 울먹였다. " .......미안해요.. " " ....... " " 내가 잘못했어요. "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모두 내 잘못인 것만 같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 혹시 내가 빚진 게 있다면 꼭 갚을께요. 이대로 기억을 찾이 못한다고 해도 꼭.. " " .....열매야. " " ....... " " 울지마. " 어느새 내 뺨을 쓸어 내리고있는 커다란 손.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남씨의 옷자락을 잡았다. 처음엔 차가운 인상 때문에 대하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다. 이 손가락도, 목소리도 조금씩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가슴 한 켠이 욱신거린다. 기억하고 싶어.. " 저기.. 이율씨..;; " " 이율. " " 이율..;; " " 이율아. " " 이율아.;;;;; " 어째 병아리 반 유치원생이된 듯한 기분이..;;; 미남씨는 날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순간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 이 남자..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얼마 같이 있지도 않았는데 이미 많이 친해진 느낌. 나는 웃으며 말했다. " 좋은 사람인 거 같아요. 이율씨는.. " " 이율씨라고 부르지 마. 그리고 존댓말 쓰지 말랬지! " " 아...;;;; " " 그리고 난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야. " 무뚝뚝한 목소리지만 손은 여전히 내 뺨 위에 머물러있다. 남자가 얼굴을 만지는데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건 역시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거 겠지? 마치 내 몸 안의 세포가 증명해주는 것 같다. " 그럼 돌아갈까.. " " ...! " " 집으로 가자. " " .....집? " " 그래. 우리들 집. " 우리들 집이라니.. 그럼.. 미남씨와 난 한 집에 살았던 건가..? 그럼 역시 형제??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아까의 그 낯선 여자.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미소로 화답해주었지만 미남씨는 냉랭한 반응이다. 방금 전까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혹시 쑥스러움을 타는 건가.. 그런 것치곤 너무 살벌하지만..;;; 잠시 우리를 번갈아보던 여자는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왔다. " 가족들에게 연락을.. " "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만 돌아가봐요. " " 아.. " " 어쨌든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 " 시선조차 주지 않고 건네는 짧은 인사. 아무래도 확실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여자는 우물쭈물거리더니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예쁜 얼굴이 살짝 굳어있다. 차갑다고 생각하면 따뜻하게 웃고있고 따뜻하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차가워지는 사람. 미남씨의 정체는 과연 뭘까..? 지금 내가 알고있는 건 내 이름이 열-_-매라는 것과 미남씨의 이름이 이율이라는 것뿐이 다. 답답해 죽을 지경이지만 무턱대고 물어봤자 제대로 가르쳐줄 것 같지도 않다. 어쩐지 미남씨는 내 스스로가 기억을 찾길 바라고있는 듯 하니까. " 저어.. 그럼 이만 가 볼께요. " " ....... " " ..;;; " 여자가 아쉬운 얼굴로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 고.. 고마워요! " 돌아보는 여자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뭔가가 떨떠름한 듯한 표정. 그래도 어쨌든 인사는 해야 도리겠지. 여자가 나간 뒤 미남씨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나란히 서니 확실히 장신이라는 걸 알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시선이 마주친다. " 좋아하는 건 케잌, 동물, 게임. " " ...!? " " 싫어하는 건 치즈, 마늘, 피. " " ??? " " 스무 살, 키는 173cm. 몸무게는 57kg. 혈액형은 A. " 잠깐.. 이거 혹시 내 얘기인가..?;; 나는 두 눈을 꿈뻑거리며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미남씨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머지는 네 스스로 알아내. 네가 누군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 " 자.. 잠깐..!;;; " " 아, 한 가지만 더 가르쳐주지. " 두근두근.. 잘 들어야겠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귀를 쫑긋 세웠다. " 느끼는 곳은 귀, 허리, 특히 허벅지. " " !? " 엥..?? =ㅁ=?? " 가자. " 자.. 잠깐--!!! 그게 뭐야-!!?? =ㅁ=;;;;; 그러나 돌아오는 건 침묵뿐. 결국 나는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내내 그 생각으로 고민해야했다.;; " 왜.. 왜 이래요-?!;;;; " " 금방 끝날 거야. " " 이.. 이러지 말아요-!!;;;; " " 열무야! 진정해! " 뒤에 선 남자가 황급히 소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열무라는 괴상망측(!)한 이름의 소년은 커다란 쟁반을 높이 든 채로 천천히 뒤를 돌아 보 았다. 잔뜩 쫄아붙은 나는 그저 온몸을 움츠린 채 떨고있을 뿐이다. ㅠㅠ " 최태진. 방해하지마.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야. " " 그러다 형님 죽어! " " 그거야 제 팔자고. " ㅡㅡ;; 아까 분명히 스스로 내 동생이라고 밝혔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얼굴은 곱게 생겼는데 성질이 보통이 아니다. 어째 같이 따라온 소년도 쩔쩔매는 듯한..;; 미남씨는 옆에 앉아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 보고있을 뿐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 실갱이를 벌인 뒤에야 열무-_-군이 쟁반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빛이 반사 돼서 번쩍번쩍하는 강철 쟁반.(아마도) 저걸로 내 머리를 치려고 한 거다. 세상에.. 혹시 기억을 잃기 전의 나.. 적이 많았던 게 아닐까.. ㅡㅡ;;;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로 떨고 있는데 잠시 후 열무 군이 앞으로 다가왔다. 놀란 내가 도망치려는 순간 그대로 덮쳐졌다. 열무군은 날 바닥에 깔고 앉은 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빨간 입술 사이로 한줄기 가느다란 바람이 새어나온다. 이름과 달리 얼굴은 굉장히 예쁘게 생겼다. " 그렇지 않아도 멍청했는데 이 지경까지 되다니.. " " ㅡㅡ;; " " 정말 나 기억 못 해? " 답답한 지 목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정작 답답한 건 나라구. 나야말로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내 주위에 포진해있는 이 범상치 않은 미남들의 정체가. 혹시 나.. 호.. 호스트바 같은 곳에서 일했던 게 아닐까? =_=;;;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휙휙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미남씨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쯤 해둬. 정말 기억 못하는 것 같으니까. " " ....... " 그제서야 위에 올라탄 채로 날 내려다보던 열무군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민다.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새하얀 손. 예쁘다. 나는 천천히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 미안해. 답답해서 그랬어. " " 괜찮아...요.. " " 아, 씨! 존댓말 쓰지 말라니깐! " " 미.. 미안해요!! >ㅁ<;;;; " 으으.. 하지만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걸..;; 모든 게 낯설어서 이렇게 해야만 할 것 같고..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쉽게 말을 놓을 수가 없다. 미남씨에겐 그럭저럭 반말을 쓰고 있지만.. (반씩 섞어서) 잠시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푹푹 내쉬던 열무군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움찔. 내 동생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믿기 지가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 다른 형제도 존재할 수 있는 걸까.. " 형. " " 네..? 아..아니, 응?;;; " " 형. " " 응?;; " " 바보. " " ㅡㅡ;; " 가만히 날 바라보던 열무군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순간 시원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서서히 주위를 잠식하며 퍼져나가는 향기.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너무너무 좋은 향기. 나는 눈을 감은 채 열무군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 우리가 누군지 알고 싶지? " " ....... " " 기억....되찾고 싶지? " 끄덕.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떠오를 것 같으면서 떠오르지 않는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익숙하고. 기억을 되찾는 것.. 지금 내게 있어 가장 큰 바램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열무군은 천천히 내 귓가로 입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 그래.. 역시 그 방법밖엔 없어. " " 에..?;; " " 고통은 잠시야. " 상냥한 미소. 이미 아름다운 새하얀 손에는 아까의 그 강철쟁반(!)이 들려져 있다. 열무군은 한 손으로 결좋은 머리카락을 스윽 쓸어올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 나 중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도 이렇게 해서 기억 되찾은 녀석이 있었어. 그러니까 너 무 걱정하지마. " " 시.. " " 알아서 힘 조절 할 테니까 긴장 풀고. " " 시.. 시.. 시.. " " 자.. 그럼 준비 됐지? " " 시.. 시.. 시.. 시.. 시.. 싫어어어어어어어어--!!!! >ㅁ<;;;;;; " 나는 황급히 미남씨의 등뒤로 달려가 숨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된다. 숨막히는 정적. 미남씨의 한쪽 팔을 꼬옥 끌어안은 채 눈치를 살피던 나는 흘끗 고개를 들었다. 다들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 정적을 깬 건... 미남씨의 근사한 목소리였다. " 열무야.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 줄래? " " ....... " "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까. " " .........알았어요. 형. " 방금까지만 해도 길길이 날뛰던 열무군이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순종적으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되면.. 미남씨 > 열무군 > 태진군,나 ........이렇게 되는 건가..? 아니.. 지금은 기억을 잊고 있어서 이렇지만 어쩌면 내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물론 일단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잠시 날 돌아다보던 열무군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인형 같은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옅은 그늘. 순간 가슴이 욱신한다. 나는 가만히 열무군을 바라보다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기.. " " ....... " "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 " " ....... " " 하지만 나 노력할게. 꼭 다시 기억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 마지막엔 힘을 잔뜩 넣어 말했다. 순간 열무군의 굳은 얼굴 위로 살풋한 미소가 스친다. 아아.. 웃는 얼굴이 굉장히 예쁘다.. 곁에 서있던 태진군의 얼굴에도 동시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 형. " " ....! " 신발을 다 신은 뒤 갑자기 내 귀를 잡아당긴 열무군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귀에 대고 가만 히 속삭였다. "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지? " " ///// "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얼굴. 예쁜 남동생에게 듣는 말이라 그런지 몇 배로 쑥스럽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손으로 뺨을 부벼댔다. " 피곤하지? " " 아니.. 괜찮.. " "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 쉬어. " 미남씨는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간 뒤 타월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잠시 날 내려다봤다. 온몸 구석구석을 훑는 듯한 시선.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미남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옷 벗어. " " --!! " " 벗어. " 컥.. =ㅁ=;;;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낯뜨거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미남씨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런 엄청난(!) 말을 하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역시나 보통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다. 아무리 같은 남자끼리라고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머.. 먼저 하세요. ^ㅁ^;;; " " 같이 들어갈 거니까 빨리 벗어. " " 저.. 전 괜찮..;; " 헉..! =0=;;;; 어느새 내 티셔츠가 훌렁 벗겨져 있다. 긴 손가락으로 단단하게 옷자락을 쥔 손은 좀처럼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몸부림을 칠수록 더더욱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나는 거의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 이.. 이러지 말아요! 나 혼자 목욕할 수 있어요!! ㅠ0ㅠ " " 시간끌지 말고 빨리 벗어. " " 싫어요오오오--!! ㅠ0ㅠ " 흐윽.. 그러나 완력에 밀린 나는 결국 벌겨벗겨진 채 욕실로 끌려오고야 말았다. 이미 욕조는 물로 채워져있다. 어느새 준비까지 끝내놓다니.. 이 남자..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일 지도.. =_=;; 나는 욕조에 몸을 담근 뒤 바싹 웅크렸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아아.. 역시 빨리 기억을 되찾아야.. 잠시 후, 목욕 준비를 마친 미남씨가 조용히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욕조 구석에 몸을 기댄 나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런 그 모습에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 물 온도는 어때? " " 괘.. 괜찮아.. " " 엉덩이 좀 들어봐. " " 엑--!!??;;; " " 나도 들어가게. " " 에..;; "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를 내주었다. 큰 욕조이지만 성인 남자 둘이 들어앉기에는 확실히 비좁다.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흘끗 뒤를 돌아보니 무표정한 얼굴의 미남씨가 보인다. 적당히 붙은 근육이 굉장히... 멋지다. 나는 슬금슬금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역시나 뼈가 만져진다. ㅡㅡ;;; " 구부리고 있지 말고 앉아. " " 그.. 그치만 자리가.. " " 있잖아. " " 에..? " " 여기. "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미남씨의 다리 사이로 바닥이 보인다. 저기에 앉으면 그야말로 야리꾸리한(!) 포즈가 될텐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괘.. 괜찮아. 그냥 이렇게.. " " 앉아. " " 하지만..;;; " " ....... " 화.. 화났나..?;;;;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천천히 무릎을 꿇고 미남씨를 바라봤다. 마치 성의를 무시한 것 같기도 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 미.. 미안..;; " " ....... " " 알았어. 앉을.. " ---!!!!!!! 뭐..................지...? 이 뜨거운.... 이.. 이.... 이거 혹시.... 키스...????? =0=;;;;;;; 키.. 키스!!;;;; 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키스-!!=ㅁ=;;;; 나는 단단한 팔 안에 갇힌 채로 멍하니 키스를 받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하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나 익숙한 감촉에 머리 속이 새하얗게 타 들어가는 느낌. 아무래도 첫 키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우리는 그렇게 좁은 욕조 안에서 한참동안을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잔뜩 굳은 나는 저항하지 않았고 미남씨도 내게서 입술을 거두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미남씨의 검은 눈동자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인상과 달리 너무나도 따뜻해 보이는 눈. 마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내게서 입술을 뗀 미남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래.. " " ....? " " 역시 못 기다리겠어. " " 에..;;; " " 감히 날 잊다니, 용서 못해. " 미.. 미안해요오오오오오--!!! ㅠ0ㅠ 저 살벌한 표정을 봐라! 사람 한 둘은 죽이고도 남겠다!;;;;;; 미남씨는 강한 힘으로 나를 바싹 끌어당겼다. 순간 중심을 잃은 나는 휘청이며 그대로 품안에 안겨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맨살이 닿자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라냐!;;;;; 일어서기 위해 열심히 버둥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미남씨의 잘생긴 얼굴이 날 내려다보고 있다.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아아.. 이 남자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하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혹시 이 사람의 장난감(!)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꼬붕같은 거.. ㅡㅡ;; 왠지 그랬을 것 같은 강력한 예감(확신)이 드는데..;;; 너무나 고요한 순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 저기.. " " ....... " " 난.. 어떤 사람이었어..? "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미남씨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그리고는 내 양팔을 쥔 채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더니 서서히 졸음이 쏟아진다. 정말 정직한 몸이다. -_-; " 바보. " " ㅡ,.ㅡ "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나는 달랑 그 한마디로 정의 내릴 만큼 간단한 인간이었던 건가!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에 항의하려고 손을 뻗는 순간 깊은 숨결이 내 귓가를 덮쳤다. 그리고.. 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어떤 멍청한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바보. " " ! " 그 농담 같은 한마디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하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열심히 날 찾고 있을 텐데.. 나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웃었다. 어쩌면 나는.. 과분할 만큼 행복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날.. 찾고 있을까..? " " ....... " "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알면.. 슬프겠지..? " " ......아마도. " 짧게 대답한 미남씨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넓은 어깨와 가슴 위로 찰랑거리는 물. 그는 말없이 날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짓궂게 농담하던 모습은 이미 온데 간데 없다. 혹시 지금 이 모습이 미남씨의 본 모습이 아닐까.. 나는 손으로 그의 팔을 잡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거운 수증기 덕분에 온 몸이 붕 뜨는 느낌이다 너무나 나른해서 이대로 그냥 잠 들어버리고 싶다. 이왕이면 미남씨의 품안.. 이대로.. " 아.. " " ....... " 나른한 몸을 미남씨의 품에 기댄 채로 노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향긋한 바디샴푸 냄새가 서서히 주위로 퍼져나간다. 등뒤의 미남씨는 아무 말 없이 내 허리를 꽈악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찌릿하는 느낌이 전신을 덮쳤고 나는 겨우겨우 입을 막으며 가느 다란 신음소리를 삼켰다. " 왜 그래? " " 아.. 아니..///// "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왜 이러는 지 잘 모르겠고.. 혹시.. 허리 디스큰가...?;;;;;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 허리에 머물러있던 긴 손가락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와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이.. 이번엔 아까보다 더한 전기가..!!;;;; " 으....!////// " " .......쿡. " 지.. 지금 뒤에서 웃은 거 맞지?? 분명히 웃음 소리였지?? =ㅁ=;;; 혹시 설마 지금 날 괴롭히고 있는 거..??! 나는 고개를 돌려 미남씨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있다. 아무래도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듯한.. ㅠㅠ " 자.. 잠까...ㄴ...!! 거기 만지지.. 으..////// " " 왜 그래? " " 그.. 그만 만지라니..///// " 도대체 뭐지??! 이 정신을 빼앗는 강렬한 느낌은!? 분명히 아픈 건 아닌데 그 이상으로 참기가 힘들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금새 커다란 손이 허리를 움켜잡고 끌어앉혔다. 또다시 풍덩하며 물 속으로 빠져버린 나. 미남씨는 소리내지 않고 웃고 있다. 혹시 나한테 무슨 화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왠지 그런 기분이.. ==;;; 긴 손가락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점점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갔다. 무릎, 종아리, 발목.. 이제야 끝인가 싶었는데 이번엔 반대쪽 손이 가슴을 쓰다듬고 있다. 그것도 아주 기술적으로.;;;;; 덕분에 숨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다. ㅠㅠ " 하아.. 으.. 왜.. 왜 이러..///// " " 기분이 어때? " " 그.. 마.....ㄴ... " 제..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거지?;; 처음엔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거의 고문 수준이다. 덕분에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 " 지금 그만두면 더 힘들 텐데? " " 으.. 으...//// " " 난 못 기다려. 멍청한 머리가 기억을 못한다면 몸한테라도 묻겠어. " " 아.. 자.. 잠깐..!//// " " 잘 들어. 난 친구 따위가 아니라 바로 네 애인이야. 알았어!? " " !! " 순간 집요하게 따라붙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말 한마디에 온 몸이 차갑게 얼어버리는 것 같다. 정말.. 사실일까..? 정말 이런 미남씨가 내 애인이라고..?? 슬며시 고개를 돌려 미남씨에게 시선을 던졌다. 방금 전과 달리 조금 찡그린 얼굴.. 지쳐 보인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아.. " " ....... " " 저기... " 너무나 무거운 침묵. 방금 전까지는 들뜬 열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어둠의 오오라로 덮여져 있다. 덕분에 말 꺼내기가 쉽지 않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그럼.. 아까 말한 사람은.. " " 바보를 사랑한 멍청한 남자? " " ....... " " .......나야. " 간단한 대답. 미남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 위에 찰싹 붙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나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듣고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게 보인다. 나는 가만히 미남씨의 말을 되뇌였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금새 얼어버렸던 탓에 정신이 몽롱하다. 그야말로 극과 극 체험이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여전히 기억은 나지 않는 걸.. 억지로 기억을 더듬으려 하면 할수록 까마득히 멀어지는 느낌. 정말 진퇴양난이다. " 기다리려고 했어. " " ....! " " 네 스스로 기억을 찾을 때까지. " " ....... " " 하지만 역시 못 기다려. " " 저.. 저기..!;;;;; " 다짐하듯 단호하게 말하는 미남씨의 기세에 눌린 나는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단정한 얼굴이 천천히 내게로 향한다. 막상 시선이 마주치니 말이 안 나온다. 확실히 생각해 놓은 말도 없긴 하지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저기.. 있지..;; " " ....... " " 그냥.. 이대로는 안될까..?;;; " " ....... " " 기억을 잃은 나는.. 싫은 거야? " 나는 꿀꺽 침을 삼킨 뒤 미남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한 말.. 빙빙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요지는 그거다. 나도 댁한테 반했으니 그냥 이대로 러브하자. -_-;; 물론.. 과거의 내겐 조금 미안하지만.. 미남씨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시선은 줄곧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까에 비해 많이 평온해진 분위기. 조금 더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여.. 역시 그건 좀 무리겠.. " " 그래.. 그렇게 할까.. " " ....! " " 너의 과거는 내 기억 속에 묻어두면 되니까. " 나.. 나의 과거..;;;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 나중에 열무라는 동생에게 몰래라도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강철-_-쟁반으로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미남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날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이 뺨에 닿는다. 정말 강한 남자라는 느낌.. 천천히 허리를 쓰다듬는 긴 손가락. 바싹 밀착된 몸이 서서히 열기로 휩싸이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그의 품안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애인사이였다고 한다면 처음도 아닐 테고.. (확실히 이 남자가 날 처녀(!)로 놔뒀을 것 같 같지는 않다. --;;) 이제 다시 시작하기로 한 이상, 새로운 관계를 쌓아나가는 것도..//// 그런데.. 남자끼리는 어떻게 하는 거지..? =ㅅ=;;;; 딩동------ 엑--!!!;;;;;;;; 음란한(!) 생각을 하고있던 나는 갑작스런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마치 18금 비디오를 보다가 부모님께 들킨 기분이랄까?;;;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미남씨는 인상을 찡그린 채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물론 가운으로 몸을 가린 뒤에. 나는 슬쩍 문앞으로 다가가 바싹 귀를 댔다. " 누구세요..? " " 누~~님~~ " " 나 바빠. " " 어머니도 같이 오셨어. " " ! " 순간 쌩 부는 바람.;;;;;; 나는 발가벗은 채로 욕실 문을 부여잡고 멍하니 눈만 껌뻑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든다. ㅡㅡ;;;;; " 얼굴 보기 힘들구나. " " 오셨어요.. " 기품 있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사람일지 대충 짐작이 간다. 분명 아름답고 우아한 분이시겠지. 나는 잠시 멍하니 욕실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생소한 집에서 생소한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게 솔직히 두렵다. 미남씨의 가족이라면 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숨어있을 수도 없고.. 특히나 지금의 난 알몸 차림이 아닌가.. ㅡㅡ;;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인 채 조심스레 욕실 문을 열었다. 멀리 현관 앞으로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옷을 갖춰 입은 미남씨와 굉장한 미녀, 그리고.. 예상했던 그대로의 기품 있는 중년 여성. 자세히는 몰라도 분명 보통 집안 사람들이 아니다. 어쩐지 그런 강력한 느낌이 든다. " 독립한 뒤로는 집에 오지를 않으니 내가 이렇게라도 직접 찾아오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 " " ......... " 조금 꾸짖는 듯한 말투. 미남씨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그 옆의 미녀씨가 말을 받는다. " 아버지 화 나셨어. " " ....... " " .....그건 그렇고.. " 잠시 미남씨를 바라보던 미녀씨는 스윽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뭔가를 열심히 찾는가 싶더니 안으로 들어선다. 순간 움찔한 나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일단은 눈만 빼꼼히 내놓고있는 상황이지만 긴장을 늦췄다간 들켜버릴 지도 모른다. 솔직히 잘못한 거야 없지만 그래도 왠지 이래야만 할 것 같다. 지금의 나로선 미남씨 하나만 상대하는 것도 벅찬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기억을 찾는다고 해도 저 두 사람을 마주하는 건 역시 힘들 것 같다. 너무나 강력한 기운이 주위를 감싸고 있어서 감히 접근하기가 두렵다고 할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맨살이 닿으니 온몸에 한기가 돈다. 그렇다고 해도 옷은 욕실 밖에 있으니..;;;; " .......안 보이네. " -!!!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미녀씨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순간 심장이 출렁한다. 혹시.. 설마.. 날 찾고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저 여자는 피해야할 것 같다. 내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저 정체불명의 미녀씨는 위험인물이라고. -_-; 잠시 후, 거실로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벽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소파에 앉는 소리가 났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쨌거나 일단 시야에서 사라지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다. 그럼 나도 이제 슬슬 옷을 가지러.. " 열매는? " " !! " 갑작스럽게 들려온 내 이름에 화들짝 놀라버린 나는 마악 욕실을 나서려다가 발을 멈췄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혹시나 했지만 미녀씨가 찾던 건 역시 나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미 초면이 아니라는 얘기겠지..? 나는 잠시 쉼 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 나 잠깐 화장실 좀.. " " =ㅁ=;;;; " 곧이어 소파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악 욕실을 나서려던 나는 재빨리 욕조 안으로 숨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그만 첨벙거리는 물소리를 내고야 말았으니..;; 다가오던 발소리가 잠시 멈춘다. 아마도 필시 눈치를 챈 것이리라.;;;;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로 눈을 꽈악 감았다. 따뜻한 물 속임에도 온 몸이 덜덜 떨린다. 좋지 않은 느낌.. 예전의 나와 미녀씨는 어떤 관계였던 걸까.. 우리 사이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 욕실에 누가 있니..? " " 잠깐만. " 미남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급하니까 먼저 좀 쓸게. " " 뭐..? " " 누나는 침실 쪽 화장실로 가. " " 얘.. "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에 이어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문 잠기는 소리가.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옅은 커튼 뒤로 긴 실루엣이 다가오는 게 보인다. 앞으로 다가온 미남씨는 조금 굳은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근심 가득한 얼굴. 나만큼이나 지금 이 상황이 곤란한 모양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 저기.. 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 " 글쎄.. " 이.. 이봐.. 글쎄라니..!;;; 어찌 그런 심한(?) 말을..;; 지금 누구 심장 마비로 죽는 꼴이 보고 싶은겨??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지금으로선 참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억울한 건 지은 죄도 없이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것. 나는 지금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어야하는 걸까.. ㅠㅠ "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넌 혼란스러운 상태니까. " 헉.. 이젠 독심술까지 하십니까..! =ㅁ=;;;; " 널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 지금도 편하지는 않아요. ㅠㅠ 어쨌거나 다 날 위해서라는 걸 알았으니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다. 온 몸이 띵띵 불을 때까지 있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그동안 온천 왔다고 생각하고 잠이나 푹 자두는 게..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남씨가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 최대한 빨리 보낼 테니까.. " - 달칵 에..?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 " 급하다더니 용건이 이거였어? " " !! " 어느새 욕실 안으로 들어선 미녀씨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한 쪽 손엔 주렁주렁 달린 열쇠 고리가 들려져있다. 아마도 마스터 키가 확실한.. 나는 잔뜩 굳은 채로 미녀씨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얼핏 스치는 조소. 정말로 차갑다. " 무슨 짓이야..!? " 미남씨가 날 등뒤로 돌리며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눈앞의 여자가 짧게 한숨을 내쉰다.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다. " 사람 소리가 나길래.. 타이밍이 안 좋았나? " " 저어.. "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미남씨가 황급히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 안녕하세요..;;; " " ....... " 어쨌든 인사는 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나보다는 윗사람이니까. 한참동안 침묵을 지킨 채 날 바라보던 미녀씨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제법 허리가 가느네. " " ! " 그제서야 알몸임을 깨닫는 나. 다행히 아래(--;)는 미남씨가 가려주고 있었다.;;; 나는 시뻘개진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재빨리 커튼 뒤로 숨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미남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래.. 웃고 싶으면 웃어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한참동안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중엔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결국 표독스런 웃음소리를 끊은 건 한참 후 거실에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욕실 밖으로 향한다. 아직 어머니는 내 존재를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인사를 드려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나는 커튼 자락을 움켜쥔 채 고민에 빠졌다. " 어머니 눈치 채시기 전에 가보지 그래? " " ....... " " 어차피 지금은 소개시킬 생각 없는 거 아냐? " 미녀씨는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로 도도하게 말했다. 지나치리 만큼 당당한 얼굴.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미남씨는 말없이 미녀씨를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짧은 한 마디를 남긴 채. " 손대면 죽어. " 순간 미녀씨가 피식 웃는다. 그리곤 곧바로 씁쓸한 미소가 따른다. 오히려 날 보는 눈빛은 좀 전 보다 더 싸늘해졌다. 이런 걸 역효과라고 한다지 아마..? ==;;;; 둘만 남은 욕실 안. 나는 옆에 놓여진 타월로 민-_-망한 부분을 가린 채 뻘쭘히 서있었다. 온몸을 훑는 듯한 따끔따끔한 시선이 너무나 부담이 되지만 차마 항의할 용기는 없다. 일단 옷이라도 입어야 무슨 말이라도 하지. ㅠㅠ 한참동안 날 노려보던 미녀씨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왜그래? 처음 보는 사람처럼. " 처.. 처음 보는데.. ㅡㅡ;;; " 그렇게 굳은 얼굴 하지마. 안 그래도 나 싫어하는 건 알고 있으니까. " " 아.. 아니에요.;;; " " 억지로 예의 차릴 거 없어. " 들켰나.. -_-;;; 나는 우물쭈물 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온몸에 한기가 느껴진다. 이 여자와 마주하고 있으려니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가만히 날 바라보던 미녀씨가 긴 손가락을 뻗어 내 턱을 치켜올렸다. 순간 당황한 나는 놀란 눈으로 미녀씨를 바라봤다. 입가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져있다. " 알아? 너 참... 귀여워. " 엑...?;;;;;;;; " 그래서보고 있으면 자꾸 괴롭히고 싶어져. " 이.. 이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던 미녀씨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장난감으로 삼기에 최적이지. " " 네...? " " 어머.. 정말 둔하네. 그렇게 이해가 느려서 어떻게 사니? " 내 뺨을 쓸어내리는 기다란 손가락. 기분 나빠.. 나는 퉁명스럽게 손을 쳐내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그러니까.. 이율이는 여지껏 널 가지고 논 거라구. " " ......! " " 이젠 그것도 끝이지만. " 뭐....라..고..? 놀란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실에서 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남씨의.. " 싫습니다-! " 눈앞의 여자는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 거짓말이죠? " " 뭐..? " " 거짓말이에요. " 나는 고개를 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가슴에 품은 채로. 다소 짓궂은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 잃은 나를 장난으로 대할 만큼 가벼운 사람 은 결코 아니다. 이전의 그 역시 그랬을 거다. 절대 날 장난감으로 여겼을 리 없어.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여자는 삐딱한 미소를 띄운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공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지만 현재 상태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문 앞에 버티고 선 미녀씨가 쉽게 문을 열어줄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난감할 뿐이다. "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이네. " " ....... " " 무슨 증거라도 있어? " " ........ " " ....... " " .......애인이라고.. " " !? " " 애인이라고 했어요. " 살짝 고개를 돌린 채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미녀씨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잠시 침묵을 지킨 채 날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덕분에 욕실 밖까지는 새어나가지 않았지만 내 상황에선 그저 불안할 뿐이다. 미남씨의 어머니에게 이런 꼴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난감하다. 기억을 찾은 뒤에라도 망설여질 텐데..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욕실 벽에 기대섰다. 아까 미남씨와 물장난을 쳤던 탓에 벽과 바닥엔 거품이 잔뜩 묻어있다. 그래.. 그 때까지만 해도 행복했는데.. " 정말 순진하네. 그 말을 믿는 거야? " " ....... " " 그 녀석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가 몇인지 알기나 해? 내 동생이지만 정말 엄청난 바람 둥이라구. " " ....... " " 사귈 땐 그렇게 말해놓고 나중엔 질렸다며 차 버리는 거야. 아마도 남자는 네가 처음인 모양이지만. " 나는 왜 이런 말을 듣고있는 걸까.. 도대체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나와 미남씨가 헤어지길 바라는 건가? 하지만 지금의 난 미남씨 외엔 의지할 곳이 없는데..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난.. 조금 우울해진 마음을 쓸어안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면이 아니라면 예전에도 이런 불편한 자리를 가졌었겠지. 친동생의 험담을 늘어놓아야 할 정도로 절박한 건가? 그만큼 내 존재가 눈에 가시처럼 느껴지는 걸까? 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지금으로선 이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 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 " " ....... " " 당장 그만 두고 본가로 들어오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어. " " .....! " " 어제 밤 현아가 찾아왔거든. " 현아..? 그게 누구지..? 어쩐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드는데.. " 이젠 정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어. 너. 아니면 널 제외한 모든 것. " " 전.. " " 이율이로선 선택하기 힘들겠지. 그러니까 네가 대신 선택해 줘. " " ....!! " " 널 위해 모든 걸 잃게 할래? 일가와 재산, 이미 보장된 사회적 지위까지? " 난.. 모르겠다.. 내가 그런 큰 결정을 내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지금 내가 아는 거라곤 잠시 스쳤던 여자와 열무라는 동생, 그리고 미남씨의 얼굴뿐인데.. 왜 하필이면 이런 때 이런 엄청난 선택의 귀로에 서게된 걸까. 그런데 이상한 건.. 지금 이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것. 마치 언젠가 한 번 겪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순한 기분 탓일까..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정면으로 쳐다보는 건 무리다. 결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 어쩐지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것 같다. "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싶지 않았어. 난 네가 맘에 들거든.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 제야. 나는 이율이가 우리 집안과 단절하게 할 수는 없어. " " ....... " " 난 널 알아. 그래서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 지도 알지. " 그렇게 말하면 난... 어쩔 수 없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건 결국 하나뿐인 거잖아..? 나는 한참동안 말없이 바닥을 응시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옷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 " ! " 순간 여자의 얼굴이 화악 펴진다. 결국 원했던 대답을 끌어냈으니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느끼고 있겠지. 나는 조금 속이 쓰렸지만 짧은 한숨으로 얼버무렸다. 어차피 예전의 내가 아니다. 모든 기억을 잃은 나는 더 이상 그의 미래를 좌우할 자격이 없는 거다. 정말 날 위해 모든 걸 잃게 된다면 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만 두는 편이.. 차라리 기억을 잃은 건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여자가 건네준 옷을 받았다. " 집으로 돌아가. " " ....... " 나는 멍하니 옷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파스텔톤 하늘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잠바 하나를 걸치니 그제서야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도 온몸의 한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 인사.. 해도 될까요..? " " 아니. 그냥 가는 게 좋겠어. " " ....... " 잠시 날 바라보던 여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이율이가 널 찾아가면 네 쪽에서 끝내자고 해.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 해. " " ....... " 잠시 망설이던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욕실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미남씨는 어머니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뒤에 선 누군가의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어쩔 수없이 신발을 신자마 자 밖으로 나와야 했다. 문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미안해. 그리고.. 힘든 결정 내려줘서 고마워. " " ....... " " 안녕. " 문이 닫힌 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행히 지갑은 가지고 나왔지만 당장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갈 용기도 나지 않아 나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다. 깨끗하고 고급스런 건물을 잠시 올려다보던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이루어진 결정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마음은 편하다. 이젠 나 때문에 미남씨가 힘들어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가족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다. 나는 쓸쓸하게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냥 아무 곳에나 있다가 지갑에 꽂힌 수첩을 뒤져 연락을 해야겠다. 동생 이름이 열무라고 했었지.. 정말 특이한 이름이다. 밖은 쌀쌀했다. 얇은 점퍼차림으로 다니기엔 심각할 만큼 추웠다. 어느새 시뻘겋게 변한 귀와 뺨이 서서히 아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샤워를 한 탓에 머리카락까지 젖어있다. 아니, 이젠 바람에 얼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일단은 따뜻한 뭐라도 마셔야할 것 같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나는 대충 눈에 띄는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간판이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된장찌개 냄새가 솔솔 풍기는 곳. 그제서야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는다. " 뭘 드릴까? 학생? " " ....... " 흘끗 고개를 들어 벽에 붙은 메뉴 판을 훑어봤다. 지갑 사정이 사정인 만큼 비싼 건 무리다. 결국 내가 고른 건 된장찌개 백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남씨의 집에 있을 땐 정말 넘칠 정도로 풍요로웠다. 아무 것도 부족한 것 없는 나른한 생활.. 첫인상과 달리 너무나 따뜻한 태도에 놀라면서도 기뻤다. 언제나 세련된 옷차림에 기분 좋은 향수를 사용하고 단정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보듬어 주었다.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다른 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너무나 멋지고 세련돼서 보통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라는 느낌. 그래서 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차마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만일 기억을 잃기 전의 나였다면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가슴이 아리다.. " 저기.. 소주 한 병만 주시겠어요..? " " 미성년자 아니여? " " 아니에요. "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등이 많이 굽은 할머니께서 술병을 건네주셨다. 차가운 유리가 손에 닿는 순간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허름한 간판 때문일까.. 손님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종업원들의 시야에 담겨진다. 부담스럽다. 나는 조심스레 한 모금을 들이킨 뒤 멍하니 벽을 쳐다봤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정신 없이 마셔댔다. 가슴이 답답해서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모든 기억을 잃고 아무런 말도 없이 마지막 희망을 놓아버린 스스로에 화가 났다. 나는 누구지? 설마 정말 미남씨의 장난감이었던 걸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정말 누구인 거야..? 그동안 억눌러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터져나왔다. 억지로 조여왔던 나사가 풀어져버렸다. 그래도 울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면 되는 거다. 어차피 미남씨와의 기억도 지워져버렸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나면 웃으며 인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지. 그가 날 사랑했던 걸 후회하지 않게.. 가슴 가득 차 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목 메인 한숨을 뱉어냈다. 그러나 내 얼굴은 이미 물기로 흠뻑 젖어버린 뒤였다. " 열매는?? " " 글쎄.. " " 강이립-!! " " 다 끝났어. " " .....뭐..? " " ....... " " 그게 무슨 소리야..? " " 네가 싫대. 부담스럽대. 그래서 떠났어. 이젠 너도 정신 차려. 내일 당장 시드니로 떠날 준비 해. 아버지가 동행하실 거야. 비행기 시간은.. "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느낌. 잠시 후.. 멍하니 굳어있던 나는 정신 없이 뛰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절박한 심정으로. 태어나서 그토록 두려웠던 건... 처음이었다. 아.. 머리가 아파.. " 제가 보호자입니다. " " 아.. 네.. 그럼 집으로 데리고 가십시오. " " .....감사합니다. " 천천히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하지만 그보다 속이 너무 쓰리다. 술 마시고 돈 계산하고 식당을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이 곳이 어디든 지금은 좀 더 쉬고 싶.. " 일어나. " " ....! " " 밖으로 나와. " 잠깐... 이 목소리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황급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미남씨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 내려다보고 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와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 잠시 날 내려다보던 그는 차갑게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파출소 안이다. 제복을 입은 경찰 두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이 추운 겨울에 얼어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 분들 덕분인가 보다. 나는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나이 들어 보이는 경찰 아저씨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넨다. "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야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위험했을 거야. " " 네...? " " 자네 주위에 남자들 여럿이 웅성거리며 서있었어. 요즘 세상엔 남자 여자 안 가리니. " " ...!? " " 그러게 나도 처음엔 여자인 줄 알았다니까. " 무슨.. 소리지..? 경찰 아저씨는 멍하니 서있는 날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 빨리 가봐. 다신 술 먹고 허우적대지 말고. " " 아.. 네.. " 나는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넨 뒤 파출소를 나왔다. 으스스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스쳐지나간다. 덕분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지만 속은 여전히 쓰리다. 그보다 문제는 차 앞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는 미남씨다. 혼자서 울며 잊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막상 또 이렇게 대하려니 민망하다. 게다가 저 무서운 표정.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많이 화가 나있는 듯 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나는 머뭇머뭇 곁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미남씨.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찔한 통증이 귓가를 덮쳤다. 멍하니 서있던 나는 가만히 뺨 위로 손을 가져갔다. 얼얼하다. 또 그렇게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뺨을 쓸어 내리며 눈을 감았다. 너무나 무서운 얼굴.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다. " 타. " " ....... " " 타! " 애써 억누르고 있지만 목소리가 거칠다.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짧게 숨을 삼켰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자 미남씨가 차 문을 열고는 억지로 날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잠.. " " 집에 도착한 뒤에 말해. "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지금의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다. 멋대로 말도 없이 나온 건 분명 내 잘못이지만.. 나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색한 침묵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다. 차라리 뭐라고 소리라도 쳐줬으면 좋겠다. 아까 맞은 뺨의 통증이 아직까지도 얼얼하게 남아있다. 별로 세게 친 것 같지도 않았는데.. 나는 흘끗 고개를 돌려 운전대에 놓은 커다란 손을 내려다봤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미동조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금 전의 무지막지한 힘이 마치 아득한 꿈처럼 느껴진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나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 말 없이 나와서.. 미안해. " " ....... " " 인사는 했어야 했.. " " 인사..? " 미남씨는 여전히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비웃듯 말했다. 스치는 헤드라이트에 간간히 비치는 옆모습은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차갑다. 지금의 그는 무슨 말을 해도 받아줄 것 같지 않다. 나는 쓰린 속을 애써 달래며 억지로 창가에 시선을 묻었다. 화려한 인공 불빛들이 어두운 도시를 채색하고 있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서서히 흐려져 간다. 안개라도 낀 걸까.. 왜 이렇게 흐려 보이는 거지..? 나는 애써 숨을 죽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흉한 꼴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한심한 거지..? 도대체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야.. 억지로 고개를 고정한 상태라 목이 점점 뻣뻣해진다. 그렇다고 손을 올리면 눈치 채일 것만 같다. 막판에 추하게 우는 꼴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야경에 애써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물을 참느라 애썼다. " 닦아. " " ....! " 그 순간 퉁명스런 목소리와 함께 푸석한 휴지 뭉치가 뺨에 와 닿았다. 억지로 참은 탓에 콧물이 입술선 위까지 내려와 있다. 아니.. 그보다도..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목이 뻣뻣하게 굳어갈 때까지도 억지로 참아냈는데.. 어쩐지 허탈한 심정이다. 말없이 휴지 뭉치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받아쥐고서 얼굴을 닦았다. 너무 세게 문지를 탓에 코 주위와 눈가가 따갑다.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여전히 적응이 안되지만 그래도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적어도 더 이상은 콧물을 참지 않아도 되니까. 눈물 콧물로 흠뻑 젖어버린 휴지 뭉치를 꾹꾹 누르며 조심스레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은 콧날이 드러나는 단정한 옆모습. 턱 선이 근사하다. 나는 꾸깃해진 휴지뭉치를 움켜쥐고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말해야할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 무섭다. 휴지를 건네준 이후로는 줄곧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무슨 말을 해야 다시 예전처럼 날 봐줄까..?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면..?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뒤다. 강요된 선택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내가 한 선택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 내려줘. " " ....... " 대답이 없다. 여전히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 나.. 그곳엔 돌아갈 수 없어. 나 이제 너랑.. " " ....... " " 너랑.. " 말이 안 나와.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처럼. 술을 마시며 그렇게나 연습했던 그 짧은 말이.. 잠시 후 나는 주먹을 쥔 채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 너랑 헤어질 거야. " - 끼익 급하게 인적 드문 갓길에 차가 세워졌다. 미남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멍청한 소리하지마. " " .......! " " 네가 헤어지자고 하면 내가 오냐하고 헤어져줄 줄 알았어? " " 난..! " " 그럼 진작에 끝냈어야지. 내가 진심이 되기 전에. " 순간 거친 숨결이 내 입술을 덮쳐왔다. 내 등을 끌어안은 팔의 힘이 너무 강해서 나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키스가 이어졌다. 너무 강렬해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 결국 내가 원했던 것도 이걸까..? 왜 난 억지로 밀어내지 않는 거지? 방금 전의 말과 지금의 행동은 다르잖아. 또다시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조금만 더 이성적인 인간이었다면 좋았을텐데. " ..........하아... "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린 난 애써 고개를 돌려 미남씨의 품안에서 빠져나왔다. 날 향하고 있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이미 깊은 키스를 받아준 지금엔 그 의미가 퇴색해버린 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정말 겁쟁이에 멍청이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건지 그저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서 이제 어쩌려고.. 빨리 냉정하게 잘라내지 않으면 결국.. "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 " ! " .........뭐...? " 네가 내 옆에 없으면 난 더 이상 내가 아니야. "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 방금 전과 달리 너무나 따뜻해 보이는 눈. 순간 눈물이 가득 고인다. 어째서 지금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하는 거야..? 이제 난 어쩌라구..? "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 " ....... " " 죽을 때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해. " 이런.. 사람이었나..?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간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달콤한 말을.. 목이 메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난 두려웠다. 내 기억에서 지워진 과거와 앞으로 다가올 어마어마한 미래가. 차라리 협박에 가깝던 그 말들이 그래서 더 날 괴롭혔다. 미남씨가 조금만 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텐데라고 끝없이 생각했다. 원래의 난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난 지독한 겁쟁이에 지나지 않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남씨가 날 붙잡아 주기를. 진심으로 정말로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기를.. 그래.. 결국 날 상처 입혔던 건 나 자신이었던 거다. 자기연민에 빠져서.. 장난감이라는 말..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도 기억을 잃은 지금의 나로선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무작정 도망쳤던 거다. 결국은 나와 미남씨를 믿지 않은 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나를.. 좋아해..? " " .....! " " ....... " 점점 더 고개가 밑으로 내려간다. 짧은 침묵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괜한 질문을 했다고 애써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당연한 거 묻지마. " 으... 결국 울어버렸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눈물을 참지 않아. 아깐 정말 힘들었으니까. 잠시 후 내 뺨 위로 커다란 손이 와 닿았다. 시원한 스킨 향이 묻어나는.. " 내가... 좋아..? " " 좋아. " " 나... 계속 네 곁에 있어도 돼? " " 그래. " 흔들림없는 눈동자가 날 향하고 있다. 이젠 내가 대답해야할 순간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몽롱한 기억 너머로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이율이가 널 찾아가면 네 쪽에서 끝내자고 해.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 해. ' 그래.. 그게 최선이라면.. 나는 고개를 들어 미남씨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난 널 믿고 싶어. " 나도.. 나도 네가 좋아. " 우리를.. 믿고 싶어. " 너.. 너무 빨라!;;; " " ....... " " 따라 잡기가 힘..!;;; " " .....천천히 해. " 나는 녀석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말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새빨간 뺨과 헐떡이는 숨결. 땀에 젖어 흩날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녀석은 지금 열심히 두더지를 잡는 중이다.-_- 팔 뿐만 아니라 온몸이 춤추듯 흔들리고 있다. 덕분에 줄곧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나. 어제 밤의 의기소침해 보이는 녀석이 안쓰러워 오늘 하루 마음을 먹고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한치의 망설임 없이 오락실이란다. 기억을 잃어도 취향은 그대로인 모양이다.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나지만 뭐.. 하루 정도는..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천천히 녀석의 등뒤로 다가갔다. 순간 공기를 타고 은은한 비누 향이 전해져 온다. 그렇게 얼마간 서있자 마침내 화면 가득 'game over'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못내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녀석.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며 말했다. " 더 할래? " " 음... " 생각할 때의 녀석이 늘 그렇듯 천장으로 시선이 향한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가 싶더니 입가에 살풋한 미소가 떠오른다. " 네가 해봐. " " ....뭐..? " " 너 하는 거 보고 싶어. " " 됐어. "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러자 녀석이 재빨리 뒤에서 내 팔을 끌어당긴다. 이 녀석.. 기억을 잃은 뒤로 어리광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원래의 녀석은 생긴 것과 다르게 꽤나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타고난 어벙함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던 녀석은 열심히 내 팔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먹이를 갈구하는 강아지 같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 " 너 두더지 해본 적 있어? +ㅁ+ " " 아니.. " " 이거 디따 재밌어! 너도 해보면 중독될 걸?? >ㅁ< " " ......그래.. " " 나중엔 두더지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귓가엔 하루종일 뾱뾱소리만 들릴 걸?" .......설마..-_- 그거 혹시 경험담인 거냐.. 나는 동전을 넣은 뒤 마지못해 망치를 집어들었다. 등뒤에서 부담스런 시선이 느껴진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그다지 생소한 일은 아니지만 손에 들려있는 망치의 중압감 때문일까.. 평소보다 조금 신경이 쓰인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시큰둥하게 준비 자세를 취하던 나는 'start'라는 닭살스러 운 멘트와 동시에 불쑥 튀어나온 물체를 향해 망치를 내리꽂았다. " 왜 때리니~ 왜 때리니~ " 두더지의 앙증맞은 목소리에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나 잠시 웃음을 머금었던 얼굴은 서서히 진지해져갔고 나중엔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정 도로 열심히 망치를 휘둘러댔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주위에서 계집애들의 꺅꺅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독까지는 안되더라도 확실히 집중력은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후 마침내 game over 화면이 떠올랐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다고 할까.. 신기록 수립이다. 조금 기쁜 것 같기도. 말없이 점수 판을 바라보던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 다. 아까보다 몇 배나 더 반짝거리는 눈동자. 역시나 이 녀석도 기뻐하는 것 같다. " 너 처음 하는 거라며?? " " 뭐, 어차피 단순한 게임이니까. " " 그래도 짱이다-! +ㅁ+ " " .....그래..; " 저 부담스런 눈빛. 별 거 아닌 일에도 기뻐한다는 건 소박한 성격이라는 증거겠지. 뭐, 그 점이 귀엽긴 하지만. 나는 천천히 망치를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주위에 몰려있던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뒤를 따라붙는다. 예전 취미로 당구를 쳤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같이 어울렸던 녀석들의 여자들도 지금의 녀석과 같은 반응이었다. 그땐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녀석이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재빨리 내 뒤를 쫓는다. " 영화 보러 가자. " " !? " " 좀 오래된 영환데.. 괜찮지..? " 작고 어두운 공간. 낡아 보이는 딱딱한 소파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잠시 후 로고가 화면 가득 뜨고 곧바로 낯익은 자막이 떠올랐다. 언젠가 누군가와 봤던 장면의 연속들. 나는 말없이 화면에 정신을 집중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 시간이면 비행기는 구름 사이를 날고 있겠지. 어제 밤의 일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 포기하겠어. " " ....뭐..? " " 차기 경영권. 앞으로 일체 간섭하지 않겠어 " " 이율아!! " " 애초에 후계자 자리가 탐났으면 날 협박하지 그랬어? 왜 매번 그 녀석을 상처 입히는 거야-!? " " 이율아! 그게 아..! " " 다행으로 생각해. 만일 녀석을 찾지 못했으면 나도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니까. 마 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더 이상 우리에게 간섭하지 마. " " 너..! " " 시드니엔 가지 않겠어. "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누나의 집을 나왔다. 집안의 반대를 전혀 예상 못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결정은 내려놓고 있었다. 꼭 후계자가 아니더라도 내 통장엔 이미 외가로부터 상속받은 적지 않은 돈이 있고. 물론 당장 수중에 돈이 없다고 해도 내 대답은 같았을 거다. 그만큼 난 녀석에게.. 문득 귓가로 귀에 익은 배경음악이 흘러들었다. 동시에 낯익은 장면도 눈에 들어온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다. 미리 준비해뒀던 손수건을 건네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띄워본다. 그 시절의 기억을 잃은 녀석은 이미 예전 그대로일 수는 없겠지. 어느 한 장면을 기억하고 녀석의 반응을 기다리며 마음 졸였던 건 역시 나뿐인 건가. 괜찮은 척 웃어보지만 마음 한 켠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 결국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던 거겠지. 잠시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나직한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었 다. " 이 영화.. 여덟 번째 보는 거야.. " " .....! " " 나.. 그 때도 이 장면에서 울었었지. 그리고 그 때도 넌 이렇게 곤란한 얼굴을 하고 날 위로해 줬었어. " " ...너... " 당황한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말없이 날 향해 웃고 있다. 혹시하는 마음으로 데려왔지만 설마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그저 몽롱하니 모든 게 꿈만 같다. 나는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 기억나는 거야..? " " ....... " 녀석은 대답 대신 미소를 띄우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누군데..? " " 깡패시.. " " ....뭐..? " 방금 무슨 말인가 한 것 같은데 배경음악 때문에 잘 못 들었다. 황급히 입을 막는 걸로 보아 뭔가 의심스러운데.. 나는 다시 한 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내가 누군지 알아? " " 강이율. " " 이름말고. " " 대학생. " " 직업말고. " " 남자. " " 야.. ㅡㅡ+ "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살며시 웃는 녀석. 자세히 보니 어느덧 옆머리가 귀를 덮을 정도로 길게 자라있다.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작은 얼굴을 감싸안았다. 동시에 깊고 뜨거운 숨결이 팔 위로 스며들었다. 희미한 흐느낌. 그래.. 그 날의 녀석도 이렇게 울었었다. 그 땐 단순히 이티의 이름을 불렀던 게 지금과 다르다고 할까.. 수많은 연인들 사이에서 조금은 어색했던 우리들. 그 땐 미처 알지 못했다. 설마 녀석이 이렇게까지 내게 소중한 존재가 될 줄은. 나는 천천히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우리 대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적막한 공간을 채워나간다.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되찾고 나니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행복. 나도 모르는 사이 진심으로 간절히 원했던 모양이다. 녀석이 다시 기억을 찾기를. 내 존재를 스스로 알아내기를. 그래서 지금의 난 눈물이 날 만큼 기쁜 거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녀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땅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볼 뿐. 마치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녀석은 말없이 손을 뻗어 내 옷자락을 쥐었다. 소매 끝으로 단단한 힘이 느껴지자 피식 웃음이 난다. 나는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침묵에 동조했다. 아무래도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 건 내 쪽인 것 같다. " 저기.. " " .....? " 그렇게 10분 정도가 흘렀을 때.. 녀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기.. " " .......? " " 기.. "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기다려줘서 고마워..라는 그 짧은 말이. 막상 분위기 잡고 말하려니 쑥스러워서 도무지..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뻘개진 얼굴로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러자 말없이 옆에 서있던 녀석이 피식하고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친다. 느낌으로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그냥 웃는 건지. 하지만 아마도 이해했을 거라고 믿는다. 녀석은 나와 달리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으니까..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과 달리 묘하게 진지한 표정이다. 단정한 이목구비 위로 언뜻 비춰지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랄까.. 분명히 몇 시간 전의 나였다면 지금 녀석의 이런 미숙한 표정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 을 것이다. 그저 색다른 주위환경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건 신경조차 쓰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래.. 나는 분명히 녀석을 기억하고 있고, 그 만큼의 기억을 내 몫으로 가질 수 있다. 그래.. 지금의 내게 있어 그 이상의 기쁨은 없다. " 날.. " " ....... " " ....기다려줘서 고마워. "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살짝 눈을 감았다. 잠시 잊고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다. 한 번 용기를 내니 그 다음은 의외로 쉬웠다. " 지금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정말 기뻐.. " 스스로 말하고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바람에 나는 억지로 웃으며 어색하게 머리를 쓸어 넘 겼다. 밤바람이 살랑이며 머리카락을 흐트러놓는다. 수많은 연인들이 라디오 프로그램 사연으로 올려놓는 단골 글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되는 진부한 유행가 가사. 모든 영화의 드라마 속의 필연적인 요소. '사랑'이라는 그 짧은 말은 결국 내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결국 난 어쩔 수 없는 소심쟁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난 이걸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녀석이..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으니까.. " ............그래.. 나도. " " 바보-!! " " ....... " " 멍청이! " " 아아.. 그래.. " " 도대체 왜 그런 바보같은 짓을 했어!? " 나는 적당히 통통하게 채워진 쿠션을 양손으로 덥썩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흥분을 했더니 아찔하니 현기증이 난다. 도대체 깡패시키는 무슨 생각으로.. =ㅁ=;; " 너 정말 누님한테 그렇게 말했어!? " " .....그래. " " 차기 경영권 포기하겠다고?? " " 그래.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돼..? " 으윽.. 이 시키... 그렇게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말하다니.. 나야 녀석의 집안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나..? 역시 보통사람들과는 스케일이 달라서 그런지 상당히 의연하다. 정작 본인은 괜찮다는데 왜 내가 더 흥분을 해야하는 건지..;; 나는 쿠션 끝을 잘근잘근 씹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정말.. 미련 없어..? " " 없어. " " 그래도.. 그럼 더 이상 지금처럼 호화롭게 살 수는 없을 텐데.. " " 상관 없어. " 녀석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다. 살짝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내가 시끄럽게 군 탓에 피곤해하는 기색이다.;; " 그럼 애초에 계획했던 유럽 여행도 힘들어질 거고.. " " 유럽이 부담되면 호주나 뉴질랜드 쪽으로 하지. " " 그게 아니라..;; " 이젠 돈이 없을 거 아냐??;;;;;; 굳이 무리해서 해외여행을 강행할 필요가..-ㅁ-;; 그보다도 녀석의 발언은 마치.. '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잖아? -by 마리 앙뜨와네트'....가 아닌가...!ㅡㅡ;;; 이래서 부르조아들은.. -_-;; 나는 몇 번에 걸쳐 한숨을 내쉰 뒤 중얼거리듯 말했다. " 너무 걱정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 " .....? " " 돈 없어도 괜찮아. 내가 벌면 되지. 뭐.. " 나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녀석의 배경이 심히 부담됐던 것도 사실인 지라 한편으론 시원하기도 하다. 적어도 예전처럼 기죽으며 지낼 필요는 없으니까. 맞벌이를 하면 그럭저럭 10년만 고생하면 집도 마련할 수 있을 테고.. 이왕 집을 마련하려면 작더라도 마당이 있는 쪽으로 구해야겠다. 귀여운 누렁이 두어 마리를 키우려면.. 녀석이 외롭지 않도록 하려면 역시 강아지가 있어야.. 지방으로 가면 더 빨리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우리들은 도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일단 녀석을 조금씩 설득해 보는 게... " 혹시 너 지금 돈 걱정 하는 거냐? " " ...! " 잠시 후 녀석이 문득 내게 물었다. 한참 머릿속에 복잡한 공식을 늘어놓던 나는 부랴부랴 정신을 수습하며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 내가 빈털터리로 쫓겨났을까봐..? " " ....... " " ....... " " .......;;;;; " 그.. 그럼.. 호적에서 짤린 게 아닌가..? ㅡㅡ;;; 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피시식 웃었다. 어째 한 순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다. ㅡㅡ;; 나는 그래도 현실적인 걱정을 했던 건데..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던 걸까... " 평생 쓸 만큼의 돈은 통장에 있어. 굳이 골치 아프게 사장 자리에 앉지 않아도 충분히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거지. " 그.. 그런 거냐..?;; 이래서야 마치 걱정한 내가 바보 같군.. ㅡㅡ; " 하지만 아마도 쉽게 날 포기하진 않을 거야. 너도 각오해두는 게 좋을걸. " " 가.. 각오라니..?;; " " 삼남매 중 후계자로 키워진 건 나 뿐이야. 형이나 누나는 나와 달리 경영에 대해선 전 혀 모르지. 큰 기업을 잇기엔 역시 무리랄까.. " " 그럼... 망할 수도 있다는 거야..?;;; " " 뭐.. 재수 없으면. " 어이.. 이봐... 당신네 회사 아냐..? 좀 더 진지해져 보라고..;;; 대체 아버님은 깡패시키의 뭘 믿고.. ㅡㅡ;;;; 나는 한쪽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흘끗 보니 녀석은 입가에 산뜻한 미소를 띄운채 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무나 우아해서 나른할 정도랄까... 어느새 차렷 자세로 녀석을 관찰하고 있는 나.. ㅡㅁㅡ;; "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 " ....... " " 만약 호적에서 제명되고 빈털터리가 된다고 해도 너만큼은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 " .......; " " 절대 안 굶겨. 그러니까 그만 얼굴 펴. " " 그.. 그런 게 아니잖아!? " " .......? " " 난 굶을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 무.. 물론 역시 배고픈 건 싫지만..;; 어쨌든!! " 난 네가 혹시라도 상처받으면 어쩌나 해서.. " " ....... " 녀석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썹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린다. " 가족과 인연이 끊기면.. 그럼.. 설날에도.. 추석에도 외롭잖아.. " " ....... " " 결혼식에도.. 장례식에도 아무도 오지 않고.. " " ....... " 말하는 동안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버렸다. 그래! 쓸 데 없이 감수성 예민한 나다! ㅜ0ㅜ 나는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며 말을 이었다. " 그럼.. 외롭잖아..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 그 순간,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내 어깨 위로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흘끗 올려다본 녀석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 네가 있잖아. " " ......! " " 내 옆엔 네가 있는 거 아냐? " 잠시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녀석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갑자기 내 뒤통수를 툭 하고 쳤다. " 근데 너 지금 누굴 왕따 취급하는 거냐? 내가 누군지는 아직 기억이 안나나 보지? " " ...;;;; " " 잠시 기억을 잃더니 이젠 아주 겁을 상실했군. 아무래도 재교육이 필요하겠어. " " =ㅁ=;; " 이.. 이보세요......!!?? ;;;;; " 오늘 밤은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 " 아.. 아니,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ㅁ=;;;;; " " 기억 찾은 기념으로 오늘은 좀 길게 가볼까.. " " 자..잠깐!! 그게 아니구요! 왕따 취급한 게 아니라 저는 그저!! >ㅁ<;;;;; " " 쿡쿡.. "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시키가 누구인지를..! 그 이름도 무서운 천하의 깡패시키라는 사실을..!! 아아... 잠시나마 녀석을 걱정한 내가 도롱뇽이지. ㅠ.뉴 결국.. 다시 기억을 찾은 축복(?)의 그 날.. 나는 녀석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밤새도록 비명을 질러야했다. ㅠ0ㅠ 오늘은 아침부터 미열이 났다. 평소 열이 많은 체질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긴 게 화근이 되어 지금은 꽤 심각할 정 도로 이마가 뜨거워져 있다. 어제 목욕을 한 뒤 에어컨 앞에 앉아서 만화책을 읽었던 게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견공도 안 걸린다는 한여름 감기라니.. ㅡㅡ; 나는 빨개진 얼굴을 양팔로 감싸며 딱딱한 거실 바닥에 누웠다. 아직 설거지와 셔츠 몇 벌 다려야할 게 남아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무리일 듯... 평소 건강체질이라 자부해왔건만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걸까..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완전히 엎드린 채로 바닥에 뺨을 대보았다. 한순간이나마 시원하게 느껴지니 다행이다. ' 깡패시키... 오늘도 늦으려나.. ' 흘끗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p.m)가 넘어 서있다. 깡패시키는 요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자주 귀가가 늦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지는 말해주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꽤 힘든 일인 것 같다. 확실히 몇 일 전부터 피곤한 기색이 드러난 달까.. 그래도 집에 돌아오면 내가 미처 끝내지 못한 집안 일을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맡으려고 하는 게 상당히 고맙게 느껴진다. 집안 일이라는 게 한도 끝도 없어서 하루종일 해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 제.. 젠장.. 이게 뭔 아줌마 같은 대사래.. =ㅁ= 나도 참.. 동거 2년 만에 완전히 주부 다 됐구만.. ㅡ_ㅜ 잠시 거실에서 밍기적거리던 나는 문득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올 사람이라곤 한 사람 뿐이니까.. 뭐.. 나는 아직까지도 빨갛게 열을 내고 있는 두 뺨을 양손으로 툭툭 두드린 뒤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왔어? 오늘도 조금 늦었네- " " 응. 일이 좀 늦게 끝났어. " " 난 오늘 수업 2시간 밖에 없어서 일찍 들어왔는데.. "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녀석의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이는 터라 나는 그쯤에서 말 을 끊고 부엌으로 향했다. " 저녁 먹었어? " " 응. " " 뭐라도 마실래? " " 아니, 됐어. " 쳇.. 모처럼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어놨는데 아쉽구만.. ㅡㅡㅋ 나는 대충 식탁에 엎드린 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역시나 여름감기에 톡톡히 걸린 모양이다. 첫날에 확실히 잡아두지 않으면 고생할 텐데.. 그렇다고 겨우 감기 정도에 비실거리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다. 식탁에 오래 엎드려 있다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방 으로 향했다. 녀석은 이미 욕실로 들어간 뒤라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노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눈을 감으니 조금씩 정신이 아득해진다. 사실은 깡패시키와 좀 더 얘기하며 놀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아아.. 정말 거대한 납덩이를 단 것처럼 온 몸이 무겁다.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 졸.... 려... " 벌써 자는 거야? " " 으... 응.. " 샤워를 마친 녀석이 침대 맡에 앉으며 나직하게 묻는다. 곧이어 시원한 바디 샴푸 향이 코끝에 와 닿는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두어번 뒤척이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불을 켜지 않은 상태라 주위가 온통 까맣다. " 수업은 잘 듣고 있지? " " 음... 뭐... 그럭저럭.. ㅡㅡㅋ " " 이번에도 낙제점 받으면 쫓아낼 거니까 알아서 해. " " =ㅁ= " 야, 이 시캬! 그런 게 어딨어??!! 언제는 평생 먹여 살려 준다매-?!! 그 말 한 게 바로 전 편이얌마-!! =ㅁ=+ " 참.. 내일 과 후배 두 명 집으로 올 지도 몰라. " " 응...? " " 아는 형 여동생인데 수업 내용 보충 좀 해달라고 부탁해서.. 뭐.. 그래도 최대한 밖에서 처리할 테니까.. " 녀석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살짝 털어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사실 깡패시키가 누군가를 집으로 들이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니까.. 누님이나 정현아나 다들 자기 발로 찾아온 거고.. ㅡㅡ; 꽤나 친한 후배인가.... 분명 '여'동생이라고 했는데.. ㅡㅡ 나는 흘끗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내 볼을 꼬집는다. (아퍼 임마!ㅜㅜ) " 잠깐.. " " 응..? =ㅅ=? " " 너.. 열 나잖아..? " 아.. 그걸 이제 안 거냐.. 뭐.. 하긴.. 계속 불끄고 있었으니까..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정성스레 녀석의 손을 꼬옥 잡았다. 제발 볼따구니 좀 당기지 말란 말이다. ㅜ_ㅜ " 감기야? " " 응.. 그런 것 같은데.. " " 약은 먹었어? " " 응.. " " 너 또 애들용 시럽 먹은 거 아냐? " 윽..; " 아.. 아니야!;; " 그치만 알약은 자꾸 목에 걸리는 걸..;; 가루약은 너무 쓰고.. ㅠㅠ 이 나이 먹고 약 하나도 제대로 못 먹는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마라.. 목구멍이 작은 건지 이상하게 뭉쳐있는 걸 먹으면 자꾸 체하는 나다. 다른 건 괜찮은데 유독 약만.. ㅡㅡ;; 아무래도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한 거겠지만.. " 약 제대로 챙겨 먹어. 또 보름동안이나 골골대지 말고. " " 아.. 안다니깐.. ㅡㅡ; " " 빨리 나아라. " " 응../// " 짜식.. 그래도 서방이라고 끔찍이 챙겨주.. " 괜히 나한테 옮기지 말고. " " =_=;; " 나쁜노무시키.. ㅜ_ㅜ 잠시 말없이 날 내려다보던 녀석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살짝 이마 위로 입술을 가져왔 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 자리가 화끈거린다. 녀석의 입술이 내 이마보다 더 뜨거운 걸까.. 나는 눈을 껌뻑이며 가만히 녀석을 바라봤다. " 과 후배는 그냥 밖에서 만나고 올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푹 쉬고 있어. " " 아니.. 난 괜찮은데.. " " 그게 아니라 걔들한테 감기 옮기면 안되니까. " 야.. =ㅁ=++ 살짝 굳은 얼굴로 째려보자 녀석이 소리내어 웃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이 시키가 또 장난병이 도진 모양인데.. =_=; 그보다 녀석이 평소답지 않게 신경 쓰는 그 여인네는 누굴까.. 어째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인다. 나름대로 쿨한 이미지를 구축해 보려고 노력중이라 웬만하면 초연한 반응을 보이고 싶지 만.. 그래도... 그래도... ㅡㅡ;;; 결국 호기심에 판정패 당한 나는 최대한 관심없는 척 하며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 근데.. 그 여동생이랑은 꽤 친한가 보네..? " " ....... " " 뭐.. 별로 상관하는 건 아니지만.. -_-; " " ....... " 으... 왜 대답이 없는 거냐.. 혹시 진짜로 친한 사이인 것이냐??;; 괜시리 초조해져서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잠시 후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는 듯 하다. 이번에도 괜한 걱정을 한 걸까... 말없이 침대에서 일어난 녀석은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가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잘 자. " " 어.. 엉.. ;_; " 뭔가.. 이상한 걸...? -_-;;; 평소의 녀석답지 않게 말을 돌리다니.. 아무래도 자꾸 신경이... 결국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나는 네 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도 펄펄 끓는 열에 취해서. 불덩어리가 된 몸으로는 도저히 출석을 할 수 없어서 나는 그대로 꼬박 하루를 침대에서 보내고야 말았다. 녀석도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정을 미루고 하루내내 곁을 지켜주었다. 아아.. 정말 아픈 건 딱 질색인데... 몇 번씩이나 물수건을 갈아도 열은 쉽게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안되겠다. 병원에 가야겠어. " " ....! " 결국 참다못한 녀석이 옷장 문을 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녀석의 표정은 비장하다. 아무리 아파도..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도 절대로 병원만은.. ㅜㅅㅜ 주사도 주사지만. 팔이고 엉덩이고 바로 엊그제 찍힌 키스마크가 그대로 잔뜩 남아있는데 어떻게 의사에게 보이란 거냐..!! ㅠ0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망측스럽기만 하다. 나는 끝까지 안가겠다고 버티며 열심히 고개를 저어댔다. 그래.. 녀석의 비장한 한 마디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ㅡㅡ;;; " 약도 먹기 싫다.. 병원에도 가기 싫다.. 그럼 결국 한가지 방법 밖에 없군. " " .... ㅡㅅㅡ?; " " 좌. 약. ^^ " " =0=;;;;;;;;; "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재빨리 아픈 몸을 이끌고 옷 장 앞으로 달려갔다. " 먼저 나가서 차 시동 걸어놓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 " ㅡ_ㅜ " 녀석은 다시 한 번 상큼한 미소를 뿌린 뒤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나는 훤히 드러난 키스마크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아아.. 최악.. =_= 나는 시뻘개진 얼굴로 병원 문을 나서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깡패시키는 갑자기 볼 일이 생겼다며 먼저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픈 환자를 버려 두고(?) 갔다는 게 좀 밉지만 그래도 택시 비는 줬으니 용서해줄 생각이 다. 돈 아까우니 버스 타고, 남은 돈으론 간식이나 좀 사 먹을까나..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머릿속엔 방금 전에 있었던 병원에서의 일들이 자꾸만 날 괴롭힌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키스마크를 고스란히 의사에게 보여야했던 심히 쪽팔리는 기억..=_=;;;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입가엔 가득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얼굴은 터지기 직전의 시뻘건 홍당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그냥 거기서 넘기면 좋았을 것을.. 되도 않는 어설픈 변명을 해버린 뒤엔 더욱 의미심장한 닥터의 시선을 받아야했던 것이다. " 요.. 요즘 모기가 좀 많아서.. 아.. 하하.. ^ㅁ^;;; " 젠장.. 옆에 있던 예쁜 간호사 누나까지 킥킥대며 웃더군. ㅠㅠ 그나마 깡패시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게 다행이랄까.. 그러게 내가 병원엔 안 가겠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ㅜ_ㅜ 치욕스런 과거를 떠올리며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던 나는 천천히 유리로 된 문을 열었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순간 나가기가 꺼려진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불덩이인데 이런 살인적인 더위라니.. 다시 태어난다면 꼭 북극에서 태어나고 싶다. 그렇게 좋아하는 펭귄이랑 바다표범도 키우면서 재미있게 살아야지. *-_-* 모cf에 나왔던 북극곰 새끼도 이뻤고.. 즐겁게 망상의 바다를 헤엄치고있는데 잠시 후 문득 어깨가 저려왔다. 골목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힌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귓가엔 조금 느린 반응으로 누군가의 거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아이구 아퍼-!! 젠장 팔 빠지겠네- 아이쿠!! "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나는 부딪힌 어깨를 감싸안으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눈앞에 서있는 건 덩치가 어마어마한 장신의 한 남자였다. 인상을 보아하니.. 제기랄.. x 밟았다. =_=;; " 어이쿠,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엉?! " " 아.. 죄.. 죄송합니다. " 일단 멍하게 길을 걷던 내 잘못이 크니까..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떡대스러운 남자는 곱게 날 보내주지 않았다. " 이봐,이봐,아가씨. 말만 하고 그냥가면 어떻게 하나..? " " 네..? " 아니.. 잠깐.. 그보다 방금 전 분명히 나한테 아가씨라고 했던 것 같은데.. -_-+ " 보상이 있어야지. 사람이 팔이 빠졌는데. " " -_-; " 아아.. 역시 예상대로 생긴 것처럼 노는군. 처음 볼 때부터 인상이 심상치 않다는 건 느꼈지만 실제로 이런 쓰레기 같은 수작을 부릴 줄이야.. 가뜩이나 열이 나서 금방이라도 엎어질 것 같은데.. 정말 일진 사나운 날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낭군-_-님도 옆에 안 계시고.. 대충 씹고 튀자니 체력도 안 받혀주고..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이런저런 상황을 그려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소란스러운 떡대로 인해 곧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보상이라면.. 역시 돈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얼마나..? 말없이 바닥을 응시하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 치료비 말씀하시는 건가요? " " .....뭐어.. "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한다. 못생긴 건 둘째치고 저 거만한 면상은 정말 눈에 거슬린다. 평소의 나라면 되든 안되든 일단 덤벼보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억지로 시선을 피하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살짝 부딪힌 것뿐이잖아요. 분명히 사과도 했는데요. " 이 시캬! 그 근육질 팔이 부러질 정도면 나는 전치 10주는 나왔겠다! =ㅁ= 어디 덩치도 산만한 놈이 되도 않는 엄살을 피워?!! 내 말이 의외였는지 떡대는 잠시 말을 잊고서 가만히 날 응시했다. 너무 강렬한 눈-_-빛이라 심히 부담스럽다. 젠장.. 빨리 돌아가서 약 먹고 자야하는데..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홱하니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무지막지한 손이 내 어깨를 사정없이 잡아챘다. " 아얏-;;; " " 저기.. " " ......? " " 아가씨... 이쁘네.. ^..^ " 이런 니미럴.. =_=+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니 최대한 좋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런 상대일수록 끈덕지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나로선 마냥 미소작전으로 나갈 수도 없다. 스무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자로 착각 당하다는 사실에 열받는 것도 사실이고. 키도 173cm면 한국 남자 표준 키는 되지 않나? 머리도 짧고 가슴도 없고 옷도 남자답게 입고 다니는데 상대 눈이 해태가 아니고서야. 나는 열에 들뜬 머리를 식히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 저기요. 죄송하지만 전 남자입니다. 제가 지금 몸이 좀 안 좋은 상태라 이만 실례하겠습 니다. ": " .....에..?! " " 그럼.. " 깍듯이 목례까지 한 뒤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등뒤에서 떡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잠깐! 저기, 정말 남자?!! " " 네..=_= " " ....... " 젠장.. 이젠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다. 정말 이러다간 택시를 타야 할 지도.. 나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걸음을 뗐다. 조금만 더 가면 버스 정류장이니까.. 거기까지만.. " 저기.. 몸이 많이 아파..? " " ....... "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또다시 떡대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르라니 깎은 깍두기 머리 사이로 땀이 번쩍인다. 군대에서 갓 제대한 건가.. 아니면 진짜 깍두기인가.. ㅡㅡ;; 나는 말없이 떡대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녀석이 싱긋 웃는다. 아아.. 심히 부담스러운 미소다. =_=;; "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까..? " " 아뇨.. 괜찮.. " " 에이~ 사양하지 말고. 나 알고 보면 괜찮은 놈이야. " 글쎄.. 별로 알고 싶지 않다니깐..! ㅡㅡ;;;; 하지만 어느새 내 어깨를 감싸고있는 떡대의 큼지막한 손. 굵직한 양팔 안에 갇혀버린 난 무력한 저항을 하며 소리쳤다. " 됐으니까 이거 놔요!! 버스 타고 갈 거니까! " 정말 성질 같아선 욕이라도 퍼붓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는다. 그 보다도 난 분명히 남자라고 말했는데 혹시 목소리가 잠겨있어서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건가..?? 아악--- 지금 엉덩이랑 가슴에 손이 닿았잖아?!! 그럼에도 계속 주물러대는 걸 보면 분명 잘못 들은 건 아닐 테고!! 나는 최대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저항했지만 떡대는 보기만 떡대가 아니었다.;; " 나 사실 남자는 처음이지만 이쪽도 괜찮을 것 같네. ^,.^ " 야-!! 그런 끔찍한 소리하지마--!! =0=;;;;;;;;;; 열심히 팔다리를 휘젓던 나는 최후의 방편으로 놈의 급소(!)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순간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팔다리가 자유를 되찾았다. 뛰자!! 일단 죽기살기로 뛰고 보는 거다!!! 나는 불덩이가 된 몸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민망한 부위를 양손으로 감싼 채 울부짖던 떡대는 잠시 후 고통을 수습했는지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처음 온 동네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젠장.. 정말 최악의 날이다. 뛰었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다리의 힘이 풀릴 때까지. 하지만 아까 전 놈의 품속에서 버둥거렸던 탓에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나있는 상태다. 미로 같은 골목길은 어디로 뛰어도 도무지 큰 길이 나오지 않았다. 허름한 집들만이 빽빽이 들어차 있을 뿐. 등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쫓아오는 변태 같은 떡대놈의 존재감에 등골이 오싹하다. 한여름에 이보다 더한 공포가 있을까..! 내 불행은 개도 안 걸린다는 한여름 감기에 거린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그 날 샤워하고 에어컨 앞에서 만화책만 읽지 않았어도. 아니.. 이젠 그런 과거 따윌 신경 쓸 때가 아닌가.. 지금 내 눈앞엔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디높은 담벼락이..!!!!!!!!!!! " 아아... 헉.. 더운데 왜 뛰게 하고 그래.. 엉..? 형아 힘들잖아. ^^ " " =_=;;;;;;;;;;;;;;; " 위열매 대 핀치--!!!! 21살의 어느 여름.. 변태 앞에 놓이다. 아아.. 젠장.. 똥 밟았다.. ㅜㅜ [외전] 탁탁탁. 밤 11시가 넘어갈 무렵.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채팅에 몰두하고 있었다. ss▷ 쵸비츠 보셨어요? 용가리▷ 네. 미이메이▷ 몇 편까지요? 음.. 몇 편까지 봤더라.. -_-a 용가리▷ 5편까지요. ss▷ 아아~ 네. 에이뤼▷ 애인 있어요? 아니.. 이 아줌마(!)는 또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ㅡㅡ;; 애니 동호회 정팅이면 애니 얘기나 할 것이지. 방제도 분명<애니 얘기만!!>이건만.. -_-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는 모니터 앞에서 고개를 빼고 있는 율이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녀석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집어넣는다. 같은 이름이건만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둔한 건지.. 녀석을 안 닮고 나를 닮은 모양이다. ㅡㅡ;; 나는 살짝 입을 내밀었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눈을 뗀 사이 이야기가 꽤 많이 진행되어 있다. ss▷ 카즈히코 이노우에상 목소리 너무 멋지지 않아요? >__< (*카즈히코 이노우에: 그래비테이션 애니 '유키 에이리' 성우) 미이메이▷ 화제 돌리죠? 용가리님은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용가리▷ -_-a 나는 옆에 놓여진 쵸콜렛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애니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애니 동호회에 든 건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뿐.. 채팅도 오랜만이라 어색하다. 꽃미녀▷ 용가리님 왠지 귀여우실 거 같아요. 용가리▷ 아니에요..;; 꽃미녀▷ 에이~ 느낌이 오는데요. >_< 용가리▷ 그냥 평범해요. ㅡㅡ;; 꽃미녀▷ 아잉~ 아잉~ 저랑 친하게 지내여~ >ㅅ< 용가리▷ 에.. 뭐냐.. 이 닭살-_-녀는..;;; 꽃미녀▷ 용가리 어빠~ (부비부비) 용가리▷ 아.. 알았어요. ㅡㅡ;; 뭐.. 어차피 만날 일도 없으니까.. -_-;; 나는 다시 쵸콜렛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뭐하고 있어? " " 아.. 왔어? " 음악을 크게 틀어놔서 문소리도 못 들었다. 깡패시키는 가방을 내려놓고는 내 옆으로 와서 섰다. 그리고는 말없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 채팅? " " 응.. 애니 동호회 정팅. " " ....... " 녀석은 잠시 날 바라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 방금 전 닭살-_-녀의 글이 올라왔다. 꽃미녀▷ 용가리 어빠. 어디 살아여? 꽃미녀▷ 여친 있어여? 없으면 내가 뻐~ 해줄께여~ >_<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ㅡㅡ;;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애..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 ^^;; " " ........ "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지만 무표정하다. 난 오히려 이 얼굴이 더 무섭다. ㅡㅡ;; 꽃미녀▷ 어빠 잠수에여?? 꽃미녀▷ 자꾸 대답 안 하시면 미녀 울꼬에요.. ㅜ.ㅜ 잠시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가 허리를 숙여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양팔에 갇힌 채 멀뚱히 모니터를 바라봤다. 용가리▷ 닥쳐. =_=;;; 그리고 곧바로 이러한 창이 떴다. [ 애니 얘기만!! 방에서 강제 퇴장 당하셨습니다. ] " 야..;; " " 안 봐도 폭탄이야. " 그런 게 아니라.. 닭살-_-녀가 회장인데..;;; 난 이제 짤렸다.. ㅡㅡ;;;; 가입하느라 2주나 걸렸건만..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깡패시키는 이미 샤워중이다. 하여튼 동작 하난 잽싸다니까.. 잠시 후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는데 샤워를 마친 녀석이 들어왔다. 순간 물기 머금은 상쾌한 냄새가 방안 가득 퍼진다. " 야.. " " ....? " " 우리.. 개 한 마리 키울까..? " " ....... " 말없이 날 바라보던 녀석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 안 돼. " " 왜..?;; " " 벌써 동물 두 마리나 키우고 있잖아. " " 엉..?? 뭐가 두 마리냐? 한 마리잖아. 율이. " " ....... " 녀석은 대답 대신 날 응시했다. 뭐.. 뭐냐..;;; 설마 다른 한 마리라는 게..!? =ㅁ=;;;;; " 왜 날 봐--!?!! =ㅁ=;; " " .....그냥. " 뭐가 그냥이냐!! 그.. 그리고 그렇게 웃지 말란 말이다!! 갑자기 심장이.. ////// 나는 녀석의 배개를 끌어안은 채로 뒹굴뒹굴 침대 위를 굴렀다. 그러자 곧바로 커다란 손이 내 팔을 붙잡는다. " 먼지나게 할래? ㅡㅡ+ " " ....... " 나는 말없이 배개를 안은 채로 녀석을 올려다봤다. 아직 물기가 촉촉한 머리카락. 상쾌한 바디샴푸의 향기.. 어쩐지 야릇한 기분이다. 잠시 후 내 위로 길게 그림자를 만들던 녀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 얼굴이 빨개. " " ///// " " 왜 그래? 어디 아파..? " " 모.. 몰라!///// " 젠장.. 나도 모른다고.. 내가 왜 이러는 지..! 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 창피할 뿐이다. 하필이면 이 녀석 앞에서..////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안아줄까..? " " ! " 황급히 눈을 떠서 시선을 옮기니 녀석이 날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너무 상냥해서 두려울 정도랄까.. -_-;;;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 돼.. 됐어!!///// " " 내가 보기엔 별로 된 거 같지 않은데..? " " 으...//// " 아무래도 내가 미친 모양이다. 오늘따라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섹시해 보이는지..;;;; 행여라도 뜨거운 밤을 보냈다간 아침에 고생하는 건 나다. 안 봐도 뻔히 답이 나와있는데.. 그런데도 왜..//// 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나 잘 거야..//// " " ......그래? " " 그.. 읏..!///// " 순간 엉덩이에 녀석의 손이 닿았다. 그리고 쇄골엔 뜨거운 숨결이..!! " 야! 하지.. 으..! >_ㅁ<;;;; " 녀석은 잠시 큭큭대며 웃더니 입술을 겹쳐왔다. 매일 하다시피 하는 키스인데도 지금 이 순간만은 왠지 참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내가 드디어 색-_-마가 된 모양이다. ㅠㅠ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녀석의 농후한 키스를 받아 삼켰다. 결국 그렇게 신음으로 물들여진 짙은 밤이 지나고.. 녀석은 내게서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야릇한 기분은 사라지지가 않는다.;;; 아아.. 진짜 야-_-남이 된 모양이다. ㅠㅠ 나는 침대에 뻗은 채로 울먹이며 말했다. " 나.. 오늘 이상해.. ㅠㅠ " " 그래? " " ㅠㅠ " 녀석은 피식 웃으며 날 끌어안았다. 그러자 또 손이 닿는 부분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 어떻게 해.. 나 정말 변태 됐나봐.. ㅠㅠ " " ....쿡. " 우어우어.. ㅠㅠ 이제 난 이 녀석의 몸(!)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된 걸까..? 평생 이렇게..? 이렇게 음란하게..?? 결국 나는 녀석과 밤새도록 음-_-란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늦은 아침 내가 일어났을 때는.. 녀석이 이미 외출한 뒤였다. 언제나처럼 깨끗이 뒷정리를 해놓고.. 그래.. 이젠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되어버린 몸.. 녀석과 한 평생 살 수밖에.. 나는 테이블에 올려진 쪽지를 손에 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게라도 밥 챙겨 먹어. 절대 굶지마. 그래.. 역시 서방님 밖에 없.. ps. 쵸콜릿 맛은 어땠어? ^^ 없...??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몰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 뜻을 알게되었을 때는 이미 다른 계절이 찾아와 있었다.;;;; [외전2] 자욱한 담배 연기. 시끄러운 음악 소리. 정신 사납도록 유쾌한 이 곳은 물 좋기로 유명한 클럽이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찾아왔던 곳이긴 하지만 지금은 내 삶과 무관하다. 담배를 끊은 후로.. 그래.. 녀석을 만난 후로. " 어! 이게 누구야? 강이율이잖아?? " " ....... " 길게 헝클어트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여자. 누구였지..? 최희나? 유서진? " 어머!! 정말!? " 시끄러운 음악 소리위로 덧칠되는 요란한 비명. 짙은 향수 냄새가 순식간에 주위를 물들이기 시작한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 구경났어? " " 아..;; " 돌아서서 밖으로 나오니 그제서야 숨이 트이는 것 같다. 유강민을 찾으러 왔는데.. 오늘은 안 나온 모양이군. 나는 흘끗 시계를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뭐.. 집으로 해도 상관없지만.. 익숙하게 손이 가는 건 저장 번호 1번.. 월매 [ 여보세요. ] " .....나야. " [ 어.. 지금 어디야? ] " 도서관. " [ ㅡㅡ; ] " 몸은 좀 어때? " [ 아파 디지겠다.++ ] " .......쿡. " [ 웃지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 화났나.. 나는 웃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 가서 약 발라줄게. " [ 피.. 필요 없어!!!!;;;; ] "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어. " [ 약 필요 없어! 알았지?!! 특히 바르는 약은 절대 싫어-!!;;; ] 젠장.. 옆에 있었으면 당장에 덮쳤을 텐데..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전화를 끊고 끝에 입력된 번호를 눌렀다. 몇 달 동안 한 번도 누른 적 없는 번호.. 솔직히 지금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일단은 끝을 봐야 하니까. 달칵- [ 여보세요. ] " 나야. " [ 아.. ] " .....지금 뭐해? " [ 피아노 레슨 중이에요. ] " 그럼 나오기 힘들겠군. " [ 아.. 아니에요! 당장 나갈게요. 오빠. ] " ..........집 앞으로 나와. " [ 네. ] 나는 커다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비스듬히 기대섰다. 역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호의 집답게 으리으리하다. 뭐.. 이젠 별다른 감흥도 없지만. 그저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다. 잠시 후 커다란 문이 열리며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문 앞에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가느다란 실루엣이 보인다. 정현아.. 현재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여고생. 나와는 우습게도 약혼관계다. 물론 난 단 한 번도 인정해본 적이 없지만. 어둠 속에서 날 알아봤는지 긴 머리를 찰랑이며 한달음에 달려온다. " 오빠! " " 오랜만이야. " " 네.. 저 정말 많이 기다렸는데.. "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린다. 이 애는 늘 그랬다. 언제나 순종적인 말투. 다소곳한 행동. 조심스런 목소리.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탓에 의지가 결여된 인형 같았다. 보고 있으면 금새 싫증을 느끼게 되는.. " 오빠.. 대학에 들어가신 거 축하드려요. " " ......그보다.. 할 얘기가 있어. " " 네..? " 커다란 눈을 마주하며 나는 망설임없이 말했다. " 끝내자. " " ! " 내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잠시 후 인형 같은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 애초에 시작한 것도 없지만 일단은 형식상으로라도 이쪽이 나을 테니까. " " ....오빠..? " " 어차피 결국은 이렇게 될 거였어. 난 처음부터 너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 조금쯤은 잔인할 수도 있는 말.. 이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스스로에 놀랄 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결국은 녀석이 울었던 이유가 됐으니까. 나는 말없이 현아를 내려보다가 차 문을 열었다. " 간다. " " ....오빠. " " ....... " " 이립 언니는 저한테 아무 말도.. " " 그랬겠지. 그래서 너 대신 울었던 녀석이 있어. " " ....... " "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이런 일로 울게 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널 찾아온 거고. " " 오빠.. 전.. 전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어요. 오빠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 저..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 자리에서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 기뻤어요. 오빠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비록 아무 것도 몰랐던 철부지였지만. " 깨어질 것 같은 가녀린 목소리가 흐느끼듯 이어졌다.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된 작은 얼굴. 조금.. 속이 쓰렸다. " 난 마음을 정한 사람이 있어. " " ....! " " 객관적으로 보면 모든 면에서 너보다 부족하지. 그렇다고 일부러 나에게 맞추려고 노력 하지도 않아. " " ....... " " 내가 사랑하는 건 사람이야. 조건이 아니라. " " .......오빠.. " " 어찌됐든 미안하다. 너에게는. " " ....... " " 난 이미 그 녀석한테 중독되어 버렸어. " 잠시 후 나는 흐느끼는 소리를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얼굴을 감싼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누나가 또 녀석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달칵- " 여보세요. " [ 나야! ] 시끄럽도록 명랑한 목소리. 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짧게 대답했다. " 응.. 왜? " [ 너 지금 어디야? ] " 집에 가는 길. " [ 어... 그럼 오다가 순대 좀 사와라. ] " 뭐..? " [ 먹고 싶은데.. 아파서 못 움직이겠어. ] " .......알았어.. " [ 땡큐- ] " 약도 같이 사갈 테니까 기다려. " [ 뭐?! 야! 됐어! 그냥 순대만 사와!!;;; ] " 아프다며? " [ 아.. 아니 이젠 괜찮아!;;; ]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간다. 틀림없이 눈을 크게 뜨고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서 소리치고 있겠지. 나는 짧게 웃었다. 그러자 녀석이 또다시 소리친다. [ 갑자기 왜 웃고 그래??;; ] " 그냥.. 웃겨서. " [ 뭐.. 뭐가..;;; ] 네가. " 이제 열은 안 나? " [ 어.. 괜찮아. ] " 알았어. 금방 갈게. " 어제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평소보다 흥분했던 모양이다. 몇 번이고 계속.. 나는 녀석을 안았다. 마침내 녀석이 울 때까지. 어쩌면 녀석을 가장 많이 울리는 건 나일지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까의 말대로 난.. 녀석에게 중독되어 버렸으니까. 내 이름은 열매 <72> 조금식 좁혀지는 거리. 서서히 거칠어져 가는 그(!)의 숨소리.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깍두기를 노려보며 슬슬슬 옆으로 움직였다. 뒤는 완전히 막혀있기 때문에 정면돌파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Dead or Alive--! 내가 몸만 정상이었어도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모든 악운은 한꺼번에 닥쳐오는 걸까.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나는 발을 멈추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놈의 덩치 때문에 긴장이 된다. 잘못 걸리면 죽도록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차라리 당하는 것보단 맞는 게 낫다. " 괜찮아? 얼굴이 빨간데. " 너 때문이야. 이 썩을 새꺄. 난 됐으니까 그 능글한 면상으로 히죽거리지나 말란 말이다. 그리고 왜 자꾸 양손을 벌리면서 다가오는 건데?! 어디 건드리기만 해봐 아주 다 물어뜯어 놓을 테니까! =ㅁ=++ 나는 마음 속으로 결의(?)를 다지며 더욱 더 눈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깍두기의 기름기 가득한 면상엔 조금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다. " 내가 무섭냐? " " .......ㅡㅡ; " 사나이 체면에 차마 그렇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잠시나마 시야에서 놈이 사라지니 가슴속까지 상쾌해지 것 같다. 물론...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가만히 땅을 쳐다보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보통의 경우라면 그냥 장난으로 해본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 입으로도 분명 남자 경험(?)은 없다고 했으니.. 사람 취향이란 게 한 순간에 자라 등 뒤집히듯이 바뀔 리도 없고. 그래. 분명 괜히 나 혼자 헛된 망상에 빠져 오버하는 걸 거다. 깍두기는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인데 내가 진지하게 반응하니까 계속해서 놀리는 거고.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왕자병이라니.. "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응? " " 우아악---!!!!!;;;;ㅁ;;;; " 어느새 허리에 둘러진 커다란 손.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결.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댄 놈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는다.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나는 입을 연 채로 불안정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놈이 크게 한 번 웃은 뒤 말을 이었다. “ 뭘 그렇게 경계 해? 나 그렇게 무서운 놈 아냐. 알고 보면 솜사탕 같은 남자라고. ” 요즘엔 솜사탕을 버터로 만드나.. =_= “ 나 사실은 가끔 가다 이쁜 놈들 보면 시선이 갔거든. 원래부터 완전한 노말은 아니었나봐. 뭐.. 이제라도 진실한 자아를 찾아서 다행이랄까. ” 깍두기는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시선을 허공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자아는 딴데서 실컷 찾고 난 내버려두란 말이다---!!!!! 아무리 봐도 그냥 농담은 아닌 모양이다. 젠장.. ㅠㅠ 나는 작은 희망이 와장창 깨지는 걸 고스란히 목격하며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이제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할지 고민중이다. 아무리 외진 골목이라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완전히 유령도시가 따로 없다. 나..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 그럼.. 어디로 갈까? ” “ ....... ” “ 대낮부터 여관은 좀 그런가..? ” 미친 놈. -_- “ 음.... ” “ ....... ” “ ....... ” “ ......우리 집으로 가자. ” “ 뭐..? ”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심을 굳히고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 우리집. 여기서 별로 안 멀어. 여관은 돈 들잖아. ” “ 그래도.. ” “ 지금 시간이면 집에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마. ” 깡패시키 제발 집에 있어라. 제발. ㅠㅠ “ 음... ” 가만히 날 바라보던 미스터 깍두기는 한참 뒤에야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곰 같은 손은 내 어깨에 걸친 채로.-_- “ 뭐.. 네가 릴렉스하기 위해서라면. ” “ ㅡㅡ; ” “ 집은 어딘데? ” “ xx동. ” “ 택시 타고 갈까? ” “ 그.. 그냥 버스 타자. ㅡㅡ; ” 조금이라도 사람 많은 곳에 있고프다. 이 원나잇 비스무리한 얄딱구리한 무드를 희석시키려면 한시라도 빨리 인파 속에 묻혀야.. 나는 천천히 놈에게서 몸을 떼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 순간 한 템포 빨리 놈의 무지막지한 힘이 내 어깨를 덮쳤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힌다. 아무래도 이 자세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썩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래 좋다. 어디 끝까지 가보자. 깡패시키와의 텔레파시에 모든 걸 거는 거다. 어차피 지금의 몸 상태로는 놈의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도 없으니까. 버스 안에서의 놈은 뭐가 그리 좋은 지 내 옆에 선 채로 연신 싱글벙글이다. 덕분에 덤으로 주위의 온갖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나. 옆에 선 나는 최대한 남인 척 외면해 봤지만 중간중간마다 깍두기놈이 시덥잖은 농담을 던 지는 바람에 꼼짝없이 일행으로 찍히고 말았다. 아.. 정말 최악이다.. 아까보다 열도 더 오른 것 같고. 이제 다음 정거장인데 정말 꼼짝없이 당하게되는 걸까..? 아무래도 텔레파시는 믿을 수가 없다. 차라리 지금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를까..? - 이번 정거장은 xx동 xx아파트 앞입니다~ - “ 야. 여기 아니냐? xx동. ”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벨을 눌렀다. 역시 난... 놈이 두렵다. 빌어먹을 한심한 소심탱이.. ㅡ.ㅜ “ 이야~ 좋은 데 사네~ ” 버스에서 내린 뒤 골목으로 들어서는 내내 놈은 휘파람을 불어가며 딱따구리처럼 떠들어댔다. 정말 생각 같아선 저 수다스런 주둥이를 시멘트로 막아버리고 싶다만. 만약 최악의 경우 깡패시키가 없고 덮쳐지기 직전까지 가게 된다면 혀라고 깨물어 버릴 테다. 그건 사나이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그래.. 이래봬도 일단은 나도 사나이니까. ㅡㅡ “ 근데 왜 이렇게 멀어? ” 당연하지. 최대한 빙글빙글 돌면서 시간을 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망할 깡패시키가 집에 없을 것 같은 엄청나게 암울한 예감이.. ㅡㅡ; 대답 없이 동네를 돌던 나는 스윽 깍두기놈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아까와 달리 표정이 잔뜩 굳어있는 게 아무래도 더 이상은 무리일 듯 싶다. 지금 표정으로 봐선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다. =_=; “ 여기 아까 왔던 길 아냐? ” “ ! ” “ 너 지금 혹시.. ” 허억..!!!!!!! =ㅁ=;;;;; “ 길 잃어버린 거냐? ” “ =ㅁ=;; ” 다.. 다행이다! 생긴대로 멍청해서. ㅡㅡ; 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으.. 응.. ” “ 아아.. 그래 뭐.. 역시 여관이 편하긴 하지. ” “ 아..아냐! 생각이 날 것 같아!! =ㅁ= ” 나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대답했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날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여관여관 하는 거냐.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 인상인가? 일단 낯익은 동네에 발을 들이고 나니 슬슬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그래.. 깡패시키한테만 의지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아프다고는 하지만 나도 남자다. 언제까지 계집애처럼 꼴사납게 깡패시키한테만 매달릴 수는 없다. 잠시 열이 펄펄 끓는 머리로 심각하게 고민을 거듭 하던 나는 한 순간 결심을 굳히고 고개 를 들어 깍두기를 노려봤다. 그러자 아까와는 사뭇 다른 내 얼굴에 놀랐는지 실실대던 놈의 얼굴에서 한순간에 웃음이 싹 걷혔다. 아아.. 표정을 굳히니까 정말 무섭다. 새삼 다시 봐도 정말 더러운 인상이다. 나.. 어쩌면 살해당할 지도 모르겠다. 만일을 대비해 잠시 인사를 해두려고 하니 경청하도록. 그동안 - 내 이름은 열매-를 읽어주신 착하신 누님과 여동생님들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비록 애초의 제목과는 달리 꽃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은 해봤습니 다만 어쨌든, 작가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지금의 몰골이 된 저 위열매를 지금까지 아끼고 사랑해 주셔서... “ 너 지금 날 야리는 거냐? ” 아아.. 태클이 걸려왔으니 인사는 여기까지- 나는 잔뜩 찡그린 인상을 더더욱 구기며 입 끝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자 깍두기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생긴 대로 다혈질이구만. 역시. “ 내가 정말 너랑 잘 줄 알았냐? 너 같은 빌어먹을 변태하고? ” “ 너 이 새끼.. ” “ 내가 생긴 게 이 모양이라 우습게 보인 모양인데 만약 몸만 성했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이런 지랄 같은 쇼는 하지도 않았어! “ 이제 교두보는 마련됐으니 죽든 살든 영혼을 불살라 보자꾸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서서히 주먹에 힘을 싣는다. 언젠가 깡패시키를 위협(?)할 생각으로 지어낸 즉흥 별칭 ‘불타는 열매’가 되어보는 거다! “ 죽어! 이 변태 새끼야--!! ” 열로 휘청이는 몸을 겨우겨우 가눈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주먹을 놈의 안면을 향해 날렸다. 순간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주먹 끝으로 물컹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슬쩍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놈의 투실투실한 볼 중앙에 애처롭게 자리잡고 있는 남자치곤 꽤 하얀 주먹이 눈에 들어온다. 깍두기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 하.. 이게 귀엽다고 봐줄랬더니! ” 순간적으로 놈의 무식하게 커다란 손에 머리카락이 한 웅큼 잡힌 나는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목 밑으로 눌러 죽이며 열심히 몸을 비틀어댔지만 역시나 허사였다. 내 발악에 진심으로 열이 받았는지 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국 그 뒤로 꽤 강하게 몇 대인가를 맞았던 것 같다. 열과 통증으로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뺨과 눈 주위가 화끈거렸고 입가에선 비릿한 향이 스물스물 피어올라오고 있었다. 망할 깍두기 새끼..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환자 상대로 힘자랑 하니 좋냐? 이 씨발 새끼야.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존심을 지켜보겠다고 비칠거리는 주먹을 열심히 휘둘러봤지만 나와 달리 몸이 멀쩡한 깍두기놈이 매너 좋게 맞아줄 리가 없었다. 최후의 발악발악................그저 그 뿐이었다. 열로 끓어오르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는 와중에도 무식하게 큰 주먹은 사정없이 내 복부를 파고 들었다. 아아.. 아까 하던 작별인사... 지금 다시 이어서 해야겠다.. 그동안....쿨럭... 저와 깡패시...쿨럭...키의 이야기를...쿨럭쿨럭-.....읽어주....쿨럭- “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 흐릿하게 번져가는 깍두기놈의 형체를 천천히 눈으로 쫓으며 연신 터져나오는 기침으로 괴 로운 한숨을 토해내던 나는 잠시 후 끼어든 누군가의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빨리 비켜!! ” 처음 듣는 목소리.....다. 흐릿한 형상이 조금씩 사람의 형체를 띄며 클로즈업된다. “ 괜찮니 너? 이런, 피가 많이 나는데..! ” 처음 보는 얼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무릎 위에 올려 세운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는 순간 아득히 멀어져 가는 현실- 낯선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로 나는 그렇게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내 이름은 열매 <73> 눈을 떴을 때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른 건 낯선 누군가의 형체....목소리.. 나는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눈을 부릅 뜨며 열심히 고개를 움직였다. “ 정신이 들어? 일단 상처부위는 대충 치료했는데 아프지 않아? ” 아아.. 그러고 보니 조금.....아니, 기절해 돌아가실 만큼 아픈 것 같기도. 욱신거리는 눈 주위와 입가를 슬쩍 손으로 더듬어 확인을 하니 은인의 말대로 환부엔 반창 고와 붕대가 꼼꼼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크지도 않은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을 반창고를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이 몰골로 집에 들어가면 깡패시키한테는 뭐라고 하지? 사나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성추행을 당하는 대신 죽도록 맞았으니 칭찬해 달라고? 아니면 내가 이 정도니 상대는 어떻게 됐겠느냐며 허세를 부려볼까? 침대에 대(大)자로 뻗은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노라니 잠시 기억에서 지워두었던 은인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널 이렇게 만든 상대의 주소랑 전화번호는 대충 여기에다 적어놨는데 확인을 못해봐서 맞을지 모르겠다. “ “ 에... ” “ 처음엔 조용히 묻고 끝내려고 했는데 끝까지 입을 다물어서. ” 그...그래서 팼수-?? 그 엄청난 깍두기를---??? 아무래도 이 쪽이 더 위험한 것 같은 난감한 예감이. ㅡㅡ;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고... 마워요.. ” 그러자 은인의 얼굴 위로 얼핏 미소가 스친다. 아무리 봐도 주먹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얼굴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 생겼다고 말할 범주에 드는 단정한 이목구비 이외에도 뭔가 엄청 유식할 것 같은 엘리트의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의자에 앉아있어서 키는 잘 모르겠지만 물수건을 짜는 손가락의 길이로 보아 아마도 꽤 장신일 거라고 생각된다. 뭐... 그런 건 나와는 상관 없지만. 축축한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주며 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내 이름은 성도현이야. 통성명이나 해두자. ” 그 상황에서도 물수건을 쥔 저 주먹으로 맞으면 나도 죽겠지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에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입을 열기는 했는데.. 난 정말 자기 소개하는 게 제일 싫단 말이다. 이놈의 망할 이름 때문에 번번히 이렇게 위축 되는 나도 정말 싫고 이런 썩을 이름을 붙여주신 아버지의 센스도 정말 싫다. 좀 더 평범한 발상을 하셨으면 안됐던 걸까? 민수나 춘식 영길등등 얼마나 남자다운 이름이 많은가. 왜 하필이면 꼭 여자들도 안 쓰려고 하는 ‘열매’ 따위냐고-!!! 혼자서 마음속으로 열심히 절규를 하고 있으니 또다시 기억 저편으로 던져놓았던 은인이 말을 걸어왔다. 이야.. 두 번이나 무시당했는데 자식 성격 참 좋구만. -_- “ 네 얼굴은 자주 봤어. xx대학 다니지? ” “ 에.. ” “ 나도 거기 조교로 통학하거든. 영문과. ” 아아.. 어쩐지 묘하게 어른스러운 데다 엘리트의 오오라를 풍기고 있더라니.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저는 국문과인데 어떻게 보셨어요? 건물도 다른데.. ” “ 식당이나 교정에서.. 가끔 버스에서도 보고.. 동네에서도. ” 어.. 어이. 당신 혹시 ‘스’로 시작해서 ‘커’로 끝나는 그거 아냐? ㅡㅡ; 그러니까 결국 동네에서부터 버스....식당까지 따라다녔다는 거지? 나.. 설마 지금 이대로 결박당하는 건....?;;;; 한순간 기억 저 너머로 언젠가 봤던 미저리라는 영화가 재상영되는 걸 간신히 막으며 잽싸 게 몸을 일으켰다. 크윽, 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아퍼어어어어어----- 아퍼 죽겠다고 이 썩을 놈의 깍두기 새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굴엔 덕지덕지 반창고로 도배를 한 채로 짐승 같은 포효의 신음을 내뱉자 은인조교스토커 씨가 재빨리 다가와 내 어깨를 잡고 침대에 도로 눕혔다. 으아악-------------- 거기가 제일 아프단 말이야 아저씨이이-----!!!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에 소리조차 뱉지 못하는 내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무식한 깍두기새끼가 아주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었던 모양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분하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제기랄. 지가 인간이면 아픈 환자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난리 부르스를 치지는 못했을 거다. 나랑 마주친 지 얼마나 됐다고!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애초에 잘못을 누가 했는데!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꾹 참아내며 옆 탁자에 놓여있던 주소가 적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 복수할 거니? ” “ ....... ” 복수라...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무리다.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샌드백........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지금의 내 몰골로는. 말없이 침울해있자 은인조교스토커씨가 또다시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아.. 몇 번씩이나 개무시를 당해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당신을 부처님으로 임명합니다.-_-; “ 만약 복수할 거라면 말 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 “ ! ” “ 이왕이면 이번 주 토요일이 좋겠는데.. 그 날은 나도 스케줄이 없거든. ” 여.. 여보세요.. “ 그럼.. 점심도 같이 할 겸 12시쯤에 볼까..? ” 여보세요---??;;;;; 뭔가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오지랖이 넓기도 하시구만. 정작 피해자인 나는 주둥이 꾹 다물고 있는데 왜 댁이 더 흥분해서 날짜까지 잡냐고. 거 참 이상한 아저씨일세.;; 나는 잔뜩 구겨진 인상으로 길게 한 번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몸을 일으켰다. “ 복수는....됐어요. 만약 해도 제가 할 테니까.. 어쨌든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 “ ....... ” “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습니다. 그만 가 볼께요. 죄송합니다. ” 으윽.. 엉덩이를 들려는 순간 엄청난 통증이 온몸을 파고 들었다. 이대로 집까지 갈 수 있으려나.. 그렇게 휘청이며 벽을 짚고 서자 은인조교씨-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스토커는 빼준다-가 잽싸게 일어나 내 허리와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니까 거기가 제일 아프대도-----!!!! ㅠ0ㅠ “ 이름... 안 가르쳐 줄래? ” “ ....... ” 야리꾸리한 분위기 만들지 마. 형씨. 가뜩이나 심란한데 형씨까지 이러면.. “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집에 놀러와 줬으면 좋겠는데.. ” 뭐... 뭐냐..; 혹시 왕따인 건가...??;; 왠지 방금 전보다 2000배는 더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 조금 서글프게 웃고 있었다. 순간 코끝이 찡해지는 나. 솔직히 이런 몰골로나마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다 이 사람 덕분인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냉정했다는 판단을 내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 내 이름은.....열매예요. ” “ ....... ” “ 뭐... 웃긴 이름이니까 웃으셔도 돼요. 5초 정도는 용서해 줄께요. ” 하지만 은인조교씨는 웃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날 내려다보기만 할 뿐. 덕분에 썰렁한 농담으로 전락해버린 내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 어깨와 허리를 감싸안은 커다란 손. 뚫어질 듯이 나를 향하고 있는 미열을 띈 시선. 미세한 숨소리.. 어째 조금 위험한 것 같기도. ㅡㅡ; 나는 재빨리 삐거덕거리는 몸을 은인씨에게서 빼내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 그..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 “ ....... ” 현관으로 향하던 나는 그제서야 조금 춥다는 생각이 들어 거실 중앙에 놓여진 전신거울로 시선을 주었다. 헉.. 상체가 파스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래서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가.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조교씨의 앞으로 걸어갔다. “ 저기... 옷 어디 있어요? ” “ 침대 바닥에....잠시만. ” 짧게 대답한 은인씨가 성큼성큼 긴 다리를 움직여 군데군데 피로 염색된 내 셔츠를 들고 돌아왔다. 그걸 보는 순간 어제의 악몽이 떠올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잠깐... 어제... 어제... 어제라고-??? “ 저기요, 잠깐만요! 나 어제 여기서 잤죠? ” “ 응. 그런데..? ” “ 그럼 혹시 제 핸드폰으로 연락 같은 거 안 왔어요?? ” “ 음... 그러고 보니 한 통.. ” “ 남자였죠? 목소리 끝내주게 뽀대 나는!! ” “ 그랬던가.. ” 아아아~ 이 아저씨 제대로 받긴 받은 거야? “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 “ 오늘 여기서 재운다고. ” “ 그... 그것 뿐?? ” “ 다친 건 걱정할까봐 일단 말 안 했는데 거기서 배터리가 다 돼서. ” 으아아아아아악--------- 앞뒤 정황 다 빼고 ‘이 녀석은 내 집에서 재우겠습니다’--라니!!! =ㅁ=;;;; “ 혹시.. 내가 실수라도 한 건가? ” 실수 정도가 아니야! 이 수채통에 처박힐 말미잘 같은 형씨야!! 나는 재빨리 옷을 빼앗아 팔을 끼우며 머릿속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외박은 둘째치고 낯선 남자와 한 집에서 원나잇-의미가 다르다!의미가!-이라니. 물론 이 정도의 상처라면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지만 밤새 배터리 떨어진 전화기 번호를 눌러대며 속을 태웠을 녀석을 생각하니 한 시라도 지체해서는 안될 것 같다. 나는 재빨리 마지막 단추를 끼우며 절뚝절뚝 현관으로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뛰고 싶지만 현재로선 이게 최고 속도다. ㅡㅡ; 아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을 보니 얼굴의 2/3가 반창고인데다 하늘색 셔츠는 피로 울긋불긋 염색이 되어있다. 하의 바지도 만만치 않고.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한 소설의 주인공인데 이 몰골이 다 뭐란 말인가. 나는 또다시 뭉실뭉실 피어오르려는 울분을 삼키며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 빌어먹을.. 발목도 삐었나. 돌아가시게도 아프다. 젠장할- “ 꼭 지금 가야 돼? 좀 더 안정을 취한 뒤에.. ” 조용히 하쇼! 당신 땜에 괜한 오해받게 생겨서 심란해 죽겠으니. 나는 대충 됐어요-라고 짧게 대답한 뒤 묵직한 현관문을 열었다. 틈새로 새어나오는 빛. 그리고 어느새 등뒤로 다가와 내 팔목을 붙잡은 남자. 그리고... 스치듯 내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 문득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낯익은 얼굴. 자..잠깐-! 옆집이었냐아아아아아--!!!!!!!!!! ㅠ0ㅠ 아아.. 이런 지랄 맞은 타이밍 같으니.. 순간적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젠 말할 기운도 없으니 알아서 잡아잡수셔들. ㅠㅠ 내 이름은 열매 <74> " 너... 괜찮아?? " 바닥에 주저앉은 내 손목을 잡아끌며 은인조교씨가 호들갑스럽게 물어왔다. "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휘적대며 조교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첫째는 골절돼서 아프고 둘째는.. 아아.. 차마 무서워서 눈을 못 마주치겠다. ==;; 이 눈치 코치에 시금치마저 없는 형씨야! 당신 저 눈빛이 안 느껴져?? 정녕 살해당하고 싶은 거야-?!!;;; 내 힘에 비례해 조교씨도 더더욱 손에 힘을 실었다. " 놔.. 놔요!! 괜찮다고 했잖아요!! " " 역시 좀 더 안정을 취한 뒤에 가는 게 좋겠어. 바래다 줄 테니까.. " " 됐어요!! " 바로 옆집인데 바래다주기는 개뿔-! 그리고 안정?? 안정--?? 지금 당신 눈엔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여?? 바로 눈앞에 깡패시키가 있는... 에...? 어디 갔...! " 큭--!!!!!!!!!! " 순간 등 뒤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현관에 쓰러진 조교씨와 엄청난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는 녀석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상상했던 중 최악의 시나리오다. " 갑자기 무슨 짓이야?? " 조교씨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소리쳤다. 부처님 같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화낼 줄도 아는구나. 아니, 지금은 감탄을 하고 있을 때가..!;; " 너냐... 이 녀석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 어이... 이 지경이라니.. ㅡㅡ; 이왕이면 이쁘게 '이 모습'이라고 해주면 안될까.-_-; "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 " 퍽---------- 바닥에 쓰러져서 뭔가를 말하려던 조교씨의 가슴팍으로 깡패시키의 구두가 가차없이 날아듦 과 동시에 이번엔 아까 전보다 훨씬 더 격한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이런! 그래도 명색이 은인인데! 아무리 '스'로 시작해서 '커'로 끝나는 인간일 확률이 78.6%라고 해도 은인은 은인인 법! 나는 다짜고짜 두 사람 사이로 삐걱이는 몸을 이끌고 달려갔다. 순간 날 향하는 싸늘한 시선. 한순간 숨이 턱 막힌다. " 비켜. " " 이 사람 좋은 사람이야! 날 구해줬단 말이야! " " 비키라고 했다. " 무서워-! ==;;;;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더 심하게 꼭지가 돌아간 모양이다. 이럴 땐 절대 건드리면 안되지만 도움만 받아놓고 이대로 찝찝한 결말을 내는 건 싫다. 이미 두려움과 멍의 합작품으로 퍼렇게 변해있을 얼굴을 결심으로 굳히고 좀 더 깡패시키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아.. 역시 눈은 못 마주치겠다... 너무 무섭다. 지금의 이 녀석. ㅜㅜ " 전화를 받은 게 너지? " " 그렇다면..? " " 그래? 그럼 죽어. " 가운데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날 우악스럽게 잡아채 등뒤로 돌린 깡패시키는 곧바로 군더더 기 없는 동작으로 주먹을 날렸다. 기술 점수 9.8! 예술 점수 10.0!! +ㅁ+.............................................이 아니다! 이 멍청아!!=ㅁ=+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조교씨가 재빨리 팔로 가드를 했지만 주먹이 뼈에 부딪히는 엄청난 소리가 귓가를 덮쳤다. 아마 엄청 아플 것이다. 저것 봐라. 표정을 보니 정말 죽을 만큼 아픈 모양이다. 아아.. 깡패시키... 깡패시키야. 제발 진정 좀 해라. 지금의 난 말릴 힘도 없단 말이다. 두 사람의 수준 높은 전투(라고 해봤자 선공을 날린 깡패시키의 일방적인 공격이지만)를 눈으로 쫓으며 몇 번의 헛기침을 해봤지만 번번이 터져 나오는 조교씨의 신음소리에 고스란 히 묻혀버렸다. 니들이 아주 날 죽이려고 날짜를 잡았구나....하아.. 또다시 미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아아... 젠장....아파서 디지겠다. ㅡ.ㅜ 니들... 나 죽고 나면 그땐 원 없이 싸워라. 내가 하늘 나라에서 심판 봐주마.. " 야! 정말 그만 좀 해! 이제 그만큼 하면 됐잖아? " " ....... " 깡패시키의 손에 멱살을 잡힌 조교씨가 굳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 그 사람 맞을 이유 없어. 죄가 있다면 날 도와준 죄밖에. " " 널 도와준 죄밖에 없다고? " " 그.. 그래.. " 야.. 표정 좀 풀어라 임마. 무서워서 대화를 못 하겠잖냐. ㅠㅠ 나는 적당한 곳에 시선을 옮기며 짧게 대답했다. 가뜩이나 여기저기 얻어터져서 기분도 더러운 데다 몸에 열까지 나는데 앞으로도 평생 나 와는 인연 없을 다른 놈 변호라니. 내가 국문과라서 글 같은 걸 잘 쓸 거라는 헛된 망상을 하는 자가 있다면 당장 그 망상을 머릿속에서 날려버리도록. 그리고 같은 맥락으로 말빨 역시 좋을 거라는 웃기지도 않는 상상을 하는 자 있다면 역시 그 망상을 깡그리 접어서 휴지통에 처박도록! 그러니까 결국 난 이론적인 것만 할 줄 알지 창작은 영 젬병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내 말은 결국 저 인간 샌드백 조교씨를 변호할 말빨이 안 된다는 거란 말이다. 그래서 결국 결과가 요 모양 요 꼴.. " 저.. 저기 이 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 전화도 중간에 배터리가 다 돼서 그런 거고.. " " 열매야.. " 이봐 형씨! 이 부분에서 그렇게 아련한 눈빛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쇼! 지금 상태에선 역효과만 날 뿐이라고!!;;; 흘끗 쳐다보니 깡패시키의 얼굴 위로 심각한 어둠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조교씨를 변호해서? 아니면 조교씨가 친한 척 내 이름을 불러서?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상황을 되돌리기엔 늦은 것 같다. 아아.. 애초에 지랄 같은 감기만 걸리지 않았어도.. 그냥 병원에 가기 전에 좌약(!)으로 끝냈어도.. 내가 그 깍두기 새끼랑 부딪히지만 않았어도.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내 서글픔을 부추긴다. " 위열매. " 네...넵-!!! =0=;;;;;; 깡패시키가 이보다 가라앉을 수 없을 심해의 바닥 같은 목소리로 짧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와 거의 동시에 차렷 자세로 고개를 돌리는 나. 죽도록 얻어터진 것만으로도 억울해 죽을 지경인데 왜 정작 피해자인 내가 이래야 하냐고. " 너 여기서 나가라. " " .....! " "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어. " 날 향해 돌아선 깡패시키가 여전히 어둠의 오오라를 드리운 채로 말했다. " 자..잠깐.. " " 같은 말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해. " " 그.. 그러니까 저 사람은.. " 뭔가 변명을 해줘야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한 발자국 떼는 찰나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순간 깡패시키가 놀란 눈을 하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한 순간에 180도 뒤바뀐 얼굴은 방금 전과 달리 걱정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이러니까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깡패시캬... 비록 좀 멍청하고 다혈질이고 쥐뿔 능력도 없는 주제에 깡만 쎄서 적을 한 무더기로 만드는 데다 결정적으로는 모질지도 못해서 피해만 보는 해삼 말미잘 같은 나지만 그래도 초 울트 라 스페셜 다이나믹 서스펜스 울트라 슬림(엥?--;) 엑설런트 아방가르드 큐티큐티 파워의 내가 좋아해주니 황송하지? 응? 대답 좀 해봐. 이 남의 속도 모르는 쿨 뷰티의 가면을 쓴 질투쟁이야..(피식) " 많이 아픈 거야, 너?? " 보면 모르냐.. 얼굴의 2/3가 반창고 인데다 피부색은 완전 스머프가 따로 없는데 네 눈엔 괜찮아 보이냐? " 업혀. " " .....! " 녀석이 커다란 손을 내 이마에 대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아니.. 그 정도는 아닌.. " 헉...! 그 순간이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방심하고 있는 깡패시키를 향해 조교형씨가 주먹을 날린 건- 그동안 특별한 영문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맞아서 기분 더러울 거라는 건 인정한다. 그래.. 인정해. 하지만.... " 야! 조심해--!!! " 깡패시키 때리면 내가 용서 안 한다-!!!!!!! >ㅁ< 또다시 우라질 사명감에 비실비실한 몸을 일으킨 나는 앞 뒤 잴 것 없이 양손을 뻗어 조교씨의 주먹을 막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늘 그렇듯 내 바램이 제대로 이뤄진 적이 있었던가.. " 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녀석의 주먹을 막은 건 내 손이 아니라 반창고로 도배가 된 내 볼따구였다. ㅠ0ㅠ 이번에 현관을 장식한 비명소리는 당연히 나의 것. 아...하하....아하..... 내가 드디어 75편을 못 넘기고 죽는구나... 다른 소설 수들은 백혈병이나 교통사고 같은 걸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던데 나는 개뿔 센스도 없는 작가 만나서 기어이 흉하게 맞아 죽는구나. 아아.. 스머프 피부에 반창고로 도배가 된 시체라니.. 의사아저씨들에게 미리 사과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72편에 하던 작별인사...다시 이어서 하려고 하니 능력 되는 사람은 녹음기 준비해 두도록.. 그래.. 어디까지 얘기 했었지...? 음... 그러니까 그동안 저와... " 위열매! " " 열매야! " 깡패시키의..... 이야기....를.......읽어주.... " 이 새끼 죽여버리겠어!! " 깡패시키... 너... 나 죽으면 누구랑 같이 살거냐..? 조민국...? 류세이...? 정현아...? 유아린...? 이지혜...? 아아.. 내가 아는 대기번호만도 다섯이구나...썩을. 생각 중 갑자기 스팀이 오른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삐걱이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잠시 조교놈(호칭의 변화에 주목할 것)을 바라보던 깡패시키가 재빨리 내 곁으로 다 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 일어날 수 있겠어? 아니, 업혀라. " " 으.... " " 빨리, 멍청아! " 서럽다..........서러워...............서럽다고! 왜 내가 지금 이런 몰골을 하고 있어야 하는 지.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자 바닥 위로 작은 물방울 들이 새겨졌다. 뚝....뚝.....뚝. " 아.......파. " " .....! " " .....! " " 아프다고 이 자식들아------------!!!!!!!!!!!!!!!! " 완전히 될 대로 되라 식으로 그렇게 소리를 지른 나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짐승처럼 울어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한참동안 우리를 지켜보던 해가 시뻘건 잔상을 남기며 기울어가고 있었다. 내 이름은 열매 <75>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대성통곡을 하자 가까이로 다가온 두 사람이 난처한 듯한 얼굴로 날 내려다 봤다. 감기 걸린 순간부터 내내 바닥을 기던 기분이 완전히 봇물 터지듯 순식간에 터져 나와 이미 남의 집 현관 바닥은 눈물로 흥건해져 있었다. 사내자식이 추하게 질질 짠다고 욕해도 이젠 어쩔 수 없다. 조민국 류세이에 이어 이름도 모르는 깍두기 놈한테까지 죽도록 맞은 데다 되지도 않는 깡 패시키의 가드까지 하다 콤보로 얻어터졌으니 인내심이 끊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은 가. 이 기회에 맺집 키운다고 좋게좋게 생각하라는 거기!! 그래, 당신!! 75편 끝나고 잠시 밀회를 희망하니 감상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_=+ “ 일어나. 병원 가자. ” “ 으어엉------ ” “ 미안.. 미안해. 일부러 널 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 “ 으허어헝----ㅠ0ㅠ ” 다 필요 없다! 이 시키들! 니들, 사람이 말하는데 개무시나 하고!! “ 위열매........열매야. ” 깡패시키가 허공을 향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긴 팔을 뻗어 내 등을 감싸 안더니 등을 토닥이기 시작한다. “ 야.. ” “ 이아 애아 마아응에 으이오 아오--- ㅠ0ㅠ ”(작:해석 가능하신 분 계신가요?^^) “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그쳐. ” “ 으흐윽....끅......끅.. ” 사실은 슬슬 말려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이거 참... 우는 것도 상당히 에너지가 소모되는 구만.. =_=; 그래도 힘든 노력 덕분에 평소답지 않게 다정한 깡패시키의 면모도 체험했고.. 이제 적당히 그쳐 볼까나... ㅡ3ㅡ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녀석의 품에 안겨있자 눈 앞으로 하얀 뭉치가 불쑥 내밀어졌다. “ 닦아. 미안, 손수건이 없어서. ” “ 히끅....히끅.. ” 너 이 녀석.. 생각보다 착한 녀석이구나. ㅡ.ㅜ 등을 향하고 있지만 분명히 들었을텐데도 깡패시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주고 있을 뿐. 아.... 잠 온다... 슬슬 졸음이 쏟아지려는 찰나 등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율형! 우리 형 찾았어요? 방금 목소리가-!!! ” 엑... 열무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역시나 한 셋트로 뒤에는 커다란 태진이 녀석이 따라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깡패시키가 밤새 여기 저기에 전화를 했었던 모양이다. 많이 걱정했구나... 이 녀석. 이 기특한 녀석. 갑자기 울었다는 사실에 창피함을 느낀 나는 녀석의 어깨에 엄청시리 와일드한 부비-_-부 비를 두 차례 실시한 뒤 휙하고 일어섰다. 열무와 태진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래... 안다. 내가 지금 좀 흉한 몰골을 하고 있긴 하지. ㅡㅡ; “ 여..여긴 어쩐 일...히끅- ” 제기랄.. 한바탕 오열을 했더니 목소리가 완전 맛이 갔다. 아아... 빌어먹을. 빌어먹을. -_- 말없이 날 바라보던 열무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예쁜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동시에 녀석 특유의 도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구시죠? ” 엑---------------------=ㅁ= “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일단 병원부터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 야.. 나야. 나. ” “ 네? ” 아아.. 목시 쉬어서 말이 잘 안나온.....히끅- 내가 목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몇 마디 더 하려 하자 어느새 옆에선 깡패시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네 형이야. ” “ 에....? ” “ 열매라고. ” “ 엑---------!!! ” 아아.. 내 꼴이 좀 심하긴 한 모양이구만.. ㅡㅡa 열무 녀석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날 관찰하기 시작했다. 뒤에 서있는 태진이 역시 마치 못볼 걸 보는 듯한 눈빛을 내게 던졌다. 저런 단체로 무례한 시키들 같으니. ㅡㅡ+ 비록 지금 내 몰골은 이렇지만 나도 잘만 꾸며놓으면 꽤 핸섬하다고 이거 왜 이래? -ㅁ-+ “ 정말....형이야? ” “ 응.. ” “ 어쩌다 이렇게... ” “ ....... ” “ 어쩌다 이 지경까지..... ” 아 진짜 점점 기분 드러워질려고 하네 이거. ㅡㅡ 나는 가뜩이나 엉망인 인상을 더더욱 구기며 열무녀석의 손을 쳐냈다. 아까부터 부들부들거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어대는데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다. 이까짓 상처 삼일...아니, 두 달 보름이면 싹 낫는다고! 삔 발목과 손목은 한의원가서 침 맞으면 직빵으로 낫고. 군데군데 멍투성인 다리랑 팔도.. 부어터진 입술과 뺨도.. 시퍼렇게 변한 눈두덩이가 좀 문제지만 선그라스 끼면 그럭저럭 감출 수 있고.. 살짝 닿을 때마다 눈이 튀어나올 만큼 아픈 배도.. 탈골 됐는지 삐그덕대는 어깨도...............................................................후후....... 으아아아아아아악------------------------------ 이 시궁창에 처박아도 시원찮을 빌어먹을 깍두기새끼이이이---------------------!!! 넌 반드시 내가 복수한다!! 나보다 더 처절하게!! 두 번 다시 변태짓 못하도록!!!!! 살아있는 걸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이 개쓰레기 같은 자식--!!!! 하아.....하아.....하아.. 속으로 절규하는 것도 꽤 많은 칼로리를 필요로하나 보다...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겠어...=_= 애틋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열무의 시선이 한순간 조교씨(휴지 줬으니까 다시 호칭 회복)에 게 파바박 꽂혔다. 흡사 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눈이. 이게... 왠지 또 뭔가 이상한....;;;; “ 저.. 저기.. 그 사람은...;; ” “ 너 이 새끼! 네가 우리 형 꼬라지 이렇게 만들었지--!?!! ” 어이 동생.. 꼬라지라니.. ㅡㅡ+ “ 무슨 오해가.. ” “ 입닥쳐! 아무리 모자라고 띨해도 그렇지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보기엔 저래도 우리 가족들한테는 제일 귀여움 받고 살았어! 그런데 너 따위가!! “ 야.. 내가 무슨 애완견 다롱이냐?!! =ㅁ=+ 어우 이 자식이 또 스팀받게 하네! 내 주위에 있는 인간들은 어째 죄다 마이웨이형 인간들 뿐일걸까나. 반론은 듣지도 않고 혼자 정의를 내리고 응징을 가하는. 참으로 무대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조금씩 수습이 되나 했더니 평소엔 불러도 오지도 않던 열무시키가 왠일로 여기 까지 찾아와설랑은..........하여튼 지랄 맞은 타이밍이다. ㅡㅡ; 나는 후들거리는 팔로 열무의 소매를 꽉 쥐며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 아니, 그 사람은 날 구해준..! ” ----------------퍽 아아... ==;; 시뻘겋게 흥분한 열무놈의 주먹은 이미 저 멀리 조교씨의 뺨에 둥지를 틀었으니.. 열무야... 내 동생 열무야.. 너도 그 지랄 맞은 성격 때문에 살면서 고생 좀 하겠구나.. 아니.. 태진이가 더 하겠지.....불쌍한 것. ㅡ.ㅜ “ 열무야! 진정하고 일단 자초지정을...! ” 말리기 위해 달려가는 태진. 역시 자네가 있어야... >ㅁ< --------------------------퍽 이번엔 열 받은 조교씨의 주먹이 열무의 뺨을 정확히 가격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외쳐지는 비명- “ 너 이 새끼 지금 누굴 때리는 거야--!!! ” 아아... 꼭지가 돌아간 우리의 태진 군. -_- 평소엔 부처님처럼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주먹도 꽤 쓰시는 모양이다. 어느새 2:1 모드로 전환된 상황.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깡패시키는 말없이 구경중이다. 별로 말릴 생각이 없어보이는데...;;;; 양쪽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녀석이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 병원에 가자. ” “ 야...잠깐, 저거 말려야..!;;; ” “ 알아서 하겠지. 업힐래? ” “ 그...그런..!!;;; ” 휙 고개를 돌리니 아주 난리도 저런 난리가 없다. 피하기에도 바쁜 우리의 스토커(78.6%의 확률로 예상 중)씨. 완전 꼭지가 돌아가 괴성을 질러대는 위씨 가문의 막내둥이 열무군. 그 옆에서 묵묵히 시원스런 주먹을 뻗어대는 공주님을 지키는 정의의 기사 최태진군. 입이 있어도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 말을 해도 좀체 들을 생각을 않는 세 인간, 깡패시키. 위열무. 최태진군. 지은 죄라고는 날 구해주고 전화 받은 것 뿐인 조교씨. 미안해요. 조교씨. 미안해요.....난.. “ 모두 그마아아아아안----------------------!!!!!!!!!!!! ” 완전히 가버린 목을 최대한 쥐어짜내며 소리를 지르자 순간, 미친 듯이 툭탁이던 세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고 날 돌아다보았다. 하아.. 이제 드디어 오해를 풀 무대가 마련된 건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바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네 사람의 시선이 따라 한 곳으로 움직인다. “ 그 사람이 날 구해주지 않았으면.....쿨럭-! 난 어쩌면.....죽었을 지도 몰라. ” “ ! ” “ ! ” “ ....... ” “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하지 마. ” “ ....... ” 아아.. 목이 너무 아프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깡패시키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 그럼 누구야? ” “ ....... ” “ 널 이렇게 만든 새끼 말이야. ” 녀석은 아까와 달리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눈빛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너무 고요해서 두려운 눈을 하고서.. 그래.. 안됐지만 날 원망 말게. 깍두기씨. 화를 자초한 건 자네. 세상은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룰 속에 움직여야 하는 법이니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에 힘을 실었다. 어디 죽어봐라---! 깍두기---!!!!!!!!!!!!!!! =ㅁ= “ 여기... 주소 있어. ” 네 사람의 눈이 하늘로 치켜들어 올려진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열매 <76> 허름한 집들이 줄줄이 늘어선 낡은 동네. 다닥다닥 붙여진 세간 때문에 경계조차 모호한 그 곳에서 우리들은 구깃한 종이 한 장에 의지한 채 열심히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 자식이 혹시 아무 주소나 부른 거 아냐?? -_-; 갑자기 짜증스런 상상이 고개를 쳐들어 나는 인상을 팍 구기며 이를 으득 갈았다. 내가 그동안은 병신 같이 당하고 터지고 해도 대충 넘어갔는데 이번만은 절대 용서 안 한다. 깡패시키가 말리는 한이 있더라도 깍두기 새끼의 머리털을 죄다 뜯어놓고 말 테다! 그래. 내가 아무리 꽃수 이미지 포기한 지 2년이 넘었다고 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한 소설의 주인공을 말이야! 그것도 제목에 떡-하니 이름까지 올려놓고 있는 이. 나. 를. 말야-!! 아무리 대단한 주인공이라 해도 제목에 이름 못 올리는 것들도 부지기수인데 그 대. 단. 하. 신. 나를 말이야, 눈은 팬더에 얼굴은 스머프에 뺨이랑 턱에는 흉하게 반창고로 덕지덕지 도배를 하게 만들어?! 엉?? 어휴... 계속 말해봐야 열만 더 받지. 어디 찾아내기만 해봐 아주 끝장을 내놓을 테니. -_-+ 나는 점점 경사가 심해지는 골목어귀에 발을 내딛으며 다시 한 번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자 묵묵히 옆에서 걷던 깡패시키가 흘끗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빛 때문인지 살짝 찡그린 얼굴이 오늘따라 살벌하게 느껴지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일까? 설마 몸 어딘가에 흉기(!)를 숨겨 가지고 왔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ㅡㅡ; 위험해... 이 녀석은 위험하다구. =_=; 섬뜩한 상상을 하며 고개를 휘휘 젓자 녀석이 한 손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아......아퍼아퍼! 아후....아후.... ㅜㅜ “ 괜찮겠어? 이제부터 오르막길인데. ” 너만 안 치면 노 프라블럼이야. 이 시꺄!! ㅠ0ㅠ “ 노 프라블럼. 아임 파써블. ㅡㅡ ” 되지도 않는 영어로 간단하게 대답해주자 녀석이 대충 손짓을 한 뒤 등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긴 그림자가 내 위로 쏟아진다. “ 형, 주소 좀 보여줘. 아직 멀었어? ” 등뒤에서 걷고있던 열무가 짜증스럽게 물으며 내 손에서 휙하고 종이 쪽지를 낚아채 갔다. 그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그림자처럼 수호기사가 척하니 붙어있다. 어우....이놈의 닭살 커플. 짜증이야. ㅡ3ㅡ (댁네 커플도 만만치 않소만..-_-;)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낡은 건물이 일렬로 늘어선 후미진 동네의 끝에서 그토록 찾았던 주소의 숫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개인주택 마당에는 인상이 드러운 불독 한 마리가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크르르거리고 있었다. 썩을 놈의 개새끼. 너 오늘 내 신경 긁지 마라. 다친다. ㅡㅡ+ 잠시 종이쪽지와 집을 번갈아 보며 우리 넷은 한순간 시선을 교환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간 나는 오랜 세월로 누렇게 변한 초인종을 힘차게 눌렀다. 삐약 삐약 삐약 삐약~~~~~~~~~~ [ 누구세요? ] 오호라... 딱 걸렸어. 이 새끼. 나는 속으로 씨익 웃으며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승사자 택배왔습니다아~ ^^ ” 이노무 깍두기 새끼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내 말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놈의 목소리가 잠시 잦아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 대기 시작했다. [ 하하하하...이게 누구야? 너 살아있었냐? 푸후훗- ] 이 벽돌로 쳐죽일 새끼. 아주 디질라고 쇼를 하는구나. 니가. ㅡㅡ+ 뒤에서 듣고있던 열무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뛰쳐 들어갈 기세다. [ 그래서 용건은? ] “ 나와. 한판 붙자. ” [ 아직 덜 맞았냐? 그러게 왜 개겨 개기길. 적당히 대주고 기분 좋게 바이바이 했으면 좋 았잖냐. 나도 네 얼굴 꽤 마음에 들었었.. ] “ 나와! 이 개새끼야--------------!!!!!!!!! ” 어느새 날 밀치며 소리를 질러댄 우리집 막내둥이 열무. 그래.. 그건 나도 지금 막 하려던 대사였으니 상관없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밀치면 어떡해!이시꺄! 덜그덕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는 나를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깡패시키 가 재빠른 동작으로 받아냈다. 아아.. 정말 잽싼 흑표범같은 녀석이라니까. 난 또 퀴즈탐험 동물의 세제(--;)라도 보는 줄 알았지 뭐야. ㅡㅅㅡ 그러나 날 조심스레 일으켜주는 다정한 행동과 달리 얼굴은 이 이상 얼어붙을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냉랭하게 굳어있었다. 열무시키의 도발이 먹혀 들어갔는지 잠시 뒤 낡은 대문이 삐걱 열리며 쳐죽여도 시원찮을 깍두기 새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화장 한번 요란하게 한 아줌마까지 끼고서. 정말 용서가 안되는 놈이다. “ 나한테 소리지른 게 너냐? ” “ 그래. 이 새끼야. ” 열무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붙이자 깍두기새끼가 능글맞게 쳐웃어대기 시작했다. 놈의 허리를 양팔로 감싸안은 떡칠 화장의 아줌마까지 셋트로. 망할... 오늘 시력 많이 떨어지게 생겼다. ㅡㅡ; “ 너 혹시 저 녀석 동생이냐? ” “ 그렇다면 어쩔건데? ” “ 아니.. 꽤나 내 취향이라서. ” 순간 열이 팍 오른 내가 욕을 한 사발 퍼부으려는 순간 등뒤에 대기하고 있던 태진군이 순 식간에 깍두기 새끼의 얼굴 위로 발을 날렸다. 미처 주위에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탓에 그대로 100% 히트된 놈의 면상이 희미한 발자 국을 남기며 부득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깔끔한 동작으로 이어지는 몇 차례의 공격은 대부분 깍두기의 얼굴에 배에 콧잔등에 정확히 내려앉았고 그 때마다 놈은 짐승 같은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놀라서 그 옆에 쓰러진 화장 떡칠 아줌마는 그저 눈을 감은 채 꺄악꺄악 소리만 질러댈 뿐 이었다. 잠시 후 그 입은 열무의 손에 의해 막혀버렸다. “ 시끄러워. 아줌마. 동네 사람들한테 구경거리 되고 싶어? ” 차갑게 웃는 예쁜 얼굴. 정말 5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에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던 내 동생 열무가 맞는 지 의심 스러울 정도다. 어느 순간 이렇게 어른의 얼굴을 하게 된 걸까. 내 동생은. 대견스럽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서운하기도..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란 거구.. “ 그쯤하고 좀 비켜줄래? ” 순간 끔찍한 비명소리가 멈췄다.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깡패시키가 긴 다리를 움직여 깍두기놈의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거짓말처럼 주위를 둘러싸는 섬뜩한 적막. 바닥에 엎어진 채로 쿨럭대고 있는 깍두기놈의 이중 턱을 구두 끝으로 거칠게 들어올리며 깡패시키가 특유의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 이 근처에 공터있지? 안내 해. ” “ ! ” “ 네가 건드린 게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게 해줄 테니까. ” 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깍두기놈이 재빨리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 위로 ‘애원’이 형상화된다. 그라나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 환자를 상대로 잘나신 힘 자랑을 한 너니까 내가 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 겠지. “ “ 으..... ” 봐주지 않을 생각인가..! 저 녀석? 아니.. 아무리 그래도 벌써 저렇게나 맞았는데 진심으로 패면..; 갑자기 불안해진 나는 비틀비틀 깡패시키의 옆으로 걸어갔다. 팔을 잡고 두어 번 흔들자 녀석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얼음처럼 차갑던 눈이 한순간 조금 누그러진다. “ 적당히만 하고 가자.... 네가 정식으로 패면 진짜 죽을 지도 몰라. ” “ 죽이려고 온 거다. ” =_=;;; 서....설마 농담이시지요??;;;;;;; 더더욱 불안해진 나는 녀석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 저....정말? 정말 죽이려고-??;;;;;; ” “ 살아있어 봤자 해만 끼치는 인종이니까. ” 그 말을 듣자 깍두기놈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졌다. 아까 내가 반쯤 농담 삼아 말했던 ‘저승사자 택배왔습니다아~’가 현실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 아.. 아니! 아무리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살인은 안돼!!;;; ” 드디어 내 입에서 구체화된 명칭이 나오자 깍두기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 했다. 떡칠 화장 아줌마 역시 파랗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아줌마의 입을 막고있는 열무는 무표정. 가만히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태진군 역시 별로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아.... 아아...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ㅁ=;;;; “ 공터 어디야? 안내 해. ” 어느새 내 팔을 쳐낸 깡패시키가 바닥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질질 짜기 시작한 깍두기놈 의 배를 거칠게 발로 차며 다시 물었다. 순간 시끄러운 비명소리가 주위로 울려 퍼졌다. 그것이 또 녀석의 신경을 거슬렸는지 이번 엔 좀 더 강한 힘이 놈의 턱을 덮쳤다. “ 시끄러우니까 닥쳐. ” “ 으... 으으아아.... ” “ 정말 죽여줄까? ” 화가 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밤새도록 연결되지 않는 번호를 누르며 새하얗게 밤을 새웠을 거라는 것도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게 걱정으로 꼬박 밤을 세운 뒤 엉망이 된 나와 마주쳤을 때의 녀석의 심정이 어떠했을 지도. 그걸 알기 때문에, 사실은 나도 저 깍두기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기에 깡패시키가 기분 을 풀 때까지 그대로 방관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깡패시키는... 저렇게 철저하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은 처음 본다. 만난 이후로 처음이다. 저렇게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있는 녀석은. 정말.... 살인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거다. 앞뒤 생각 없이 절뚝절뚝 달려갔다. 마치 솜으로 만들어진 인형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로 차듯하는 녀석을 향해 달렸다. 살짝 삔 다리가 통증을 호소했지만 깡그리 무시하고 달렸다. 녀석의 팔을 잡는다- 돌아보는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 양팔을 뻗어 녀석의 목에 감는다- 당황한 듯 뭔가를 말하려 살짝 벌어지는 입술. 그대로 밀어붙였다.....................닿는 입술. 되지도 않는 온갖 테크닉을 구사해가며 밀어붙였다. 내 쪽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자..... 어때? 이젠 내 테크닉도 꽤나 쓸만해졌지? 후후.... 이노무 깡패시키 놀라기는. 꽤나 긴 키스였다. 처음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녀석도 마지막엔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적극적으로 대쉬해 왔다. 살짝 눈을 뜨니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완전히 얼어붙은 네 사람이 차례차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 떡칠 화장 아줌마는 묘하게 행복한 듯한(--;) 표정으로 연신 꺄아꺄아를 외쳐대고 있 었다.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그제서야 자신이 벌인 일을 떠올리며 얼굴이 달아오른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나는 말없이 날 내려다 보고있는 깡패시키를 향해 씨익 웃어주며 말했다. “ 이.. 이건 선불! ” “ .......? ” “ 저 깍두기 새끼 나한테 넘기는 조건. 오케이?? ” “ 위 열매- ” “ 결자해지. 몰라? 맞은 놈이 푸는 거야! ” “ 너 정말.. ” “ 알어알어. 나더러 멍청하다고 하려고 그러지? 뭐...그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역시 내가 패지 않으면 기분이 안 풀릴 것 같아서 말야. “ “ ....... ” “ 너 대신 내가 끝장을 내놓을 테니까 내 자세나 좀 봐줘. 일단 노력은 많이 했는데.. ” 이 멍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라있는 녀석의 얼굴을 향해 하하 웃어준 나는 바닥 에 웅크린 채 벌벌 떨고있는 깍두기놈에게로 다가갔다. 시선이 마주치자 놈이 눈을 꽉 감는다. 복수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이 새꺄------------!! =ㅁ= 후들거리는 발로 열심히 밟았다. 헉헉 대면서도 끝까지 밟았다. 중간에 힘이 들면 쉼호흡 운동을 한 뒤에 다시 밟았다. 밟았다.......마침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소리조차 내지 못할 때까지. 알고 보면 나도 참 무서운 놈이다..후후.. 그 날 밤 깡패시키의 강요에 의해 침대 위에서 후금을 지불해야 했던 건 비밀... ㅜ_ㅠ 내 이름은 열매 외전 - 너를 위한 전주곡 " 최태진! 빨리 나와봐! 싸움 났어!! " 짧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 어제 늦게까지 연습을 하느라 미처 못한 숙제를 하고 있는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용석이가 교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치며 날 불러냈다. 또냐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녀석을 따라 뛰기 시작했 다. 이게 대체 몇 번째냐. 위 열무- 달리는 내내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하나씩 되뇌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 새끼가..! " " 아가리 닥쳐! 이 돼지 새끼야! " 이번 상대는 덩치 좋은 상급생인 모양이었다. 이미 주위는 싸움구경을 하러 나온... 아니, 아 마도 열무녀석을 보러 나왔을 녀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발 딛을 틈 없이 꽉꽉 들어찬 인파속을 헤치며 내 눈은 열무 녀석을 쫓았다. 새까만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있 는 걸 발견한 순간 또다시 한숨이 새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으며 좀 더 앞으로 나아갔다. " 넌 상급생 대하는 예절도 못배웠냐-?! " " 상급생 좋아하네. 지나가는 남자 후배 엉덩이 더듬는 변태새끼 주제에 " " 이.. 이 새끼가-! " 순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덩치 좋은 상대가 팔꿈치를 뒤로 당겼다. 아... 아차하면 늦을 지도 모르겠다. 놈이 부들부들 떨리던 주먹을 마악 뻗으려는 순간과 동시에 내 발이 놈의 등 가운데에 정확 히 꽂혔다. 듣기 싫은 소음이 짧게 복도를 울리고는 흩어졌다. 예상했다는 듯 열무녀석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짧게 중얼거렸다. " 권용석이 또 꼰질렀구만. " " 적당히 해. 일일이 반응하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 " " 그럼 넌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변태새끼가 엉덩이 주물러대면 그냥 있을래?? " 녀석답게 쏘아붙인다. 나 역시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라 가볍게 무시하며 녀석의 손목을 잡고 인파를 뚫고 걷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하게 열무를 향하던 시선들이 서서히 흩어지며 길을 내주었다. 여기까지도 언제나와 같은 패턴- 대체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위 열무. 처음 녀석과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우연히 같은 반이 된 이후 눈에 띄는 외모와 시원스런 성격으로 반의 중심이 된 녀석과 보통 의 무리 속에 속해있던 나는 같은 써클에 가입한 일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본 녀석은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매력적이었다. 그 덕택에 당시 사귀고 있던 여자애가 있었음에도 오히려 이 쪽이야 말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 감정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소 혼란스런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결국 그 애와는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깨졌다. 거절을 한 건 내 쪽. 피아노를 변명의 구실로 삼자 상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피아니스트가 될 거냐.. 너? ' 녀석이 커다란 빵을 한 입 가득 베어물며 시큰둥하게 물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 했다. ' 응. ' ' 흐응~ ' ' 사내놈이 피아노라니 센치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 ' 아니.. ' ' ....... ' ' 그냥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난 못 치니까. ' 여전히 빵을 우적대며 녀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예쁜 얼굴과 달리 덜렁대는 행동에 놀라면서도 그것조차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내 눈은 변함없이 녀석의 등을 쫓고 있었다. 약간 마른 체형에 성깔을 그대로 반영하는 가로로 길게 찢어진 묘하게 색기어린 눈매. 지나치게 하얀 얼굴과 새까만 머리는 그림 같이 매치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애처로울 만큼 가느다란 턱선이었다. 위험해 이 녀석....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드는. 더운 여름 하복의 목 단추를 풀어헤치면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 다. 마음 같아서는 목도리라도 둘둘 말아주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겼다간 그대로 돌아오는 건 욕설과 주먹세례 뿐일 것이다. ' 아아... 고소해 버릴까봐. ' 캐캐 먼지 묵은 지하에 위치한 서클실에 들어선 녀석이 테이블 위에 가방을 집어던지며 다 소 지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리 와서 시험범위를 체크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짧게 이유를 물었다. 잠시 말없이 한숨을 내쉬던 녀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이중섭 알지? 그 변태 선생. ' ' 수학..? ' ' 응... 그 변태 할아범이 수업시간마다 자꾸 더듬어대잖아. 닭살 돋게. 그 때마다 토할 것 같아. ' 끝에 우엑....을 붙이며 모션까지 취해준다. 그렇지 않아도 추잡한 소문이 무성히 떠돌고 있던 선생이라 약간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보통의 사람도 끌어당기는 녀석인데 변태선생이야 오죽했으랴. 불쾌한 상상까지 머릿속에 떠올려본 나는 참고서를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이 덜컹한다. 그런 내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녀석이 물고 있던 아이 스크림을 손으로 옮겨 들며 말했다. ' 걱정되지 않아? ' ' ! ' ' 너... 내 보디가드 안 해볼래? '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당혹감은 앞으로 살며 두 번 다시 경험하기 힘든 것이리라.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 툭하면 주먹부터 나가는 주제에 보디가드는 무슨. ' ' 그래서...? 관심 없어? ' 혹시 내 감정을 눈치챈 건가.. 서투른 대답을 했다간 빼지도 박지도 못할 것 같아 침묵을 지키자 녀석이 흐응~하며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갔다. ' 나 피아노 때문에 주먹 못 쓰는 거 알잖아? ' ' 발은 뒀다 국 끓여먹을래? ' ' 진심이야? ' 짧게 묻자 녀석이 씨익 웃는다. ' 농담~ ' ' ....... ' ' 아니.. 반은 진심일 지도. ' ' 뭐냐, 그게. ' ' 음...... 음악실 비었던데 연습 안해? ' ' 집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지겨워. ' 한숨을 곁들여 대답하자 녀석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이 묻은 입술이 반짝거리며 유혹하듯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절반쯤 남은 그것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 먹고 싶으면 말로 해. ' ' 아니.. ' ' 너 단 거 싫어한다고 해서 일부러 내 것만 사왔는데.. ' 향긋한 레몬 향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순간 묘하게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위험해- ' 뭐야.. 싫으면 말지 왜 바닥에 떨어트리고 그래? ' ' 미안. ' 일단 사과부터 한 뒤에 시선을 내리니 바닥에 흉한 흔적을 남긴 아이스크림 잔해가 눈에 들 어왔다.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으로 뭔가를 궁시렁대는 녀석. 만약 내가 이 충동을 억누르지 않고 실행한다면 녀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 도도한 입술로 날 비웃을까.. 경멸할까? 아니면.. 짧은 순간이었다. 도저히 상상만으로는 견딜 수 없게된 내가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친 건. 역시 상상대로 싱그러운 레몬 맛이 나는 키스였다. 이젠 혀를 물린다고 해도 상관없을 지도. 막연한 행복감에 빠진 채 반쯤 체념하고 녀석의 반응을 기다리며 입술을 뗐다. 기분 탓인지 방금 전보다 미세하게 붉어진 듯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 뭐야.. ' ' 보면 알잖아? 키스. ' ' 왜 한 건데? ' 녀석의 지당한 질문에 잠시 대답을 미루던 나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 하고 싶었으니까. ' ' 왜? '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지 녀석은 왠지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진성 중학의 위열무가 운다고? 스스로 기막혀 하면서 시선을 마주하자 녀석이 금새 얼굴을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빨리 대답 안 하면 너도 블랙리스트에 올릴 테니까 알아서 해. ' 역시 그건 좀 싫다. ' 널 좋아하니까. ' ' ....... ' ' ....... ' ' ........그것 뿐? ' 그것 뿐이라니.. 그거면 이유로서는 충분한 게 아닌가? 조금 당황해서 쳐다보자 녀석은 흥미 없다는 듯 손을 퍼덕이며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 갔다. 역시나 싶어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려던 녀석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보디가드 하는 거다?! ' ' ! '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결국 녀석의 도발에 넘어간 나는 그렇게 한참을 서서 쿡쿡대며 웃었던 것 같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 " .....! " " 손 좀 놓으라니까. 다 쳐다보잖아. 그것보다도 아파죽겠어. " " 아........미안. " 그제서야 손을 놓자 열무녀석이 손목을 만지작대며 날 노려본다. 단 2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젠 훨씬 농염한 색기를 품고 있는 눈매. 2년 전 여름의 내 충동에 감사하며 녀석을 음악실로 이끌었다. 녀석은 끝까지 날 노려보면서도 싫다며 돌아서지는 않았다. 완전히 비어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그대로 구석에 녀석을 밀어 넣었다. " 뭐야... 하려고? " " 응. " 짧게 대답하며 허리를 끌어안자 녀석이 천천히 내 목을 끌어안았다. " 너... 테크닉이 꽤 늘었어. " " 칭찬해 주는 거냐? " 가슴 돌기를 살짝 핥으며 묻자 녀석의 코끝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주인보다는 솔직한 몸이다. 티 하나 없는 고운 살결을 조심스레 입술로 쓰다듬을 때마다 녀석은 목을 뒤로 젖히며 내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실었다. 이젠 목소리만으로도 가버릴 것 같다. 생각해보니 콩쿨 준비를 하느라 꽤 오랫동안 녀석을 안지 않았다. 녀석을 볼 때마다 턱에 목에 시선이 가던 건 아마도 그에 대한 부작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대담하게 혀를 움직이며 녀석을 한계로 밀어붙였다. 서서히 신음소리가 커진다. " ..............음.........앗. " 평소의 앙칼진 목소리가 어느덧 달콤한 꿀을 머금고 있다. 이제 슬슬 밀어붙여도 될까... 그렇게 생각하며 뒤쪽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녀석이 양손으로 힘껏 내 머리를 밀어냈다. " 윽...! " " 미안! 깜빡하고 있었는데 오늘 바보형이 집에 잠깐 들르기로 했어! " 아니.. 그렇다고... " 벌써 8시야? 젠장, 빨리 안가면 얼굴도 못 보겠네. 미안. 내일 보자--! "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음악실을 나서버렸다. 혼자 우두커니 남은 나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평소에도 형이라면 끔찍이도 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창가 앞으로 다가간 나는 어둑해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다가 천 천히 시선을 내렸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응? 위 열무- 어둠에 잠식당한 운동장 한 가운데를 경쾌하게 가로지르며 달리는 녀석을 바라보며 후후하 고 웃었다. 오늘 내가 전주로 칠 곡은 아무래도 '고양이 왈츠'가 될 것 같다. 내 이름은 열매 <77> 깍두기 문제가 마무리된 지 2주 정도가 흐른 일요일의 오후. 모처럼 휴일이라 밀어뒀던 빨래를 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만화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 -딩동 누구지...? 특별히 올 사람도 없는데.. 열무 빼고는 아무도 열어주지 말라는 깡패시키의 분부도 있었고.. 혹시 교회 전도하러 나온 건가..? 소파에서 뭉기적대던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읽던 책을 탁자에 올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신문이나 우유 권유면 길게 말할 것도 없이 NO다. -딩동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없는 척 하려는데 두 번 째 벨이 울렸다. 없어. 없어. 없다구. 여긴 빈 집이야. -_- -딩동 흐음... -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 =_=+ “ 거참, 사람 없다니까 왜 자꾸 시끄럽게 누르고 난리...........! ” “ 안녕. ” 잠깐... 이 목소리는..??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힐끔 고개를 내밀자 역시나 예상대로 조교씨가 서 있었다. 두 손 가득 커다란 쟁반을 들고. 캡 맛있는 냄새-!! 0ㅠ0 “ 음식을 좀 만들었는데 너무 많이 만든 것 같아서.. ” “ 이.. 이게 다 뭐예요? ” “ 파스타랑 순대볶음이랑 마카로니 샐러드랑 후라이드 치킨. ” 주르륵....+ㅠ+ 어.. 어떻게 죄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ㅠ< 좋아라~하고 덥썩 받아들려는 순간 깡패시키의 무서운 얼굴이 생각나 멈칫했다. 아무리 맛있는 걸 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넙죽넙죽 받지 말라고 했었다. 뭐.. 물론 그건 굳이 녀석이 말하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엄마한테 교육받고 자랐지만. 나는 서글픈 눈으로 김을 풀풀 풍기고 있는 것들을 마지막으로 스윽 쳐다본 뒤 눈을 딱 감고 손을 내저었다. “ 아...아니에요!! 성의는 고맙지만 방금 밥을 먹어서...! >ㅁ< ” 꾸르르르르륵---------- 이런 쳐죽일 내장 같으니!! =ㅁ=++ 민망함으로 시뻘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둘둘 말자 풋-하는 웃음소 리가 들려왔다. 아아...그래 마음껏 비웃으슈. ㅡ.ㅜ “ 팔.....아픈데. ” “ 에..? ” 그러고보니 정말 무식하게도 많이 가져왔다. 도대체 얼마나 만들었길래..; 아주 큰 손 정도가 아니구만. 당신이 주부하면 집안 거덜나겠어. ==; 정말 팔이 아픈지 손이 조금 후들거리고 있다. 일단 보기에 뻘쭘해서 받아들어 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조교씨의 조금 침울해진 목소리 가 들려왔다. “ 나....그렇게 수상한 사람 아니야. ” “ ....... ” “ 하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이런 수상한 녀석이 주는 음식 따위 독이 들었을 지도 모르니까.. ” “ 아.. 아니에요. 그런 건!;;; ” “ 난 그냥... 옆집이니까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실례 됐다면 미안하다. 이 음식들은 그냥 갖다 버리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 엄청나게 신경 쓰여! 그리고... 당신 미쳤어?! 이 아까운 것을!! =ㅁ= 나는 흐르는 침을 대충 닦고 쟁반을 받아들었다. 과연 보기만큼이나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기우뚱하자 조교씨가 냉큼 다시 받아들며 말했다. “ 식탁까지 옮겨줄게. ” 자..잠깐.. 깡패시키가 집안에 낯선 남자(!) 들이면 가만 안 둔다고 했는데..;;; 지난밤의 엄청났던 운동(!!)을 떠올린 내가 잔뜩 굳은 얼굴로 망설이고 있자 조교씨가 훗하 고 웃었다. “ 걱정마. 안 잡아 먹을 테니까. ” “ 그런 거 아니에요!;; ” 당신이 문제가 아니라 깡패시키한테 잡아먹히는 게 두려운 거라고 난! 그... 그 짐승 같은 시키.. 도대체 하룻밤에 몇 발을 장전하는 건지. >ㅁ<;;; 대체 날 죽일 셈이야? 숫자만 많으면 말을 안 해. 기운은 또 왜 그렇게 센지. 하드한 플레이를 안 해서 그렇지 움직임 자체로 따지면 하드 뺨친다고! 쓸데없는 조교씨의 말에 또다시 지난밤의 일을 떠올려버린 나는 시뻘개진 얼굴로 후우후우 쉼 호흡을 했다. 옆에서는 조교씨가 그런 나를 보며 묘하게 미소짓고 있다. 뭐... 금방 가겠....지..? ㅡㅡ; “ 그.. 그럼 잠깐만 들어오.. ” “ 응. 그럼 실례할게. ^^ ” 어느새 잽싸게 신발까지 벗고 있는 조교씨. 이.. 이거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 ㅡㅡ; 그래도 이젠 어쩔 수 없지. 맛있는(아마도) 음식도 받았으니 문전박대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쟁반만 옮겨준다고 했으니까 너무 경계하는 것도 오버 아닐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문을 닫고 조교씨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 이야~ 인테리어 좋은데? ” “ 아... 그래요..?-_-; ” “ 죄다 고가(高價)품뿐이네. 굉장한 부잔가봐? ” 아니 뭐... 우리 시-_-댁이 좀 잘 살긴 해요.. ㅡㅡ; 일단 식탁에 쟁반을 내려놓은 조교씨는 그러나 나갈 기미는 조금도.. 아주 쪼~~금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이것 좋다느니 저것 좋다느니 혼자서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감정 중이었다. “ 저.. 저기..; ” “ 같이 사는 남자.. ” “ ! ” “ 우리 학교 학생 맞지? 이름도 알고 있는데... 강이율 맞지? 우리 과 여학생들이 하도 시끄러워서 말이야. ” “ 아... ” 인기가 날로 번창하시는구만. 흥. ㅡㅡ 내 이름은 여자 애들이 말 안......하는 게 좋다. 이딴 웃긴 이름은 그저 까르륵대며 안줏감 삼기에 좋겠지. 여자한테 인기 따위 없어도 난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은 정해졌으니까 다른 여자 따위... 그.. 그래도 귀여운 여자면 조금 좋을 지도.. -_-//// “ 곁에 사람을 두지 않는 타입 같던데 동거라니.. 놀랐어. ” “ 친구 많아요. 그 녀석. ” 엄밀히 말하자면 꼬붕들이지만. ㅡㅡ; “ 너도.... 친구야? ” “ 에.. ”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조교씨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과장된 몸짓. “ 요 몇일 학교에 안 보이던데 수업은 계속 빠지고 있는 거야? ” “ 몸이 좀 아파서요.. ” “ 얼굴.. 많이 좋아졌네. 복수는 잘 했어? ^^ ” “ 뭐어.. ” 실컷 밟기는 했지만 다음 날 생각하니 역시 분이 덜 풀리더군. 언제 하루 날 잡아서 다시 찾아가 볼 계획이올시다. ㅡㅡ 그보다.. 당신 안 나가-?? =ㅁ=++ “ 사실 그 땐 좀 많이 당황했어. 억울하기도 하고. ” “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 아아.. 이 상황에서도 너무나 예의바른 나... 역시 인간이 됐다니깐. ㅠㅠ 깡패시키 넌 대어를 건진 거야. 임마. -0- 짧게 사과하자 조교씨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아니 뭐..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 “ ....... ” “ 애인이지? 그 녀석. ”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사실 그 상황의 분위기로 보아 우리 둘의 사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이 남자 한테 직접적으로 들으니 뭔가 덜컹하는 기분이다. 웃고 있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하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교씨의 손을 살짝 치워냈다. “ 네.. 그런데요. ” “ 역시.. ” “ .......? ”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던지자 조교씨가 소파에 앉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야! 누가 앉으래! 그리고 누가 담배 피워도 좋다고 했어!? 여기서 담배 피우면 ‘낯선 남자 왔다 갑니다~’와 다를 게 뭐냐! 너 임마 불만 붙여봐 아주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놓을 테니까!! =0=+ 나는 재빨리 그 앞으로 달려가 담배를 홱 낚아챘다. 조금 놀랐는지 커다래진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조교씨. 이런 예의의 ‘예’자도 모르는 호랑말코놈 같으니!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조교놈(또다시 호칭 변화-_-;)을 향해 소리쳤다. “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 “ ....... ” “ 그리고 이 집에선 담배 아무도 안 핍니다! ” “ ....... ” “ =_= ” “ ...........풋. ” 아니, 이게 웃어?? =0= “ 하하하... 미안 미안....큭큭.. ” “ ㅡㅡ+ ” “ 네가.. 너무 귀여워서....풋- ” 아니 이 자식이 지금 기골이 장대한(?) 대한의 성인 남자(강조!)를 상대로 무슨 낙타가 혹에 빨대 꽂고 뽀그르르 거품 내는 소릴 하는 거야?? 엉?? 더더욱 기분이 상한 나는 담배를 그대로 보란 듯이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 나가요! 저 음식들도 당장 들고 나가요!! ” 그깟 파스타 따위! 그깟 순대볶음 따위!! 그깟 마카로니 샐러드 따위!!! 그깟 후라이드 치킨....(주르륵>ㅠ<)..............따위!!!! 나중에 깡패시키한테 사달라고 하면 돼!! 아니면 내가 배달시켜서 먹어도 돼!! 그깟 파......(주르륵+ㅠ+)....................따위!! 그 따위 거!! 그라나 식식거리는 나를 앞에 두고도 조교놈의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묘하게 미소지을 뿐. 아... 웃으니까 꽤 다정해 보이는 것 같기도..........................가 아니란 말이다!! >ㅁ<;;;; 스스로를 자학하며 거실 벽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자 어느새 일어나서 내 곁으로 다가온 조교놈이 양손으로 내 어깨를 턱하니 잡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 숨결까지 느껴질 만큼 좁혀진 거리에서 나는 재빨리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 만 강한 힘이 날 놓아주지 않았다. 아아.. 어째서 이노무 소설엔 죄다 변강쇠들만 등장하는 거냐!! ㅠ0ㅠ 애초에 목적이 이거였구나! 이 변태 스토커 놈! 집에서 혼자 집안 일을 하고 있는 유부녀(!)를 꼬셔볼 생각으로 음식을 많이 만들었느니 어 쩌니 쇼를 해댄 거겠지! 이 혹에 빨대 꽂고 뽀그르르 거품 낼 낙타 같은 놈!! 애초에 너를 집안에 들인 내가 병신 삽대가리였다! 그래 나야말로 혹에 빨대 꽂고 뽀그르르 거품 낼 낙타 같은 놈이었어!! “ 이거 놔요-!! ” 물어뜯을 기세로 노려보며 소리치는데도 놈은 여전히 미소지은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너... 나랑 사귀지 않을래? ” “ ....! ” “ 나랑 사귀자. 너 정말 귀여워. ^^ ” 하도 황당해서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놈의 팔이 무식한 힘으로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뭐라고 소리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겹쳐진 입술. 딩동-하고 의미심장한 벨소리가 울린 건 그 때였다- 내 이름은 열매 <78> 벨소리에 멈짓한 순간을 노리고 있는 힘껏 조교놈의 가랑이에 무릎을 차올린 나는 낮은 신 음소리를 뒤로 한 채 잽싸게 현관문을 열었다. 우유 배달이든 신문배달이든 피자배달이든 좋다! 덕분에 틈을 얻었으니 하나 정도는 사주마! " 누구세욧------------!!!! >ㅁ< " 이미 문을 열며 씩씩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생각과는 달리 은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 리가 들려왔다. " 저..... 실례지만 여기.. 강이율씨라고 살지 않으시나요? " 검은 머리를 등뒤로 가지런하게 묶은 참하게 생긴 여고생이었다. 교복을 입었으니까 확실하다. 그런데 여고생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왔지..? 또 깡패시키는 어떻게 아는 거지? 찰나에 떠오른 궁금증을 꾹꾹 눌러 죽이며 나는 짧게 대답했다. " 맞는데.... 무슨 일로..? " " 아.... 맞군요. 다행이다~ " 그렇게 웃으며 생긋 웃는 여고생. 잠시 행동을 살피며 갸웃하자 등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차.. 스토커놈의 급소를 가격하고 달려온 거였지. " 아프잖아.. " 아프라고 찬 거다. 이 자식아! ㅡㅡ 내 목에 팔을 두르려는 놈을 잽싸게 밀어낸 나는 곧다시 여고생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 무슨 일로 왔죠? 그 녀석이라면 지금 없는데.. " " 아... 네.... 이율 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책을 두고 가셔서요. " 엥.....? 웬 선생?? ==;; 그 시키가 언제 전공을 바꿨지?? " 저희 집에서 제 개인 과외를 해주고 계시거든요. " 그럼.. 그 녀석이 전에 말하던 알바란 게..? 안 어울려! 안 어울려! 그 녀석이랑 과외 선생과는 엄청난 갭이 있다구!! ;ㅁ; 물론 단순한 바-_-보이던 날 죽기살기로 가르쳐서 떡-하니 지금 학교에 붙여놓은 걸 보면 자질은 충분히 입증이 되고도 남지만 그래도 그 깡패시키가-?? 절대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텐데.. 아니면 역시 내가 걱정할까봐 거짓말을 한 걸까? 사실은 빈털터리로 쫓겨나서 이 집세를 갚아나가기 위해 매일같이 주경야독을 해왔던 걸까? 어울리지도 않는 선생노릇까지 해가면서? 날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나는 어느새 또그르르 뺨 위를 흐르는 눈물을 잽싸게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안이했다. 피자 시킬 때도 제일 비싼 메뉴로만 고르고-그치만 맛있는 걸..- 컴퓨터 게임하느라 매일 밤을 지새우고.. 뭐 먹을 거 없나하고 하루에도 수십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아마 전기세도 엄청 나왔겠지. 그것까지 내려고 녀석은........흑... ㅡ.ㅠ " 저.... 저어.. " 난 그것도 모르고 매일 밤 달려드는 녀석을 짐승이라고 욕하고.. ㅜㅜ " 저... 저기..; " 내 안에서 빼지 않고(!) 몇 발이나 장전하는 녀석을 변태라고 울부짖고.. ㅜ^ㅜ " 저기... 잠깐...; " 일부러 눈에 훤히 보이는 곳에 키스자국을 남기는 걸 보고 투덜투덜대고.. ㅠㅠ " 저기요--!!! " " 에... " 거기까지 생각하며 반성을 하고 있는데 여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나는 흐르는 콧물(;)을 대충 소매로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고생과 조교놈이 뚫어질 듯이 날 바라보고 있다. 나만의 세계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나..... 갑자기 민망해진다.-_-; 조금 빨개진 얼굴로 슬쩍 눈치를 살피던 나는 짧게 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 나... 불렀어요? " " 네. " " 왜요? == " " 선생님께 이것 좀 전해 주세요. " 스윽 시선을 내리니 양 손바닥 위로 묵직한 책 한 권과....................편지로 추정되는 핑크빛(!) 봉투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는 진홍색 하트 스티커로 꼼꼼하게 봉합이 되어 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수작이여--?? =_=+ 조금 찡그린 얼굴로 쳐다보자 여고생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 꼭 전해 주세요. " " ....... " " 그럼... 실례했습니다아아~ >ㅁ< " 아.. 아니, 이봐 학생-------------!!!!!!!!!!!!! 졸지에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떠맡게된 내가 팔까지 열심히 휘저으며 불렀지만 여고생은 이 미 엘리베이터와 함께 사라지고 난 뒤였다. 거참... 생긴 거 답지 않게 무지하게 빠르구만. ==; 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든 책 사이에 편지를 끼우며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잠시 존재감을 잊고 있던 조교시키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 그거 전해줄 거야? " " 댁이랑은 상관 없잖아요? ㅡㅡ " 최대한 앙칼지게 말해봐지만 역시 열무처럼은 안되는군. ㅡㅡ; 짜증난다는 오오라를 마구 발산하는 데도 조교놈은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 고 있다. 웃다 죽은 귀신이 붙었나..썩을. ㅡㅡ " 나...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 하.. 기가 막힌다 진짜. 설마 내가 ok라도 할 줄 안 거냐? 나는 더 이상 지체할 것도 없이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 NO-예요. 앞으로 내 대답은 똑같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마요. =_= " " 흐응~ " " 아까 그.. 그거 한 거!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용서 안 할 테니까 앞으로 일체 나한테 말 걸지 마요-!! " 그래 이 자식아, 내가 그렇게 지조도 없는 놈팽이로 보이든?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든? 나는 의지도 없는 인형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인생으로 보이든?? 너나 이류나 싱글거리며 달라붙는 건 똑같지만 안타깝게도 네 쪽이 더 최저야. 너처럼 무식하게 힘으로 사람 마음을 가지려는 인종들을 나는 제일 경멸해. 재빨리 안으로 들어선 뒤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문틈 사이로 조교놈의 다리가 들어왔다. 순간 움찔한 내가 조금 힘을 빼자 이 때를 노렸다는 듯 놈이 능글맞은 면상을 들이댔다. 이 썩을 오징어 같은 놈이... 네가 이젠 아주 막 가는구나?!! " 나가! " 그래, 이젠 나도 반말이다! =ㅁ=+ " 말 놓으니까 좋은데? 친근감 있게 느껴지고. ^^ " " 미친 새끼. 솔직히 불어. 너 스토커지-??! " 내 질문에 그저 묘한 미소로 응수하는 조교놈. 그렇다는 거냐, 아니라는 거냐? 아.... 진짜 짜증나는 인간이다. 넌 임마, 나한테 완전히 찍혔어!! =ㅁ=+ " 내가 정말 스토커라면 어떻게 할 건데? " " ! " " 네가 이름을 말하기 전에 이미 네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 이.. 새끼...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조금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자 놈의 단정한 얼굴 위로 싸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제기랄.. 아무래도 진짜로 똥을 밟은 것 같다. ==;;; " 네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흥얼거리는 노래가 난마 루트 1/2의 주제가라던가.. " " !! " " 막 흥분했을 때의 신음소리가 묘하게 고양이 울음소리를 닮았다던가.. " 이........ 이....... 이 개 같은 변태새끼가-!!!!!!!!!!//////// 나는 순간 시뻘개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높이 올린 손을 내리 그었다. -짝 날카로운 소음이 짧게 복도를 울렸다. 놈이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아준 것이다. " 손은 꽤 맵네? " 하.... " 평소의 멍한 모습도 귀엽지만 앙탈부리는 것도 귀여운데? ^^ " " 뭐.. 뭔 탈????!! " 이 놈이 도발의 달인인 것이냐, 아니면 내가 너무 단순한 거냐? 어쨌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꾸욱 쥔 주먹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마악 휘두르려는 찰나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놈의 몸이 휘청이며 날 스치고 현관 바닥에 쳐박혔다.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가운 얼굴..................이 아니라 지옥귀같은 오오 라를 마구마구 발산하고 있는 지나치게 수려한 얼굴이 날 맞이했다. " 누가 문 열어주라고 했어? " 자..........잘못했사옵니다! 부디 고정하소서-!!!!!!!! >ㅁ<;;;;;;;; " 또 저 새끼냐? "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를 짧게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진 조교놈을 발로 돌려 눕혔다. 꽤 심하게 충격을 받았는지 놈은 연신 기침을 해가며 뻘개진 얼굴로 깡패시키를 노려보았다. 아아.. 이 상황.... " 그 때도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인연이 있나봐? " " ....... " 완벽하게 개무시를 때리는 깡패시키를 향해 혼자서 큭큭대며 웃는 조교. 보는 내가 더 무안하다. ㅡㅡ;; 나는 말없이 깡패시키를 스윽 바라본 뒤 부엌으로 들어가 아까의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던 쟁반을 가지고 나왔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그냥 얼굴에다 확 던져버릴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음식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면 죄 받을 것 같아서-물론 청소하기 전에 냄새가 심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천천히 조교놈의 집 문앞에 내려놨다. " 내... 내가 이딴 거 먹고 싶어서 문 열어준 줄 알아-??!! " 힐끔. == " 이딴 파스타 따위! 순대볶음 따위! 마카로니 샐.....! " 끄르르르르르르르륵----------------- 아아... 이런 쳐죽여도 시원찮을 내장아. 니가 기어이 주인님 개망신을 시키는구나. 이제 만족하니? 응? 행복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번에도 가장 먼저 침묵을 나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 그.. 그러니까 내가 먹을 거에 현혹되서 문 열어준 게 절대 아니란 말이다!!! " 힐끔. ==; " 나는 그냥 동방예의지국의 한 일원으로서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을 한 번 시험해 보기 위해서...!! " 힐끔. ==;;;;;;; 여기 좀 봐주세요! 깡패시키님! ㅠㅠ 그러나 혼자 열심히 생쇼를 떨어도 돌아보지 않는 무정한 깡패시키였으니..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터덜터덜 녀석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악 검지손가락으로 녀석의 등을 쿠욱 찌르려는 찰나 냉기가 줄줄 풍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번엔 확실히 끝내 놓을테니까 넌 먼저 들어가 있어. " " ....... " " 참.... 목욕해놓고 있어라. " =ㅁ=;;;;;;;;;;;;;;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진 두 사람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굳어버린 나. 드... 드디어 나왔다.... 깡패시키 최고의 궁극기....그 이름도 민망스런.. 밤. 의. 형. 벌----!!;;;;;;;;;; 하아... 거기 침흘리는 당신! 당신! 당신!!!!!!!! 다... 다음 다음 편은 읽지 말아주세요--!! ㅠ0ㅠ 내 이름은 열매 <79> " 이립이한테 얘기는 들었다. 사실이냐? " " ..........네. " " 정말 뒤를 잇지 않겠다는 게냐? " " 죄송합니다. " 짧게 대답한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 녀석.. 집에는 제대로 들어갔을까..?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곧바로 달려왔지만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건 넓디 넓 은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계시던 할머니 본인이셨다. 순간 맥이 탁 풀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대로 발길을 돌리기는 무리인지라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려 불편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어릴 때부터 손주들 중 나를 가장 아껴주셨던 분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라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목숨이 위태롭다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에서는 서늘한 후회가 밀려든다. 미열로 발그레하게 변한 녀석의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날 괴롭힌다. 역시..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바래다주고 오는 편이 나았을까.. " 이율아? " " ..........네. " 노기를 띈 목소리가 장엄하게 울렸다. 이렇게 노여워하시는 모습은 처음이다. " 나는 허락할 수 없다. " " ....... " " 네가 우리 가문을 잇는 건 의심해 볼 여지없이 명확한 진리다. " " 할머니... " " 네가 어떤 일로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든 나는 절대 인정 못한다. " " ....... " 아무리 내게 관대하신 분이라도 역시 이것만은 무리인 건가. 나는 자조 섞인 미소를 띄우며 조금 자세를 고쳐 앉았다. " 여지껏 부족함 없이 자란 너다. 모든 걸 포기한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겠니? " " 아니요, 제가 포기한 건 모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린 거죠. " " 그게 뭐냐? " " ....... " " 이 정도의 사회적 위치와 재력을 버릴 만큼 중요한 것이란 게? " "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 ....... " " ....... " 침묵이 흘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사각의 공간 안에서 나는 그저 벗어나기만을 원하고 있었다. 결국 긴 침묵을 깬 건 조금 가라앉은 내 목소리였다. "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 " 1년. " " ......! " " 1년 동안 네 힘으로 생활해 보거라. " " ....... " " 도움은 일체 주지 않겠다. 만약 자력으로 1년을 살아낸다면 그 때는 나도 생각을 다시 해보마. " 짧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나왔다. 살아낸다라.......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응석을 부리며 살아왔던 이미지로 비춰진 걸까? 여지껏 부족함 없이 살아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재력이 없으면 곧 죽어버릴 정도의 시시한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녀석만 옆에 있다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살아갈 것이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가련한 왕자님 역할은 사양이야- 부유의 상징 같은 거대한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지킬 것은 하나면 돼. [ 여보세요. ] " ! " 난데없는 목소리에 잠시 말을 잃고 있자 전화가 뚝 끊겼다. 분명 녀석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는데 혹시 내가 실수라도 한 건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번호를 입력했다. 뚜르르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 당신..... 누구야? " [ 그 쪽은? ] " 핸드폰 주인 바꿔. " [ 아아... 그거라면 곤란한데요. ] 잠시 뜸을 들이던 상대는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 '열매'라면 지금 옆에서 자고 있거든요. 밤새도록...... 아마 많이 피곤할 거예요. ] " !! " [ 그럼. ]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몇 번을 다시 걸었지만 돌아오는 거라곤 기계적인 목소리뿐이었다. -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소리샘으로 연결........ - 순식간에 일어난 분노. 녀석의 서랍과 졸업앨범을 뒤져 대충 짐작이 갈만한 연락처를 찾았다. 고등학교 동창 녀석들은 내가 전화를 걸었다는 데 놀라는 듯한 눈치였지만 그런 건 상관없 었다. 중요한 건 정보.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 밤새도록 결례 따위는 무시하고 수 십 통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연락이 올까 꼿꼿이 그 앞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새하얗게 새어버린 밤. 말 그대로 뜬눈으로 지새운 밤을 뒤로 한 채 몸을 일으켜 옷을 꿰어 입었다. 어디로든 누구에게든, 적어도 지금처럼 멍하니 대답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하.. 내가 지킬 것은 하나면 된다고...? 그것조차 지키지 못한 난? 나는...? 현관문을 대충 잠그고 다급해진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 눈을 고정시키며. 그런데 그 때, 막 스쳐 지나려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의 상상보다 훨씬 엉망이 된 얼굴과 마주쳤다. 그대로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은 녀석. 어쩌면 살인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먹에 힘을 실었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 갑자기 비실대던 몸을 일으키더니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또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분명 날 가드 하려던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칠 즈음 갑자기 웃음이 흘러나왔다. 당황한 얼굴로 녀석에게 달려가고 있지만 그 아래로는 옅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 대담성에, 희극적인 상황에. 그리고... 녀석이 날 위해 몸을 던졌다는 사실에. 아아.. 이러니까 결국 난 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다. 네가 이런 내 속을 이해할 날이 오기는 할까...? 완전히 떡이 된 녀석을 안아들려는데 녀석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 아................파....... " " ! " " 아프다고 이 자식들아---------------!!!!!!!! " 대성통곡을 하는 녀석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러나 그 상상이 현실화 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 선생님, 여기 이 문제 잘 모르겠어요. " " 응. " 짧게 대답한 뒤 체크된 부분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그 사이에도 내 얼굴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져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 보기에 나온 대로 일단 r에 3을 대입해서.. " " 선생님. " " ......? " 그제서야 책에서 시선을 떼어 마주하자 녀석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서윤이라고 했었나.. " 이건 좀 시시한 질문인데.... 애인 있으세요? " " 수업 내용 외의 질문은 안 받는다고 미리 분명히 말했을 텐데? " 조금 차갑게 대답하자 녀석이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두르며 콧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에이~ 그냥 좀 말해주면 어때서요~ " " ....... " " 소개시켜준 영준 오빠가 그랬어요. 선생님 교내에서 인기 톱이라고. " 쓸 데 없는 소릴 지껄이는군. 그 놈도. 그나마 제일 말을 트고 지내는 놈이라 아르바이트에 대한 얘기를 조금 꺼냈더니 괜찮은 과 외 자리가 있다며 적극적으로 일을 성사시켰다. 그게 결국 이것. 나는 대충 팔을 빼낸 뒤 문제집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할 마음이 없으면 난 간다. " " 선생님! " 애초에 나와는 맞을 리가 없는 자리였다. 차라리 조금 귀찮더라도 모델 제의를 수락하는 게 나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 평소의 멍한 모습도 귀엽지만 앙탈 부리는 것도 귀여운데? " " 뭐.. 뭐가 어째-??!! " 내가 들은 건 거기부터지만 대강의 상황은 충분히 파악이 끝났다. 한 쪽 어깨에 가방을 두른 채로 놈의 등 가운데 힘껏 발을 차 넣었다. 비틀거리며 보기 흉하게 바닥에 엎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살짝 시선을 옮기니 여전히 어벙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누가 문 열어주라고 했어? " 내가 늦었다면. 내가 2차까지 가서 어울려 놀았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불쾌한 기분은 급속히 팽창됐다.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녀석은 집으로 들어가더니 여러 메뉴로 조합된 쟁반을 들고 나왔다. 흐응.. 역시 그렇게 된 거군. 등뒤에서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은 녀석을 무시하며 옆집 놈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 이번엔 확실히 끝내놓을 테니까 넌 먼저 들어가 있어. " " ....... " " 참.. 목욕해놓고 있어라. " 그동안 쌓였던 걸 확실히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도 듣지 않고 걸어나왔다. 내 손에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함께 나온 놈을 잠시 노려보다가 적당한 장소에서 손을 놓았다. 심하게 쿨럭대는 놈의 시뻘개진 얼굴을 보는 순간 잔인한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내가 늦었다면. 그대로 내려친 발이 놈의 복부에 꽂혔다. " 한 번으로는 정신을 못 차리나 보지? " " 쿨럭--! " " 아니면 혹시 맞는 걸 즐기는 변태냐? " 앞뒤 생각 없이 기분 나는 대로 차 넣었다. 빈틈은 찾을 것도 없었다. 몸 전체가 빈틈이었으니까. 제대로 들어간 첫 발이 그대로 명치에 적중한 탓에 놈은 서있을 힘조차 없는지 연신 쿨럭 대기만 할 뿐이었다. 시시한 놈. " 겨우 그 정도로 내 걸 넘본 거냐? " " 쿨럭,, 쿨럭---!! " " 내 걸 빼앗을 생각을 했다면 당연히 죽을 각오도 하고 있었겠지? " 가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처참한 몰골로 추락한 놈을 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위 열매. 넌 대체 어디까지 날 휘두를 셈이냐. - 나도 너와 같이 있고 싶어 - 순간, 언젠가의 녀석의 말이 떠올라 힘껏 쳐들었던 발을 그대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 그래. 그럼 이제 죽을 때까지 안 놔준다 - 이건 언젠가 내가 했던 말. 거의 정신을 잃은 놈을 발로 뒤적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학교 시절 신나게 싸움질을 하고 다니던 이후 잊고 있던 기분을 만끽하며.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이 상쾌한 기분을. 그래도 조금쯤은 반격해 올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실망이다. 시시해. " 다시 올 생각이면 관 하나 정도는 짜두고 와라. " " ..............으......... " 거슬리는 신음을 뒤로한 채 서늘한 바람의 배웅을 받으며 맨션으로 향했다. 그럼... 이제부터 형벌을 내리러 가볼까.... 평소보다 배는 환한 달이 묵묵히 밤하늘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열매 <80> 욕조에 몸을 푸욱 담근 채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먹을 것에 혹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도 난 그저 이웃에 대한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 였던 거라고 꿍얼꿍얼거리면서. 그깟 파스타, 순대볶음, 마카로니 샐러드, 후라이드 치킨 따위에 눈이 뒤집혔던 건 단 3초였 을 뿐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ㅅ-;) 뭐... 그래도 조금은 아쉽기도. 어차피 결국은 귀찮은 사건에 휘말린 데다 그 이름도 음란한 '밤. 의. 형. 벌'에 처해지게 됐 으니.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던데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면 다 먹어치울걸 하는 아쉬움이 슬슬슬 고개를 든다. 욕조에 붕붕 띄운 장미향이 나는 오일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눈앞은 깜깜 하다. 분노의 오오라를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는 밤의 마왕(!)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한 숨만 푹푹 나오는 거다. 그냥... 씻지 말고 버틸까? 목욕 안 한 지 열흘이 넘었다고 하면 그 깔끔쟁이시키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온 몸에 때로 덕지덕지 도배를 하면 확실히 가능성이 있을 지도. 뭐.. 그때야말로 그동안 구축해놓은 큐티큐티 이미지는 완전히 우주 저 멀리 날아가 버리겠지만. ㅡㅡ; 가만히 욕조에 몸을 누인 채 눈을 감고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 머나먼 우주의 보랏빛 별에서어~ 외계소년 위제트가 나타났네~~~ " 에헤라디야~ 워워~ 위젯~ ㅡㅅㅡ " 즐겁냐? " " --!! " 눈을 감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럭셔리의 정점에 이른 목소리가 나직히 욕실에 울려 퍼졌다. 일부러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는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치덕치덕 바르던 거품을 물에 띄워보내며 스윽 고개를 내밀었다. 예상대로 핸섬의 정점을 달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갈 때와 조금도 변함 없는 단정한 옷차림을 한 채 가만히 문에 기대서서 날 바라보고 있다. " 구석구석 잘 씻었지? " " 너... 언제 왔어?; " " 지금. " 짧게 대답한 녀석은 커다란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으헉--; 주먹 중간 중간에 혈흔이..!!; 당황한 나와는 달리 너무나도 유연한 깡패시키의 얼굴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바.. 반항했다가는 나도 저 주먹에 떡이 되고 말겠지. ㅡㅡ;; " 다 씻었으면 비켜. " " 아.. 아직.. " 새벽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 그럼 같이 할까? " " 소인 다 끝났사옵니다아아----!!=ㅁ= "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일어서자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아직 몸에 남아있는 거품을 샤워기로 쓸어내며 흘끗 쳐다보자 역시나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늘 맞닿는 몸인데도 이렇게 보면 새삼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저 품에 안겨보려고 버둥대는 여자들도 열 트럭은 거뜬히 넘을텐데 어떤 의미로는 나도 참 대단한 것 같기도. 물론 그 덕에 저 에로에로대마왕을 혼자서 상대하느라 파김치 꼴로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지만. 속지들 마셔. 겉으로는 쿨한 척 하지만 저 시키....... 은근히 색마라고. ㅡㅡ; 길게 뻗은 다리가 욕조 한 가운데를 파고들었다. 얇게 퍼지는 물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재빨리 수건을 몸에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 깡패시키가 욕실을 사용하는 시간은 평균 15분. 그 동안이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지만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가 잡히는 날엔.. 아아.. 수명 5년이 단축될 상상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 ==; 물기를 열심히 닦은 뒤에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이틀 전에 동대문에서 12000원 주고 산 캐 릭터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 깡패시키가 페어 룩으로 맞춘 잠옷은 현재 세탁기에 봉인 중이기 때문에. 킁킁 냄새를 맡으니 온 몸에서 장미향이 풀풀 풍기고 있다. 평소 쓰던 오렌지 향 오일이 다 떨어져서 대충 아무거나 뜯어서 썼는데 아무래도 좀.. ㅡㅡ; tv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입에 퍼담고 있자 잠시 후 등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샤워를 끝낸 녀석이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며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천히 tv를 끄고 아이스크림 뚜껑을 닫자 녀석이 살짝 미간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 뭐냐... 그 옷? " " 아...? 동준이랑 동대문 갔다가.. " " 벗어. " 컥-! " 지금부터 뭘 할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 " ......;;; " " 벗어. 아니면 역시 내가 벗겨주는 쪽이..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벗어서 구석에 휙 던져버렸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걸 몰랐던 것도 아니니까-! 좋다! 와라-!! >ㅁ< 그러나 무심히 내 곁을 스쳐 침대에 걸터앉은 녀석의 입에선.. " 유혹해봐. " 라는 천인공노할 말이 나왔으니..! 잠시 벙쪄서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꿈뻑이며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 유혹하라고. 네가 나를. " 여.. 역시 그 유혹이었냐? =ㅁ=;; 난 주옥, 유도, 부업 등등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앗을텐데라는 생각이. 잠시 망설이던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주섬주섬 앞으로 나아갔다. 까짓 유혹쯤이야-! 평소 열무한테 전해들은 지식도 있고! 나도 명색이 남잔데 언제까지 뺄 수만도 없지 않겠어?! 그렇게 원한다면 뻑 가도록 해주지. 그...........그.............그깟 유혹이란 거!! >ㅁ< 침대머리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날 응시하고 있는 깡패시키. 아직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살짝 뺨 언저리에 붙어 은근한 색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시키.. 유혹은 지가 하고 있구만. ㅡㅡ; 가만히 기억을 떠올렸다. 열무에게서 배운 테크닉 노하우 하나. - 촉촉한 눈빛으로 상대의 이름을 부른다. 조금 열에 띈 시선을 담아 - 음.. 그게 말이 쉽지. 촉촉한 눈빛이란 게 어떻게 하면 만들어지는 건데? 눈에 안약 넣으면 되나? ㅡㅡ; 어쨌든 시도는 해보자. 조금 더 가까이로 다가간 나는 후우후우 쉼 호흡을 했다. ' 이율아아~ '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좀 느끼하게 부르면 되는 거지? 속으로 몇 번의 예행연습을 끝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어.. 어이... 이율. " 그러나 현실은 이것. ㅡㅡ; 게다가 검지손가락으로 녀석의 어깨를 꾸욱꾸욱 찌르는 모션까지. 뭔가 조금 이상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각색한 위열매식 유혹이다. 상대의 어깨를 검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터치(!)하며 수줍은 듯 이름을 부르는. *-_-* 흘끗 쳐다보니 녀석이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고 있다. 이 시키. 이 내가(!) 모처럼 친히 유혹이란 걸 행사해 주셨는데 뭐냐 그 시큰둥한 반응은! 결국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길게 한숨까지 내쉰다. " 됐어. 기대한 내가 바보지. " 이... 이게..!! ==+ 순간 발끈한 나는 부웅하고 온몸을 날려 녀석의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주둥이 미사일 발사. 물론 목표지점은 녀석의 보기 좋은 모양새를 갖춘 입술. 무시당했다는 설움을 테크닉으로 승화시켜 열심히 요리조리 움직여댔다. 녀석은 별 반응 없이 묵묵히 받아내기만 할 뿐. 그 순간 또다시 떠오른 동생의 조언. - 귀는 예민한 성감대 중의 하나야. 핥거나 살짝 깨물면 흥분을 유도할 수 있지 - 그래. 그러고 보니 깡패시키가 자주 내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다음 목표지점을 향해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 윽-! " 덥썩 물어버렸다. *-_-* " 타이슨이냐? " " 응..? " 조금(?) 세게 물었는지 녀석의 귓불 위로 빨간 치아 자국이 형성됐다. 갑자기 덥쳐오는 민망스러움.; 재빨리 미안미안-을 외친 뒤 터덜터덜 구석으로 향했다. 시무룩.... 어디 내가 해봤어야 알지! 누군 태어날 때부터 에로에로 페로몬을 뿜으면서 태어나나? 내가 테크닉이 부족한 게 아니라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구! 이 내가! 제목에 이름까지 떠억--!!하고 올려놓은 이 내가 말야! 설마 그런 것도 몰랐겠어?? 엉?? .............................그래도 역시 창피함은 가시지 않아 무릎을 모으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됐으니까 이리 와. " " ....... " 이 시키.. 놀리려고 그러지? == 웃음 참고 있는 거 훤히 다 보여 임마! 나는 애써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위열무의 테크닉 어드바이스 그 세 번 째. - 몸을 겹치는 순간에는 약간의 콧소리를 섞어낼 것. 아픈 듯 흥분한 듯 중간 지점에서 미묘한 신음소리를 만드는 게 포인트 - 그런데.. 그 시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알고있는 걸까. 내 동생이지만 심히 무서운 놈이다. ==;; 가만히 웅크리고 있자 녀석이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 됐어. 신경 쓰지마. " " ....... " " 어차피 기대도 안 했고. " 이... 이게-!! =ㅁ=+ " 이 쪽이 너다워서 좋아. " " ....... " 그렇게 말해주니 미묘하게 기쁜 것도 같지만.. 대체 뭐냐? '이 쪽'이란 것과 '너답다'는 건? ㅡㅡ; 내 손을 이끌며 녀석이 침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묘하게 에로틱해 보이는 킹사이즈의 침대. 묘하게 은은해 보이는 조명. 묘하게 상냥한 녀석의 행동. 이거.. 엄청 무서운 예감이 불쑥불쑥 드는데. ㅡㅡ; 날 눕히고 그 위로 깡패시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운 채로 시선을 마주하니 방금 전까지 콩닥거리던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가볍게 겹치는 입술. 뺨과 목을 거쳐 가슴께로 내려앉는 숨결. 나는 그렇게.. 조금씩 가빠오는 숨결을 눌러 죽이며 밤의 형벌에 몸을 맡겼다. 오늘밤은 꽤..... 길 듯 하다. 내 이름은 열매 <81> 녀석과의 공간에 옅은 장미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조금 굳어있었지만 동시에 눈에 확연히 드러날 만큼 홍조를 띄고 있었다. 사실 유혹을 해보라고 말하긴 했지만 별로 기대를 했던 건 아니었다. 위열매는 위열매고 어느 상황에서든 결국은 위열매일 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녀석이 내 귀를 깨물었을 때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아픔은 둘 째 치고 녀석이 시도했다는 자체에. 또 다른 의미로 나는 더더욱 녀석을 안고 싶어졌으니 결론적으로 녀석의 ‘유혹’은 성공한 셈 이다. 구석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입을 삐죽 내밀고 있던 모습도 완벽하게 날 자극했으니까. 천천히 녀석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자 얕은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녀석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장미향이 묘하게 코를 자극하며 자석처럼 날 끌어당겼다. “ 저... 저기... 몇 번.. 할거야? ” 녀석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발그스름하게 변한 뺨을 하고서. 나는 속으로 웃으며 가만히 입술을 가져가 녀석의 입술을 덮었다.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에 열심히 입에 퍼 나르던 바닐라 아이스크림 탓일까.. 혀끝으로 향긋한 맛이 느껴져 좀 더 격하게 키스를 했다. 단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녀석의 입을 통해서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일부러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이자 결국 칭얼거리는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 웅~~ 아후- ” 분위기고 뭐고 일단 숨부터 열심히 몰아쉬는 녀석. 방금 전보다 좀 더 붉은 기를 띄운 뺨이 귀엽게 느껴져 양손으로 잡아당기자 곧장 아파아파-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말없이 웃으며 녀석의 귀로 손의 위치를 이동시켰다. 어느새 물기어린 눈으로 잠시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질러댔다. 아아.. 넌 어째서 그렇게 귀여운 거냐. 결국 이런 식으로 날 KO시키고 스스로의 무덤을 판다는 걸 대체 언제쯤에야 깨닫게 될까? 열심히 뺨을 문질러대는 녀석의 손을 가볍게 제압해 위로 올린 뒤 곧바로 턱선을 따라 입술 을 움직였다. 순간 움찔하던 녀석이 조금씩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은은한 조명에 섞여 농염한 향기가 주위로 서서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도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장미향기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벽한 조화를 이뤄내 고 있다. 가슴 한 가운데의 돌기를 살짝 혀로 핥아 올리자 내 왼손에 잡힌 녀석의 손목이 크게 움찔 했다.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지만 그것도 조금씩이나마 미묘하게 바뀌어가고 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아니, 확실히 다른 또 하나의 얼굴로. 아무래도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비디오라도 찍어서 보여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져 입가를 누그러뜨리자 녀석이 천천히 눈을 떠 날 응시했다. 엷은 물기를 머금은 새까만 눈동자. 속눈썹이 길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자아낸다. 나는 천천히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녀석의 손목에 자유를 되돌려주었다. “ 조금 지독하지..? ” “ .....? ” “ 오렌지 향이... 다 떨어져서.. ”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조금 강하게 마른 어깨를 감싸안으며 짧게 대답했다. “ 너랑 잘 어울려. ”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쓸데없는 꼬리는 빼고 말하자 녀석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응. 어깨와 목 언저리에 키스마크를 새기며 왜...?라고 묻자 녀석이 힘겹게 대답했다. “ 그... 읏..! 나 고 3때 담임......앗.. 변태였.... 그.. 그만 좀..!;; ” “ 그런데? ” “ 변태담... 임이 맨날.....아앗....아.. ”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셔츠를 입으면 간신히 가려질 위치에 최종으로 마크를 새긴 뒤 입술을 뗐다. 이젠 확실히 새빨갛게 변한 얼굴 위로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다. 속으로 웃으며 다음 말을 재촉하자 녀석이 흐응~하고 숨을 내쉰 뒤 투덜댔다. “ 아파.. ” “ 그래서 형벌이라고 했잖아. ” “ 그래도 아프단 말야. ㅡ.ㅜ ” “ 아아.... 그래서? ” “ ......? ” “ 그 변태 담임 말이야. ” “ 아아.. ” 이것만 확실히 듣고 본 코스로 진입해야겠다. 밤은 짧으니까.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녀석은 가만히 손으로 목 언저리를 더듬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니까... 그 변태 담임이 장미향수를 뿌리고 다녔거든. 가끔 친한 척 껴안아 댈 때마다 숨이 콱콱 막혔다구. 그래서 장미향수가 싫어졌어. “ “ ....... ” 녀석의 말에 불쾌한 상상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자 녀석이 머뭇머뭇 내 뺨 위로 손을 가져 왔다. “ 아니.. 뭐.. 그래도 네가 괜찮다고 하면 가끔은 쓸 수도 있고.. ㅡ3ㅡ ” 잘 어울린다고 했던 내가 무안할까 신경을 써주는 모양이다. 그 점이 역시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셔 그대로 있는 힘껏 녀석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힘에 눌려 버둥대기 시작하는 녀석. 정성을 들여 긴 전희를 끝낸 뒤 천천히 녀석의 다리를 벌렸다. “ .....! ” 하루 이틀도 아닌 주제에 여전히 생소한 듯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내 손목을 붙잡는다. 그 순간마다 길들여가는 기쁨이 있지만 여전히 정복되지 않는 산의 끝머리처럼 가련히 움 츠리고 있는 녀석을 보면 어느새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스윽 풀려버리곤 한다. “ 그.. 그냥 내가 손으로 해주면 안.. ” “ 죽을래? ” 짧게 끊어 대답하자 녀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내 위를 차지하겠다던 배짱 두둑한 녀석이지만 지금으로선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에 힘을 소진해버릴 만큼 바보는 아니라는 걸까. 속으로 미소를 띄우며 손가락을 가져갔다. 닿는 순간 히익-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삽입했다. 미리 젤로 흥건히 축여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별 무리는 없었다. 손가락을 두 개로 늘리자 신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완전히 굳은 사지가 움찔하며 반응을 나타낼 뿐 베개 가운데 푸욱 파묻힌 탓에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 아프면 말 해. ” 두 손가락을 느릿느릿 움직이며 말하자 녀석이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 아프면 그만 해줄 거야? ” “ 아니. ” “ ㅡㅡ ” 반짝반짝이던 눈동자가 금새 허망의 빛을 담고 꺼져갔다. 시무룩해진 표정 너머로 또 무슨 생각을 하며 투덜대고 있을지. 잠시 무방비해진 틈을 타 약지까지 슬쩍 밀어넣자 녀석이 웃-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질퍽질퍽한 젤로 인한 음란한 마찰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덕분에 녀석의 얼굴이 완벽하게 익은 토마토의 빛깔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그럼에도 내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빨라질 뿐. “ 아... 앗.. ” “ ....... ” “ 이.. 이제 됐으니까..!;; ”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조금 속도를 늦췄다. 평소라면 절대 들을 수 없는 솔직한 말들이 이 시기부터 조금씩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는 걸 경험상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엔 울먹이며 보챈다는 것도. 상상만으로 완전히 모양새를 갖춘 그것을 적당히 자리잡아 밀어넣기 시작했다. “ 아야..! ” 삽입의 순간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다리를 벌린 채 양손으로 시트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는 녀석을 내려다볼 때마 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만 순간만 넘기면 된다는 사실을 채찍 삼아 진행시키는 거다. “ 너.. 평소보다... 커... 아얏-! ” “ 형벌이니까. ” 그런 게 대답이 될 리 만무하지만 어차피 어떤 말이라도 지금의 녀석의 귀에는 들어가지 못 할 테니 상관없겠지. 완전히 틀을 맞춘 뒤 반쯤 삽입했을 때 조금 쉰 듯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부들거리며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 녀석의 입술에 키스했다. “ 천천히? 아니면 단번에? " “ 그.. 그딴 거 묻지맛-!!!! >ㅁ<;;;; ” 녀석의 대답에 미소를 띄우며 서서히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단숨에 끝까지 삽입했다. “ 아아아아악------ ” 호들갑스런 비명이 짧게 침실 안으로 뒤흔들었다. 언제나 같은 패턴이지만 질리는 일이 없으니 그것도 신기하다면 신기하다. 녀석을 만나기 전의 나는 한 여자와 세 번 이상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바람둥이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어린 나이었음에도 내가 흥미를 느꼈던 건 싸움과 섹스. 단 두 가지뿐이었다. “ 아퍼... ” “ 조금 기다렸다가 움직일 테니까 조금 쉬어. ” “ 야! 안에 네가 들어있는데 쉬기는 어떻게-!! ” 식식거리며 벌떡 일어나려던 녀석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뒤로 쓰러졌다. 속으로 혀를 차며 상체를 숙이자 비명소리는 더욱 더 커졌다. “ 우.. 움직이지 마! 아프단 말야! 아후아후----ㅠ0ㅜ ” “ 새벽 3시까지 할 건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려고? ” 내 말에 황급히 벽시계로 시선을 옮긴 녀석이 새하얗게 질린 채 턱을 덜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시계는 정확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아... 읏.....! ” 두 번의 사정을 끝낸 뒤에야 녀석의 신음 소리에 미묘한 색이 섞여들었다. 그저 아프기만 한 건 아닌 듯 조금 들뜬 목소리가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새어나왔다. 중간중간 울긋불긋하게 변한 목과 어깨, 가슴과 허벅지가 흔들리는 시야 안에 들어온다. 다리를 넓게 벌린 채 흔들리는 녀석의 몸을 손으로 지탱하며 서서히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 으... 윽.. ” 드디어인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마주했다. 예상대로 눈가가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다. 널 울리는 건 누구라도 용서 안 해. 그 상대가 내가 아니라면. 하지만 이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널 울린다면 나 역시 용서하지 못하겠지. “ 아.. ” 오래 지속된 비명에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녀석과 연결된 부분을 살짝 밀어붙이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안아도 안아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 날 향하는 열에 띈 시선이 더욱 더 날 부추긴다. 내가 멈추지 못하는 이유의 절반은 아마도 녀석의 탓일 거다. “ 그만... 나.. 내일 오후에 수업.. ” 물기 어린 시선이 애절하게 내게 닿아온다. 홍조 띈 뺨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잔뜩 쉰 목소리와 살짝 벌어진 입술. 오늘은 그만 끝내줄까하던 내 이성을 한 방에 저 멀리로 날려버릴 만큼 유혹적이었다. 아까의 뻣뻣하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침대에서만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태어나는 녀석. 혹시라도 다른 놈이 알까 두려울 정도다. 평소답지 않게 수업 핑계를 대며 칭얼대는 녀석 사이로 힘을 넣자 곧바로 얕은 비명소리 가 터져나왔다. 어느새 내 등을 꼬옥 끌어안고 있는 손. 팔팔하게 살아난 것을 깊이 삽입하며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 멈추게 하는 건 녀석의 목소리지만 날 부추기는 것 역시 녀석의 목소리다. 녀석의 고3 변태 담임이 자주 사용했다는 장미향 역시 지금으로선 충실히 기폭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점차 잦아드는 움직임 속에 평소 가슴 깊숙이 숨겨왔던 진심이 소리되어 나왔다. “ 사랑해. ”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얼굴을 한 채 녀석이 정면으로 날 올려다봤다. “ 사랑한다고. 위 열매. ” 잠시 입을 뻐끔거리며 망설이던 녀석은 머뭇머뭇 양손을 내 등에 두르며 가만히 속삭였다. - 아... 아마 나도./// 서로에게 다른 길이로 다가왔을 하룻밤이 서서히 종막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두 시간.. 아무래도 연장요금을 지불해야할 것 같다. *서로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율- 나 없는 데서 맞고 다니지 말 것. 열매- 밤에 자제 좀 해 줄 것. (이율, 옆에서 웃음) 내 이름은 열매 <82> “ 할 수 있겄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은디.. ” “ 할 수 있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 쩌렁쩌렁 큰 소리로 대답하자 주인 아저씨가 잠시 고민을 하시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셨다. “ 그럼 이거 저 끝까지 한 번 들고 가서 옮겨봐. ” “ 옙-! ” 대답 좋고~ >ㅁ< 그.. 그런데 잠깐, 이 무식하게 큰 상자는 뭐시다냐.;; “ 감자 두 박스 정도는 옮길 수 있겄지? ” “ 그.. 그럼요. 하하....하....하....=0=;; ” 하... 한 박스라면 어떻게 가능할 것도 같은데..;;;; 잠시 자리에 서서 감자 그림이 그려진 상자 두 개를 내려다보던 나는 헛헛-하고 기를 모은 뒤 조심스레 양손으로 감싸들었다. 깡패시키와 만리장성을 쌓은 게 불과 이틀 전이라 허리 상태가 좋지 않긴 하지만 한창 나이 에 겨우(?) 감자 두 박스 옮기는 것도 못한대서야 사나이 체면이 안 서지. 흘끗 목적지를 살피니 족히 100m는 되 보인다. 이 아저씨.. 혹시 내 첫인상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ㅡㅡ; 어제 저녁 모처럼 만난 경문이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아르바이트 건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호프집 서빙, 가정교사, 놀이동산 알바 등등 몇몇의 후보가 있었지만 내 적성에 맞는 게 딱 히 없어서 고민을 했더니 경문이 녀석이 농수산물 시장 아르바이트는 어떠냐고 물어왔다. 단순 노동직이라 복잡하지도 않고 일당도 짭짤하다면서. 과연 내가 원하던 것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다지 힘이 좋다고 할 수는 없는 탓에 망설이자 녀석은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날 잘 아는 가게에 소개시켜 주었다. 일당 55000원.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주인 아저씨도 서글서글하니 인상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아저씨에게 흰 봉투를 받아들고 ‘열심히 해~’라는 짧은 말을 건넨 뒤 사라져 가는 경문이 놈 이 어쩐지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ㅡㅡ; 어쨌든 그리하여 농수산물 아르바이트 조약은 체결된 것이었으니. 새벽 4시에 졸린 눈을 부비며 조용히 잠들어있는 깡패시키 몰래 집을 나왔다. 집에서 나오기 전 깡패시키의 잠든 그림 같은 얼굴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걱정마라. 깡패시키. 넌 내가 먹여 살린다. +_+ ’ 생각해보면 언제나 녀석이 등뒤에서 날 지탱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찼을텐데. 맹세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해도 결론적으로 녀석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보다 어린 녀석에게. (내 생일이 5개월 더 빠르다. -_-v) 그래서 결심했다. 좀 더 대등한 관계로 발전시키겠다고. 녀석이 언젠가 내 어깨에 기대고 내가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해 줄 날을 그리며. 녀석이 ‘이 문제 모르겠어.’라고 하면 ‘으응. 그건 말이지~’라고 말 할 수 있을 날을. 녀석이 ‘너 나 좋아해?’라고 물으면 녀석의 양볼을 쭈욱 늘리며 ‘훗.’하고 웃어줄 날을 꿈꾸며. 아마...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 뭐혀? 언넝 옮기라니께. ” “ 아.... 예~예! ” 갑작스런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재빨리 시원스런 대답을 한 뒤 손목에 힘을 넣었다. 이깟 감자 두 상자쯤이야 미래의 내 꿈을 위해서라면-! “ 으......읏.. ” 새... 생각보다 무거운걸. ==;; 시뻘개진 얼굴로 언젠가 tv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소리쳤다. “ 따이따이따이---!! >ㅁ<;;; ” 순간, 거짓말처럼 상자가 들렸다. 마치 천사의 날개에서 빠진 깃털처럼 둥실하고. 아아... 역시 따이따이따이의 위력이란 대단한 것이구... “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 “ ! ” 감자 상자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잔뜩 찡그린 채 날 내려다보고 있는 음산한 얼굴. 순간 숨이 턱 막힌 나는 잔뜩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어떻게.. ” “ 오경문한테 연락 받았어. ” 그 망할 자식 왜 쓸데없는 짓을! ==+ “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 “ .......;; ” “ 혹시... 집에 누가 찾아왔었어? ” “ .....!? ” 순간적으로 음산한 오오라가 주위를 감쌌다.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는 내 손목을 붙잡고서 녀석이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 하기 시작했다. 거의 똥개 끌려가듯 끌려가며 벙쪄 있는 아저씨를 향해 소리쳤다. “ 아.. 아저씨! 죄송해요!;;;;; ” 아아.. 이 빌어먹을 오경문 새끼. 너하고 상담한 내가 아메바였다. 내가 다시 너한테 상담하면 이 소설 제목에서 내 이름 지운다! =0=+ 거의 강제로 차에 태워진 나는 웅크린 자세로 흘끔 녀석을 쳐다봤다. 녀석이 차에 시동도 걸지 않은 채 앞 유리창을 노려보고만 있다. 호.. 혹시 지금 말 걸었다가 살해당하는 거 아닐까? =_=;; 콩닥콩닥 눈치를 보고 있는데 녀석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 누가 집에 찾아와서 무슨 얘기했어? ” “ .......? ” “ 혹시 나에 대해서..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전에 말했잖아. 돈 같은 거 없어도 된다고. ” “ ....... ” “ 모처럼 기운 센 남자가 둘씩이나 있잖아? 둘이서 열심히 일하면 되지. ” “ .......너.. ” “ 뭐라도 할거야. 나도.. ” 으으.. 이건 말하기 좀 부끄러운데.. 그래도 모처럼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니 힘내서 따이따이따이 한 번 외치고-!! >ㅁ< “ 나.. 나도 이제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 에이.. 앞에 말 더듬는 것만 없었으면 99점짜리 명대사였는데. >_< 엄청 부끄러운 말을 한 뒤 시뻘개진 얼굴을 푸욱 숙였다. 긴 침묵이 좁은 공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시키! 이 내가 모처럼 친히 뽀댜구 나는 대사를 해주셨는데!! -3- 슬슬 침묵이 지겨워 내가 먼저 입을 열려는 찰나, 한 템포 빠르게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역시 안되는 건 안 돼. ” “ ....... ” 그렇게 말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올렸다. 그 단정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난 살짝 미간을 모았다. 역시 싫어. 이렇게 받기만 하는 관계는. “ 내가... 못 미더워..? ” “ ....... ” “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어차피 난 바보니까. ” “ ....... ” 야--!! 넌 부정도 안 하냐-!! =0=+ 이 예의의 미덕도 모르는 시키 같으니라구-!!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투덜투덜대고 있자니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고개를 돌리자 입가에 미소를 띄운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알긴 아는 거냐? ” 어우.. 이 싸가지 없는 시키. ㅡ,.ㅡ “ 어쨌든 들은 것 같으니까 말하겠는데 아르바이트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야. ” “ ....... ” 잠시 말을 멈춘 녀석은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푸시시 헝클어트리며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이번엔 내 예상이 적중한 모양이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녀석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 미리 말해두자면 앞으로 1년간은 상황이 별로 안 좋을 거야. ” 역시 쫓겨났구나. 불쌍한 깡패시키. 괜히 내가 걱정할까봐 1년이라고 선의의 거짓말까지 하고. 괜찮아. 임마. 남자 둘이 버는데 설마 입에 풀칠이야 못하겠어? 그래도 이 녀석은 나와 달리 뼛속까지 부르조아였던 녀석인데 서민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역시 조금이라도 면역이 있는 내가 앞장 서야.. 금방이라도 흘러 넘칠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뚫어질 듯 창 밖을 응시했다. 그럼 역시 집은 비워줘야겠지. 차도.. 처분해야 하려나..? 일단 복덕방에 가서 방 두 칸에 화장실 하나 딸린 전세를.. “ 집은 그대로 사용할 거니까 쓸 데 없는 걱정하고 있는 거면 그만 둬. ” 헉..! 이제 독심술까지 하십니까! =0=;; 녀석은 내 생각과 달리 덤덤한 표정이다. 마치 나 혼자 오버한 것 같아 민망할 정도로. ㅡㅡ; 열심히 야채를 나르는 사람들이 차창 밖을 슥슥 스쳐지나갔다. 활기찬 느낌이 들어 구경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역시 직접 하는 건 무리였을 지도. 그래도 역시 주인 아저씨에겐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소개시켜준 경문이놈............에겐 미안할 리가 없지 않은가!! 돈 봉투까지 받아 챙겨 놓고는 뒤에서 깡패시키한테 꼰질러!? 그래도 오래 사귄 놈이라고 고민을 털어놨더니 완전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다. 덕분에 지금 난 추운 시베리아 한복판의 재현을 고스란히 목격하고있지 않은가. 슬슬슬 눈치를 보다가 괜시리 어색해져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아무래도 불편해. 너무 불편해. ==; “ 그래서. ” “ ....! ” 갑작스런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녀석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 네가 정 원한다면 내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줄 테니까.. ” “ ....... ” “ 어쨌든 이렇게 힘든 일은 하지마. ” 그렇게 말한 녀석은 그제서야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이 적당히 매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지금은 어쩐지 지친 기색이 어려있다. 혼자서 이 일 저 일 떠맡느라고 힘들기도 하겠지. “ 내가 잠깐 했던 가정교사 자리... 네가 해봐. ” “ ! ” 잠깐.. 가정교사 자리라면.. 혹시 나한테 핑크빛 러브레터(아마도 추정)를 주면서 깡패시키한테 전해달라고 했던 그 여 고생??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내가 편지를 어디에 뒀더라... 태우려고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ㅡㅡ+ 대답없이 열심히 기억을 더듬고 있자 녀석이 가만히 날 바라봤다. “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 “ 아... 아니.응.. ” 가정교사라.. 상대도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 남 가르치는 건 젬병이라.. “ 급여가 꽤 괜찮은 편이야. 일주일에 두 번. 한 달에 50만. ” ∑=ㅁ= 꿈의 숫자에 화들짝 놀란 나는 잽싸게 녀석의 손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 맡겨만 줘!! +ㅁ+ ” 그러나 그 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맡게될 여고생의 눈물어린 순정을. 위열매 21세의 여름.. 돈에 눈이 뒤집혀 여우의 굴에 뛰어들다. 나는...............바보인 걸까........역시??;; 내 이름은 열매 <83> " 재밌냐? " " 아.....? 응. " 소파 옆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책을 읽고있던 깡패시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tv에선 슬픈 멜로디와 함께 죽은 새끼 가젤 곁을 못 떠나고 배회하는 어미 가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있는 중이었다. 억지로 꾹 참는데도 역시 난 눈물샘이 약한 모양이다. 그래도 들키면 역시 창피하니까 일단 고개를 화면에 고정한 채 스윽하고 눈을 부비는 척 손 가락으로 닦아냈다. 어우..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말을 거는 거야. 설마 훌쩍이는 거 들키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콧물은 어쩌지...? ㅡㅡ; 윗입술과 맞닿은 맑은 액체의 참을 수 없는 존재감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퍼석이 는 물체가 뺨에 닿아왔다. " 닦아. " 윽.. 또 걸렸구나. ==; 어차피 걸린 거 휴지를 받아들고 패앵-하고 풀었다. 풀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마치 세상이 모두 내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이건 좀 오버인가? ㅡㅡ; 퀴즈탐험 신비의 세제(;)도 슬슬 끝이 나고 스윽 고개를 돌리니 녀석이 책을 덮고 일어났다. 혹시... 내가 이 프로 좋아하는 걸 알고 다 볼 때까지 일부러 기다려준 건가..? 아니, 깡패시키가 그렇게 젠틀하고 델리케이트할 리가..; 물끄러미 등을 돌리는 녀석을 쳐다보자 평소 그대로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슬슬 나갈 준비하자. " " 아......응. " 저녁 때 쯤 깡패시키의 고등학교 친구 세 명과 만나기로 했다. 물론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주먹 꽤나 쓰는 놈들이지만 나도 깡패시키와 자주 있었던 덕분 에 녀석들과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 방과 후 패싸움하는 것도 여러 번 구경했었고.. 하지만 가끔은 깡패시키가 싸움대신 날 택해서 무리들의 원성도 들어야 했다. 뭐.. 말이 좋아 날 택한거지 결국은 내 멍청한 뇌를 개조시키기 위해 매일 같이 실시하던 개인과외였지만. 아마 이 시키한테 돈 내고 배웠으면 집 한 채는 그냥 날렸을 거다. 어디 보통 대단하신 분이시던가. ㅡㅡ; 하늘색 티셔츠에 헐렁한 면바지 차림으로 거실로 나가자 미리 준비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있 던 녀석과 마주쳤다. 베이지색 남방에 헐렁한 청바지. 키가 187cm인데다 몸매가 좋아서 그런지 별 거 아닌 옷을 입어도 스타일이 확 산다. 나도 173cm면 보통은 되지만.. 열무도 178cm인데.. 잠시 시무룩해 있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녀석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 가자. " " 아... " 에이, 뭐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180대의 위열매는 또 이상하지 않겠어? 나름대로 위로를 하며 녀석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밤바람이 방금 울고 나온 덕분에 조금 후끈한 눈두덩이를 간질이며 스쳤다. 설마 그 정도 울고 붓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녀석에게 가만히 물었다. " 나... 눈 많이 부었어? " " 별로. " " 세수는 하고 왔는데.. " " 신경 쓰이면 말해. 네 얼굴 보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둘 테니까. " 아.. 아니. 그 정도는. =ㅁ=;;; 재빨리 입을 꾸욱 다물자 옆에서 스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탓일까.. 녀석의 웃음소리가 조금쯤 바람소리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어~ 왔어?? " 꽤 고상한 분위기의 바(bar)에 눈에 익은 몇몇의 녀석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깡패시키겠지만. 자연스레 그들 무리에 동화되어가는 깡패시키를 바라보며 역시..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대학생의 신분이니 많이 얌전해졌지만 야생마처럼 뛰놀던 그 시절이야말로 가장 깡패시키다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붉은 선혈을 뿌리며 쓰러지는 적들 가운데 꼿꼿이 서서 싸늘한 미소를 짓던 그 모습. 그땐 무섭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멋있었던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멋있다고 싸움질하고 다니랄 수는 없지만. ㅡㅡ; 그리운(?) 기억을 떠올리며 말없이 네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제일 오른쪽의 회색머리가 장석일. 쭉 찢어진 눈이 무서운 분위기를 풍겨서 직접 말을 해본 적은 거의 없다. 저 쪽도 별로 날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고....일단은 그냥 내 느낌이지만. 그리고 그 옆은 이름이...... 안세준이었지. 아마? 가끔 깡패시키가 싸움하러 가면 대타로 날 가르쳤던 녀석. 근데 참 신기한 건 그렇게 싸움질을 하고 다니는 데도 패거리 모두 성적이 좋았다는 거다. 특히 깡패시키와 안세준 녀석은 둘이서 전교 1,2등을 나눠먹었다지. 깡패들(?)보다도 못한 오리지날 범생이들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뭐.. 주먹 패거리들 사이에서 개인과외를 받은 나도 참 대단하긴 하지만. " 잘 지냈어? 형수님? " 풋---!!!!!!!! 한 모금 가득 머금었던 콜라를 확 뿜으며 캑캑댔다. 아니, 저 새끼가 저 무슨 낙타가 혹에 빨대 꽂고 뽀그르르할 망언을 지껄이는 거냐! 형수라니! 형수라니! 그딴 징그러운(?) 호칭 따위로 불릴 이유 없다고!! 언젠가 내가 깡패시키 위에 군림하면 그때 가서 깡패시키한테나 실컷 부르셔!! " 괜찮냐? " 무리 사이에서 얘기를 나누던 깡패시키가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 나는 여전히 콜록이면서도 괜찮다고 손짓을 했다. 그러니까... 방금 이상한 호칭으로 날 부른 놈이 박희열. 그나마 이 넷 중엔 제일 평범한 인간이다. 체격도 외모도 보통 수준이고 농담도 잘 하고. 그렇다고 별로 기분 좋은 농담을 하는 건 아니지만. ㅡㅡ; 뭐... 어쨌든 그렇고.. 마지막으로 그 옆은 깡패시키. 내가 맨날 깡패시키 깡패시키라고 부른 탓에 많이들 잊고있는 것 같은데 본명은 강이율이다. 강이현, 강이립이라는 걸출한 의사 형님과 모델 누님을 둔 대단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성격 은 무뚝뚝하니 전혀 막내스럽지 않지만 누님과 있을 때는 약간 그런 기미가 보이기도 하더군. 물론 내 앞에서는 절대 티를 내지 않지만. 큰 키에 얼굴 잘 나, 집안 빵빵해, 머리 좋아, 싸움 잘 해, 목소리까지 좋으니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는 옵션으로 마스터한 데다 쿨 뷰티한 성격까지 갖추었으니 여자 남자 안 가리고 달 라붙는 마성의 깡패시키 그 자체인 것이다. 혈액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AB형으로, 아마도 녀석의 경우엔 전자 쪽일 듯. 참고로 나는 O형인데 소심한 성격 탓에 종종 A형으로 오해받고 있다. 센스 없고 무능력한 에모모 작가야말로 소심의 극치를 달리는 A형이라는 후문이 들리더군.-_-; 뭐어.. 결론적으로 이러이러한 인간들이 모인 그룹이라는 것이다. 가만히 메뉴 판을 훑어보고 있자 옆에서 깡패시키가 물었다. " 뭐 주문할래? " " 음.. "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녀석이 짧게 덧붙였다. " 여긴 우유 안 돼. " 야-!! 난 뭐 맨날 우유만 먹냐-!! =ㅁ=!! 순간 울컥한 나는 네 녀석들 앞에서 보란 듯이 외쳤다. "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주세요!! " 언젠가 무슨 드라마에서 들었던 것 같다. 어떤 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내가 돈 내는 것도 아니고. 흥흥거리며 의기양양하게 기다리고있자 옆에 선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에... 왜.. 왜 웃는 거냐? ==;;; 어쩐지 한기가 느껴져 양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 머... 먹어도 되지? ㅡㅡ; " " 응. 많이 마셔. " 오호, 왠일로! 이제 날 어엿한 한 사람의 남자로 인정해주는 거냐? 그렇취! 남자라면 술도 마실 줄 알아야쥐! >ㅁ< 그런데 그 때, 등뒤에서 박희열의 히죽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율이 너, 열매 녀석 취하게 한 뒤에 먹으려고 그러지? " >ㅁ<;;;;;; " 쿡. " 저.. 정말 그런 것이었냐-!!!! =ㅁ=;;;;;;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재빨리 웨이터를 향해 소리쳤다. " 로얄 스트레이트 취소하고 콜라요!! =ㅁ=;;;; " " 로얄 스트레이트요?;; " 아, 그런가? 위스키 스트레이트랬나? 어우 거 참 대충 알아들을 것이지 쨍알쨍알 토달기는! -0-+ 옆에서 세 놈이 그런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아, 그래요, 내가 원래 좀 이런 캐릭터예요. 흥. " 강이율. 너 저 녀석이랑 있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 " ....... " " 난 지금 사귀는 애랑 끝낼까 생각중이야. 이쁜 척하며 명품만 찾아대는데 얼마나 짜증나는 줄 아냐? 열매 녀석은 명품 같은 거 안 사줘도 좋아하지? 맛있는 거만 주면. " 아니 저 새끼가-!! 내가 무슨 애완견 다롱인 줄 아나-!!! =ㅁ=+++ " 뭐.. 별로 명품엔 관심이 없는 것 같긴 한데.. " " 넌 메이커제품만 쓰잖아? " 박희열의 예리한 질문에 녀석이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빨래할 때 보면 죄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메이커제였던 것 같다. 녀석이야 뭐... 부잣집 아들이니까. 그래도 별로 자랑 같은 건 안 하던데.. (이율이가 너냐?-_-;) 주문되어 나온 콜라를 쭈욱 마셨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들이킨 탓에 코끝이 찡해져와서 윽-소리를 내자 동시에 세 놈의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젠장맞을 것들. 니들은 실수도 안 하냐!? "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저 녀석 은근히 귀엽단 말야. " " ....... " " 뭐랄까.. 다람쥐 같은 느낌이랄까? " 뭐시라? 그딴 쥐새끼 따위에 날 비교하다니 니 눈이 썩었구나! " 난 좀 멍한 거북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 " 야.. 그건 좀 심하다. 하하- " " 이율아, 가끔 좀 빌려주라. 같이 좀 놀게. " 순간 쾅하는 소리가 테이블 위에 울렸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를 낸 주인공으로 몰렸다. 미묘하게 눈썹 끝이 위로 향해있는 신의 조각품 같은 얼굴. 녀석의 시선은 마지막 말을 한 안세준에게 향해 있었다. " 아니.. 뭐 그렇게 정색할 것까진.. 난 그냥.. "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시도하는 안세준을 차갑게 노려보며 깡패시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죽기 전에 입 조심해. " " ....... " " 어, 야? 가려고?? " " 술 맛 떨어졌어. " 짧게 대답한 녀석이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감싸며 입구로 향했다. 벙찐 표정의 세 사람을 바라보며 질질 끌려가는 나.;; 분명 내 편을 들어준 건 기쁘지만.//// 그래도 그 성격 고치지 않으면 언젠가 외톨이가 될 지도 모른다. 깡패시키야.. 조금 걱정스런 시선을 담아 올려다보자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녀석이 슬쩍 날 내려다봤다. " 그.. 그냥 나와도 되냐?;; " " 신경 쓰지마. " 녀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신경은 무지하게 쓰이지만 그래도 뭐..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니까. 내 얼굴... 지금 웃고 있으려나.; 음주를 대비해서 차를 두고 나왔기 때문에 우리 둘의 발길은 자연스레 지하철역을 향했다. 어째 생각보다 일찍 정리가 되어버려서 싱거운 느낌마저 드는데.. 그런데 그 순간, 마치 하늘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하고 쳤다. 아야.... 아파..... " 오랜만이다. 위열매-! " 이 사람... 절대 잊혀질 리 없는 목소리. 얼굴.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손길. 돌아본 내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가고 있었다. 내 이름은 열매 <84> " 너 선생님 기억하지?? " 아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찔할 만큼 지독했던 그 여름날의 장미 향기를. 오늘도 변함 없는 향기를 내뿜으며 그가 다가왔다. 81편에 잠시 등장(?)했던 고 3 변태담임. 이름도 기억한다. 변춘식. 변태 이미지대로 대머리에 불뚝 튀어나온 배는 옵션. 느끼한 말투는 스페셜 아이템. 진학 상담을 할 때 방과후 빈 교무실에서 내 손을 주물럭대던 기억도 생생하다. 교무실을 빠져나온 뒤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었지만 이미 깊숙이 침투된 장미 향기 때문에 그 날 하루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 손잡는 건 그렇다 치자.(사실은 이것도 인정할 수 없지만.) 100보 양보해서 그래, 뭐 남학교였으면 이해를 한다고 쳐, 그런데 내가 다닌 학교는 남녀공 학이었다구-!!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자 변태담임이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 이 녀석. 쑥스러워하는 거냐? 하하하..! " =_=;; 잠시 혼자 웃어대던 변태담임이 가만히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 키가 좀 컸나...? " 그러면서 어깨를 더듬더듬. " 가슴도 좀 넓어진 거 같은데.. " 그러면서 가슴을 더듬더듬..................대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변태담임의 손목을 잡아챘다. 쇼킹한 만남으로 인해 잠시 기억 저 멀리로 보내버렸던 깡패시키의 손이라는 건 당연한 진리. 아직 소개도 하지 않았건만 녀석은 이미 상대에 대해 알고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알고도 남겠지. 이 정도의 지독한 향기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니까. 곁에 서있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냄새의 원인으로 몰린 나와 깡패시키. ㅡㅡ; 아아.. 집에 가자마자 장미향 바스오일부터 처리해야겠다. " 강이율...? " 변태담임이 대뜸 깡패시키의 이름을 불렀다. " 강이율군 맞지? 우리학교 출신... 수재라고 유명했던. " " ....... " 잠시 침묵을 지키던 깡패시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긍정하자 변태담임이 흠흠하고 헛 기침을 했다. 깡패시키의 유명세와 변태담임의 기억력의 만남이라고 해야할까.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을 깡패시키의 눈치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숙였다. " 만나서 반가웠습니다.(거짓말) 저희는 약속이 있어서 그만.. " " 열매, 학교 잘 다니냐? " " .............아....네. " " 한 번 찾아오지 그랬어? 서운하다 야. 내가 널 얼마나 이뻐했는데. 응? " 아아... 그래. 마주칠 때마다 몸 더듬어대는 게 이뻐서 그런 거였구나. 다른 놈들 진로 상담 한 번 할 때 난 별별 이유로 네 번이나 끌려가서 했었다. 그때마다 친근감의 표시라니 뭐라니 하며 어깨와 무릎을 주물러댔었지. 그러더니 마침내는 내가 방심한 틈을 타 입술에 기습 뽀뽀까지 감행했었고 말이야. 까슬까슬한 수염의 감촉까지 생각나. (물론 이건 아직까지 깡패시키한테도 비밀이다) 가정 방문차 집에도 몇 번 찾아왔었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랬어. 가능하면 평생-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나 좀 알려줄래? " 그렇게 말한 변태담임이 능글맞게 웃으며 양복 주머니를 뒤적여 만년필과 수첩을 꺼냈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깡패시키가 무표정하게 변태담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 3때의 일을 상세히 말한다면 이 시키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그래도 선생인데 설마 패지야 않겠지.. 그래도 모른다. 깡패시키라면. ㅡㅡ; " 응? 전화번호 좀.. " 그때의 내가 아니다. 난 변했다. 분명하게 내 기분을 전할만큼.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심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 죄송합니다만 전화가 없어서. " " 응...? " " 자취하느라 가난해서요. ㅡㅡ " 요즘 세상에 이렇게 티 나는 거짓말이 또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싫은 건 싫은 거다. 이제 물렁하게 끌려 다니는 건 사양이라구 이 변태 담임아! " 조심하세요. " " .......! " " 요즘 애들은 자기주장이 확실하니까요. 누구처럼 만진다고 물렁하게 움츠리기만 하진 않을 걸요? " 벙쪄있는 변태담임을 뒤에 남긴 채 깡패시키의 옷자락을 붙들고 걸어나왔다. 골목을 돌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자 옆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얼마나 당한 거야, 너? " 후련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축하고 있던 난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녀석이 미간을 좁혔다. " 그 자식이 얼마나 만졌어? " " 에.... " " 얼마나 만졌냐고 물었어. " 화내고 있는 깡패시키를 보며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띄웠다. 확연히 질투라고 써있는 얼굴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달까. 아아.. 나한테 귀엽다고 불리다니 이 녀석도 끝장이군. ㅡㅡ;;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스윽 주위를 둘러본 뒤 사람이 없는 것을 한인하고 양손을 녀석의 목에 감아 끌어내렸다. 순간, 촉-하는 소리가 좁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한 듯 녀석이 평소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 만약 이런 것도 했으면 어쩔......어이-!!!!!!!!!;;;;;;; "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말한 뒤 방긋 웃어 도발을 해야하는데-어제 전화로 열무에게 전수받 은 비법-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녀석은 왔던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재빨리 손목을 붙잡으며 농담이야!농담--을 외치자 걸음을 멈춘 녀석이 미심쩍은 듯한 얼굴 로 날 내려다봤다. 어우 참.. 성질하고는. ㅡㅡ; 태진군은 이 대목에서 질투로 타오르며 물어뜯을 듯이 열무녀석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 다던데. 그래....뭐, 어차피 우리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녀석들이니까.. 꽉꽉 들어찬 지하철에 오른 우리들은 종종 시선을 마주할 뿐 특별한 대화는 하지 않았다. 녀석은 변태담임 때문에 기분이 별로인 것 같지만 정작 피해자인 나는 지금 기분이 썩 나쁘 지 않다. 아까 바(bar)에서에 이어 녀석의 질투를 고스란히 목격했으니까. 평소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쿨한 반응을 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뭐랄까... (미리 말해두는데 닭살에 민감한 사람들은 패스트하게 스크롤바를 내리도록) 그래.... 뭐랄까..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하는 느낌... *-_-* 자꾸만 히죽거리는 얼굴 근육을 다잡으며 묵묵히 옆에 서있는 녀석을 올려다봤다. 오늘도 변함 없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있는 녀석. 어이, 아가씨.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지 말라구. 이 시키는 내꺼야. 내꺼. ㅡㅡ 앗.. 그 뒤의 아줌마! 얼굴에 빗금은 왜 긋는 거야?? 깡패시키만 보지말고 난 어때? 요즘 꽃미남이 뜬다며? 내가 좀 비리비리해 보여서 그렇지 알고 보면 진국이라고! 인기도 많아. 이지혜양(결국은 깡패시키에게 마음이 기울었지만). 양순자씨(이쪽도 깡패시키한테 갔다가 안되니까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지만), 이류(남자지만;), 조교씨(스토커지만;), 변태담임(......) 등등...............아무튼 나도 인기폭발이라고-!!! >ㅁ<;;;;; 혼자 흥분하며 마음 속으로 절규를 하고있는데 옆에 서있던 깡패시키가 내 등에 손을 얹고 슬쩍 앞으로 밀었다. " 자리 났어. " 앞을 살피니 빼꼼히 1인분의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기특한 녀석. 니가 이제 좀 사람이 되는구나. 웃어른(5개월 연상)도 공경할 줄 알고. 착해요. 착해. ㅡㅅㅡ* 슬금 눈치를 본 뒤 자리에 앉자 녀석이 좀 더 앞으로 다가왔다. 앉은 상태로 올려다봐서 그런가... 녀석이 평소보다 더 듬직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지하철 내에서 혼자만 눈에 띈달까. 아가씨들 교복 입은 여학생들 남학생들 아줌마들 아저씨들 할 것 없이 곁눈질로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뭐.... 이 녀석 잘난 거야 하루 이틀 알고 지내는 것도 아니지만 평소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 용하는 일이 없어서일까 오늘따라 심하게 달라붙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옆에 있는 나도 그런데 본인이야 오죽하랴. 주위 시선 때문에 짜증난다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거겠지. 그래... 뭐 솔직히 좀 부럽다. == 나도 남자다운 얼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성형수술을 해볼까? 요즘 유오x이 뜬다던데. ㅡㅡㅋ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들고 어디론가 전화하는 깡패시키가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통화가 연결됐는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 ..................그럼. 지금 가겠습니다. " 마지막은 그렇게 마무리 된 통화. 갑자기 어딜 간다는 거지? 호기심에 갸웃하며 녀석을 쳐다보자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잡고 일으켰다. " 내리자. " 에에.. 그러니까 지금 과외 아르바이트 견습하러 가는 거란 말이지? 깡패시키가 가르치는 거 옆에서 본 뒤에 교체식을 한다고..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정장을 입고 나올 것을.. " 저기.... 이렇게 입고 가도 돼? 그래도 인사하러 가는 건데.. " " 우리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신경 쓸 거 없어. " " 그래도..; " 잠시 말없이 옆에서 걷던 녀석이 내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 뭐라고 소개할까? 친구? 애인? " " ..................친구.; " 사회적 이목은 둘째치고 네 애인이라고 했다가 그 여고생한테 칼 맞을 일 있냐?;; 이왕 하는 알바 안전하게 하자구....응? ㅡㅡ; 으리번쩍한 집들이 넓게 넓게 퍼져있는 골목을 가로지르며 속으로 쉼 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된다. 뭐... 한여름에 토끼옷 입고 춤도 췄는데 뭘 못하겠냐마는. ㅡㅡ;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으리번쩍한 집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할 만한 저택이었다. 덕분에 긴장 두 배.;; " 여... 여기야?; " 내가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묻자 녀석이 초인종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추고 다가와 짧게 키스해주었다. 야..! 넌 응원이라고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심장 뛰는 속도가 네 배가 됐다고! 책임져!! 이 시꺄-!! =ㅁ=;;;; 내가 뻘개진 얼굴로 에헴에헴 기침을 하는 사이 집채만한 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일주일에 두 번 과외로 50만원 준다고 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으리으리한 집이다.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나와 달리 묵묵히 앞을 향하는 깡패시키. " 이.. 이 집 무지 비싸겠다. 그치??;;;; " " 어느 정도는 하겠지. " 아아.... 그러세요..?; 이것이 바로 부르조아의 여유란 건가. ㅡㅡ; 속으로 꿍얼대며 뒤를 쫓아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아마도 주인마님으로 추정되는 중년의 사모님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 어머~ 선생님 오셨어요? 호호호호. " " 안녕하세요. " 따라서 고개를 숙이자 사모님이 내게 시선을 던져주셨다. " 이 쪽 분은...? " " .............친구입니다. " 앞에 사이를 두고 짧게 대답한 녀석이 날 내려다봤다. " 예, 치.. 친구인 위 열매라고 합니다.;ㅁ; " " 그래? 어서 와요. ^^ " 그렇게 말한 사모님이 내 어깨를 툭툭 치시며 안으로 들여주셨다. 에에..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때늦은 걱정을 하며 여고생을 만나기 위해 2층으로 향하는 나. 러브레터 분실한 걸 알면 날 죽이려고 하겠지..?;;; 모두들.. 나의 무사귀환을 빌어다오. ==;;; 내 이름은 열매 <85> " 한서윤이에요. " 몇일 전 봤을 때와 다름없이 귀여운 얼굴로 여고생이 말했다. 그다지 날 경계하는 것 같지도 않고.....아, 친구라고 소개했으니 당연한 건가? 러브레터 분실 건은 그냥 덮어도 될까나.. 내 앞으로 내밀어진 작은 손을 살쩍 잡자 서윤이 열심히 위아래로 휙휙 흔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명랑한 것 하나는 맘에 드는군. 나도 저 시절에 꽤 파릇했지.. 짧게 인사를 마친 뒤 자리에 앉은 우리 세 사람. 깡패시키가 몇 마디 건네자 서윤양이 냉큼 문제집을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 여기, 여기, 여기 문제 모르겠어요. 여기도. 아... 그리고 여기 여기. " " 그럼 아홉 문제 중에 세 문제를 푼 거야? " ㅡㅡ;; 나... 이런 앨 가르칠 수 있을까나...;;;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가만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나. 흘끔 고개를 돌리니 깡패시키가 자세를 잡고 열심히 설명 중이었다. 연신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윤양. 그런데 왜 시선은 깡패시키의 얼굴에 달라 붙어있는 걸까. 응? 서윤양? ㅡㅡ+ 그러고 보니 나도 고등학교 시절 깡패시키한테 개인과외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과 쪽은 완전 꽝이라 녀석이 엄청 진땀을 뺐었지. 했던 설명 또 하고 또 하고 그렇게 수십 차례 반복에 반복.. 그 때의 날 향하던 그 한심스럽다는 눈빛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이해력이 늦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꽤 한심하다고 생각했었지. 녀석 몰래 머리를 퍽퍽 쥐어박으며 눈물을 찔끔댈 만큼. 생각해보면 여러 모로 은인인 녀석이다. 위 열매 바보-_-뇌 개조 계획도 충실히 이행해 주었고.. 혼자서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 옆에서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열매 오빠~ " 엑..;;; " 열매 오빠~ 심심하죠?응? " " 세 문제 남았어. 한서윤. " 깡패시키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자 서윤양이 히잉~하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은 듯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쪼르르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순간 화악 퍼지는 꽃 내음. 흐음... 화장했구먼.. 어쩐지 지나치게 뽀샤시 하더라니. " 모처럼 친구분이 오셨잖아요. 혹시 제가 열매 오빠한테 추파 던질까봐 그러시는 거예요? " " 한서윤. " " 열매 오빠 여자친구 있어요? " 지금 바로 앞에 있수다.. ㅡㅡ;;; 차마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리려는 찰나 자신 나름대로 답을 내렸는지 서윤이 키득대며 웃기 시작했다. " 아아.. 하긴 여자들보다 남자들한테 더 인기 많겠어요. " " ....... " " 군대 아직 안 갔죠? 조심하세요. 요즘 군대에 성추행 얘기가 자주 나오던데.. " 윽.. 지금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성추행이라니! 어디 하기만 해봐 다 물어 뜯어놓을 테니까!! 나,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위열매가 아니라구!! 잠시 말없이 우리 두 사람의 대화(라고 해봤자 여고생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한 거지만)를 듣던 깡패시키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고생이 더더욱 생글거리며 옆으로 찰싹 붙었다. " 이율 선생님은 재미없어요. 물론 그래도... " 뒤는 생략. '그래도'라는 말을 썼으니 앞 문장과 대비되는 말이 나오겠지? 그래도 멋져요? 그래도 좋아요? 그래도 귀여워요? 하지만 여고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후우-하는 한숨소리로 끝을 마무리했다. 나는 그저 멀뚱히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 " 열매 오빠 정말 애인 없어요? " 그러니깐 눈앞에 있다니깐.; " 첫 키스는 해봤어요? " 눈앞에 있는 이율 선생님과. ㅡㅡ; " 첫.....경험은요? " 그것도 눈앞에 있는 이율 선생님과. *-_-* " 이건 아직 이르지만... 결혼은 하실 거예요? " 그것마저도 눈앞에 있는 이율선... " 한서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책 펴. "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는지 깡패시키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상한 건가.... 아니면 쑥스러워하는 것? 일단 다시 쿨뷰티 가면을 뒤집어 쓴 이상 지금으로선 식별이 어렵다. 남은 문항을 펜으로 능숙하게 체크하던 녀석이 흘끗 고개를 들어 내게 시선을 던졌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묵묵히 참고서를 향해 돌려놓는다. 혹시.. 언제나 이런 식으로 중간중간 날 보곤 했던 걸까...? 어쩐지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물론 나 혼자만의 착각일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억지로 자리로 돌아간 여고생은 그다지 싫지 않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 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능을 앞두고 깡패시키가 내게 가르쳤던 내용 그대로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때의 녀석은 중간중간 내 뺨을 꼬집었었지. ㅡㅡ;; 조금은 그립고 또 나머지는 그다지 그립지 않은 추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째 조금 졸리네..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 내 상태를 눈치 챘는지 깡패시키가 책을 덮으며 분명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덩달아 와아~를 외치는 애교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조금 몽롱한 시선을 던지자 깡패시키가 상 아래로 손을 뻗어 내 무릎을 툭 쳤다. " 그럼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 쪽은 위 열매. 이제부터 날 대신해서 널 가르칠 거다. " " .....! " 그 순간의 여고생의 표정은 darkness 그 자체였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 마치 석화(石化) 마법에 걸린 듯 완전히 굳어버린 얼굴.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져 있겠지. 아니면 혼돈 그 자체이거나. 내게 깡패시키에게 전해달라며 분홍색 러브레터를 쥐어주던 그 순정을 가슴에 품고있던 시 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을 지도. 어째 순진한 소녀의 순정을 짓밟은 악의 훼방꾼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별로구만. ㅡㅡ; 괜히 시선을 다른 곳에 던지며 딴청을 부리자 여고생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신.....이라뇨? " " 말 그대로. 난 이제부터 다른 일을 할거거든. " " 하지만.. " " 이제부터는 열매 오빠라고 부르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불러. 그리고 녀석이 물렁하다고 멋대로 굴면 용서 안 해. " 마.. 말은 고마운데 어째 불난 집에 휘발유 붓는 듯한 기..........히익--!!!!!!!!!!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나는 깜짝 놀라 깡패시키의 소매를 붙잡았다. 한 순간, 아주 짧은 한 순간 날 향했던 여고생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흡사 지옥귀조차 삼킬 만큼 강렬하게. 아...아무래도 그만 두는 게..;; 역시 50만원보다는 목숨이 중요하.. 그런데 그 순간, 마치 숲 속에 사는 엘프족의 노래같이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잘 부탁드려요. 열매 오......선생님. ^^ " " 아... " 무.. 무섭게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아무래도 이건 너무 심한데..;; 그.. 그래도 순진한 여고생인데 믿어도 되.....되겠지? ㅡㅡ;;; 차마 활짝 웃는 여고생을 외면할 수 없어서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깡패시키는 몇 분간의 사건(?)을 알지 못할 것이다. 뭐.. 별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 그럼... 이율 선생님은 이제... 안 오세요? " " 당분간 가끔은 올 거야. 이 녀석 가르치는 거 보러. " 그제서야 조금 풀어지는 얼굴. 풋풋한 사춘기 여고생답게 뺨엔 홍조를 띄우고 있다. 이렇게 보면 꽤 귀여운 것 같기도. " 그럼 지금 열매 오.....선생님께 잠시만 배워봐도 될까요? " 테스트인 건가..? 너무 갑작스러운데..; 조금 망설이는 듯한 깡패시키의 어깨를 툭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 그래.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봐야지. " " 정말요? 그럼 잠시만.. " 그러고선 책상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여고생. 뭐.. 그래봤자 고등학교 수준 문제인데 뭐.. 설마 내가 모르는 문제가 나오기야 하겠어..?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는데 괜한 허세를 부린 걸까? 깡패시키 앞에서 개망신 당하는 건 절대 사양인데..;; 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리며 언제나 그렇듯 혼자서 열심히 번뇌와 싸우고 있는데 어느새 눈앞에 펄럭이며 문제집이 촥 펼쳐졌다. " 이거랑 이거.. 이거.. 이거.. 아, 요것두요. 그리고 이거랑...음....이것도 완벽히는 모르겠어서.. 일단 오늘은 이 정도만요. ^^ " " =_=;; " 분명 상상했던 극악수준의 문제는 아니지만 지문이 엄청 길거나 공식이 엄청 복잡한 문제들 이라 저걸 다 풀려면 밤을 꼴딱 새게 될지도 모르겠다. 흘끗 옆을 보니 녀석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으라차차! 위 열매! 사나이 울리는 위열매!! 네가 깡패시키를 먹여 살리겠다고 했잖아? 이 정도로 빌빌거리면 안 되지! 이래서야 어떻게 '날 좋아해"'라고 묻는 깡패시키의 뺨을 주욱 늘리며 '쿠욱'하고 웃어줄 수 있겠어?? 의지가 되는 남자 위열매! 바로 지금을 남자로서의 너를 어필할 기회로 잡는 거야! 아자아자! 앞을 향해 전진-!! >ㅁ< 후우후우 숨을 내쉬며 열심히 목운동을 마친 나는 눈동자를 빛내며 체크되어 있는 문제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영어.. 일단 문과이니 만큼 언어 쪽은 뭐... 자리에 앉은 나는 깡패시키가 지켜보는 가운데 머리가 따라주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설명 을 하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이건.. " " 아....네....네.. " 대답 시원하고~ 그. 런. 데. 왜 가르치는 건 난데 옆의 깡패시키를 보며 눈웃음을 흘리는 건데? 엉?! 깡패시키 보지말고 날 보며 웃으란 말.. >ㅁ< >ㅁ<;;;; 에에.. 다음 문제는 이건가...음? ㅡㅅㅡ; 한참동안 설명을 늘어놓은 뒤 목이 아파 흘끔 시계를 보자 어느새 9시가 넘어있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우리들 내일 수업 있으니까. " 내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눈치 빠른 녀석이 조금 더 빨리 심플하게 핵심만 추려서 말했다. 그제서야 여고생이 허리를 쭈욱 펴며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성에 차지는 않지만 어쨌든 알겠다는 표정. 그러게 역시 난 가르치는 건 자신 없다니깐.. 조금 기운이 빠져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여고생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 별로 나쁘지 않았어요. " 에..? "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릴께요. " 이미 방을 나서고있는 깡패시키의 등을 눈으로 쫓으며 아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다. 이 정도면 인정받은 건가..?; " 그럼... 나중에 또 보자. " " 네. 그런데.. " " ......? " " 편지는... 전해 주셨겠죠? " 허걱- =0=;;; 화들짝 놀란 내가 콩닥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고르자 여고생이 생긋 웃었다. " 그래도 친구라서 다행이에요. 이율 선생님께 사정이 있으시다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부탁드릴께요. 소식 자주 전해 주세요. 잘만 도와주시면 예쁜 여자친구 소개시켜 드릴께요.^^ " " 아.. 하하..;;; " 엄청난 오해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거대한 저택에서 빠져나온 나는 의아한 듯 쳐다보는 깡패시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국문과답게 속으로는 즉흥시를 가만히 중얼거리며.. (음율을 맞추어 읽어주기 바란다.) 깡패시키야.. 깡패시키야.. 이 마성의 깡패시키야.. 네 덕분에 내 앞길은 언제나 어둠이구나. 깡패시키야.. 깡패시키야.. 잘남 놈의 깡패시키야.. 너 때문에 팍 늙으면 어떻게 책임질 거니? 카사노바 깡패시키는 오늘도 여자들의 비명소리에 파묻혀 노는데 홀로 남은 이 나는 오늘도 쓸쓸히 다림질만 하누나. 아아.. 시집이나 내볼까.. ㅡ.ㅠ 내 이름은 열매 <86> 텅 빈집에 홀로 앉아 열심히 채널을 돌려가며 tv를 신청하고 있는데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광고가 있었다. 맛있어요~ 육각 김밥~ 며느리가 죽어도 몰라~ 마침 출출하던 차의 나였기에 그 짧은 cf는 뇌리에 깊숙이 박혀왔다. 동시에 울려대기 시작하는 요란한 꼬르륵 소리. 스윽 배를 문질러대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육각김밥.. 요 앞의 편의점에서 팔았었지.. 난 브리또도 좋던데.. 아니면 피자빵이나 소라빵도. 잠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배꼽소리가 미친 듯 울려댔다. 그래.. 그래. 알았어. 주인님 알았다니깐. ㅡㅡ; 대충 눌러 tv를 끈 뒤 방으로 들어가 지갑을 찾았다. 아르바이트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라 현재 지갑 안에 들어있는 돈은 전부 깡패시키에게 받은 용돈이다. 같은 나이의 녀석에게 용돈을 타 쓰다니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하지만 집에서 원조가 끊긴 지 오래라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걸 말린 것도 녀석이고. 뭐.. 그것도 이젠 사정상 해제가 됐지만. 후줄근한 츄리닝 바지에 쭈글쭈글한 점퍼차림으로 현관문을 잠그고 털레털레 엘리베이터 앞 에 서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깡패시키..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다. 자는 얼굴이라도 볼까 했지만 오히려 자는 얼굴만 보이고 마니 원. 기초 체력이 좋은 녀석이니까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만 그래도 원래 험한 일을 안 하던 도 련님이라 걱정이 된다. 집안의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귀여운 강아지일텐데. 유치원에 다닐 땐 검은 반바지 정장에,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하얀 양말에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구두를 신었겠지. 옆에는 굽신굽신거리며 할아버지 집사님이 따라다니시고.. 혹시라도 잘못하면 대신해서 매맞는 아이가.. 거기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스윽하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대충 생각의 테잎을 끊고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 오랜만이야. ” “ ......! ” 나를 바라보며 웃는 엘리트적 풍모의 남자. 이웃의 조교씨였다. 조금 굳은 얼굴로 올려다보자 조교씨가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 얼굴 보기 힘드네. 이사라도 간 줄 알았어. ” “ 에... 안 내리실 거예요?; ” “ 어디 가는 길이야? 옷차림을 보아하니 멀리 나가는 것 같지는 않은데. ” 예리한 눈동자를 빛내며 조교씨가 물었다. 나는 잠시 흘끗 눈치를 살피다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 잠깐 편의점에.. ” “ 바래다줄게. ” “ 아.. 아니, 됐어요-!!; ” 이 형씨가 그렇게 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바래다 줄 데가 없어 쓰레빠 끌고 편의점 가는 걸 바래다 줘?!; 그 정력으로 이쁜 여자친구나 실컷 사겨보지 그러슈! 기분 탓인지 거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낀 나는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아아.. 가뜩이나 배고파서 힘도 없는데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될 수고까지 하게 되다니.. ㅡ.ㅜ 속으로 옆집의 조교씨를 원망하며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계단 내려설 때마다 꼬르륵... 꼬르륵.. 편의점에 도착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을까나.. ㅡㅡ;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린 탓에 밖은 쌀쌀했다. 아직 초여름이긴 해도 점퍼를 입고 나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새까만 암흑 속에 듬성듬성 고개를 내민 별들. 그저 쓸쓸하게만 느껴질 뿐이지만....내가 너무 센티멘탈한가? 갑자기 뭔가 영감이 떠오른다. 제목은....아, 그래. 모처럼이니까 센치한 분위기로.. 별과 나그네............그래, 그거 좋다!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 델리케이트 해! >ㅁ< 제목 별과 나그네. 나는 나그네. 너는 별. 내 이름은 열매. 네 이름은 혹성 b-204호. 마치 전기뱀장어처럼 파지직 파지직 빛나는 너를 보면 나는 슬퍼져. 누군가 널 전기 고문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아파와. 그래서 눈물만 뚝뚝 흘리지. 너는 알고 있니? 우리는 모두 나그네란 걸. 별은 인간보다 부피나 질량이 큰 만큼 삶도 길지만 인간은 작은 우주라고 불리지. 그러니까 인간이 작다고 해서 별보다 하등한 건 아냐. 나는 나그네. 너는 별. 우리는 모두 나그네. 아아.. 역시 시집을 한 권 내야겠어. *-_-* 서점에 들여놓으면 많이들 사주기 바란다./// 그렇게 짧은 시 작업을 끝낸 나는 다시 편의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안은 언제나 그렇듯 떠들썩한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플한 유니폼의 우락부락한 주인 아저씨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곧 시원한 공기와 맞닥뜨렸다. 오늘은 날씨도 쌀쌀하니 그다지 에어컨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당연히 내 발걸음은 식품코너로 향했다. 마침 신상품을 막 들여놓았는지 반짝반짝이는 제품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나를 맞아 주었다. 도저히 한 두 개만 추릴 수가 없을 많큼 풍부한 메뉴. 그러나 내가 제일 먼저 찾는 건 언제나 하나.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참치 마요네즈 김밥’-! 앗.. 역시 이건 다 나가고 하나 남아있다. 일단 하나라도 건지... 눈을 빛내며 휙하고 손을 뻗는 순간 나의(예정) 참치 마요네즈 김밥이 누군가의 손안으로 안겨들었다. 단 1초 차이로 판가름난 승부. 허탈한 얼굴로 눈만 꿈뻑이고 있는데 옆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나와의 승부(?)에서 승리한 위너일 것이 뻔한. 가뜩이나 열 받는데 그 재수 없는 면상이나 실컷 노려봐 주마-! =ㅁ=+ 표정관리를 한 뒤 휙하고 고개를 든 나는 순간 싸늘히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 이 동네 사냐? ” 끝내주게 커다란 눈(속 쌍커풀 포함). 인형같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창백하다 못해 송장 같은 피부. 신경을 팍팍 긁는 아마도 미성이라고 할 만한 목소리. “ 오랜만이다. 위 열매. ” 아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한 얼굴로 생긋 웃는 여유까지 보이는 초 미소년. 그 이름도 화려한 류. 세. 이!! 나의(예정) 참치 마요네즈 김밥을 한 손에 꼬옥 쥔 채 내 어깨를 툭툭 친다. “ 뭐야. 왜 그렇게 굳었어? 아.. 이거 먹고 싶어? ” 그렇게 말하더니 억지로 내 손에 꼬옥 쥐어준다. 갑작스런 만남과 너무나 상냥한 녀석의 미소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녀석을 쳐다봤다. 웃고는 있지만 확실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많이 초췌해져 있다. 녀석과의 마지막 기억은.. 내가 열심히 녀석을 밟았던 기억. 중간중간 힘들 땐 깡패시키가 대타로 나서기도 했었지. 그래도 놈이 나한테 저지른 엄청난 죄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은 오징어 응아 만큼도 들지 않는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잠시 한기가 느껴져 양어깨를 감싸안았다. 싸늘하게 웃으며 알몸의 날 유린하고 있었던 그때의 그 얼굴이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거다. 학교를 그만둔 뒤 자취를 감췄는데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될 줄이야. 미간을 살짝 좁히며 노려보자 녀석이 입가를 누그러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 미움받고 있는 건 알지만 이제 그쯤 해줘. 나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구. ” “ ....... ” “ 그날 너희한테 밟히고서 한달간 움직이지도 못했어. ” 그것 참 미안하군. ㅡㅡ “ 뭐.. 물론 내가 화를 자초하긴 했지만. ” 시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녀석을 보자 한순간에 긴장이 쭈욱 빠져나갔다. 나는 단순한 걸까.. 다혈질인 걸까..? 그래도 성격상 한 사람을 끝까지 오래오래 미워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깡패시키의 말을 빌리자면 바-_-보, 멍청이, 물렁한 인간, 혹은 단세포일 지도. 그래.. 결국은 이래저래 손해만 보는 멍청이 캐릭터라는 거겠지. ㅡㅡ; “ 가슴에 묻어두지 마. ” “ ....... ” “ 학교.... 잘 다니고 있어? ” 그렇게 친근하게 물어오면 더 이상 무시하기도 힘들잖아.; 참치 마요네즈 삼각김밥을 꼬옥 쥔 채로 대충 대답했다. “ 그냥.. ” “ 아니, 너 말고..........강이율. ” 오호, 그러셔-?!! =0=+ “ 아니, 아니. 농담이야. 농담. ”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소만? 응? ㅡㅡ+ 불쾌의 감정이 슬금슬금 올라오려는 찰나 녀석이 내 어깨를 툭 쳤다. “ 농담이라니까. 난 이제 완전히 포기했어. 항복했다구. ” “ ㅡㅡ ” “ 다시 한 번 그랬다간 그 땐 정말 이율이한테 죽을 거야. ” 양손을 들어 항복 제스처를 취하며 하하-하고 웃는다. 어쩐지 조금은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늘어놓던 녀석은 두 개의 샌드위치를 들고 계산대로 향하며 말했다. “ 만나서 반가웠다. 안녕- ” 그저 멍하니 문밖으로 사라지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 역시 완전한 악인은 없는 걸까... ’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대답을 해줄 걸 그랬다. 짧은 아쉬움을 구깃구깃 접어 가슴 한 구석에 눌러놓은 난 찬찬히 쇼핑을 마친 뒤 계산대로 향했다. 참치 마요네즈 김밥, 불고기 주먹밥, 브리또(中) 2개, 라면 두 개. 과자 두 봉지. 밀키스 하나. 뭐... 이 정도면 배가 차겠지? 남은 건 깡패시키 주고.. 역시 오늘 류세이랑 만난 건 말하지 않는 게 좋을까나.. 그런 잡스런 생각을 하며 문을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다. 삐--------------------------------------------------------- 갑작스레 고막을 찌르는 무기질 적인 소리. 재빨리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채는 우악스런 주인 아저씨를 돌아보며 바닥에 봉지를 떨어 뜨렸다. 곧이어 양 점퍼 주머니에서 나온 자잘한 물건들. 그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상냥했던 미소를 떠올린 나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최악이다- 내 이름은 열매 <87>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훔친 게 아니라고, 아까 나간 놈이 멋대로 내 주머니에 넣어둔 거라고 몇 번이나 자초지정을 설명했지만 빌어먹을 주인 아저씨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금새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이 즐거운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눈동자를 빛내며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아.. 아무리 인심이 각박한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거냐? 서로 믿고 사는 사회 좋은 사회라는 모토는!? 이 선한 눈망울이 보이지도 않는 건가? 내가 정말 그따위 잡스런 물건을 훔칠 인간으로 보이냐고-!! 유희왕 판박이 껌이랑 찍어먹는 펜돌이 사탕 따위를-!! 이 내가-!! 인간 위열매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내가 그런 쫌스런 인간으로 보이냔 말이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한 번 훔치기로 마음먹었으면 적어도 x라면 한 박스 정도는 훔쳐야 폼나지 않겠... ...............어쨌든 난 결백하다고! 그건 86편을 본 사람 모두가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아저씨가 날 놓아줄지 모르겠다. “ 어머.. 아랫집 총각 아냐? ” 순간 무리를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윗층의 아주머니였다. 요즘 에어로빅 시작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시는 다소(?) 수다스러운 아주머니. 수다쟁이 아줌마한테 이 상황을 보였으니 내일이면 도둑놈으로 온 동네에 소문이 다 나겠군. 나이 스물이 넘어서 유희왕 판박이 껌 도둑이라니.. 아아.. 정말 상상만으로도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주인 아저씨의 시끄러운 추궁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내내 윗집 아주머니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참을 관찰하던 아줌마가 갑자기 한 마디를 던지며 아파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이율 총각한테 도움 요청하고 올게~~~~~~~~~~~~~~~~~ ” -컥-!! 안돼! 아줌마! 이런 쪽팔린 꼴을 그 시키한테 보이라고-!!?? 마침 녀석이 집에 돌아올 시간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된다구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절규하듯 아줌마를 불렀지만 에어로빅 탓인지 무지하게 빨라진 다리로 아줌마는 이미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새로이 몰려든 구경꾼들뿐. 당신들 다 뭐야-! 무슨 구경났어-!? 볼려면 관람료 내고 봐!!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야! 엉?? “ 너 이 자식 빨리 안 불어? ” “ 아.. 글쎄 아까 다 설명했잖아요!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딴 걸 훔쳐요?! 유.. 유.. 판박이껌 같은 걸-!! ” 씨팍.. 말하기도 쪽팔리다. ᅮᅮ 그러나 여전히 귀에 못을 처박은 아저씨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 변명은 필요 없고 빨리 불어-!! ” “ 지금 불고 있잖아요! 내가 아니라고!! ” “ 너 오타쿠냐? ” 에....? “ 이런 애들 프로보고 흥분하는 어른들도 있다던데 너 그런 부류 아냐? ” “ 뭐. 뭐라구요-!!! ” 그런 부류라니! 그런 부류라니-!!? 아니 이 인간이 사람 멋대로 변태 취급하네! 내 비록 깡패시키와 삐리리부터 삐리리한 짓까지 다 해봤지만 보통은 평범한 대한의 건아라구! 오타쿠라니!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긴 걸로 따지면 댁이 훨씬 그 쪽에 가까워! 이 콧수염 매니아야-!! 열 받아서 몇 마디 쏘아주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 수염 아저씨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무래도 안되겠다. 경찰서에 가자. 너 같은 놈은 아주 콩밥을 먹어야 돼! ” 엑--! “ 비싸지 않은 것들이라 웬만하면 좋게 끝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 자.. 잠깐, 경찰서라니! 다 합쳐 겨우 이 천 원도 안될 것 때문에 날 범죄자 취급할 셈이야!? 게다가 콩밥이라니-!! 우악스럽게 내 손목을 잡아끄는 수염 아저씨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각하게 흘러가자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로 조금씩 웅성이기 시작했다. 아줌마들 아저씨들 꼬마들 누나들 할머니 한 분에 할아버지 두 분, 류세이 한 분....에..? 류세이--!!!???? “ 야---------!!!!!!!!! ” 뒤도 돌아볼 것 없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순간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건의 원흉놈에게로 몰렸다. 그러나 놈은 너무나 덤덤한 표정으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 대답이 없었다. 그 빌어먹게 이쁘장한 얼굴 탓에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래저래 열 받게 만드는 놈이다. “ 너 이 새끼.. 잠깐, 아저씨! 저 자식 생각 안 나요?!! 아까 가게 안에서 본 놈이잖아요!! 계산도 했죠! 샌드위치 두 개!! ” 나의 다급한 질문에 수염 아저씨가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양으로 봐서 아무래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 같다. 정말 꽉 막힌데다 기억력까지 안 좋은 모양이다. 썩을. 그러나 어쨌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 야! 류세이!! 네가 아까 내 주머니에 유... 판박이 껌 넣었지?? 어??!! ” “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혹시 너 아직도 그런 거 가지고 놀아? ” “ ...! ” 밟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예쁜 미소를 지으며 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 그냥 자수해. 버텨봐야 너만 손해야. 물 고문이라도 당해야 실토할래? ” 하.. 유희왕 판박이 껌 훔쳤다고 물 고문이라.. 이 썩을 새끼, 사람 놀리는 것도 정도껏 해라-! 결국 참다 못한 나는 무식하게 커다란 수염 아저씨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낸 뒤 비호처럼 잽싸게 놈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 ...............ᄀ..........! ” 100% 히트된 타격감에 만족스레 미소를 떠올리려는 찰나 그 바로 옆에서 입가에 미소를 띄운 류세이 놈이 눈에 들어왔다. 자.. 잠깐.. 그럼 지금 비명은... “ 폭행죄 추가. 위열매. ” 컥...! 제대로 살펴보니 회사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찡그린 채 양손으로 턱을 감싸고 있다. 이거야말로 빼도 박을 수 없는 범죄 현장.. 구경꾼들이 희생자를 애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류세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리고 류세이 때문에 폭행죄까지 뒤집어쓰게 됐다. 이런 제길.. 난 이제 이대로 감옥에서 썩게 되는 건가..? 이 꽃다운 나이에 차디찬 감옥 구석에서 앙상하게 마른 몸을 웅크린 채 가끔 부모님께 편지나 쓰면서? 햇살 좋은 날 제소자들끼리 모여 축구 시합을 하고 이긴 사람에게 사식을 헌납하면서? 구멍 슝슝 뚫린 플라스틱 칸막이에 떨리는 손을 대면 건너 편에서 면회자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나는 연인. 내 인생은.. 결국 그렇게 차디찬 감옥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 너 뭐하냐? ” “ ...! ” 상상만으로도 서러워서 콧물까지 줄줄 흘리고 있는데 등뒤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자리엔 방금 전 상상 속에서 새로운 남자(!)와 길을 떠나던 녀석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 너 또 무슨 바보 같은 짓을.. ” “ ....... ”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던 녀석이 한순간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변한 눈매는 명백한 경계의 빛을 띄고 있었다. “ 넌 왜 여기 있어? 분명히 근처에서 얼쩡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 “ ....... ” 류세이가 조금 굳은 얼굴로 깡패시키를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멀뚱히 선 나는 일단 소매로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을 슥슥 문질러 닦은 뒤 깡패시키의 앞으로 다가갔다. 류세이를 향하던 시선이 내게로 돌아온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조금 멍해진 상태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나.. 한동안 못 봐도 기다려줄래? ” “ .....? ” 녀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본다. 평소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단정한 얼굴이 일순간 멍해졌다. 이런 얼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 내가 범죄자가 되도 기다릴 거야? ” “ 너 지금 수는 소릴 하는 거냐? " “ 그냥 대답 해줘. 기다릴래? ” 내 진지한 눈빛에 녀석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는 안되지만 일단 대답부터 하자면 못 기다려. ” “ ....... ” “ 어쨌든 보낼 생각 자체가 없으니까. ” 그래.. 그 대답이면 충분해. 그럼 이제 마음 편히.... 류세이를 족쳐볼까? ᅳᅳ+ 타오를 듯 떨어지는 석양 빛 속에서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려 원흉놈의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번에야말로 파이널 라운드다! 내 이름은 열매 <88> 시선이 마주치자 시퍼런 빛의 굉장한 전기파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덮쳐오는 98% 원한과 질투의 유해성분이 포함된 거대한 전자파. 이에 질세라 최대한 눈을 부릅뜬 나는 열심히 놈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기선을 빼앗기면 끝장이다-! 잠시 후 진지하게 굳어있던 놈의 얼굴 위로 기분 나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얼핏 눈웃음까지. 그래, 니 쌍꺼풀 굵다-!! =ᄆ= 그렇게 한참 관중들 속에서 시선을 교환하던 우리는 서서히 고조되는 공기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일(一). 촉(觸). 즉(卽). 발(發)-! 이기든 지든 일단 붙어나 보자! 그동안 당하기만 했던 나다. 놈의 얼굴에 제대로 된 주먹을 먹일 수만 있다면 아주 조금은 속이 풀리리라.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그리고 한 순간 숨을 멈추었다. 시선을 놈에게 고정한 채 한 발자국을 떼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의 준비를 끝낸 내가 우렁찬 기합과 함께 달려나가려는 찰나, “ 시간 그만 끌고 빨리 경찰서 가자! ” 갑자기 등뒤에서 나타난 콧수염 아저씨가 내 목덜미를 잡아채며 소리쳤다. 막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참이었기에 한 순간에 숨통이 조인 나는 그 자리에 엎어져 심하게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시뻘개진 얼굴로 자리에 앉아 기침을 해대자 또다시 주위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너무 심하게 기침을 한 탓에 눈물이 흥건히 고여 눈앞의 류세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희미한 잔상이 눈물에 일렁거린다. “ 괜찮아? ” 어느새 옆으로 달려온 깡패시키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기침하기에 바쁜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겨우겨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얌생이 콧수염. 당신 혹시 저 자식이랑 짠 거 아냐?! 겨우겨우 숨을 고른 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또다시 등뒤에서 콧수염의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런다고 쉽게 끝날 줄 알아? 나쁜 버릇은 초장부터 뿌리뽑아놔야 돼!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세상 참 말세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무조건 싹싹 빌어야 할 것 아냐?! ” “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 “ 네 주머니에서 나왔어. 중요한 건 그 사실이야. 누가 넣었건 어쨌든 네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 하.. 그러니까 결국 남이야 누명을 쓰던 말던 그깟 껌이랑 사탕 따위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아무리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냐? 그렇게 따지면 방금 뒤에서 잡아당긴 당신 행동도 엄연히 살인미수라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현기증이 났다. 무엇보다도 이런 추태를 류세이 앞에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분했다. 아니, 그보다도 깡패시키의 앞이란 게 죽을 만큼 창피했다. 알고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내 말을 믿어줄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걸. 결국은 내 주머니에서 나왔고 중요한 건 그 사실이란 걸. 그래도 난 아니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완전히 날 도둑놈 취급하며 손가락질해도, 거짓말쟁이라고 욕하며 떠들어대도 나는.. “ 내가 시켰어요. ” " ! “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가 한 순간에 웅성임을 갈랐다. 방금 전까지 내 등을 토닥여주던 녀석이 긴 다리를 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 내가 가지고 오라고 시켰어요. 이 녀석은 그저 제 협박에 따른 것뿐입니다. ” “ ...... ” 콧수염 아저씨와 주위의 구경꾼들이 일제히 당황한 얼굴로 깡패시키를 쳐다봤다. 흘끗 쳐다본 류세이는 반쯤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깡패시키의 그 무모한 행동에 놀란 건 나였다. “ 정말 자네가 시켰나? ” “ 그래요. ” “ 왜..? ” 뭔가 말하려던 깡패시키는 한 순간 콧수염 아저씨의 손에 들린 것들을 보고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 .............갖고 싶었으니까. ” 아아.. 그 씨도 안 먹힐 거짓말이라니. 나라면 몰라도 깡패시키와 유희왕 판박이 껌은 도무지 매치가 안 된다. 수 십만 원 짜리 브랜드를 걸치고 다니는 놈이 뭐가 아쉬워서 그딴 걸 훔치겠는가. 아니, 차라리 훔친 거면 낫다. 그걸 뒤에서 종용했다니 어떤 바보가 믿을까. 봐라. 저 사람들의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콧수염 주인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 “ 왜 거짓말이라고 단정짓죠? 나라고 그걸 원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 맞는 말이지만 상황이 너무 어색하다. 아마 사실이었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거짓으로라도 자수를 하고 사과를 하면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어차피 빼도 박도 못하는 현행범으로 몰린 나다. 이 이상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그 잘난 강이율을 한낮 좀도둑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일단 이 상황을 빠져나간 뒤에.. 결국 결심을 굳힌 내가 거짓 자수를 하려는 찰나 깡패시키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이걸로 만족하냐? 류. 세. 이. ” “ ! ”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독이 된 듯 놈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 조롱하던 입술이 희미한 떨림을 안고 있다. 수많은 구경꾼들 가운데의 우리. 그러나 그들은 이미 완전히 배제된 채 우리 셋만 미묘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뒤 깡패시키가 입 끝으로 웃었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류세이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가...했어요. 그 주머니에 제가 넣었습니다. ” 모두의 놀란 시선이 류세이에게로 몰렸다. 웅성이는 목소리. 콧수염 아저씨는 벙찐 표정으로 우리들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승자는 류세이도 나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뜻대로 상황을 종결시킨 건 지금 내 옆에서 바닥을 향한 채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한 사람뿐이었다.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되었고 콧수염 아저씨는 쭈뼛쭈뼛 내 앞으로 다가와 사과를 했다. 구경꾼들을 내쫓고 남은 두 사람이 어떤 결말을 냈는 지는 모르겠다. 그저 돌아서는 우리를 바라보던 류세이의 쓸쓸한 눈빛만이 묘하게 기억에 남을 뿐. 돌아가는 길, 나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쑥스럽지만 그래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 너.. 내 어디가 좋아..? ” “ ....... ” 어이, 어이, 어이, 뭐냐 그 기분 나쁜 침묵은. =_=+ 썰렁한 반응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 야.. 내 어디가 그렇게 좋냐니깐?? ”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녀석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지그시 날 내려다봤다. 해가 진 뒤라 어둠에 닿은 얼굴은 표정을 읽기가 힘들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녀석을 멀뚱히 올려다보던 나는 결국 피식 웃으며 먼저 걷기 시작했다. 사실은 고맙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다. 끝까지 날 믿어줘서. 물론 대학생씩이나 돼서 유희왕 판박이 껌이랑 찍어먹는 펜돌이 사탕 따윌 훔쳤다는 사실을 믿는 게 더 힘들겠지만. 하지만 모르겠다. 왜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건지. 초조하다. 아니, 초조함 이상으로 불안하다. 아까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심장의 두근거림은 더욱 강해진다. 그 독한 놈도 결국은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깡패시키를.. 깡패시키를 향하던 그 눈빛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한순간 내가 훼방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만큼 그 눈빛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내가... 있어도 될까? 정말 내가... 이 녀석의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내가.. 그 녀석보다도 더.. 훨씬 더 깡패시키를 사랑할 수 있을까? 현관문을 닫기가 무섭게 녀석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여전히 서툴지만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처음엔 좀 당황하는 듯한 녀석도 결국엔 적극적으로 날 바닥에 눕히고 긴 손가락으로 몸을 더듬어왔다. 다리 사이로 수백 번은 오갔을 고통과 쾌감이 오히려 내 정신을 맑아지게 했다. 서서히 진정이 되간다. 적어도 지금의 녀석의 곁에 내가 있다. 완전히 지친 나를 신사답게 침대로 옮겨준 녀석은 대충 뒷정리를 끝낸 뒤에 내 머리맡에 앉았다. 인기척에 눈을 뜨는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날 내려다보고 있는 눈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아아.. 다행이다.. 가만히 내 머리를 쓸어 내리던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너 갑자기 왜 그래? ” “ ....... ” “ ....... ” 잔뜩 붉어진 얼굴을 베개에 묻자 귓가에서 녀석의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그보다 아까 네가 한 질문에 대한 답. 방금 찾았다. ” “ ....! ” 잠시 뜸을 들이던 녀석은 내 심장이 터지기 직전에야 스치듯 말했다. “ 어디가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 원래 난 좀 취향이 특이하니까. ” 그 마지막 말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베개 커버를 세탁기에 넣은 건.........비밀이다. ------------------------------------------------------------------------------ 내 이름은 열매 <89> 집 앞 할인 마트에서 아이스크림 몇 개를 사 가지고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시끄러워! 그 얘긴 이미 예전에 끝났잖아!!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연락하지마! ”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깡패시키는 그렇게 무정하게 전화를 끊은 뒤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손에 든 채 조용히 다가가자 자켓을 걸치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명백히 ‘짜증’이란 두 글자가 쓰여진 얼굴에 말 걸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녀석이 조금 가라앉힌 목소리로 말했다. “ 혹시 누나가 집에 올 지도 모르니까 절대 열어주지마. ” 엑-! 갑작스런 말에 놀란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방금 통화한 상대는 깡패시키의 누님이었던 모양이다. 평소엔 쿨한 녀석도 누님 앞에선 이렇게까지 흥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 아니, 근데 누님이 여기 스페어 키 가지고 계시던데..; ”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의 미간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좁혀졌다. 왜..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ᅮᅮ “ 그럼 너도 어디 나가서 놀고 있어. ” “ 갑자기 그런 소릴 해도.. ” 모처럼의 주말에 집안에 남아있을 친구 놈들이 있기나 할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지내는 놈들 중에 솔로는 거의 없다. 미처 확실한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대던 나는 일단 분위기나 전환할 생각으로 사 가지고 온 아이스크림 하나를 골라 녀석의 앞으로 내밀었다. 소매 단추를 채우던 녀석이 잠시 손을 멈추고 날 쳐다본다. 어이, 어이, 사람 손 부끄럽게 할거야? 응? ᅳᅳ; 몇 초간 반응이 없어 손을 거두려는데 녀석이 자켓을 걸치며 짧게 말했다. “ 냉장고에 넣어두면 갔다와서 먹을게. ” “ 어디 가? ” “ 일 하러. ” 모처럼의 주말에 일을 하러 가다니 보통의 직장은 아닐 테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녀석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 몸으로 때우는 일. ” 잠깐..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면 혹시 공사판 막노동..? 하지만 공사판에 일하러 가는 것치곤 너무 제대로 차려 입었는데..? 혹시 일터에 도착하면 윗옷을 벗고 정식 유니폼인 난닝구 차림으로 일하는 형식인가? 아니다. 굳이 하라면 못할 리도 없겠지만 어쨌든 내가 아는 한 녀석은 그 쪽과는 확실히 인연이 없는 타입이다. 차라리 출장 호스트 쪽이 더 확률이 높을망정 .....................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다소의 뉘앙스 차이는 있지만 ‘몸으로 때우는 일’임엔 매한가지 아닌가! 저 얼굴에 저 몸매면 신이 내려준 소질 그 자체다! 어쩌면 이미 잘 나가는 호스트 클럽 넘버원의 자리를 꿰차고 있을 지도. 쏟아지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 섞이는 짙은 향수 냄새와 남녀의 웃음소리. 호스트들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아양을 떠는 떡칠 화장 아줌마들. 양복 주머니에 지폐를 꽂아 넣어주며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뺨을 쓰다듬고.. 다리를 꼬고 앉아 양손에 여자 손님들을 안으며 길게 담배 연기를 피워내는 넘버원.(=깡패시키로 추정) 아아..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내 이 년놈(!)들을 가만 두지 않으리! 적당히 외출 준비를 마친 깡패시키는 현관문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당부를 했다. “ 만약 멋대로 들어오면 경찰에 신고해. ” “ 야..; ” “ 그게 싫으면 어디라도 나가서 시간 때우던가. ” 여전히 저기압인 녀석은 그렇게 짧게 덧붙인 뒤 현관문을 나섰다. 홀로 남겨진 나는 멀뚱히 서서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 봉지를 덩그러니 든 채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을 하는 건지 확실히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영 수상하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정말로 호스트 일을 하는 건 아닐까? 문제는 상상도가 너무 자세하게 잘 그려진다는 데에 있다. 녀석은 평소에도 힘든 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부잣집 막내둥이 도련님이다. 게다가 생긴 게 워낙에 쌔끈하니 악세서리나 광택이 나는 실크 재질의 남방이 너무 잘 매치가 된단 말이다. 물론 녀석이 그런 취향이 아닌 관계로 여지껏 본 적은 없지만. 잠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결심을 굳히고 재빨리 봉지를 냉동실에 던져놓은 뒤 녀석의 뒤를 쫓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이름하야 ‘깡패시키 미행 프로젝트!’ 이건 절대 나쁜 의도로 하는 게 아니다!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걸려있긴 하지만 어쨌든 난 녀석의 남편(!!)이고 아내(!?)의 비밀을 공유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행여 이상한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거라면 애초에 뿌리를 뽑아놔야 한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미친 듯이 달린 지 5분쯤 뒤에야 겨우 녀석의 뒷모습을 시야에 들일 수가 있었다. 녀석은 다리가 일반인보다 월등히 긴 탓에 보폭 량이 엄청나다. ᅳᅳ;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녀석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나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재빨리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좋은 차 놔두고 어째서 인산인해의 지하철을 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도 조금 떨어진 칸으로 몸을 들여놓았다. 녀석을 쫓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 녀석은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는 존재였으니까. 지나던 사람들이 기본으로 한 번씩은 돌아본다. 젊은 여자와 아줌마들은 기본 두 번씩. 이거.. 애인으로서 기뻐해야 하는 걸까나.. ᅳᅳᄏ 뒤를 쫓으며 온갖 잡스런 생각을 다 해봤다. 마누라가 돈 번다며 노래방 알바 같은 거 나가면 남편의 심정이 이럴까. 물론 아직은 그저 내 짐작일 뿐이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란 게 모르는 거다. 귀한 아들이 나 때문에 차기 경영권까지 깨끗이 포기해놓고 몸을 파는(!) 신세가 됐다는 걸 알면 그 집 식구들이 날 죽이려고 달려오겠지. 아니면 깔끔하게 킬러 하나를 고용하던가. ᅳᅳ; 잠시 으스스한 생각을 하는 사이 녀석이 인파를 뚫고 내리려 하고 있었다. 또다시 쏜살같이, 그러나 조심스레 그 뒤를 쫓았다. 오오.. 이러니까 마치 범인을 쫓는 형사라도 된 기분이다. 이게 또 기분 캡인 걸~ “ 저어.. 학생 길 좀 물어봐도 될까? ” 에...? 갑자기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와 재빨리 시선을 내리니 구부정한 허리의 할머니 한 분이 무거운 짐을 이신 채 내 소매를 잡고 계셨다. 평소 부모님으로부터 예의바른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반사적으로 그 짐들을 받아들었다. “ 어이구. 고마워라.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네 그랴. ” “ 아.. 아닙니다. 그보다 어디까지 가세요? ” 눈으로는 서서히 멀어지는 깡패시키의 뒷모습을 쫓으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묻자 할머니께서 기다리셨다는 듯 꾸깃꾸깃한 종이 쪽지를 내미셨다. “ 여기 주소대로 가믄 되는디.. ” 연필로 쓰여진 글씨가 손때에 밀려 희미하게 지워져 있었지만 집중해서 보니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인천시.. 헉... 인천시면 여기서 짧게 잡아도 두 시간은 걸린다. 갈아타야 할 것도 많아 차마 설명만으로 혼자 보내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무거운 짐까지 한 가득.. 이미 무리들 속으로 사라진 깡패시키. 지금 달려가서 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까. “ 저..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잘 따라오세요. ” 그러나 결국 난 바른 생활 사나이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몸에 흐르는 정의의 피가 날 그렇게 재촉하고 있었기에. 몇 번이나 고맙다며 인사를 하시는 할머니께 일일이 아니라고 고개를 숙인 나는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다시 전철에 올랐다. 사실 나도 방향치라 쪽지에 적힌 자세한 위치를 찾을 자신은 없다. 그래도 일단 지하철로 어디까지 가는 지는 아니까 거기까지만이라도 모셔다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어디서 내려서 어디서 갈아타시고 또 어디서 내리고 어디서 갈아타시라고 종이에 적어 설명을 해드리는 것도 방법 중의 하나지만 역시 뒤끝이 안 좋다고 할까. 할머니의 보폭에 보조를 맞춘 나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여기 앉으세요! ” 자리가 나자마자 일부러 그렇게 큰 목소리로 권하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멈칫했다. 또다시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시는 할머니께 나 역시 진땀을 빼며 같이 고개를 숙였다. 뭐어.. 좋은 일을 해서 기분은 좋지만.. 그래도 역시 깡패시키의 비밀스런 아르바이트(?)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오늘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실패했지만 내일은 반드시 놈의 실체를 파헤치고 말리라. +_+ 결국 장장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바래다 드리고 또 두 시간을 걸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엔 이미 저녁 8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집을 찾느라 꽤나 고생을 했다. 처음엔 지하철역까지만 바래다드릴 생각이었지만 이왕 고생한 거 끝까지 가자는 생각으로 아예 집까지 찾아드렸다. 오랜만에 딸의 집을 찾은 할머니는 도착한 뒤 연신 고개를 숙이시며 인사를 하셨고 몇 번의 사양 끝에 어쩔 수 없이 음료수 대접을 받은 후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좋은 일도 좋지만 자주 했다간 몸에 무리가 갈 것 같으니 너무 남용해서는 안 될 것 같.. “ 나가. ” -!!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귓가에 떨어진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순간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녀석의 목소리엔 명백한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설마....... 들켜버린 걸까....? ------------------------------------------------------------------------------ 내 이름은 열매 <90> 흡사 펭귄의 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싸늘한 목소리에 잔뜩 쫄아붙은 나는 고개를 푸욱 숙인 채로 주섬주섬 신발을 벗었다. 물론 미행이란 건 절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할뿐더러 프라이버시 침해의 요소도 다분하고. 그래도 상황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마음만으로.. " 열매 왔니~? " 속으로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를 주욱 늘어놓고 있는데 등뒤로 상냥한 고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명확했다. " 늦게 다니면 안되지~ 우리 율이가 걱정하잖아~? " 이봐요. 늦게라니.; 아직 아홉 시도 안됐구만. ᅳᅳ; 그래도 일단은 고개부터 슬쩍 숙이는 바른 청년 열매. 내 몸에 정의의 피가 1리터만 모자랐더라도 세상 살기가 훨씬 편했을 텐데. 귀찮거나 자신이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열무녀석과 달리 난 너무 우직해서 탈이다. 손해 보는 성격이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아왔으니 얘기 끝난 거지. 사실 깡패시키가 옆에 떠억-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지금까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휘둘리며 살았을 거다. 뭐.. 지금도 한 녀석에게 한정해서만큼은 비스무리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_-; 내 인사에 살짝 눈웃음을 짓던 누님이 고개만 살짝 돌려 깡패시키에게 향했다. 신발을 안 신었는데도 180cm는 가뿐히 넘어 보인다. 피가 좋아서 그런가 이 집 식구들은 죄다 모델 급이네. 이런 걸 썰어브래.. 썰어브랜드라고 하던가.. ᅳᅳᄏ 긴 생머리를 스윽하고 쓸어 올리는 손가락이 유난히 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깡패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이렇게 늦었어? " 어이, 어이, 어이~ 그러니깐 아직 아홉 시도 안됐다니깐-! 이 집 식구들은 통금이 여섯신가? ᅳᅳ; 자기야말로 툭하면 외박하는 주제에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는 거냐. 샐쭉이며 툭 한 번 쏘아붙이려던 나는 순간 발끝에 닿는 낯선 느낌에 길게 비명을 질렀다.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뭔가.. 뭔가 축축한 느낌..! 조금 뜨겁고.. 축축하고.. 하여튼 무지 생소한 느낌-!! 그러나 한 쪽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발밑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 이유는.. " 이리와! 엑스칼리버! " " 왈왈-! " 축 늘어진 귀와 부들부들해 보이는 윤기 흐르는 털. 핑크빛 혀와 쉼 없이 흔들어대는 꼬리. 영광스럽게도 성스러운 '아더왕의 검'을 이름으로 한 견공 엑스칼리버의 등장이었다. " 어때? 귀엽지? 얘가 얼마나 곰살 맞은 줄 아니?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척척 달라붙는다구. 사교성 좋지?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자 누님의 등뒤로 깡패시키가 사인이 담긴 눈빛을 보내왔다. 안. 키. 운. 다. 고. 해. 일단 실질적인 집주인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저기.. 저희 집은 개는.. " " 어머, 엑스. 왜 자꾸 그리로 가? 열매 형이 그렇게 좋아? " 아.. 아니, 이놈의 개쉬키가 왜 자꾸 달라붙고 난리야. 저리가, 날 유혹하지 말라구. 난 개 따윈 싫다구. 냄새도 나고.. 그러니깐.. 아무리 귀여워도.. " 어머~ 열매 형이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네. 아이~ 그래도 핥으면 안 돼지~ " 어느새 축축해진 양말. 빨아놓은 게 없어서 이거 내일 하루 더 신어야 하는데..-_-; " 엑스! 자꾸 핥으면 안 돼. 아..! 그렇다고 물면.. " 누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앞으로 주욱 늘어난 양말 끝 부분에 자잘한 구멍들이 숭숭 나버렸다. 아아.. 내일 외출할 때 어쩌지.. 어쩔 수 없다. 예전에 잠시 사용했던 우유빛 스타킹(!)이라도 신을 수밖에. 신발만 안 벗으면 누가 알.... 아니다! 내일은 서윤양의 첫 과외가 있는데 선생으로서 체면이 있지, 우유빛 스타킹을 신은 선생님의 근엄한 수업 따위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휴우.. 어쩔 수 없군. 깡패시키의 양말을 빌릴 수밖에. 옷과 속옷은 따로 입기로 무언의 약속이 이루어졌지만 하루 정도라면 뭐.. 밤이면 합체(!)까지 하는 사인데 양말쯤이야.. " 그런 이유로 잘 부탁해- " 엉..? 잠시 합체하는 씬에서 얼굴을 붉힌 내 귓가로 발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빛나는 얼굴. 목표를 달성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짐을 덜었다는 의미인가. 물론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지만. 일단 엉망이 된 양말을 벗어든 나는 발을 휘휘 저으며 엑스-_-멍멍이를 멀리 쫓았다. 그러나 정말로 내가 마음에 든 듯한 엑스견공은 곧 다시 내 발 옆으로 돌아왔다. " 수작부리지 말고 당장 데리고 나가. " 그 곰살맞은 행동에 마음이 동하려는 순간 등뒤로 녀석의 썰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귀여움 따위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한 냉정한 눈. 말없이 선 채 그 차가운 눈으로 죽일 듯 누님과 엑스멍멍이를 번갈아 보고 있다. 이.. 이봐.. 아무리 그래도 멍멍이는 별로 죄가 없잖아..?; 양말이야 뭐.. 새로 하나 사면되는 거고.. 그러나 전해질리 없는 마음을 스스로 꼬깃꼬깃 접어넣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저희는... 개 싫어해요. "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마. 난 널 내 곁에 둘 수 없으니까. " 개는 냄새도 나고 털도 날려서.. 위생상으로도 좋지 않구요.. " 내 발을 적시는 너의 그 달콤한 혀도.. 비단처럼 보드라운 털도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으니까.. " 게다가 전 털 알레르기도 있어요.. " 당장이라도 무릎꿇고 널 뜨겁게 껴안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런 상상만으로도 난 그 녀석을 배신하는 것이 돼. "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키울 수 없을 것 같아요. "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미친 듯이 부비부비를 하고픈 충동을 손톱 끝으로 억누르며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당당히(?) 내 의견을 표출했다. 잠시 감았던 눈을 슬쩍 뜨니 조금 놀란 듯한 누님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변했구나. " " ....? " " 제법 할 말은 하네? " 역시 연극이었던 듯 금새 싸늘해진 얼굴로 작게 웃는다. 아아.. 다행이다. 이번엔 안 속아서. ᅮᅮ 방금 전까지 내 다리를 마구 부벼대던 엑스견공도 누님의 손짓 하나에 금새 태도를 바꿔 언제 그랬냐는 듯 떨어져 나갔다. 이야.. 그럼 저 똥개도 지금까지 연극을 해댄 거냐?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_=; 속으로 질려하며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갑자기 깡패시키의 초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런 이유니까 그만 돌아가. " " ....... " " 미끼를 내 걸 생각이었나 본데 그런 뻔한 속셈에 누가 속을 것 같아? " " 열매라면. " 뭣이여-!! 이 아줌마가 사람 알기를 보자기로 아네-!! 그딴 잡종 똥개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면 한 트럭이야-! 내가 뭐가 아쉽다고 그딴 똥개를-!! 열을 식히기 위해 목의 단추를 하나 하나 풀던 나는 뚜렷이 응시해오는 누님의 시선에 순간 멈칫했다. 마스카라가 엷게 그려진 눈매가 이보다 더 할 수 없을 만큼 서늘하다. 왜.. 왜 그러지..?;;; 불안해진 마음에 다시 단추를 잠그기 시작하자 푸훗-하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어젯밤에도 듬뿍 사랑 받은 모양이지? " " .....! " 그제서야 방금 전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시뻘개진 얼굴로 후다닥 대답했다. " 그.. 그게 아니라 이건 모기가..! " 쭈뼛쭈뼛 크로마뇽인이 뛰놀던 시대의 변명을 한 뒤 흘끗 반응을 살피자 누님이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 선 깡패시키 역시 창가로 시선을 옮겨 긴 한숨만 내쉬고 있다. 아, 그래요! 나 촌스러워요-!! ᅮ0ᅮ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리고 있자 그제서야 뻐꾸기 시계가 9시를 알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떨어진 말. " 열매.. 너 나랑 거래 안 할래? " 그렇게 말한 누님은 묘한 미소를 띄운 채 나와 깡패시키를 번갈아 보았다. ------------------------------------------------------------------------------ 내 이름은 열매 <91> “ 네엣-!? 모델이요-!!? ” 기차 화통 서른 두 개는 삶아먹은 듯한 목소리로 되묻자 두 사람이 동시에 미간을 좁히며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두 사람의 서늘한 반응에 순간 머쓱해진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작게 사과를 했다. 하. 지. 만. 이게 어디 놀라지 않을 일인가! 깡패시키면 몰라도 내가 모델이라니! 키도 170을 조금 넘는 수준인데다 팔 다리가 눈에 띌 정도로 긴 것도 아니다. 얼굴도 그다지 멋지지 않고... 굳이 따지자면 여자 쪽에 가까운.. “ 아..! ”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친 불길한 예감에 짧게 탄성을 내지르자 간파라도 한 듯 누님이 미리 대답을 해주셨다. “ 안심해. 여자 옷 입는 거 아니니까. ” 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일단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흘끗 깡패시키를 쳐다보자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이 내게 향했다. 폼새를 보아하니 미리부터 거절을 할 기세다. 뭐.. 솔직히 나도 그다지 할 마음은 없다. 누님이 제안하는 것이니 만큼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소심한 성격이라 남 앞에 서면 금새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굳어져버린다. 워킹하러 나갔다가 엎어지기라도 해봐라. 그게 무슨 개망신이겠는가. 슬슬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오르려는 걸 간신히 막으며 고개를 붕붕 젓자 이번엔 좀 더 달콤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어. 별로 어렵지 않으니까. 고급수준이 아니라니까. ” 그건 그 나름대로 다행이지만 여전히 수상한 냄새가 난다. 혹시 양손에 각각 배추와 마늘을 들고 찍는 농산물 전단지 모델을 말하는 게 아닐까. 농협 마크가 새겨진 로고 밑으로 ‘배추는 역시 xx배추! 신토불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촌스러운 문구가.. 그것도 일단 모델이라면 모델이다. 키나 외모도 그다지 상관없으니 나 같은 녀석이라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깡패시키 같이 번듯한 녀석이 언밸런스겠지. 결국 농산물 전단지 모델로 상상을 굳힌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 저어.. 죄송한데 그건 좀.. ” “ 일단 조건이나 한 번 들어보지 그래? ” “ 아...........네에.. ” 착하게 무릎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이자 누님이 피식하고 웃었다. 또다시 떠오른 생각지만 두 사람은 웃는 얼굴이 많이 닮았다. 웃어도 진심으로 웃고있지 않은 듯한 느낌이라던가.. “ 그래서..? 조건이란 게 뭔데? ” 잠시 텀을 두고 깡패시키가 삐딱하게 묻자 누님이 눈동자를 빛내며 대답했다. “ 이제 좀 더 의연해질게. ” “ 쉬운 말로 해. 이 녀석 못 알아들으니까. ” 이.. 이게..! 나도 다 알아 임마! 그러니까 의연해지겠다는 거 아냐-!! 눈을 부릅뜨던 나는 녀석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_-; 그 짧은 상황을 즐겁다는 듯이 지켜보던 누님은 긴 다리를 꼬며 기지개를 쭈욱 폈다. 역시 현역 모델이라 그런지 팔 다리가 무지 길다. 외국에서 활동을 한다는 얘긴 얼핏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 쪽 분야에 대해선 영 문외한이라 지금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그렇지만 문외한의 눈으로 보더라도 결코 범상치 않은 인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꼭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러니까... 분위기나 기합..? 뭐 그런 것들이. 조금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불편함을 느낀 나는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기.. 오렌지 쥬스 드릴까요? 깡... 율이는 포도쥬스? ” “ 야.. 누가 그렇게 부르래? 죽을래? ” 헉.. 입에 붙은 ‘깡패시키’를 후다닥 무마시키려던 차에 튀어나온 ‘율’이란 호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녀석이 살벌하게 날 노려봤다. 녀석이 ‘율’이라는 호칭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율’이라는 말에 이 정도면 ‘깡패시키’라고 불렀다간 그대로 가루가 되겠지. ᅳᅳ; “ 너희 아직도 서로 이름 불러? ” “ ......? ” “ 서방님이라던가.. 'honey'... 아니면 'sweetheart'라던가.. 한참 신혼이잖아? ” “ 시끄러우니까 나가. ” 평소보다 저기압 상태인 녀석이 짧게 말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운데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뻘쭘해 하는 나. 이놈의 한심한 이미지와는 대체 언제쯤에야 완벽한 이별을 고할 수 있을까. “ 두 사람 사이 훼방 안 할게. ” “ ! ” “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 “ ....... ” “ 더 이상 ‘너의 목숨보다 소중한 달링’ 괴롭히지 않을게. 이게 조건이야. ” ‘너의 목숨보다 소중한 달링’이란 부분에서 살짝 미간을 좁히던 깡패시키는 잠시 날 쳐다본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누님도 날 괴롭히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나 보구만. -_-; 순간적으로 심각하게 흘러가는 공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냉장고로 향하려는데 순간적으로 강한 힘이 내 손목을 덮쳐왔다. “ 앉아있어. ”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가려던 내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녀석이 그대로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 이.. 이봐 깡패시키..; 갑자기 왜 이래? 평소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건데? 엉? 무섭잖아 임마..; 나란히 앉은 채 두 사람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고 있자 잠시 후 누님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내 앞에서 애정 과시하는 거야? ” 그... 그런..;; “ 그래. ” 야.. 사람 너댓 명은 죽일 듯한 눈빛을 하고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애정을 과시하려면 좀 더 그윽하고 달콤하게 날 바라봐야 하는 거 아냐? 무.. 물론 그런 깡패시키는 또 다른 의미로 무서워서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만.; “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일단 하던 말 계속 할게. ” “ ....... ” “ 아까 그 조건으로 거래를 하고 싶어. 솔직히 나도 열매가 싫지 않고. ” 마찬가지로 속을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누님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두 사람 다 웃으며 태연히 살인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타입이라 저 달콤한 말들이 그다지 달콤하게 들리지가 않는다. 오히려 아까보다 오한이 심해진 듯한 느낌이..; “ 저기.. 오렌지 쥬스..; ” “ 미안한데 필요 없으니까 얘기나 끝까지 들어줄래? ” 아.. 예....ᅮᅮ 엄청난 기백에 놀라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옆에 앉았던 녀석이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쭈욱 당겼다. 시선이 마주치자 녀석이 아주 잠시 웃으며 말했다. “ 쫄지마. ” “ ....아..; ” “ 그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 무슨 모델을 하라는 건데? ” “ 이번에 내가 맡은 쇼의 컨셉이 ‘소년에서 남자로’거든. ” 제목 유치하다. ᅳᅳ; “ 유치하지? 내가 생각해낸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 줘. 어쨌든 컨셉에 맡는 모델을 구하는 게 꽤 힘들어. 특히 프로 모델들은 소년 역을 하기엔 하나같이 너무 크고 이미지가 강해서 말이야. 그래서.. ” 이봐요..! 근데 왜 그 대목에서 날 봐요?! 그니깐 내가 길이도 짧고 어벙해 보이니까 애들 역(!)하라 이거 아냐! 엉?? 가뜩이나 유희왕 판박이껌 사건 때문에 예민해져 있던 나는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눈을 부릅떴다. 물론 모델이란 멋진 단어에 호기심이 인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해서 프로들의 무대에 끼어 들 자신은 없다. 애들 역(?)이라서 싫다는 건 핑계라고 치더라도 내겐 절대 그런 배짱이 없다는 말이다. 행여 누님이 맡은 쇼에서 실수라도 했다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어느 날 아침 등굣길에 스리슬쩍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지도 모르는 거다. “ 내가 대신 하면? ” “ 물론 너도 같이 하는 거야. 제대로 된 ‘남자’ 역으로. ” 잠깐... 뭣이여!! 지금 그 말투는!! 그럼 난 뭐 변태 중인 개구리라는 거야 뭐야! =ᄆ=+ “ 난 한다고 안 했어. 멋대로 정하지 마. ” “ 그래서 제안하고 있는 거잖아. 강. 이. 율. 씨. ” “ 왜 나까지 해야되는 건데? ” “ 지후가 너 보고 싶대. 네가 참가 안 하면 자기도 안 하겠다고 해서. ” “ 그럼 애초부터 목적은.. ” “ 아니, 그런 이유도 있지만 아까 말했잖아. ‘소년’이 필요하다고. ” 멋대로 흘러가는 이야기에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조심스레 질문 하나를 던졌다. “ 저어.. 그런데 지후란 사람은 누구.. ” 동시에 내게 시선을 던진 두 사람의 얼굴은 명백한 씁쓸함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뒤에 입을 연 건 깡패시키였다. ------------------------------------------------------------------------------ 내 이름은 열매 <92> “ 정지후는 이 여자 남편 이름이야. ” “ ! ” 순간적으로 놀란 시선을 던지자 깡패시키가 중얼거리듯 짧게 덧붙였다. “ 완전히 당한 거지. ” “ 뭐야-!? ” 그 말을 들은 누님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역시 특이한 남매다. 의사인 맏형은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지갑에 가족 사진 대신 남동생의 사진을 넣어 다니는 위험한(!) 남자고 모델인 누님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남동생에게 상식 이상으로 집착하는 면모를 보이며 귀염둥이(?!) 막내는 가족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시니컬하게 성장한 특이체질(?)인 것 같다. 사랑이 너무 과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한 예랄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깡패시키가 물어왔다. “ 너, 할거야? ” “ 아.. ” 해야.... 할까..? 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여전히 번민과 싸우는 중의 나는 이렇다할 대답을 내리지 못한 채 고개만 갸웃거렸다. 승낙한다→ 누님의 괴롭힘에서 해방된다. 거절한다→ 괴롭힘이 계속된다. 만약 누님이 약속만 지켜준다면 간단한 룰이 성립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아무리 하루의 쇼라고 해도 준비기간이며 연습이며.. 무엇보다도 난 무대체질이 아니란 사실이 크다. 간혹 사람 많은 장소에 가면 수많은 시선에 당황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옆에 있는 어느 잘난 녀석 때문이지 내 자체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존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정도의 시선에도 당황하는 내가 수많은 관객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시선을 끌어낼 수 있을까. 차라리 언젠가처럼 인형 옷 입고 관광버스 춤을 추는 조건이면 미련 없이 승낙을 했을 거다. 잠시 머리를 싸안고 고민하던 나는 흘끔 눈치를 살핀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저기...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 “ 나 이번 쇼 성공시키지 못하면 이혼 당해. ” “ !! " 나오던 말이 순간 냉동된 채 잘려나갔다. 그 엄청난 말도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저 시름에 빠진 듯한 표정-!! 어쩌면 아니, 아마도 80%는 연기일 테지만 그래도 단호하게 거절할 수가 없다. 정말로 이혼이라도 당한다면.. 꼭 내 탓인 것처럼 되잖아..?? 물론 짐작 가는 건 하나 둘이 아니다. 골초인데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에.. 지나치게 화려해서 이 남자 저 남자 꼬일 타입이고.. 무엇보다 저 지x같은 성격!! 나였으면 진작에 이혼했다. 아니,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거다. 일단 난 여왕님 타입의 여자는 질색이니까. 그래도 뭐.. 미인이니 보는 건 싫지 않지만. 다소 모순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누님이 엑스칼리버를 품에 안으며 말을 이었다. “ 그 남자. 정말 내 남편이지만 멋지다구. 놓치기엔 아까워. ” “ ....... ” “ 섬세하고 매너 좋고.. 무엇보다 얼굴이 내 타입이고. ” 남편 자랑은 다른 데 가서나 하시지. 아줌마. ᅳᅳ 쳇.. 누군 남자(!) 없는 줄 아나? 그럼 나도 어디 한 번 깡패시키 자랑이나 한 번 해볼까? 음.. 그러니까 깡패시키는 일단.. 쿨하다고.(무섭지만) 가끔 자상하고(평소엔 냉정하지만) 날 아껴주고(침대에선 맨날 울리지만) 손가락도 무지 예쁘고(그 손으로 툭하면 내 볼을 잡아당기지만) 목소리도 끝내주는 저음이고(덕분에 살벌하지만) 테크닉(!)도 끝내주고(어쩐지 전직이 의심스럽지만) ..................암튼 기타 등등!! 어디 한 군데 빠질 데가 없는 남자라구! 오히려 너무 완벽해서 부담이 되는 거지.. -_-; " 사실 요즘 지후랑 별거 중이거든. 아, 남편이 네 살 연하라 이름을 부르는 게 버릇이 돼서. “ “ 아.....네. ” 짧은 덧붙임 덕분에 사실 방금 전까지 품고 있던 의문점이 하나 사그라들었다. 그나저나 네 살이나 어리다니.. 혹시 영계킬러 아냐? 정말 깡패시키의 말대로 당한 건가? ᅳᅳ;; “ 그 남자 바이거든. ” 에...!? “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 전에 나보다 이율이를 더 좋아한 것 같아. ” “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 누님의 말을 단번에 가르며 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갈한 얼굴 위로 불만의 기색이 가득하다. 그나저나 정말 마성의 남자다.; 나 이런 녀석과 계속 사귀다가 언젠가 등에 칼맞고 죽는 거 아닐까.;; 다소 을씨년스러운 상상을 하며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다시 이어지는 누님의 말에 귀를 세웠다. “ 이번 쇼는 나와 지후가 공동 책임자로 일하게 됐어. 잘되면 화해의 기회가 생기는 거고 안되면 쨍- 하고 깨지게 되겠지. ” ‘쨍’부분을 강조해서 설명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누님은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기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다. 이제야 겨우 해방인가 싶었지만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승낙한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누님도 재결합한다. 거절한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독기를 품은 누님에게 엄청난 구박을 받기 시작한다. 협박인지 부탁인지 모를 제안에 결심을 굳힌 난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대답했다. “ 할게요. ” 두 사람이 동시에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이것도 연기인지 모르겠지만 누님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짧은 침묵을 깨고 청량한 하이 톤이 들려왔다. “ Excellent Choice. "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다. 처음으로 보는 허물없는 미소. 이번에 놀란 건 나였다. 아직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나쁜 결정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전단지 광고도, 여자 옷을 입는 것도 아닌 진지한 역할인데다 조건도 나쁘지 않다. 늘 내 문제 때문에 힘들었을 깡패시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고 말 테다. 그동안의 어리버리한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버릴 만큼 멋진 남자가 되어서. 아.. 아니 일단은 소년 역이지만.; 변태중인 개구리라고 해도 좋다. 그래도 언젠가는 진짜 개구리가 될 테니까. 처음으로 웃는 얼굴로 누님의 뒤를 배웅한 나는 현관문을 닫은 뒤 조심스레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멋대로 결정한 일에 결국은 녀석까지 포함되는 거니까. 혹시라도 내 독단적인 결정에 화가 났다면.. “ 너.. 할 수 있겠어? ” 다행히 마주한 시선은 온화한 빛을 띄고 있었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듯한 기색까지 담겨져 있다. 결국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순순히 따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든든한 서포터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낯간지러운 말이 떠올라 잠시 망설이던 나는 모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 걱정 마. 열심히 할 테니까. 내가 이래봬도 성실 빼면 시체잖냐. ” “ ....... ” 일부러 생글거리며 말하는데도 녀석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다. “ 절대 네 발목 안 잡도록 노력 할 테니까.. ” “ ............상관없어. 잡아도. ”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짧게 말한 녀석이 피곤하다는 듯 대충 머리를 쓸어 올린 뒤 부엌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냉장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뭔가 부스럭 부스럭.. 평소 좀처럼 냉장고 문을 여는 일이 없는 녀석이라 갑작스레 궁금해진 내가 귀를 바짝 세우려는 순간 녀석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떤 거야, 아까 네가 사온 거. ” “ 응...? ” “ 나한테 주려고 했던 거 있잖아. 아이스크림. ”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나는 입 끝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달려갔다. 꼭 그 아이스크림이 아니라도 상관없을 텐데 일부러 물어보다니.. 단 걸 싫어하는 녀석의 입맛을 알기에 일부러 남겨놓았던 녹차 맛 아이스크림을 찾아 건네려던 나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가장 달콤한 걸로 바꿔 건넸다. 순간 잠시 멈칫하던 녀석은 결국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 이번에 새로 나온 거래. 맛있지? ” 일부러 발랄하게 묻자 한 입 베어 문 녀석이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아아.. 그나저나 지후라는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나.. 마지막으로 남은 녹차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벗겨내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누군가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 내 이름은 열매 <93> 현재 시각 01:47(pm) 약속 시각 01:00(pm) 웅성거리는 연인들 사이에 혼자 뻘쭘히 선 채로 시계만 흘끗거리며 쳐다보던 나는 멀리서 달려오는 낯익은 실루엣에 얼굴을 굳히고 눈을 부릅떴다. “ 미안~ 미안- ” “ 죽을래? 이 새꺄!! ” 미리 준비했던 대사를 읊자 동생 녀석이 내 어깨에 턱하니 팔을 걸치며 웃었다. “ 미안하다니까. 길이 막히는데 어쩔 수 없잖아. ” “ 요즘엔 지하철도 길 막히냐-!? ” “ 바보같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보다 배 안 고파? ” “ ......................................................고파. ” “ 아, 그래? 그런데 어쩌지? 난 먹고 나왔거든. ” 이.. 이 잡것-!!! =ᄆ=+ 화창한 일요일 아침 갑작스럽게 울리기 시작한 전화기. 요 몇 일 과외 때문에 지쳐있던 나는 모처럼의 단잠을 즐길 생각이었으나 수화기 너머로 시끄럽게 구는 열무녀석 때문에 결국 이렇게 불려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늦어?? 게다가 점심까지 먹고 나왔다고-!!?? 약속 시간이 한 시라 당연히 같이 먹게될 거라고 지레짐작한 내가 바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보통 이런 시간에 약속을 잡을 경우 그렇게 하지 않나? 꾸루룩거리는 배를 감싸안은 채 인상을 최대한 구기며 분위기를 잡고 있자 열무녀석이 어딘가를 향해 앞서 걷기 시작했다. “ 야.. 어디가? ” “ 점심 먹으러. ” “ 너 먹었다며? ” “ 형 먹으라고. 난 음료수나 마시며 앉아있을 테니까. ” 녀석의 호쾌한 미소에 입을 삐쭉 내밀자 마른 손가락이 내 손목을 잡고 끌기 시작했다. 낯짝이 두껍다고 해야할까, 사교성이 좋다고 해야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풀고 순순히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위치를 전환한 손. 다 큰 남자 둘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걷는 형상이 되자 그와 동시에 주변을 지나던 여고생들이 꺄아꺄아거리며 핸드폰과 디카를 꺼내들고 우리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호... 혹시 엽기 사이트 같은 데에 올릴 생각인 걸까? ᅳ므;; 당황한 내가 재빨리 손을 빼려고 하자 열무녀석이 더욱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 남의 시선 신경 쓰지마. 그래서 모델은 어떻게 할래? ” 야! 지금 여학생들 아가씨들 아주머니들이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어딘가로 전화까지 걸며 쳐다보는데 신경 안 쓰게 됐냐??!! 이건 대범한 게 아니라 무신경한 거야 이 시캬!!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왔지만 이 상황에서 목소리까지 내면 반응이 더 커질 것 같아 억지로 입을 다물고 속도를 올려 걷기 시작했다. 그런 날 옆에서 바라보며 열무시키가 피식 웃는다. 그와 동시에 터지는 여학생들의 함성.. 아아.. 지구를 떠나고 싶다... 거의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우리들은 일단 사람들이 적은 후미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이제 손 좀 놔.;; ” “ 형제끼린데 뭐가 어때서? ” 그렇게 태연히 대답한 녀석은 잔뜩 굳은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잠시 웃은 뒤 손을 풀었다. 이젠 아주 동생놈한테까지 놀림을 받는구나 이 불쌍한 놈아.. ᅮᅮ 사실 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볼을 쭈욱 늘리며 묘한 미소를 띄우는 깡패시키나 끝까지 ‘체리보이’라 부르며 따라다니던 이류놈이나 툭하면 농담을 던져 날 당황하게 만드는 동생놈을 포함한 주변인들의 심리를. 난 정말이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다. 만약 그 범위를 벗어난 게 있다면 깡패시키와 사귄다는 사실 하나겠지. 어쨌든 지극히 평범한 사상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남자인 나를.. 왜 다들 하나같이 놀려먹지 못해 안달인 건지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 뭐 먹을래? ” “ .............순두부찌개. ” 일단은 급한대로 빈속을 달래기 위해 순순히 대답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날 바라보며 입가를 누그러뜨리는 동생놈. 마치 ‘어이구, 우리 새끼. 뭐 먹구 싶어?’라고 물은 부모가, 자식이 ‘짜장면..’이라고 대답하는 걸 보고 기쁜 듯 웃는 모양 같지 않은가. 이 경우도 내가 잘못한 건가? 난 그냥 평범하게 대답했을 뿐인데.. 또다시 혼란스러워지려고 하는 쓸데없이 생각만 많은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 녀석이 물컵을 조금 비운 뒤 다시 입을 열었다. “ 모델 일 수락했다고 했지? 연습은 언제부터야? ” “ .........다음주 수요일. ” “ 과외 아르바이트는 어쩔건데? ” “ 과 친구한테 넘길 거야. ”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꾸꾹 누르며 대답했다. 사실 서윤양의 과외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첫인상과 달리 나름대로 성실한 자세로 임했고 특별히 나를 경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수업 중간 중간마다 깡패시키의 신상을 묻는 걸 제외하면 지극히 무난한 정도..? 급료도 나쁘지 않고 환경도 좋아 솔직히 남 주기엔 다소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게 사실이다. .....그래도 일단 모델 건을 수락한 이상 방법은 없는 것이니.. 물론 보수는 적지 않을 거라는 귀띔도 있었다. 아.. 이러니까 꼭 내가 무슨 돈에 찌든 영감 같구만.. ᅳᅳ; 주문되어 나온 음식들을 쭈욱 한 번 살피던 나는 수저로 천천히 국을 젓기 시작했다. 고양이 혀라 지금부터 식을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 그보다 너 오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날 부른 거냐? ” “ 응? 아아... 원래는 태진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그 녀석이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 아항~? 그러니까 난 그냥 땜. 빵. 용이었다 이거구만? 엉? ᅳᅳ+ 또다시 불쾌해지려는 기분을 억지로 다잡으며 일단 차가운 나물부터 우적대며 먹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남의 기분 좋은 휴일을 망쳐놓은 주제에 뻔뻔스럽긴. 약속시간에 한 시간 가까이 늦어놓고도 헤헤거리질 않나. 자기 혼자 배까지 든든히 채워서 오질 않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형님을 데이트 땜빵용으로 쓰질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자연스레 입이 나온 모양인지 녀석이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 형. 여전히 귀엽네. ” 이런 잡것이.. =_=+ “ 그나저나 정말 무슨 생각으로 승낙한 거야? ”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녀석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여우같은 인상을 주는 곱상한 얼굴 위로 호기심 반 걱정 반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국을 휘젓던 나는 뜨거운 김을 후후 분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어른에겐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 ” “ 푸훕---!!! 아.. 미안, 미안. ” =_=+ 저게 지금 날 비웃은 거 맞지? 일부러 들리도록 이를 부득 갊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 일행. 덕분에 ‘어서 오세요-!’라는 우렁찬 인사소리에 초라하게 묻혀버리고 말았다. 아아.. 정말 되는 게 하나 없는 날이다...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쉰 뒤 식어버린 국을 입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이럴 땐 체념이 제일 좋은 약이다. “ 패션쇼 어디서 하는데? ” “ ...........무슨 호텔이라고 들었어. ” “ 나 구경가도 되지? ” “ -!! ” 열심히 입안에 밥을 퍼 나르던 손이 딱 멈춘다. “ 정확한 날짜랑 시간, 장소 알게되면 꼭 알려줘. 참, 태진이도 같이 갈 거야. ” “ 아..........안 돼!! ” “ 왜? ” 당황한 내가 씹다말고 소리치자 밥풀 몇 개가 그대로 녀석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주위 사람들의 인상이 구겨진다. 아.. 하하.. 이거 참 민망하구만..;;; 일단 입안에 담았던 걸 최대한 빨리 씹어 삼킨 나는 물을 두어 모금 마신 뒤 다시 말을 이었다. “ 고3이 무슨!! 공부해야지!! ” “ 나 내신 1등급이야. ” 크윽..! “ 애.. 애들은 어른들 노는 데 오는 거 아냐!!;;; ” “ 짜증나니까 장난치지 말고 빨리 이유나 말해. ” 이.. 이게-!! =0=++ 그 외에도 별 허접한 변명거리를 열심히 늘어놓아봤지만 녀석은 애초부터 들을 생각이 없었던 듯 다리를 꼰 채로 딴청만 부릴 뿐이었다. 이런 걸 소귀에 경 읽기라고 했던가. 그래..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형만한 아우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래서.. “ ..............알았어. 알았으니까 절대 엄마 아빠나 친척들한텐 말하지 마!! ” “ OK. " 난 형이다. 그래서 져준 거다. 절대 동네 사람들 다 불러온다는 협박에 굴한 게 아닌 거다. 난... 내가 형이니까... 흡족한 듯 웃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정말 눈앞이 캄캄해진다. 잘못하면 아주 동네방네 개망신을 당하게 생겼다. 이제 이걸 어쩐다냐... 흑.. ᅮᅮ ------------------------------------------------------------------------------ 내 이름은 열매 <94>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모처럼 일찍 돌아와 방에서 레포트를 작성하고 있는데 별안간 거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치던 걸 그대로 두고 다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내 눈에 들어온 건.. 소파 구석에 둥글게 몸을 만 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화면 가득 시퍼런 여자의 얼굴이 촌스러운 각도로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물론 낡아빠진 효과 음 역시 빠지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다. 순간적으로 허탈해진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녀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꽤나 심하게 놀란 듯 내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눈을 꼭 감고 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진 나는 다시 한 번, 이번엔 좀 더 진지하게 브라운관을 응시했다. 납량 특집으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분장과 조명. 배경음과 대사는 너무 식상해서 짜증이 다 날 정도다. 대체 이런 게 뭐가 무섭다는 건지 나로선 이해불가다. 결국 해답을 찾는 걸 포기한 나는 녀석의 옆에 앉으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한동안 귀를 막은 채 눈을 감고 있던 녀석이 그제서야 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자세를 풀었다. 날 보더니 놀라는 눈치다. 아니.. 창피해하는 건가. 얼굴이 빨개졌다. “ 어... 언제.. ” “ ............무서우면 애초에 보지를 마. ” 딱딱한 톤으로 말하자 녀석이 무안해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변명을 해왔다. “ 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잠깐 놀라서..!;; ” 훤히 보이는 변명을 차마 더 잇지 못 하고 입을 다문다. 옆에서 적나라하게 목격 당한 걸 안 이상 여지가 없다고 체념이라도 한 걸까. 왠지 웃음이 나온다. “ 왜.. 왜 웃어?!; ” “ 그냥. ” 짧게 대답하자 녀석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위축된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억누르고 있던 가학성을 부추긴다. 보통은 속으로 웃는 선에서 끝내지만.. 작성하다 만 레포트를 잠시 떠올리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녀석의 뺨에 가져다 댔다. 한 시간의 유예라면 어떻게든.. 사내 녀석치고는 지나치게 보드라운 뺨을 가만히 쓸어 내리자 움찔거리는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 반응이 재미있어서 이번엔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 본다. “ 왜... 왜..?; ” 장난인지 진심인지 확실치 않은 내 의도를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녀석이 더듬더듬 물어왔다. 당황하는 그 표정에 점점 더 진심이 되어 가는 마음.. 충동은 곧 수순을 밟고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꿈뻑이며 쳐다보는 눈가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녀석이 자연스레 눈을 감는다. 그래도 조금 굳은 얼굴은 여전히 내 의도를 묻고 있는 듯 하다. 눈을 감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있는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특별히 예쁜 얼굴인 건 아니다. 얼굴만이라면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중간 정도.. 물론 남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상향조정은 되겠지만. 수수한 듯 하면서도 청결한 인상을 주는 얼굴 위로 어리숙함이 덧그려져 있다. 희로애락이 풍부하게 펼쳐지는 표정은 마치 티 없는 유리 같다. 아마도 그 점일 것이다. 나와 다른 녀석의 순수함에 자석처럼 끌리는 것일 거다. 여전히 긴장한 채.. 그럼에도 우직하게 눈을 감은 모습에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이틀 전의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거둬들였다. 평소보다 길게 끈 밤은 온통 녀석의 짙은 헐떡임으로 채색되었다.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도를 넘어선다는 자각도 있었지만 끝내 멈출 수 없었던 건 굳이 변명하자면 절반쯤은 녀석이 이유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은 원망스러워하는 듯한 눈빛과 고른 복숭아 색으로 물들여진 뺨은 더할 수 없이 선정적이었다. 평소 자신하던 내 이성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큼. 또다시 동하려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아직까지도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 아... 아야-!!; ” “ 더는 없으니까 눈 떠. ” 내 말에 아마도 습관처럼 다음 단계를 기다렸을 녀석이 홍당무가 됐다. 금새 하얗게 됐다가 파랗게 됐다가 빨갛게 됐다가.. 사람의 얼굴색이란 게 변화무쌍하다는 걸 녀석을 통해 배우고 있다. 그 변화가 신기해서 가끔 나도 모르게는 사이 진지하게 쳐다보게 될 때가 있다. “ 무서워? ” “ ...? ” “ 아까 비명 질렀잖아. ”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은 그제서야 이해한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지금도 뭔가 변명거리를 생각하고 있겠지. 만약 결정이 났다면 천천히 입을 열 것이다. 뻔히 보이는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 그.. 그냥 뭐.. 별로 얘기가 무서운 건 아닌데 갑자기 이상한 음악이 나오니까..; ” “ ....... ” 대답 없이 쳐다보자 또다시 흥분하기 시작한다. “ 그.. 그러니까 난 원래 귀가 좀 민감해서!! 내.. 내가 무슨 애냐? 저딴 게 뭐가 무섭다고!!;; ” 이번엔 못이기는 척 시선을 떼 봤다. 그래도 여전히 얼굴에 달라붙은 시선. 보통 사람이 흘끔거리며 쳐다본다면 마주 노려보겠지만 녀석만은 예외다. 아마도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근본은 조금 더 깊은 것. 간단히 말해 ‘싫지 않으니까’다. 채널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또다시 기분 나쁜 비명이 들려왔다. 이번엔 선명하게도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온 것 같다. 그와 동시에 움직이려던 다리가 허공에 멈춘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보니 어느새 양손으로 내 다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또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그 자리에 섰다. 언젠가 녀석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 ‘ 네가 없으면 난 더 이상 내가 아니야 ’ 저 붕어 기억력의 녀석이 지금까지 그걸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분명 내 진심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따위 간단히 초월해버릴 만큼 깊은 고백-. 바보 같은 정도로 착하고 소심하고 어리숙한 녀석이지만 결국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의 취향이 특이하다는 걸 자각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 처음 녀석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표명했을 때 같이 어울리던 녀석들이 일제히 웃었다. 비웃음의 성질이 아닌, 농담이라고 치부한 뒤에야 나오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굳이 진심이라고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그대로 있었지만 사실은 나 역시 약간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 왜 이 녀석일까. 라는. 여자는 차고 넘칠 만큼 많았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잠시동안의 유흥쯤으로 여겼다. 쉼 없이 중얼대는 작은 입술이 묘하게 흥미를 끈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진심이 된 건. 결코 나쁘지 않은 기억력으로 찬찬히 돌이켜봐도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가 없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이 맞닿았다. 여전히 흘러나오는 식상한 여자의 울음소리를 막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귀를 막은 녀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날 올려다보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벗겨내면 훤히 드러날 지난밤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붉은 흔적. 저 어린아이 같은 얼굴과의 갭은 역시 엄청나다는 생각을 해본다. 잠시 녀석과 시선을 마주하던 나는 문득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녀석은 갑작스런 내 행동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잠시의 텀을 둔 뒤 순순히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뻗어나간 충동- 겹쳐지는 입술 끝으로 달콤한 감촉이 피어오른다. 살며시 한 손으로 감싼 가느다란 목으로 조금씩 빨라지는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1/3 가량 남은 레포트는 꽤나 높은 점수가 걸려있어서 이틀 째 별도의 휴식시간 없이 붙잡고 있는 중이다. 내일과 모레 다른 일로 스케줄이 잡혀있으니 오늘 안으로 끝내야 마감 일에 무사히 제출 할 수 있을 터다. “ 으..ᄆ....... ” 녀석이 달콤한 콧소리를 내며 살짝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겨우겨우 떨어진 입술을 혀끝으로 핥은 뒤 새빨개진 귓가를 손으로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순간 머릿속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이틀 전 격한 밤을 보낸 탓에 적은 양이지만 출혈이 있었다. 평소라면 주사 한 대 맞는 것조차 엄살을 피웠을 녀석은 끝끝내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확실히 시간을 둘 생각을 하고 있다. 분명 나는 녀석의 ‘수컷’이기 이전에 ‘연인’이니까-. 흘끗 돌아본 녀석은 이번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덕분에 붉어진 귓가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말없이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직전에 쓸어 담았다. 보통 사람들보다 배는 소심한 녀석이라 섹스에 있어서는 늘 소극적인 면모만을 보이고 있다. 감도는 좋지만 의도적인 반응은 한심할 만큼 서투르다. 하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허리를 흔들도록 만들겠지만 지금은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덜. 익. 은. 열. 매’도 내겐 꽤나 달콤하게 느껴지니까. 마지막으로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나는 흡사 박제처럼 굳은 녀석을 잠시 내려다본 뒤 방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또다시 짧은 비명이 터진 건 불과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속으로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고정시킨 나는 잠시 텀을 둔 뒤 막힘 없이 화면을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머리 속으로는 역시 녀석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확인하듯 짧게 떠올리며. 아무래도 유예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듯 하다. ------------------------------------------------------------------------------ 내 이름은 열매 <95> 드디어 연습이 시작되는 첫날의 아침이 밝았다. 쇼가 진행되는 당일이 아님에도 한껏 긴장한 탓에 전날 밤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조금 붉어진 눈을 한 채 침대 맡에 앉았다. 연습은 오후부터라고 했으니 몇 시간의 여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 더 자는 건 무리일 듯 싶다. 어제 저녁 깡패시키에게서 캐낸 정보에 의하면 이번 쇼에 참여하는 모델 중 상당수가 유명 인사라고 한다. 더불어 제목이 그런 고로 남자 모델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스탭들과 총괄하는 책임자는 여자이니 너무 굳어있지 말라는 간단한 주의를 받았다. 뭐.. 여자들 앞에만 서면 화석이 되는 건 사실인지라 변명할 여지도 없고.. 흘끗 시선을 옮겨 옆으로 향했다. 늦게까지 레포트를 작성하느라 새벽녘에야 잠든 깡패시키는 지금 현재 내 옆에 곤히 잠들어있다. 평소 늦잠을 자는 일이 없는 녀석이기 때문일까.. 이것도 나름대로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조금 붉은 눈을 한 채 고개를 숙여 녀석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이 녀석 얼굴이 잘생긴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몇 번을 봐도 같은 소감이다. 얼굴 하나만으로도 밥 벌어먹고 살 놈.. ㅡㅡ; 같은 남자로서 조금... 아니, 우라지게도 부럽다. 아주 배가 아파 돌아가실 만큼. 괜시리 심술이 난 내가 인상을 구기며 혀를 내미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 ...........뭐 하는 거냐? " 에.......... 에...........;; 순간 당황한 내가 뭐라고 채 변명을 하기도 전 녀석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슴이 콩닥콩닥해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자 잠시 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좀 더 자. " " ......? " " 눈이 빨개. " 아아.. 내가 자기 잠든 얼굴을 훔쳐(?)보며 메롱(;)을 한 죄(!)따윈 가볍게 넘길 만큼 내 걱정을 하.. " 혹시 눈병인 거면 옆방으로 가고. " 이.... 이런 잡것이.. ㅡㅡ+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별로 쫓아낼 생각은 없는 듯 녀석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긴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침대에 앉은 채의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 어제.. 몇 시에 잤어? " " .........네 시 조금 넘어서. " 녀석이 짧게 대답하며 헐렁한 티셔츠에 팔을 꿴다. 그 대단치 않은 행동마저 cf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건 왤까나... 녀석이 옷을 갈아입는 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 뻐꾸기 시계가 울려왔다. 뻐꾹...뻐꾹...뻐꾹......총 아홉 번. 나야 일상이지만 녀석으로 따지면 엄청난 늦잠이다. 과제가 그렇게 많았던 건가..... .........!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황급히 일어나 옆방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아니,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다짜고짜 책상 앞으로 달려들어 깨끗이 정리된 서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뭔가 어려운 단어들의 조합... 복잡한 설계 도면들.. 그리고... " 이... 있다-! "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나는 마치 신기루인양 눈을 껌뻑이며 그것을 쳐다봤다. " 이번 한 번이야. " 어느새 등뒤로 다가온 녀석이 팔짱을 낀 채로 냉정하게 말했다. 심플한 티셔츠가 넓은 어깨에 감겨들어 근사한 실루엣을 강조하고 있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잠시 정리된 서류를 훑어보던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 진짜.... 했네. " " 이번만이야. " 딱딱하게 말을 끊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선은 정면으로 날 향하고 있다. 어젯밤 늦게까지 영어문제들로 골치를 앓던 나는 반 농담 삼아 녀석에게 어리광을 부렸던 것이다. 감기 기운인지 몸이 영 무거워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대신 좀 해주면 안되겠냐고.. 녀석의 반응이란 볼 것도 없이 냉정했다. '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차가운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다시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옮긴 것이다. 뻘쭘해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아도 바쁜 통에 내 말을 장난으로 인식해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엔 많이 서운했다. 설마.. 새벽 네 시까지 안 자고 해줄 줄은 정말 상상조차 못했으니까. 깔끔하게 워드로 작성해서 출력한 것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정확할 것이다. 문제라면 너무 제대로 해가서 교수님한테 들통이 날 확률이 높다는 것 정도랄까..; 반쯤 농담으로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종이 뭉치를 양손으로 꼭 잡았다. " 내일까지 제출이라고 했지? 학번하고 이름 써놨으니까 그냥 내도 될 거야. " " .......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고 앞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체향이 가까이에 퍼진다. " 갑자기 왜 그래? 많이 아픈 거면 스튜디오에 연락해 둘 테니까.. "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녀석의 긴 손가락을 잡았다. 정말.. 냉정한 건지 다정한 건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는 녀석.. 정말 장난으로 받아들였다면 굳이 밤을 새가며 대신 해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왼쪽 손에 들린 종이뭉치의 무게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내 반응을 살피려는 듯 말을 멈춘 녀석이 다른 쪽 빈손을 들어 천천히 내 뺨에 댔다. 아아... 또 꼬집히는 건가, 하고 눈을 꼭 감는 순간.. " 울지마. 이런 걸로. " 라는 짧은 말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아아.. 정말 뭐냐... 이건... 레포트 하나에 감동해서 아침부터 질질 짜고 있는 흉한 꼴을 감추기 위해 후다닥 욕실로 달리기 시작한 내 등뒤로 녀석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넌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야, 라는 뜻이 담겨있을.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을 흩뿌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왜 이렇게 감수성이 예민해진 걸까 하고. 녀석과 같이 있으면 나는 강해지는 걸까.. 아니면 약해지는 걸까.. 짧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서자 녀석이 타월을 주워들며 날 스쳐지나갔다. " 제대로 말리고 있어. " " 아.... 응. " 욕실 안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늠름하게 보인다. 나.. 레포트 하나에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것일지도..; 그렇게 평소보다 일찍 외출 준비를 마친 우리는 오랜만에 단 둘이서 외식을 했다.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오늘은 특별히 까르보나라를 주문했는데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느끼하지는 않았다. 흘끗 쳐다본 녀석은 주위의 쏟아지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얼마만이더라.. 이런... 이런... 데....이트...? 순간 화르륵 붉어진 뺨의 체온을 느끼고 재빨리 물 컵을 집어들어 한꺼번에 들이켰다. 유혈사태까지 일으키며 합체하는 주제에 겨우 데이트 정도로 부끄러워하다니 스스로도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어쩌겠는가. 생리현상인 것을. 어쩐지 이런 건전한 연애 쪽이 더 창피하게 느껴지는 걸.. 뭐.. 그렇다고 우리가 그다지 난잡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일이 많을 땐 몇 일 동안이고 내 몸에 손 하나 대지 않는 이성적인 녀석이라 대놓고 짐승(;)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없다. 하드한 밤을 보낸 뒤엔 내 몸을 생각해서인지 얼마 동안은 청렴한 선비 같은 얼굴을 유지하기도 하고. 강이율..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나의 남자'라고 해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분명 지금 녀석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나일 텐데도. 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녀석이 잠시 포크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 걱정 돼? " " .....? " " 긴장한 얼굴이야. " 아..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나는 다시 포크에 새하얀 면발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 " 나름대로 목소리 톤까지 바꿔가며 위장을 시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담백했다. " 내가 걱정 돼. " " ....! " " 일의 특성상 특이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일일이 반응할 것 없이 네 할 일만 하면 돼. " 그게 말이 쉽지.. 여전히 긴장으로 뻣뻣해진 고개를 억지로 숙인 나는 '응'이라고 짧게 대답한 뒤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잠시 동안 달라붙는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연습할 장소로 정해진 건물은 내 상상보다도 훨씬 컸다.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치 다른 인종처럼 크고 늘씬하고 인형 같았다. 더러는 외국인도 눈에 띄었는데 어찌나 이목구비가 뚜렷한 지 중간중간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바짝 긴장한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은 깡패시키가 눈길로 날 재촉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가자 나 역시 재빨리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폭의 차이란 곧 다리 길이의 차이라고 했던가.. ㅡㅜ 건물 내부는 외부와 달리 심플한 느낌의 것이었지만 인테리어 자체가 잘 되어 있어서 그다지 단조로운 느낌은 받지 못했다. 조명이 조금 환하다는 것 정도가 일반 건물과의 차이점이랄까.. 지나는 장신의 미남미녀들이 한번씩 이쪽에 눈길을 주며 미소지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전혀 진정이 안 된다.;; 콩닥콩닥.. 나 여기서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100편은 채워야 뭔가 이룬 기분이라도 날 텐데.. 쿵쾅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문지르며 짧은 한숨을 살짝 내쉬어 봤다. 그리고, 그 때였다. " 강...........이율....? " 머리 위로 들려온 저음의 미성에 천천히 고개를 드니.. 긴 계단의 끝에서 한 장신의 남자가 우리를... 아니, 깡패시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눈을 하고서. 누구......지....?; ------------------------------------------------------------------------------ 내 이름은 열매 <96> 몇 초간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깡패시키였다. " 오랜만이네요. 매.형. " 그제서야 상대의 존재를 알아챈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뜨고 이번엔 좀 더 제대로 살펴봤다. 어두운 톤의 셔츠를 입고 있는 매형씨(;)는 다소 서늘한 인상을 주는 남자로 나이는 우리보다 두 세 살 정도 많아 보였다. 특별히 잘 생긴 건 아니지만 청결한 인상을 주는 얼굴은 모델보다는 학자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뚫어지게 응시해오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매형씨가 시선을 마주해왔다. 노려보는 걸까 싶어 침을 꿀꺽 삼키자 옆에 있던 깡패시키가 내 어깨를 툭 한 번 친 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분명 따라오라는 의미일 터.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녀석의 뒤를 따라 발을 옮겼다. 흡사 얼음 같은 공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소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려는 찰나 문득 등뒤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녀석과 나의 발이 멈춘다. " 와줘서 고맙다. " " ....... " " 잘 부탁해. " " ............잘 부탁드립니다. " 깡패시키 치고는 의외로 정중한 말투였다. 마치..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한 금속 같은 차가움을 품고 있었지만. 돌아서려는 녀석의 등뒤로 매형씨의 말이 이어졌다. " 그 쪽은... 친구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 " ..........친구입니다. " 짧게 대답한 깡패시키는 흘끗 내게 시선을 던진 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평소에도 가면 하나를 덮어쓰고 있는 느낌이지만 지금은 가면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녀석을 따라 묵묵히 걷던 나는 갑작스런 힘에 끌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끌려갔다. 어우.. 이 과격한 시키,, 손목에 손자국 난 것 좀 봐라. ㅡㅡ;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투덜대고 있는데 머리 위로 진지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지금부터 여기서 너와 난 '친구' 사이다. " " 으....응..? " " 내가 없을 때 사람들이 뭘 물어오건 무조건 잘 모른다고만 대답해. " 물론 대놓고 우리 사이를 밝히려던 건 아니었기에 별 무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긴 하지만 어쩐지 힘이 쭈욱 빠져나간다. 이 녀석.. 설마 어리버리한 내가 창피해서 미리 선수를 치려는... 그런 아름답지 못한(-_-) 속셈인 건 아니겠지..??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연습 중간 중간마다 일부러 달려가 사랑의 츄~로 도배를 해줄 테다. -_-+ 여전히 손목을 만지작대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복잡해하는 내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긴 손가락을 뻗어 내 입술을 천천히 덧그린다. 천천히 뺨을 타고 오르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매뉴얼대로 덥썩 잡히는 뺨.. ㅡㅡ; 아아.. 좀 더 아름-_-다운 애정 표현은 없는 거냐. 정말 나중에 불독처럼 되면 그래도 나 댈꾸 살껴-!! 입을 내밀며 스윽 째려보자 손에 들어간 힘이 느슨해졌다. 살짝 올라간 입가와 당겨진 눈매로 보아 아무래도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듯 한데.. ㅡㅡ+ 변신 중인 개구리라고 일단 자신 있게 소리는 쳤지만.. 이대로는 위험하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투투(개구리 왕눈이 참조)가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거다! =ㅁ=;;;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붙잡은 채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일그러진 미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서... 떠올라서... " 어머.. 이게 누구야? " 붕붕 흔들리던 머리는 순간적으로 들려온 어느 누님(?)의 목소리에 의해 딱-하고 멈췄다. 왠지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깡패시키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 설마.. 이립씨에게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와 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 이 곳에선 당연한 거지만 늘씬한 장신의 미녀 분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를... 아니, 깡패시키만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ㅡㅡ+ 아니, 이 아줌마가 어딜 보는 거야!! 그 시킨 안돼-!! 보려면 차라리 이 쪽을 보라고! 내가 비록 아줌마보다 키는 조금(약 10cm로 추정) 딸리지만 이래봬도 속이 꽉꽉 찬 순도99.7 남자라고! 이 세상 키만으로 사는 게 아냐! 그래, 얼굴?! 요즘엔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도 인기 좋다더라! 미소년이니 꽃미남이니 그런 거 많이 들어봤지?? 응?? 그리고 남자로서의 카리스마?? 내가 비록 멸치 같이 마르고, 싸움 좀 못하고, 길 못 찾고, 소심하고, 겁 많고, 기억력이 좀 딸려서 그렇지 직접 만나보면 카리스마 만빵이야!! 이제 '내 이름은 열매'에서 안기고 싶은 남자 No.1에 등극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그리고 또 뭐?? 능력?! .................................................................................(=_=) 자아.. 그리하여 모델 누님과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게 된 것이었으니. .-_- 무표정한 얼굴의 깡패시키가 모델 누님의 미소를 단칼에 자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 ..................누나한테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 " 응..? 아.. 깜찍한 피.앙.새.를 데리고 온다고. " 빠. 직-. 어째 방금 깡패시키의 얼굴 위로 위험한 소리가 들린 듯한데.. -_-;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변함 없이 정갈한 얼굴을 유지한 채다. " 대개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었지만 구석에서 눈물 쏟은 애들도 꽤 된다구. " 헉.. 마... 만약 정말이라면 나는.. 적군이 판치는 소굴에 맨몸으로 뛰어든 셈인가....아...? 어.. 어쩌면 이미 사방에서 날 포위하고 조준하고 있을 지도!!;; 깡패시키와 헤어지는 순간을 노려 곧바로 내 등뒤로 날아오는 십자형 칼날!!(언제 또 닌자물을 본 거냐-_-;) 오싹한 상상에 어깨를 움츠리자 깡패시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던져왔다. " 이 쪽이 그 피앙새..? " "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율군(!)의 가장 친한 죽마고우 열매입니다!! " 마치 확성기라도 댄 듯 최대한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힘주어 자기 소개를 한 나는 혹시나 못 들었을 자객(?)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 저는 절대 피. 앙. 새. 가 무슨 뜻인 지도 모르는 순수한 친. 구.입니다! 세상에 친구처럼 좋은 게 또 어디 있나요? 아하하하하... " " ....... " " 하...하......하...; " 동시에 향해 오는 두 사람의 썰렁한 시선에 금방이라도 얼음동상이 되어버릴 것 같아 나는 후다닥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럼에도 돌아보며 전언을 남기는 것만은 잊지 않고. " 그.. 그럼 이율군!! 난 잠깐 화장실에 들를테니.. " 가만히 날 바라보던 깡패시키가 갑자기 인상을 구기더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 어디에 있는 지 모르잖아? " " 지..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 " 데려다 줄게. " 사실은 썰렁한 분위기를 타파해보기 위한 나의 재치만점(?) 애드립이었지만.. 강력한 눈빛에 포획 당해 어쩔 수 없이 화장실로 동행하게 됐다. 뻘쭘히 남겨진 모델 누님은 잠시 동안 고개를 갸웃하며 우리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녀석과 같이 있는 쪽이 위험할까.. 아니면 떨어져 있는 쪽이 위험할까.. 속으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파란색 푯말이 붙여진 작은 공간에 도착했다. 화장실 안은 과연 외부만큼이나 깨끗했다. 사실 그다지 화장실에 용무가 없는 터라 우물쭈물 하고있자 잠시 기다리던 녀석이 결국 입을 열어왔다. " 뭐 하는 거야? " " 응...? 아아.. 갑자기 괜찮아졌네. 하하..; " " ....... " 내 연기가 어설펐는지 녀석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곧이어 쏟아진 한숨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의연함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녀석이 갑자기 내 옆을 스쳐 걸어가더니 화장실 문을 잠가버렸다. ........!? 돌아선 장신의 미남자가 입 끝으로 웃는다. 에....엥...?? 가.. 갑자기 문은 왜 잠그고..;;;; 내 마음속의 질문이 닿았는지 곧바로 또박또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 이왕 온 거, 화장실에 용무가 없다면 있게 만들면 되겠지? " " -! " 천천히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몸을 움츠리자 녀석이 긴 손가락을 뻗어 내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른 쪽 손이 셔츠 위로 내 얄팍한 가슴을 더듬어오기 시작했다. 목적한 지점을 찾은 후엔 집요하게 한 곳만을 노려온다. " 야... 여기가.. 어딘...........!아아.. " 뜨거운 숨소리에 스스로가 놀라 재빨리 입을 막았지만 더더욱 강해지는 자극에 점점 더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녀석의 손이 셔츠 속으로 들어가 붉은 지점을 장난스레 잡아당기고 있다. " 야... 야야... 잠...! " 위열매 낯선 화장실에서의 대 핀치-! 이 상황에서 날 구해주는 자는 과연 악역이 될 것인가! 도우미가 될 것인가! 금방이라도 녹아 내릴 듯한 허리를 억지로 잡아 세우며 녀석의 손목을 잡고 빼내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애처롭게도 전부 실패. 아아.. 조금씩 의식이 멀어져간다... ........................................읏............/// ------------------------------------------------------------------------------ 내 이름은 열매 <97> 아... 아앗! 잡아당기지마! 읏... 그.. 그렇다고 돌리지 말라구!!!;;;;;;;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마구 흔들어대며 꺄악꺄악 소리치자 녀석이 엉덩이 중앙 부분을 살짝 꼬집어왔다. " 아....아아아아악~~~~~~ " " 조용히 좀 해. " 조금 짜증이 난 듯한 목소리가 귀에 닿는 동시에 허리에 둘러진 녀석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한 마리의 거북이처럼 버둥버둥대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공장소에서 얌전히 당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필사적으로 온몸에 힘을 실었다. 으으... 으으음.... 그래..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당장 살기 위해선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던 나는 일순간 저항을 멈춘 뒤 속삭이듯 말했다. " 지.. 집에 가면 할 테니까..; " " 그럼 안 할 생각이었냐? " 이.. 이 짐승 같은 시키-!! 남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수줍게 꺼낸 말을 그렇게 단칼에 자르지 말란 말이다! 능수능란한 테크닉에 길들여진 몸은 좀처럼 주인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녀석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미 딱딱하게 일어선 가슴의 돌기가 차가운 공기에 닿아 체온을 갈구하고 있다. 몸 전체가 성감대나 다름없는 나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움찔하는 빌어먹을 음란 체질(!)이다. 언젠가 선생님께 시험을 망친 벌로 셔츠 너머로 가슴을 꼬집힌 적이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반 전체의 웃음거리가 됐던 적이 있다. 아아.. 그 때 날 보며 킥킥대던 반 친구놈들의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언젠가 차례차례 찾아가 복수해 주겠어. 엉. ᅳᅳ+ 그리고 이 빌어먹을 몸뚱이! 주인님 말이라곤 응가에 앉은 초파리 취급도 안 하다니! 너 나중에 둘만(?) 남았을 때 보자. 너도 복수해주겠어. 엉. ᅳᅳ+ " 아.........으....ᄉ.... " 녀석의 매끈하게 뻗은 손가락이 천천히 내 분신을 감싸왔다. 평소에도 녀석의 테크닉에 대해서라면 안다고 자부했지만 야외(?)라는 특수상황인 탓일까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열기가 몰려왔다. 그나마 뒷부분은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아...! 너.. 넣지맛-!!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한계까지 몰린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팔을 마구 휘둘러봤지만 한 번 거북이는 그저 영원한 거북이일 뿐이었다. -_-; 게다가 하필이면 아무렇게나 휘두른 팔이 녀석의 이마와 충돌하는 바람에 중심을 애무하던 손에 힘이 확 들어가 버린 것이다.; 하아... 아.. 이.. 이제 나올 것 같...! " 윽... " 짧은 신음과 함께 녀석의 손바닥 위로 고스란히 쏟아낸 나는 잠시의 텀을 두고 자연스레 뒤로 향하는 녀석의 손길을 캐치해낼 수 있었다. 절정의 여운을 만끽할 새도 없이 닥쳐온 위기(!)에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지만 녀석은 완강했다. " 아.. 잠깐..!!;; 이 다음은 지.. 집에서!!;;; " 당연하게도 대답 대신 차가운 눈빛만이 돌아왔다. 그래, 당연하겠지. 나도 같은 남자라서 알지만 흥분한 상태에서 스톱을 걸면 짜증나지. 그럼. 그렇고 말고.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마지막까지 가버리면 난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다. (3회 이상을 넘어갈 경우) 워킹 연습하러 왔는데 걷지도 못하면 구경이나 하다 가라는 거냐?? 방청객 하면 알바비는 주나? =ᄆ= ......................가 아니라 아무튼 나도 비즈니스 차원으로 온 이상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이거야. 그리하여 최후의 비기를 꺼내든 것이었으니.. 그... 그건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눈을 꽈악 감았다가 뜨며 소리쳤다. " 이.. 입으로 해줄게!! >ᄆᄆ<;;;; 점막 사이에 자연스레 감겨든 체온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잠시 내 반응을 살피던 녀석은 내가 익숙해질 시간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 이.. 이제 괜찮으니까..//// " 이미 한계에 도달한 건 내 쪽으로, 평소 녀석이 한 번 내보낼 때 나는 3~4회 정도다.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 걸 냄비근성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 냄비일 것이다. 아니.. 내보내고 난 뒤에 시지 않고 곧바로 달아오르니까 조금은 틀린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머릿속 가득 전혀 에로틱하지 못한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그렇게 녀석의 손안에서 두 번째의 절정을 맞았다. 하악... 으헉.. 우훕.... 아아.. 아무래도 열무-_-교수님을 초빙해서 좀 더 오래 참는 법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할 것 같다. ᅮᅮ 그리고 덧붙여.. 깡패시키에게서 애초에 나 혼자만 내보내게 하고 그만둘 예정이었다는 전언을 들은 건, 화장실을 나서기 조금 전의 일이었다. =ㅁ= ------------------------------------------------------------------------------ 내 이름은 열매 <98> 대리석으로 번쩍이는 복도를 걷는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쉼 호흡을 했다. 방금 전까지 엄청난 열량을 소비하는 운동(!)을 한 탓에 뺨은 아직도 후끈후끈한 상태다. 혹시나 싶어 흘끗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변함 없이 여유만만한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흥.. 좋겠어. 포커페이스 녀석들은. 이러니까 꼭 나 혼자 마스x베이션을 하고 온 것 같잖아. -_-; 여전히 발그레한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아에이오우’를 3회 반복 실시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유명 모델들 앞에서 초장부터 한심한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러나 주인 닮아 소심한 심장은 좀체 진정할 기미를 안 보이니..-_-; 하아... 아후... 아후....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 복도 끝 커다란 문 앞에 잠시 멈춰선 나는 다시 한 번 쉼 호흡을 한 뒤 녀석에게 ok 사인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가만히 날 바라보던 녀석이 갑자기 정면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 자.. 잠깐! 여.. 여기서 키스는..!! >3<;;;; 그러나 긴 손가락은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셔츠 깃만을 살짝 세워준 뒤 곧바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어느새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입을 쭈욱 내밀고 있던 나는 순간 뻘쭘해져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괜시리 뒤통수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뭐.... 벼.. 별로 기대하고 있던 건 아니니까. ᅳ스//// 흡사 손톱에 피가 묻어 나올 정도로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사이 녀석의 커다란 손에 의해 커다란 문이 틈을 드러냈다. 그리고 점차 머리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빛들.. 그저 워킹 연습을 위해 만들어졌을 연습실은 마치 무도회장을 연상케 할 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카펫도 엄청 질 좋아 보이는 것이고 조명도 번쩍번쩍 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 곳에서 긴 다리를 움직여 포즈를 취하고 있던 장신의 모델들이었다. 정말 눈 돌아가게 멋진 사람들.. 나.. 여기서 제대로 설 수나 있을까.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진다. (원래도 그다지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나의 갭을 뼈저리게 느끼며 침만 꿀꺽 삼키고 있는데 문득 머리 위에서 귀에 익은 하이 톤이 들려왔다. “ 어머.. 왔어? ” 강이립. 깡패시키의 누님이자 이번 패션쇼의 디렉터 겸 톱 모델. 플레어 미니스커트와 타이트한 바이올렛 니트가 오늘도 누님의 완벽한 몸매를 한껏 강조시켜주고 있었다. 그.. 그런데 가슴 부분이 너무 파여서 가슴이 그대로 노출...;;;;; “ 어머, 어딜 보는 거니? 응큼하긴~ ” “ 앗...///// ” 당황해서 재빨리 양손을 내젓자 누님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벌써부터 페이스에 말려든 것 같은 기분에 또다시 표정이 굳어져버렸다. 아아.. 난 역시 이 사람이 불편해... ᅳ.ᅮ 한껏 긴장한 채 누님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중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깡패시키도 묵묵히 내 옆에서 보조를 맞춰 걷고 있다. 우리가 걸어나가자 마치 홍해 바다가 갈라지 듯 사람들이 양쪽으로 주욱 갈라섰다. 덕분에 긴장감 두 배. 초조함은 세 배. 콩닥콩닥콩닥콩닥콩닥..... 시선이 느껴진다. 등에 달라붙는 시선. 얼굴에 달라붙는 시선. 엉덩이에 달라붙는 끈-_-적한 시선..(젠장) 한 순간에 동물원 거북이 신세로 전락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기 최면을 시도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낼 것이다. 나는 거북이가 아니다. 나는 거북이가 아니다.... “ 그럼, 잠깐 소개를 하죠. ” 사람들로 빙 둘러싸인 가운데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누님이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제각각의 표정으로 우리들을.... 아니 이번엔 집중적으로 나만을 응시해왔다. ᅳᅳ; 그나마 남자들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오는 반면 여자들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여기 저기서 생성된 엄청난 전기파들로 인해 양 귀에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ᄆ=;;;;; 그리고 무엇보다도... 뭐냐, 이 분위기는.;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 모두가 180을 오르내리는 장신들이라 사방이 완전히 꽉 막혀 금방이라도 질식사 해버릴 것만 같다.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남녀 통틀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내 키 173cm. 결코 작다는 말을 들을 키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런 거인국(!)이 되어버린 것이냐! =ᄆ= “ 자아.. 이율이는 굳이 소개 안 해도 알고 있죠? 어릴 때부터 여기서 몇 번 아르바이트를 했으니까. ” 깡패시키의 침묵. 저.. 정말이냐?? 어쩐지 묘하게 여유만만이더라니 이 시키 경험자였구만! 게다가 어릴 때부터라면 언제부터...? 남은 그 나이에 아빠 구두 닦기나 설거지로 용돈을 충당하는데 누군 뽀대 나게 모델 아르바이트 하고. 세상 참 불공평하다 야. -- 키만 크면 다야?? 내가 여기서 10센티만 더 크고 싸움만 좀 더 잘했으면 떡대수로서 한 명성 날렸을지 또 누가 알까. 지금은 그저 비굴한 거북이 꼴로 살고 있지만. ᅳ.ᅮ “ 잘 부탁해요. 이율군. ” “ 여전히 미남이네 이율이는~ ” “ 언제든 마음 내키면 누나한테 오라고 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 ” “ 그냥 이 길로 나가면 어떨까? 톱모델은 따논 당상인데. ” 여기저기서 던져지는 추파들 속에 깡패시키는 그저 인사치레로 고개만 살짝 움직일 뿐이다. 보통이라면 싸가지 없네 어쩌네 하며 욕 먹을 상황이지만 일단 외모가 되고 나니 그것마저도 쿨하네 섹시하네로 바뀌어버린다. 아아.. 외모지상주의의 현주소란 이런 것. 어쩐지 씁쓸함을 느낀다. ᅳᅳ; “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 ” “ ! ” 순간 깡패시키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쏠렸다. 미처 타이밍을 캐치해내지 못하고 있던 나는 긴장으로 굳어진 손가락을 꾸욱 말아 쥐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저... 저는 이번에 객원으로 출연하게 된.. ” “ 제 친구 위열매입니다. ” 깡패시키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짧게 덧붙여주자 주위에서 꺄아꺄아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너무 귀엽다~ 이름이 열매야? ” “ 볼 빨간 것 좀 봐~ 꽉 깨물어 주고 싶어~ ” 저.. 저어.. 깨무는 건 좀... =_=;;;;;;;; 깡패시키의 ‘친구’라는 단어 하나에 완전히 180도 태도를 바꾼 누님들이 우르르 내 코앞까지 몰려왔다. 개중엔 손을 잡고 만지작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엉덩이(!)까지!! ==;;;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굳어버린 내 뺨을 꾹꾹 누르며 귀여워~ 귀여워~를 연발하시는 누님들. 아무래도 누님들의 사랑을 견뎌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다. 완전히 인파에 파묻힌 채 슬쩍 손을 내밀어 깡패시키의 소매를 잡자 녀석이 내 손을 잡아 살짝 힘을 실었다. 내 구조요청을 받아들인 녀석이 미간을 좁히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 이 녀석은 제가 가장 신뢰하는 베스트 프렌드니까 예의를 지켜주세요. 만약 이 시간 이후로 함부로 이 녀석의 몸에 손을 대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 그 순간 내 뺨과 허리와 엉덩이와 사타구니(!)를 더듬던 손길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나 아침 내내 다려서 입고 온 후드 남방은 이미 완전히 구깃구깃.. 카키색의 조금 밀리터리한 느낌이 나는 후드 남방은 평소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것으로 구입한 이후 아껴가며 중요한 날에만 입어왔던 것이다. 어쩐지 시무룩해져서 눈만 꿈뻑거리고 있자 문득 옆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율이의 베스트 프렌드라면 우리에게도 최고의 손님이지. ” “ ........?! ” 어느새 내 바로 옆에서 싱긋 웃고있는 남자. 턱수염을 조금 기른 탓일까 전체적으로 와일드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 이번 쇼의 총괄적 책임을 맡은 릭 크렌하트다. 잘 부탁해. ” 에....? 외국인?? “ 서류상 난 미국인이거든. 한국 이름은 정서후. ” 190 정도는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무지 커다란 손.. 잠시 벙쪄있던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수습하고 손을 건네며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했다. “ 저.. 저는 위열매입니다. 서류상 한국인(!?)이구요. 나이는 스물 두 살. 취미는 오목 두기입니다. ”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항목까지 늘어놓은 뒤 일부러 싱긋 웃어 보이자 릭씨가 호쾌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 좋아. 열매군. 혹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와서 상담하도록 해. 총괄자의 권리로 다 해결해 줄 테니까. ” “ 가.. 감사합니다-!!;; ” 든든한 협력자.... 도우미(?)를 얻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 나는 조금 풀어진 얼굴 근육을 손으로 살짝 두드린 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릭 크렌하트라는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남자는 척 보기에도 뭔가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파마를 한 건지 천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목까지 부슬부슬하게 내려오는 웨이브 진 머리 스타일이라던가.. 분명 일부러 기른 듯한 느낌이 나는 턱수염이라든가.. 그 얼굴에 기막히게 어울리는 어두운 톤의 선그라스등이 그의 센스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뭐랄까.. 전체적으로 야성적인 사나이라는 느낌...? 만약 깡패시키가 매끈한 재규어라면 릭씨는 야생 곰(?)이랄까.. “ 열매군. 괜찮다면 내가 건물 안을 구경시켜주고 싶은데..? ” 내가 마음에 든 것일까..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로 물어온 릭씨는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그러나 미처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 깡패시키가 내 목을 끌어안고 자기 쪽으로 확 잡아당겨 안았다.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드리운 채로. 뭐.. 뭐시다냐..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이 부담스러운 전개는.. =ᄆ=;;;; ------------------------------------------------------------------------------ 내 이름은 열매 <99> 이 곳은 찬란한 조명 빛이 쏟아지는 릴레함메르. ==; 웅성이는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함 속에 얼어붙은 공기. 그리고 그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깡패시키의 품안에 안긴(?) 나. 문득 녀석 특유의 시원스런 향기가 느껴져 나는 자연스레 눈을 감고 킁킁 코를 울렸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 향기를 맡으면. 그러고 보니 깜빡했네. 무슨 향수를 쓰는 지 물어본다는 것을. 깡패시키의 품에 안겨 녀석의 목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는 모습으로 몇 초간 정지해 있던 내 귓가로 문득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친구 사이치고는 꽤 뜨거운데? " 진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분간이 안 서는 평범한 톤의 목소리였다. 순간 후다닥 정신을 차린 나는 킁킁거리던 코를 멈추고 깡패시키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제...젠장, 무의식중에 그만 커플선언을 해버린 셈이 됐다.; 평소 침대에서 같이 끌어안고 잘 때의 행동이 고스란히 나와버렸다. 아마... 녀석은 모를 거다. 자다가 문득 깨서 일부러 코를 대고 냄새를 맡을 땐... 녀석은 늘 잠이 든 상태였으니까. 앞으로 여기서 조금만 더 경험치를 쌓은 뒤엔 잠든 녀석의 뺨에 살짝 누르기를 시도해 볼 예정이다. 후후... .......................아, 아니,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나는 재빨리 몸을 펴며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 제.. 제가 어릴 때 외국생활을 조금 했거든요.;; 그 쪽에선 이런 포옹이 친근감의 표현이라..; " 거짓말인 티가 팍팍 나는 어설픈 변명이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오해(?)를 받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깡패시키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지만 사실이 밝혀지면 고달파지는 건 아마도 나일 것이다. 여기 누님들이 결코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야생의 감으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침묵이 흘렀다. 화려한 조명 아래 둥글게 무리를 지어선 미남미녀들이 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시츄에이션은 질색인데.. " 열매군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 무거운 공기를 깨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다. 올려다본 릭씨가 사람 좋은 얼굴로 싱긋 웃고 있다. " 친구로서의 이율군은 어떤 느낌이지? " 선글라스에 가려져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 깡패시키를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조... 좋아요. 농담도 잘 하고..아, " 최대한 평범하게 대답한다는 것이 그만 우주 최강의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저 서늘한 얼굴을 봐라. 농담이란 거... 태어나서 열 번은 해봤을까나..; 그러나 이왕 엎질러진 물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 성실하고 성적도 좋고 차갑지만 그래도 때론 굉장히 자상해요. " 뭔가 뒤죽박죽인 문장이지만 어쨌든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말이었다. 일단 맡은 일에 대해선 확실히 끝을 내는 성격이고 성적이야 말할 것도 없이 최상위 클래스이며 그 말 그대로 때로는 굉장히 다정해서 날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남편-_-자랑을 늘어놓던 나는 조금 발그레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짧게 헛기침을 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중이다. 이.. 이거 어째 아까의 스킨 쉽보다 더 큰 임펙트를 낳은 듯한 느낌이.. ᅳᅳ; 구깃구깃해진 남방 밑단을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흘끔 깡패시키를 쳐다보자 가만히 시선을 마주해왔다. 느낌 탓일까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눈매로 날 응시하고 있다. 어이~ 나 잘했지? 좀 있다 집에 갈 때 치킨 사줘야 해. *-_-* 상상만으로도 주륵하고 넘치는 침을 스윽 닦으며 싱긋 웃었다. 어쩐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나... 어쩌면 무대 체질인지도. -_-v " 아아.. 그럼 지금부터 워킹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보고 배우도록 해. " " 아... 네. " 위급한(?) 상황을 단칼에 정리하며 이립 누님이 내게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욱 한 번 둘러보더니 갑자기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 유하야! 잠깐만 이리 와 볼래? " 잠시 후 나와 누님의 앞으로 다가온 사람은 이제 겨우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키는 크지만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 이 쪽은 유하. 열 일곱 살이고 현재 고등학생이야. 원칙적으로 미성년자는 쓰지 않지만. " " 잘 부탁해요. " 예쁜 눈으로 생긋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어쩐지 나쁘지 않은 느낌이라 마주 웃어주자 갑자기 유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싸악 걷혔다. 뭐... 뭐지..? ==;;;; " 그럼.. 이제부터 유하가 열매를 담당하도록 해. " 에.....? " 유하가 아직 어리긴 해도 베테랑이니까 열매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거야. " " 아... " 그... 그래도 이왕이면 좀 연상으로 해주시면..;;;;;;; " 내가 가르칠게. " 대놓고 말은 못하고 난처한 기색으로 흘끗 쳐다보자 기다렸다는 듯 깡패시키가 말을 꺼냈다. 순간 또다시 주위가 고요해졌다. 어이... 어이... 이봐... 이봐... 당신들 너무 예민한 거 아냐?;; 깡패시키가 한 마디 꺼낼 때마다 이런 반응이니 이거 참 말 시키기가 무안해지는 구만.; 이 시키가 혹시 예전에 여기서 폭주(!)라도 일으켰던 거 아냐?; 지금 이 붉은 카펫도 그 당시 전투 때 배어버린 피(!)라던 지..;;; 그러고 보니 첫 만남 때도 녀석은 싸움을 하고 있었지. 마치 즐기듯 사정없이 발을 날리며. 솔직히 같은 남자로서 쪼금은 멋지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날 보고 기집애라고 하기 전까진. ᅳᅳ+ 잠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고딩 시절 뒷산에서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무턱대고 패싸움에 끼어 들었던 일.. 깡패시키 몰래 소개팅 나갔다가 레스토랑에서 걸려 화장실로 끌려간 일.. '이월매'라는 말을 들으며 납치 됐었던 일.. 반 강제로 여장했다가 무대에서 넘어져 왕x을 당했던 일... (제길) 한 여름에 토끼 옷 입고 춤추다 넘어지는 바람에 깡패시키 패거리한테 들통났던 일.. 그리고.... 기억을 잃고 녀석과 끝내려고 했던 일.. 거기까지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감정이 복받쳐 그렁그렁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다. " 야.... 열매. " 갑자기 이름이 불리워져서 고개를 들자 깡패시키가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또 울어버린 건가? 아니, 아직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는데? " 눈이 빨개. "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옆에 서있던 남자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걸 받아 또다시 네게 건네는 깡패시키. 아앗..! 내가 또 초면인 사람들 앞에서 왕 추태를!!;;;;ᄆ;;;; 붉어진 눈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깜빡이자 단번에 눈물 방울이 후두둑 붉은 카펫 위로 떨어졌다. 위 열매 이 한심한 거북이+개구리 같은 놈아! 왜 사니? 죽어라! 죽어!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 주르륵 흐르는 콧물을 손수건에 킁하고 풀며 최후의 눈물까지 짜내는 사이 깡패시키의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날 향하는 게 아닌. " 이 녀석은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가르칠 테니까 신경 쓰지마. " " 안 돼. 넌 메인이니까 그런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어. " " 지금까지 내가 실수하는 거 본 적 있어? " 굉장한 자신감에 찬 말투였다. 또박또박 홀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애초에 거절 따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보통의 자신감으로는 절대 저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녀석은 분명 남들이 흔히 말하는 '제왕의 별자리'를 타고 난 것이리라. 타인 위에 올라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오만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공기를 지배한다. 언제 어디서나 무리의 중심이 되는 남자. 나도... 노력하면 그런 남자가 될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옆에 달라붙은 한심한 배추벌레 꼴로 인생을 종치는 건 아닐까? 나도 배에 왕(王)자를 새기는 터프한 남자가 되고 싶다. 담배 연기를 길게 피워내며 근사하게 '그대 눈동자에 건배'를 외칠 수 있는 그런 달콤한 남자가. 위에 올라탄 채 울먹이는 깡패시키의 뺨을 쓸어 내리며 '괜찮아. 살살 할게. 이율아'를 속삭일 수 있는 그런 멋진 남자가. 오오.. 한동안 잊고 있던 남자로서의 로망이 지금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이 붙기 시작한 뜨거운 눈동자로 누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깡.................이율이에게 배우게 해주세요. " " .....! " "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결국 잠시 후, 내 진지한 부탁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쉰 뒤에야 누님이 ok사인을 보내왔다. 이것으로 '내 선생은 내가 정한다'의 임무는 무사히 클리어. 나는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을 이번엔 깡패시키에게 향하며 억누를 길 없는 열정을 담아 소리쳤다. " 지금부터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줘-!! >ᄆ< " 그러나... 몇 초의 정적 뒤 찾아온 비명에 정신을 차린 내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이란... 깡패시키의 등뒤로 후다닥 숨는 것이었다...........................(젠장..;) 불타오르던 남자의 로망이 푸시식 하고 허무하게 꺼져버린 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 인생에도 빛이 찾아오겠지라는... 덧없는 소망을 가슴에 품은 채로. ------------------------------------------------------------------------------ 내 이름은 열매 <100> 웃지 말 것. 가능한 한 무표정을 유지해 사람들의 시선이 옷에 집중될 수 있도록 할 것.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뒤 녀석은 제일 처음 그렇게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말은 진지하면서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고 있어 나도 같이 싱긋 웃어주자 가차없이 긴 손가락이 다가와 뺨을 움켜쥐었다. 아... 아파아아아아~ >ᄆ<;;;;;; " 방금 웃지 말라고 했을 텐데? " " 아.. 아직 배우는 중이잖아!;;; " 혹시라도 이런 바보 같은 꼴을 보이기라도 할까봐 재빨리 목소리를 죽인 뒤 원망을 가득 담은 눈으로 쳐다보자 그제서야 녀석이 천천히 손을 뗐다. 아후.... 아후.... 후끈후끈거린다. -_ᅮ/// 잠시 그대로 선 채 뺨을 쓰다듬었다. 그 사이 다른 모델들에게 흘끗 시선을 옮기니 다들 뽀대가 줄줄 흐르는 포즈를 취하며 각자의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사이사이 낀 금발의 외국인들은 이국적인 느낌까지 풍겨서 몇 배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직은 연습 중이라 간단한 셔츠와 바지를 입었을 뿐인데도 어찌나 멋져 보이는지. 역시 모델은 괜히 모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토끼 옷 입고 춤추는 알바 쪽이 내겐 더 맞을 지도.. 조금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이자 어깨 위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섹시한 향기가. " 벌써부터 기죽을 거 없어. 우리 율이한테 배우면 금새 능숙해질 테니까. " 이립누님이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우리 율'이라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적응이 안되지만 그래도 격려를 받았다는 생각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답했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조금 상냥해진 느낌인데... 믿어도 되.....는 거겠지? ;ᄆ; " 아....? "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갑자기 누님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해 왔다. 갑작스런 뜨거운 시선에 당황하며 뒤로 주춤 물러서자 누님이 양손을 뻗어 내 어깨를 고정시켰다. " 잠깐 있어봐. 속눈썹 묻었어. " 그렇게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이며 허리를 숙이고 좀 더 가까이 다가오........앗! 앗......앗.......앗......!;;;;;; 길게 파인 얇은 니트 탓에 가슴 선이 훤히 다 드러난다! 허리를 숙이는 각도가 깊어질수록 더더욱 노출 강도가 심해지....!!;;; =ᄆ=;;;;; " 에...... 저.....저기...;;;; " 애써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버벅버벅 말을 꺼내자 누님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그러는 게 뻔하지만 그렇다고 맞받아 치기엔 아직 너무나 순진한 나이기에... 뭐어... 깡패시키와 '유혈사태까지 일으키며 합체하는 주제에'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만. -_-; 돌이켜보면 참 여자와는 인연이 없는 삶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조차 인지하지 못했고 중학교 땐 한참 게임에 빠져 관심을 두지 않았고 고등학교 시절엔 깡패시키에게 찍혀 지조 있는 아낙-_-네로 살았으며 그건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별로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여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가끔 야한 사이트 광고가 뜨면 나 역시 혈기 왕성한 남자이기에 흥분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여자의 가슴 같은 걸 보니 좀 많이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상대가 깡패시키의 누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저.... 무서울 뿐이다. =ᄆ=; " 어머, 귀 빨개진 거 봐. " " 그만 해. " " 어머, 왜 그러니? 열매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 시... 싫다기 보다 무섭다니깐.. ==;; " 그렇게 보여주고 싶으면 가서 남편한테나 실컷 보여주던가. " 차갑게 끝을 맺은 깡패시키가 내 손목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투덜거리는 누님을 뒤로 한 채 녀석을 따라나선 나는 복도를 지나 커다란 창가 앞에 도착한 뒤에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흘끔 창 밖을 보니 어느새 어두컴컴한 빛을 띄고 있다. 실제 연습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데 꽤나 오랫동안 혹사당한 느낌이다. 어쩌면 이미 눈 밑이 퀭할지도. ==; 은은한 할로겐의 조명을 받은 깡패시키는 평소보다 빛나는 모습으로 가만히 창 밖을 응시했다. 모델 좋고, 배경 좋고, 각도 좋고, 조명 좋고. 이거 찍어서 여자들한테 팔면 수입이 꽤 짭짤할 것 같구만. 개중 류모군이나 강모 의사 같은 사람을 만나면 플러스 알파를 뜯어낼 수도. 평소보다 훨씬 많은 별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고딩 시절 방 천장을 야광별로 덕지덕지 도배를 했던 나로선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그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느낌.. 어릴 적 내 꿈이 우주비행사였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내 눈은 별 반 깡패시키 반을 흘끔거리고 있는 중이다. 녀석의 옆모습 역시 별 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니까. 이것도 할로겐 조명의 영향일까.. 조금 센티멘탈해진 채 말없이 녀석의 옆모습을 바라보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재미있냐? " " 어...? " " 나. "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들은 나는 후다닥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 벼... 별로. ᅳ3ᅳ;;; " 이... 이 시키, 눈치 채고 있었구만. 나름대로 시크리트하게 흘끗하고 쳐다봤는데 타고난 감이 좋은 건지. 잠시 후 깡패시키가 천천히 창을 등지고 돌아섰다. " 힘들면 굳이 할 필요 없어. " 진지한 목소리를 가벼운 한숨이 뒤따른다. 오똑하게 선 콧날에 시선을 살짝 던진 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너한테 좋은 경험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일단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 " ....... " " 그보다 아까 그 말은 뭐냐? " 으... 응...? =ᄉ=?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자 녀석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줘. ' " " ! " 무.. 물론 말 그대로 멋진 남자로 트레이닝시켜 달라는 뜻이지만 이렇게 듣고 보니 어째 좀 어감이 요상하다.; 괜시리 민망해져 흠흠하고 헛기침을 하자 녀석이 피식하고 웃었다. " 너, 남자잖아? " " ....... " "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널 여자라고 생각한 적 없어. " 단호한 목소리만큼이나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물론 나 역시 내가 '여자'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분명히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1로 시작하고 목소리도 남자 톤이고 가슴도 없고 달릴 것(!)도 제대로 달려있다. 그저 약간 얼굴이 여자 같고 체모가 적고 남자 치고 지나치게 소심하다는 게 사소한(?) 문제점이랄까. 내가 원한 건.. 녀석이 가진 태양 같은 불꽃... 그런 기운이다. 활활 타올라서 흡사 모든 걸 삼켜버릴 만큼의 존재감....빛. 그걸 말한다면 녀석은 뭐라고 대답할까..? 아무래도 역시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워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이 주위를 덮쳤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찾아온 어둠의 정체는 아마도 정전이 원인인 듯 했다. 멀리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부하라도 걸린 것일까. -! 손목에 열이 닿았다. 그리고 허리에. 턱을 거쳐 입술에. 창가 앞인 덕에 은은한 달빛을 받아 녀석의 이상적인 콧날이 시야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키스는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역시....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었군. " -!! 갑작스럽게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강이율이 일부러 '친구'를 데려오다니 말야. " 섭섭함인지 빈정거림인지 명확하게 판단이 서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저 들통났다는 사실에 놀란 채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게 들통났다는 것도 그렇지만 키스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 당했다는 게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다. " 그래서...? 너의 새로운 애인? " 학자풍의 얼굴에 쓰디쓴 미소를 띄우며 매형씨가 그렇게 물어왔다. '새로운'이라고 하기에 5년의 시간이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지만 상대는 꽤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듯 했다. 깡패시키는 그저 차갑게 웃고 있을 뿐이다. 일단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나라도 입을 열어야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앞으로 나섰다. " 저.. 저기... 방금 그건.. 제.. 제가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요!;; 입으로 직접 체온을 재는 방법이 있다고 하길래 한 번..;;; " " 됐어. " 그러나 뜨거운 열변을 토하고 있는 나를 등뒤로 돌리며 깡패시키가 짧게 말을 끊었다. 녀석이 앞에 서니 매형씨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빼꼼히 고개를 빼서 쳐다봤다. " 내 애인이라고 하면 어쩔 건가요? 매. 형? " " 그렇게 부르지 마. " " 그럼 어떻게 부를까? " 두 사람의 신경전이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정전 상태라는 조건 때문에 두 배로 음산하다는 생각을 하며 같이 숨을 죽이자 곧바로 깡패시키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누나랑은 잘 지내지? " " ....... " " 성질은 꽤 더럽지만 잘 뜯어보면 좋은 점도 어디 한 군데 쯤은 있을 걸. " " 이율.. " " 결혼을 했으면 가정에 최선을 다 해. " 그... 그런..! 깡패시키의 입에서 그런 사람다운 말이..!!;;;; 그리고 등을 돌리며 녀석이 짧게 덧붙였다. " 적어도 난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 =ᄆ= 그...........그...........그럼........ 우..........우....우리.....지금.........겨........겨......결................ᄒ............!! 정전 상태인 게 다행일 정도로 시뻘겋게 열을 내뿜고 있는 얼굴을 녀석 몰래 차가운 손으로 사악사악 분지르며 식히기 시작했다. 대놓고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은 안 하는 주제에 이런 식으로 일침을 놓곤 한다. 덕분에 당황은 두 배. 기쁨은 여든 세 배...?; 돌아선 녀석이 내게 '따라와'라고 짧게 속삭인 뒤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두운데 거침없이 움직일 정도면 이미 건물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얘기겠지. 모델 아르바이트란 거.... 몇 번이나 해본 걸까. 녀석을 따라 걷는 내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 너.... 모델 일 몇 살부터 한 거야? " 일부러 보조를 맞춰 느슨하게 걷던 깡패시키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짧게 대답했다. " 중 2때. " " 아, 그럼 그때도 지금처럼 컸어? " " 별로... 179정도. " 시큰둥하게 대답하더니 흘끗 날 내려다본다. 아, 그래요. 나 작아요. == 그.. 그래도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도 있다고-! 작은 사람 중에 미인도 많고 권력 맛을 본 사람도 많다고! 선인 악인을 떠나 나폴레옹, 모택동, 히틀러, 박정히, 강감찬, 등소평등등..! 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지만-! =ᄆ= 똑바로 응시해오는 시선이 따끔따끔해서 눈을 내리깔자 녀석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 그 정도면 딱 좋아. " 뭐... 뭐냐. 그건. 혹시... 애완동물 사이즈..? =_=? 그.. 그래! 내가 대한민국 남자 평균키야, 이 거인(!)아! >ᄆ< 사악사악 쓰다듬음(;)을 당하며 속으로 절규했다. 정말이지.. 이 녀석이 옆에 버티고 있는 탓에 주인공으로서 제대로 한 번 빛도 못 보고. 제목에 이름까지 터억 올려놓고 있는 '이 내가' 말이야! 좀 멋지구리하게 연출해줘도 좋을 텐데 시간만 나면 어벙한 짓만 시키고 말야! 센스라고는 부엉이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없는 무식한 작가 같으니..(투덜투덜)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조용히 녀석을 따라 걷던 나는 얼핏 타이밍에 맞춰 말을 꺼냈다. " 지금... 어디 가는 거야..? " " 강이립씨한테. " 가.. 강이립씨.. ᅳᅳ; 그러고 보니 녀석은 '누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저 얼음 같은 얼굴과도 그다지 매치가 안되지만. 그래도 나라면 좋아서 부를 텐데.. 누나........누나..............누나라.............어쩐지 포근하지 않은가. 보기엔 이래도(--;) 나는 한 가문의 장남이라 그런 호칭을 사용할 일이 없다. 사촌들도 다들 어리고.. " 누... 누님한텐 왜..? " 흘끔 올려다보며 묻자 녀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날 내려다본다. 마... 맞는다...? >_<;;;;; " 그만둔다고 할거야. " " .....!? " " 그 남자가 눈치를 챈 이상 앞으로 피곤해 질 테니까. 너도, 나도. " 이해를 못하고 눈을 껌뻑이자 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잠시의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 그 남자... 죽으려고 했었어. " " ! " " 나 때문에. " 어둠 속에 짧게 울린 목소리가 잠시동안 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저 달빛만이 어스름하게 새어나오는 복도 가운데서 나는 그저 그렇게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숨을 눌러 죽인 채로. Special Free Talk A: 얼마만인 지 모르겠네. 이런 거. B: 작가 자신이 좋을 때만 불러내는 거지. 뭐. A: 으음... 그래도 일단 제대로 된 인사부터 해야지. 저어... 모두 잘 지내고 계시죠? 이런 허접한 글을 읽으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정말이지 시력이 떨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 C: 적당히 해둬. 잘리기 싫으면. A: 윽. B: 그런데 설마 했지만 정말 100편까지 올 줄이야. 이 작가 끈질긴 거 하난 인정해줘야겠는데? D: 그러게. 뭘 믿고 이렇게 끈질길까. 나야 가끔 출연하니 상관없지만 주인공은 꽤 피곤하겠어. B: 멍청해서 혹사당하고 있는 것도 모를 걸? A: 뭐.. 뭐가!!? 나도 다 알아!! =ᄆ=; D: 댁 휴일이 얼마나 되는데? A: 휴... 휴일..?; B: 외전과 서방님 시점으로 된 글 말야. D: 아니, 결국 서방님 시점으로 된 글에도 꼬박꼬박 출연을 했으니 결과적으로 열무외전 만이 휴일이었던 셈인가. A: 에... 에...? D,B: 그것 봐. 역시 혹사당하고 있었잖아. 알긴 뭘 알아? 멍청하긴. A: 으... C: 시끄러워. 그만 해. B: 댁이 그렇게 싸고도니까 애가 그 모양인 거라고. C: 책임은 내가 지니까 신경 꺼. E: 그래도 제목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잖아? B: 너 바보냐? E: 응? B.D: 그거야 당연히 '미끼'지! E: 에...? D: 미끼 하나 던져 놓고 마구 부려먹으려는 사악한 작가의 계략이라고. 그것도 모르고 우쭐대고 있으니 바보라는 거지. E: 아아.. B: 그나저나 궁금하네. D,E: 뭐가? B: 저 멍청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바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걸까. D: 보나마나 또 이상한 망상이나 하고 있겠지. B: 분명 소심해서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투덜투덜대고 있을 게 뻔해. E: 설마.. D: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안 보이는데? B: 완전히 들통날까봐 작가가 일찌감치 워프시킨 거지. 뭐. E: 아아.. 조금 비겁하네. D: 자아자.. 우리도 그만 가자고. 아, 그 전에 몇 푼 받은 출연료 값은 해야지. 그럼 자아, 하나.... 둘.. B,D,E: 이런 초 울트라 허접 작가의 후질구레한 글을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읽어주신 모든분들께 마음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아무쪼록 시력이 마이너스가 되는 그 날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행복하세요_!! Z: 야! 어디가!? 이것들, 니들 다 모가지야!! =ᄆ=++ ------------------------------------------------------------------------------